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들판 작은 교회
톱밥 난로 투둑투둑 뜨겁던 교회
마루 틈은 할머니 집사님 흘린 눈물로
까만 때가 스며 있던 교회
그 눈물들이 양초 속에서 매끄럽게 윤이 나던
들판 가운데 작은 교회
종루에 매어진 끈을 잡아당기면
종소리는 겨울 투명한 들녘을 가로질러
나락 벤 자리를 더듬다가
장독대 간장독을 지나
초종, 재종으로 성도들을 불렀지
성탄절 새벽송을 부를 때면
첫사랑 손 스침의 감격이
펼친 찬송가 위에
구주 예수 탄생처럼 명료하던 곳
주일을 못 지키는 일이 있어도
힘든 친구 따뜻하게 받아 안던 교회
끝내 기울어져 전나무를 잘라 받쳐 쓰다가
결국 사라지고 없는 교회
우리들 마음 그 끝에 세워진
저 들판 작은 교회 (P.69 )
구직
벼룩시장 들고 남산 말랭이까지 튄 사내
내리는 눈발 사이로
취직자리를 찾는다
지난 가을 떨어지지 않았던
팥배나무 빨간 열매 눈보라에 흩어져
붉은빛 으깨지며 눈속에서 시린 손 부빈다
벚나무 가지 사이
눌어붙은 눈 범벅
단풍은 손 오므려 떨어지는 눈발을 쥐고
떡갈나무는 터진 몸통 안으로 눈을 쟁인다
사내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벤치의 눈을 손으로 흝어내고
서서히 눈보라에 몸을 들이민다
폭설 그치면 일자리 보이리라 (P.14 )
눈인사
한 방울의 빗물에도
온몸의 주름을 펴며 안아 주는 호수
그 흔들림으로 당신을 천천히 불러봅니다
당신은 웃고 있나요
숨죽이며 간신히 숨을 들이쉬던 선창가에서
당신은 내게 왔지요
입술이 말랐던가요
비가 왔던가요
가로등 불빛이 얼굴의 그림자를 스쳐
잔잔하게 뒷걸음쳤지요
사랑하고 마침내 미워하게 된
몇 자락 살아왔던 이야기
끝내 삭정이로 스러져 가는
우리네 저 아득한 자리
아득하여서 오늘은 훨씬 가까운
당신의 벅찬 이름 (P.11 )
환생
알츠하이머성 치매로 오락가락 하는 老母
옛 기억이 되살아나시는지 밥 안치는 일을 자청하신다
손목 아래로 빚어지는 정겨운 리듬
썩썩 써스럭, 써-억 써억 썩
바가지가 요란해진다
쏟아지는 수돗물이 시원타며 손등이 웃고
어둑한 집 안의 오후가 환해진다
어머니 일흔아홉이니
쌀 씻어 밥 안치는 일은 칠 십 년은 됐으리라
짚풀은 부지깽이로 아궁이에 넣어 지피고
한참 후엔 전기밥통에 쌀 씻어 안쳤으리라
식구들의 사발에 께끼밥도 푸고
때로 고봉밥 꾹꾹 눌러 펐으리라
떨어지는 밥알은 손으로 주워드시면서
"엄니, 다시 시집가도 되겠네, 쌀 씻는 소리 들응께"
"야 좀 봐라, 못하는 소리가 없네, 떼-엑!" (P.47 )
깊은 산속 옹달샘
산책길 입구 조그만 시냇물 흐르는 곳
선생님이 흐르는 물 사이에 모형집을 세운다
토끼 두 마리를 그 옆에 다시 세운다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삐뚤빼뚤 서 있다
선생님은 작업을 마치고 산만한 아이들을 모은다
여러분!
오늘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 불러요
아이들이 눈을 껌벅거리며 합창을 한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지나가던 행인이 궁시렁댄다
저 애들 데리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대.....자빠지면 어
쩔라고
깊은 산속도 아닌디
그러고 말여 토깽이 새끼 코쭝뱅이밖에 뭐 있어
세수할 디가 어디 있다고 (P.23 )
-강형철 詩集, <환생>-에서
'실천 시선' 213권.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속살을 보여줘 온 강형철 시인이 십여 년 만에 펴낸 네 번째 시집. 이번 시집에는 강형철 시인의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매개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노래한 시편들이 실려 있다.
이번 시집의 '환생'이라는 것은 다시 돌아온다는 표층적 의미를 넘어 심층적이고 복합적인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통해 바라본 환생은 정신이 다시 살아남을 의미한다. 불교적 세계관을 토대로 보이는 환생이 있다. 또한 환생의 의미를 시인은 희망적 세계의 부활로 여기기도 한다.
발표한 지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시들과 최근의 시들을 합쳐 총 4부로 묶었다. 1부는 나름으로 전체적인 이야기를 모았고 2부는 어머니와 살고 있는 이야기를 모았다. 3부와 4부는 최근에 생각하는 것들을 시로 쓴 것들이다. 시인은 특히 2부 시편들은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웃으면서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작품들로 엮었다.
세상의 '밥'이 되기 위해 오시는... 한 아기가 오늘밤 구유에서 태어나는 날,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었다'의 시인 강형철 詩人의 <환생>을 읽는다.
오늘밤 세상의 모든 교회와 성당에서는 아름답고 거룩한 경배가 있겠지만
오늘밤도 여전히 세상은 출산을 앞두고 '빈방'을 찾아 헤맸던
아기의 부모처럼, 절박하게 길을 헤매는 사람들이 또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일흔 아홉 먹으신 치매로 오락가락하는 한 어머니가 쌀 씻는 정겨운 소리를
듣는다. 께끼밥도 푸고 고봉밥도 꾹꾹 눌러 펐던 그 밥의 환함,을 듣는다.
'밥'은 열심히 일하고 배고플때 먹는 밥이 가장 맛있는 밥일 것이다.
갓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그릇도 맛있고, 고소한 누룽지도 맛있고
뜨끈하고 구수한 숭늉도 모두 다 맛있다.
나도 네게 밥이 되고 너도 내게 밥이 되어 주고 싶은 그런 날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서빨리 신나게 웃으며 맛있는 밥을 함께 먹는 그런 세상을
어둠에 묻힌 밤 촛불,처럼 기다리는 그런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