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토마스 수사님이 거름더미에서 죽은 요한 신부의 시신을 안고 '왜 하느님, 대체 왜? 하고 불렀을 때부터 그러고 싶었다. 창가에서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보니 토마스 수사님은 오랜 이야기가 힘에 겨운 듯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그맣고 파란 눈을 아이처럼 찡그리면서 또 웃었다.
"그 후로도 나는 가끔 옥사덕을 만났어요. 박정희가 해방신학에 대한 책을 인쇄한다고 우리 인쇄소를 압수했을 때, 그때 우리 독일 사람들은 차마 못 건드리고 한국 수사님들, 직원들 데려갔을 때, 가난한 사람들의 사진을 자주 찍는다는 이유로 최민식 작가의 사진집을 압수했을 때, 나는 옥사덕을 보았지요. 남미의 로메로 주교의 학살에서 옥사덕을 보았고, 80년 5월 도륙당하던 광주....에서 다시 옥사덕을 만납니다. 한국적 민주주의...이런 말들, 잘 살아보세 이런 언어의 왜곡에서 다시 옥사덕을 만납니다.
요한 수사님, 악은 수많은 얼굴로 다가옵니다. 사실 사람인 우리가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은총에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도 있어요.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모든 사랑을 무의미하게 느끼게 하는 모든 폭력, 모든 설득, 모든 수사는 악입니다. 너 한 사람이 무슨 소용이야, 네가 좀 애쓴다고 누가 바뀌겠어, 네가 사랑한들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 속삭이는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옥사덕이나 남미 로메로의 피살이나 유신 혹은 광주 학살 같은 것은 아직 난이도가 높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죠. 이제 악은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달려듭니다. 소리 없는 풀 모기처럼 우리를 각개격파하러 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무의미입니다. " (P.238~ 239 )
"나무가 참 많네요?"
내가 묻자 이사악 신부님이 대답했다.
"여기 수도원의 주 수입원이 크리스마스용 트리를 파는 거래. 아무래도 뉴욕도 가깝고 그러니까 말이야. 나도 그제 도착해 여기 수사님께 설명을 들었는데 500에이커, 한국식 표현으로 치면 61만평? 워낙 땅이 넓어서 그런가 말이야, 이게 다 참나무 숲이라는군. 그런데 요한 수사 그거 아나? 이 세상에 참나무란 건 없다는 거 말이야."
뜻밖의 말이었다.
"그래요?"
"응. 나도 여기 와서 알았네. 참나무란 참나무 속에 속하는 여러 나무들의 공통 명칭이라는 것을. 자료를 좀 찾아보니까 수피를 잘라내어 굴피집의 지붕으로 썼다는 굴참나무- 우리 수도원에서 순교자를 여럿 냈던 옥사덕의 지붕 자재도 아마 이 굴참나무였을 거야- . 떡을 상하지 않게 감싸주었다는 떡갈나무, 예전에 신발 깔창으로 대기 좋았다는 신갈나무, 묵을 쑤어 먹으면 제일 맛있는 열매를 맺는다는 졸참나무, 거기서 열린 도토리로 임금님 수라상에 올릴 도토리묵을 쑤었다는 상수리나무.... .한마디로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가 다 참나무라는 거야. "
참나무 숲속의 그늘은 서늘했다. 우리의 발소리는 그 고요한 숲의 침묵을 가르고 있었다. 가을 냄새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쌉싸름한 내음이 온 숲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참나무는 20년은 되어야 비로소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고 하네. 물론 그 전에 그 수많은 도토리 중에서 싹을 틔우는 것도 몇 개 되지 않고 말이야. 그렇게 싹이 났다고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죽는 일도 비일비재, 여러 해충에 약하고... . 요즘 같은 세상에 20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다니.... . 그때 생각했어. 이렇게 약하고 어찌 보면 느린 나무에게 참이라는 이름을 붙인 우리 조상들을 말이야. 심지어 평균 수명도 짧았을 그 시기에 자신이 심었다 해도 살아서는 그 혜택을 보지 못할 그 나무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참이라는 말을 붙여주다니.... . (P.313~314 )
-공지영 장편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