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올리느라
나물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 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P.40 )
별 만드는 나무들
내설악 수렴동 들어가면
별 만드는 나무들이 있다
단풍나무에서는 단풍별이
떡갈나무에선 떡갈나무 이파리만 한 별이 올라가
어떤 별은 삶처럼 빛나고
또 어떤 별은 죽음처럼 반짝이다가
생을 마치고 떨어지면
나무들이 그 별을 다시 받아내는데
별만큼 나무가 많은 것도 다 그때문이다
산에서 자 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에도 숲이 별처럼 술렁이는 건
나무들이 별 수리하느라 그러는 것이다 (P.63 )
국수가 먹고 싶다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 자국 때문에
속이 휜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P.52 )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 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P.72 )
어둠
나무를 베면
뿌리는 얼마나 캄캄할까 (P.80 )
기러기 가족
- 아버지 송지호에서 좀 쉬었다 가요.
- 시베리아는 멀다.
-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 그런 소리 말아라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P. 82 )
- 이상국, <2013 제2회 박재삼 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