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깃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풀 속을 누벼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 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서 후닥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P.16 )
꽃사과 꽃이 피었다
꽃사과 꽃 피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눈을 치켜들자
떨어지던 꽃사과 꽃
도로 튀어오른다.
바람도 미미한데
불같이 일어난다.
희디흰 불꽃이다.
꽃사과 꽃, 꽃사과 꽃.
눈으로 코로 달려든다.
나는 팔을 뻗었다.
나는 불이 붙었다.
공기가 갈라졌다.
하! 하! 하!
식물원 지붕위에서
비둘기가 내려다본다. 가느스름 눈을 뜨고.
여덟시 십분 전의 공중목욕탕 욕조물처럼
그대로 식기 전에 누군가의 몸에 침투하길 열망하는
누우런 손가락엔
열개의 창백한 손톱 외에
아무것도 피어 있지않다.
내 청춘, 늘 움츠려
아무것도 피우지 못했다, 아무것도.
꽃사과 꽃이 피었다. (P.50 )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힐거야.
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
너를 흠뻑 적실거야.
유리창을 열어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P.98 )
-황인숙 시선집, <꽃사과 꽃이 피었다>-에서
한국시단의 독특하고 경쾌한 상상력, 황인숙 시인의 자선 대표시집!
『꽃사과 꽃이 피었다』는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했고, 동서문학상(1999)과 김수영문학상(2004) 등을 수상한 황인숙의 첫 시선집이다. 1988년부터 2007년까지 30년간 황인숙 시인이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 시집들에 수록된 시들 중 시인이 가려 뽑은 시선집 『꽃사과 꽃이 피었다』에는 발랄하고 경쾌한 상상력을 통해 사물에 아름다움을 불어넣어주는 황인숙 시인 특유의 깔깔거림과 쓸쓸함의 시어들로 가득 넘친다. 시인은 일상과 사물에 부여된 낡은 옷과 생각을 벗기고 새로운 옷을 입히며 답답한 현실을 새로움의 충동으로 만들어놓는다. 그리하여 시인의 통통 튀는 개성적인 문체와 시크한 사유를 통해 부조리한 생의 허무를 부드럽게 매만진다. 마치 콧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한 그의 시편들은 ‘생’이라는 부조리극에 대한 조롱이자 자유로운 영혼의 휘파람이기도 하다.
세상살이의 복잡함과 무모함에 초연하면서 그래도 살아가야만 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황인숙 시인은 고양이의 발걸음처럼 때론 조심스럽게 때론 오만하게 행간과 행간을 내딛으며 생의 ‘자명한’ 이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