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이른 아침 출근길 노량진동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하수구로는 졸졸졸 도량물 흐르는 소리
집집이 아침밥 준비하는 물
양치질하고 머리 감는 물 모여
졸졸졸 도랑물 흐르는 소리
어깨를 겹치고
처마를 맞댄 키 작은 집들 사이로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
고등어 굽는 냄새
좁은 골목길을 넘실거리고
더러는 열어 놓은 창으로 텔레비전 뉴스 소리
옛날 고샅길 같을까
베란다 빨랫줄엔
무청 시래기도 내걸리고
더러 담장 위 녹슨 철조망에
기울어진 채 서 있는
대추나무 모과나무
구불구불 사방
핏줄처럼 퍼지고 내장처럼 이어져
어디로든 가는 골목길
도랑물길 따라 바윗돌 따라
어디이든 이어지는 골목길
달팽이 같은 집들 사이로
그길에
곧게 내뻗은 직선은 없다
달리면서 무너지는 속도도 없고
붉은 신호등도 없다 (P.16 )
썩은 시
시가 발효되면
술이 될까
술이 되어
사람들을 취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러고서는
오줌이 되고
똥이 되어
향그러운 흙이 될 수 있을까
다시 그 땅 위에서
파랗게 돋아 나는
풀이나 나무가 될 수 있을까
풀잎 간지르는 바람이 될 수 있을까
시도 썩어야 한다
썩은 시에서 눈이 돋는다 (P.70 )
개 그냥 살겠다
- 어떤 인생론
작문 시간에
논술은 말고
그냥 에세이 식으로
인생관을 쓰라 했다
아, 나도 모르는
인생관을 쓰라니
참으로 어려웠겠다
그러나 쉽게 찾아낸 정답
정답은 단 세 줄
이러했다
나는 생각해 보니 공부도 못하고 재주도 없고
애들한테 아무 인기도 없는 것 같다
개 그냥 살겠다 (P.28 )
능소화 밥상
후관 삼층 남교사 화장실
북창에서 내려다보면
영화초등학교 뒤편 골목길 안
낡고 오랜 키 작은 지붕들
그 가운데 움푹한 빈집
구멍 뚫린 슬레이트 지붕
서까래는 반쯤 무너진 채
마당 가득 능소화 꽃밭
아무도 내다보지 않으니
내게는 황송한 독상
호박잎쌈에 강된장 조기젓 놓인
열무김치에 감자 넣고 조린 갈치 한 토막
한여름 입맛 나는 밥 한 상
아니면 하늘 정원일까
공중 정원일까
골목길 안 가까이에선 보이지 않고
삼층 북창 허공에서만 보이는 (P.71 )
중호 생각
굴비만 보면
마흔 아홉에 죽은
시인 윤중호 생각
저 세상 어디쯤에서도
굴비 한 마리 노릇노릇 구워놓고
소주 한 잔에 살 한 점
앞니로 조근조근 씹고 있을까
아니면 다시 스님 되셨을까
깊은 산 혼자 사는 암자
저물어가는 능소화빛 하늘
정지문으로 건네다 보다
아궁이불 뒤적이며
무국 끓이고 있을지
조물조물 고사리나물 무치고 있을지
굴비 한 마리 노릇노릇 구워놓고
부추 겉절이 무치고
이 겨울
차가운 소주 한 잔
목구멍으로 넘기며
짜르르 중호 생각이 납니다 (P.108 )
-윤재철 詩集, <썩은 시>-에서
윤재철 시인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시집이 아니라
2000년에 나온 산문집 <오래된 집>,이였다.
1985년 교육 무크지 <민중교육> 사건으로 투옥 해직되었다가
15년만에 복직한 해에 쓴 '오래되고도 하나 낡은 것이 없다'란
부제가 붙은. 이 산문집의 머리글에서 시인은- 스스로에게 '자유'
라는 숙제를 주었다 했다. 혼자 한적하게 어디 들어가 살고 싶다
거나, 현실적인 어떤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적나라한 현실 속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
고, 나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라는, 부딪치고 깨어지는
자유를 택하였으며 그러한 자유와 자유를 위한 치열함에 놓인다.-
쓴 머리말을 오래도록 들여다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깊은 밤, 기린의 말>속 최일남의 단편소설 '국화 밑에서'에 인용된
윤재철 시인의 詩,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를 읽고 너무 좋아 다시 詩集 <능소화>, <거꾸로
가자>를 또 즐겁게 읽었다. <거꾸로 가자>의 첫 번째 시는,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인데 1978년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만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와 바퀴의 '속성'은 같지만
그 바퀴의 가속도에 빗댄 너무 빠르게만 우리는 ' 너무 오래 달려오지 않았나'를 노래한다.
그런 윤재철 시인의 새 詩集, <썩은 시>를 다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는다.
장마철의 어느 오후, 종일 내리는 비로 싱숭생숭해진 학생들에게 단 두 개의 문장을 화두처럼
던지고 수업을 끝내는 교사 있다 한다. 그 교사가 바로 윤재철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