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오프라야 도서관
도서관 창밖으로 눈발이 흩날린다
몇 년 동안 쓸까 말까 망설이던 편지
봄마다 담배를 끊는 당신께
의자에 앉기 전 인사부터 하는 당신께
소한(小寒)에 이삿짐을 싸는 당신께
엉킨, 비밀의, 눈물 고인, 캐스터네츠, 어쿠스틱 기타,
짙은
경계성 자폐를 앓고 있는 당신 때문이다
도서관 딱딱한 나무 의자처럼 서러워진다
입 밖으로 내보낸 적 없는 밀어들
종신형으로 서 있는 나무를 생각한다
어둠 속에서 혼자 등불을 들고 가는 여자가 있는
타로 카드를 새해에 뽑았다
여자는 가슴 가득 책을 껴안고 잠들 곳을 찾고 있다
책은 어디에 있을까 잠은 어디에 있을까
공기와 빈 상자가 가득 쌓여 있는
차오프라야 도서관은 차오프라야 강가에 있다
책을 펼칠 때마다 모래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언제나 육체보다는 사랑을 원했다 (P.32 )
느낌이 좋은 사람
봄눈은 바라보는 자의 눈동자에 쌓인다
첼로와 하프를 위한 흰 눈의 낙법(落法)
저 장엄한 서사의 주인공은
봄 눈 내리듯 깨끗이 사라지는 이마
자기 발자국 소리를 천둥처럼 듣는 자
나비, 나비의 흰 망령(亡靈)들
찍히는 자의 혼을 들여다보느라
사진 찍는 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사진작가의 눈
느낌이 좋은 사람과는 밥을 함께 먹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는 너의 이마 위에 봄 눈이 내린다 (P.38 )
물방울 관음
로프를 잡고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올라가
여럿이 술을 마시던
고색창연은 그 자리에 아직 남아 있을까
그곳에서는 매번 무장해제되었다
매번 탈레반처럼 감정이 격렬해졌다
탁자에 엎드려 있던 내게 누군가 노트를 찢어 내밀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너는 누구를 좋아하는 거니
사리와 나는 멍하니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새끼를 많이 낳아 젖몸살에 시달리던 어미 개 사리는
이웃집 닭을 세 마리나 물어 죽이고 위안리치 중이다
하루종일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장독대와 맨드라미와 비쩍 마른 사리와
나는 하루 종일
장맛비 속에 들어앚아 함께 묵언 중이다
함께 감정의 형벌을 받고 있다
어미 개 사리야, 너는 누구를 좋아했던 거니 (P.64 )
지원의 얼굴
붉은 흙을 새긴 마음 때문인지
권진규의 조각 <지원의 얼굴>이 좋았다
사랑을 받는 것은 얼굴이 살아 있다
스무 살의 비 오는 날은 노랑 우산의 환(幻) 속에 숨
었다
벗어버리고 싶은 집, 구석, 언제나 밖이 좋았다
신발을 신고 나서면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튤립이나 입을 노랑 비옷을 누가 입다 줬을까
시간이 흐른 다음, 사람들은 모르는 이를
노랑 튤립을 나라고 말해준다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누군가 내 얼굴을 조각끌로 심장에 새겨둔다면
진흙으로 남을지라도 패배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거다
그가 나간 다음 우리는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저자는 왜 저리 고독한 거야
내가 나간 다음 등 뒤에 대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저자는 왜 저리 고독한 거야 (P. 88 )
해석되지 않는다
늙은 독학자는
끝을 본 사람이 아니라
이제 시작하는 사람
독학자의 음악은 하나의 점
독학자의 언어는 하나의 점
점의 정수리를 뚫고 뿌리로 내려가는 깊이
그 깊이 앞에서는 누구나 시작하는 사람
궁극에 가면 모든 것은 모든 것으로
색소폰 소리는 바이올린 솔로 소리로
시는 호랑이 가죽으로
남는다, 위태로운 열정에 빠져
시작과 끝은 달빛 아래 흰 나무의 뿌리와 함께
달아난다 해석되지 않은 빛과 어둠과 함께 (P.119 )
-권현형 詩集, <포옹의 방식>-에서
시인의 말
감출 수 없는 속의 말들.
감출 수 없기에 언젠가는
내 시가 얼얼하게 아름다워졌으면 좋겠다.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생의 가닥을 찾을 때가 있다.
늘 그리운 햇살이 10데시벨의 소음으로
양철 지붕 위를 두드린다. 쓸쓸 명랑하게.
간헐식 단식도 아닌 간헐식 몸살이, 물에 찬밥 말아 먹다가 체한 천사가 가슴을
주먹으로 치듯 찾아오곤 하는 요즘이다.
그럴땐 일들을 떠나 곧바로 책상에서 내려 온다.
마법고양이 펠릭스가 눈꽃송이와 함께 아톰처럼 웃고 있는, 두툼한 회색 극세사이불을
덮고 잠깐 한 30분이나 1시간쯤 잠을 자고 나면 다시 괜찮아지긴 한데, 아 이젠 내몸이
내 뜻대로 안되는구나 싶은 마음에...ㅠㅠ
오늘도 그런날이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따끈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마음풀기로 권현형 시인의 <포옹의 방식>
을 읽는다.
새끼를 많이 나 젖몸살에 시달리던 어미 개 사리는, 이웃집 닭을 세 마리나 물어 죽여
쇠사슬에 묶여 위안리치 중이지만, 문득 오래 전 다니던 산에 있던 암자의 하얀 진돗개
'보리'는 너무 '발랄난망'하여 절 마당 나무 옆에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 보리의 신랑은 누런 빛깔의 잘 생기고 점잖은 진돗개' 삼마'인데 삼마는 산길을 안내해
주기도 하고 등산객들에게 간식도 받아 먹곤 했는데, 어느 여름 산에 오르다 보니 갑자기
비가 내려 올라가기도 뭣하고 다시 내려가기도 뭣한 찰나에 어디선가 삼마가 나타나 어서
암자로 가자는 듯, 앞장을 서 삼마랑 웃으며(개도 웃는 걸, 삼마에게서 보았다~) 드디어
영원암에 도착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그 절의 마루에 앉아 삼마와 둘이 하염없
이 내리는 장맛비를 보았던 그 기억이 난다. 삼마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시인의 스무 살,처럼 나의 스무 살 즈음도 권진규의 테라코타 <지원의 얼굴>을 사랑
하고, 최욱경의 그림들을 사랑하고, 자꼬메티와 조르주 루오의 <미제레레>를 옆구리에 끼고
다닌 그 시간들이 문득, 약간 어두운 실내에서 창문처럼 나를 들여다 보는 듯한 지금이다.
자주빛 싱싱한 사과같은 얼굴을 하고 다닌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왠지 그 시간으로 되돌아
가고 싶진 않다.
아직은 늙은 독학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의 이 시간도 나쁘진 않다.
지금은 참이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하던 마음에서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은 없다'를 깨닫는 그런 시간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우리가 해석하겠는가. '점의 정수리를 뚫고 뿌리로 내려가는 깊이/ 그 깊이 앞에서는
누구나 시작하는 사람' 일텐데...
마법고양이의 마법으로 이제 나는 다시, 싱싱해져 즐겁게 일을 시작한다.
오늘 장거리운전을 하며 길을 가신, 나의 님께도 이 기운을 함께 나눈다.
오늘도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