주말을 보내고, 식구들이 또 저마다 각자 속한 장소로 단정히 총총히 떠나고
오늘도 어지간히 햇빛이 쨍쨍할 하루를 여는 월요일 아침,
여러가지 산재된 일들이 착한 학생들처럼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나의 다정한 호칭,을 기다리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나는 여전히 빈둥거리며 <나 한 사람의 전쟁>이라는,
돈만 생기면 교보문고에 들러 신간을 사고 록 뮤직의 시디를 사고 자신을 '폐업 시인'이라
부르며 계속 시를 써나가지 못하는 자신을 괴로워했으며, 꿈꾸는 청년의 모습을 끝까지 지니고
있었던 문학주의자 윤성근의 다섯 번째 시집을,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지만,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바라지 않았던 투병의 시간에 썼던 시집을 싱싱하게 읽고 있다.
거 참 이상도 하지? 누구라도 새로운 한 주를 여는 새 월요일, 화창한 화이팅!을 외칠 시간에.
가만 생각해보니 결국 사는 일이나 죽는 일이나 다 한가지가 아닌가 싶다. 또 다른 꿈을 향해
언제라도 떠나는 일. <나 한 사람의 전쟁>은 기실 사랑과 질병과 죽음을 앞에 둔 우리 모두의
'전쟁과 구원'이니 그대는 그대의 시를 쓰고 갔을 뿐이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을 미리 쓰고
갔을 것이다. 떠나기 하루 전 , 아직 의식이 있을 때 대세(代洗)를 받았다. 세례명은 라파엘.
시인과의 약속대로 그의 아내는 그의 타계 1주기에 이 詩集을 출간했다.
투병을 쓴 유고시집이라니, 미리 읽기도 전에 겁 먹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시집은 처절하지도
눈물타령도, 고통을 호소하는 詩集도 아니다. 그저 삶의 일부였고 과정이었던 시간들을 철저히
싱싱한 각성과 명료한 언어로 명랑(?)하고 정직하고 담담하게 적어내려간 '노래'이다.
그리고 그 '노래'를 어떤 사람이 6월의 첫 번째 월요일 아침,에 또 감사하고 기쁘게 듣는다,
기형도 생각
훤칠한 키에 노래까지 잘했던
청탁받은 원고를 들고 언제나 회사 근처로 수줍은 듯 나타났던
사내
일간지 기자 같지 않은 자신 없는 표정과 꺼내놓은 원고를 주기
싫은 듯 몇 번이고 교정을 보여달라고 조르던
그를 마지막 보고도 수 십년을 더 살고 있으니
애초에 좋은 시인이 되기는 싹수가 노란 터.
같이 무슨 동인 활동을 해보자는 제안에
난색을 표하던 섬세한 사내, 대학 동기들 가운덴 말도 잘하고
시도 잘 낭송하곤 했다는데
나랑은 유전자가 달라 노는 물이 달라 속을 알 수 없던 시인
당신 생각이 나요 당신도 야구를 좋아했던가요?
우리나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림픽에서 야구가 우승했던 베
이징
우커송 경기장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베이스만 한국에 오고 건물은 헐려
재방송마다 찾아보면 내가 눈물짓는 사연을.
당신과의 짧았던 만남을 되새김질하고
나는 길 떠나고자 합니다, 미지의 세계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P.80 )
축복받은 저녁
아내가 고등어조림을 맛있게 해줬다.
비가 와서 파리공원 산책로의 우레탄이
비단처럼 부드러워졌다.
산책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아이와
담배를 꼬나문 아저씨를 만났지만
짜증은 내지 않았다.
나의 돈 쓰는 단위도 병원비를 제외하면
동그라미가 두 개쯤 빠졌다.
아내의 음식 솜씨가 나날이 좋아진다.
나의 식욕과는 무관하게. (P.95 )
너무 큰 바람
하고픈 말 다하고 먹고픈 거 다 먹고
원 없이 책도 보고 조금은 글도 짓고
그런 것을 원했을까요? 전차에 받히지 않았더라면
갔었던 좋은 관광지를 다시 방문해서
좋은 사람과 좋은 술 좋은 음악에 핑크 플로이드까지
악기도 배우고 정원도 가꾸고 개도 고양이도 기르면서
만년에 그러고 싶었을까요? 나란 사람은
그러나 나는 노력했어요, 내 욕망도 바람도 꿈도
모두 휘발되어 사라 없어지기를.
아픔이 오기 전에 병들기 전에 왜 그것을 몰랐을까요
바라지 않는다고 바라는 것, 그것은 너무 큰 바람이라는 것을. (P. 27 )
-윤성근 시집, <나 한 사람의 전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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