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원 가는 길
먹고 웃고 떠든 동창회는 두 시에 끝나고
세 시에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탔다
"을지로 입구로 가 주세요."
세운상가를 지날 때
"세운 상가가 그대로 있네요." 했더니
그때부터 기사 양반 말이 많아졌다
대형상가가 생기면서 세운상가가 죽었다면서
나라의 경제 문제까지 이어졌다
"기사 양반 고향이 어디세요?"
"부산입니다"
내 고향은 대구
지역감정 아닌 향수 같은 것
친밀감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여기는 왜 가시는데요?"
"문화원에 공부하러 가요."
"연세가 얼마신데요?"
"여든 셋이요."
"일흔 남짓밖에 안 보이시는데요."
택시비 사천삼백 원
호기롭게 오천 원을 내어주고
십 년 젊어진 할마씨
발걸음이 가볍다 (P.16 )
4.19 민주공원의 아침
"여러분 몇 살이지요?"
"다섯 살."
"맞았어요. 여기는 다섯 살 이상은 못 오는 곳이예요."
아침 여섯 시는 어둡고 쌀쌀하다
육십 칠십 팔십대가 다섯 살 아이가 되어
선생님 구호에 맞추어 국악기공 체조를 한다
일곱 시 운동이 끝날 무렵이면
진달래 능선 뒤로 파아란 하늘 아래
그림같이 고운 삼각산 인수봉
영령들 무덤 앞을 지나며
건강히 잘 지낸다고 고개 숙이고
단풍이 시작한 연못가 벤치에 앉으면
일찍 잠이 깬 수련
인사를 한다 (P.28 )
추석
나무 위에 사과는 빨갛게 살찌고
추석 음식 장만하느라고 어머니는
밤 새우고도 고단한 줄 모르시던 시절
빨간 원피스에 새 구두 신고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시골 마을 뛰어다니던 단발머리
어른 몰래 사과 따다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면
빙그레 웃으면서 아버지 하시던 말씀
"우리 종아는 장가나 보내야지."
아들 식구들 제사 모시고 간 후
막내딸 내외 와서 자 주고 가고
오늘 밤은 외손자가 저 방에서 자고 있는데
그리움은 강물 되어 흐르는 밤 (P.29 )
부모의 마음
막내딸이 이사를 하며
소용이 없다며 에어컨을 보내 왔다
설치해 주러 온 기사
"할머니, 어떻게 해드릴까요?"
"내 부모 일이라 생각하고 알아서 잘해 주세요."
두어 시간 넘게 걸려 깔끔하게 끝냈다
전기세 아까워 별로 사용할 것 같지는 않다
"기사 양반, 우리 앞집 식당 음식이 맛있는데 저녁 먹
고 가요."
"너무 늦어 마음만 고맙게 받고 가겠습니다."
"아무래도 저녁은 먹어야 할 테니 먹고 가요."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면서
커피잔 들고 식당에서 나오는
얼굴 불그레한 두 기사
오늘 아들 노릇 해 주었으니
밥을 먹인 나도 즐겁답니다 (P.30 )
집 없는 달팽이
겨울밤 마루에 나오다
발바닥 뭉클
기겁하고 불을 켠다
발가벗고 기어다니는
보기 민망한 달팽이
우리가 친숙한 달팽이는 집이 있다
그리고 예쁘다
그러나 평생 집을 업고 다닌다
너는 업고 다녀야 할 집은 없구나
집 없는 노숙자
쓰레받이로 쓸어 담아
화분에 넣어준다 (P.44 )
마당에서 2
등꽃이 지기 전에 찔레꽃 피고
달맞이꽃 초롱꽃 매발톱 금낭화
애기똥풀 흑장미 넝쿨장미
물망초는 저를 잊지 말라 하고
여보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에
가우디 얼굴이 있듯이
이 마당도 설계한 당신 얼굴이 있어
오늘 아침 뻐꾸기 소리 (P.48 )
계단
수유 전철역 1번 출구 계단
나이든 부부 싸우고 있다
대구 딸네에서 받아온 사과 상자
남편은 혼자 들고 가겠다 하고
마누라는 무거우니 같이 들자 하고
보고 있던 한 학생
번쩍 들어 계단 위에 가져다 두고 가버렸다
다투던 이 없는 지금도
그 계단 밑에 서면
흐르는
잔잔한 물결 (P.66 )
떡과 까마귀
동네 떡집 앞 은행나무에
까마귀 소리가 시끄럽다
떡집 주인의 말씀
떡판 앞에 손님이 많아 떡이 가려지면
저렇게 야단이라구
하루에 떡 여남은 개씩은 물고 간다구
떡집 주인 싱글벙글
아까워하지 않네 (P.71 )
-박순희 詩集, <마당에서>-에서
보통은 정오 안팎으로 오시는 택배아저씨가 오늘은 9시쯤
일찍 오셨다. 가시면서 "명절 잘 쉬세요!"하신다. 아이쿠나,
내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할 말씀을.^^
지난 3,4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도 배달약속을
어긴 적 없는 이 60대의 기사님께선 평소에는 꼭
"수고하세요.~" 인사를 하고 가시는데, 그때마다 수고는 아저씨가
하시지...가만히 앉아서 책배달을 편안히 받는 내가 무슨 수고인가,
벌쭘하기도 하고 늘 고맙고 따듯했다.
이 시집은 2013년 봄부터, 일주일에 한 번 유자효 시인께서 시 창작 강의를 하시는, 중구 문화원을 다니신 85세의 박순희 님께서 2년이란 한정된 시간 속에서, 합평을 통과한 작품들로 엮은 시집인데, 시인의 삶과 사고의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아주 따뜻하면서도 정제된 시들이 즐거운 시집이었다.
어느덧 한가위가 내일 모레다. 어려운 세상일지라도, 에어컨을 설치해 준 기사들에게 부모마음으로 맛있는 밥을 먹이신 마음이나, 집 없는 민달팽이에게 화분집을 내어준 마음이나, 전철 역 계단에서 노부부의 옥신각신을 바라보다 냉큼 사과 상자를 번쩍 들어 계단 위로 가져다주고 가 버린 학생의 마음이나, 하루에 까마귀가 떡 여남은 개씩을 물고 가도 싱글벙글 아까워 하지 않는 떡집 주인의 마음처럼... 그렇게 다 우리의 마음이 넉넉한 기쁜 추석을 맞으면 참 좋겠다. 택배 아저씨를 비롯해 모든분들, 넉넉하고 좋은 보름달같은 그런 한가위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