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두주
희뿌연 산
언덕에는 흰 눈이 내리고요
얼어죽을까 봐 얼어죽을까 봐
나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요
동치미 국물 동치미 국물을 마시며
슬픈 이과두주 마시는 밤
또 무슨 헛것을 보았는지 저 새카만 개새끼는 짖고요
저 하얀 들판에는 검은 새들이 내리고요
짬뽕 국물도 없이
시뻘건
후회도 없이
내리는 눈발 사이로 흘러가는 푸른 달 틈으로
적막하고 나하고 마주 앉아
이과두주 마시는 밤
이 조그만 것에 독한 것을 담아 마시는 밤
이 조그만 것에도 독한 것이 담기는 밤 (P.45 )
계수나무 장작
계수나무 장작을 쪼개 헛간 가득 쌓아놓고
겨울을 맞는다 걱정 없다 아궁이 깊이 계수나무 장작을
밀어넣으면
가기도 잘도 간다 흰 연기
굴뚝이 달린 나의 옛집
허리 쭉 펴고 마당 가운데 서서 바라보면
나는 밤하늘의 반달과 맞대면하는 자,
볼때기는 싸늘해도 웃음은 절로 번진다
(에구, 연말정산 하느라고 고되겠다 너희들은
이 모임 저 모임
허리 굽실거리고 다니느라 피곤하겠다)
동치미 국물 한 대접 마시고
뜨뜻한 이불 밑에 몸을 넣으면 나는 안온, 安穩이라는 사
람 생각이 난다
그는 한겨울밤의 이불 속에서 팔을 뻗어 차가운 흑벽을
만져보던 사람, 그 흙벽의 차가움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기를
좋아하던 사람, 푸른 하늘 은하수 계수나무 장작을 쪼개 군
불을 넣고 적막을 이겨낸 사람
이 겨울의 나도
따라 할 사람이 있고 흉내 낼 사람이 있어서 감사하다 계
수나무 장작은 따뜻하다 (P.50 )
달걀 속의 밥
이것은
내용과 형식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
그 옛날 닭 울고 개 짖던 유정란의 시절에
아버지는 젓가락 끝으로 톡톡 구멍을 내고 날달걀을 드
셨네
목고개를 있는 대로 젖히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날계란 드시는 아버지의 목울대는 또 다른 달걀
나도 알아, 목구멍 넘어갈 때의
그 계란 노른자와 흰자의
맛 차이
신기해, 닭장에서 계란을 꺼내올 때마다
어떻게 해서 이 둥글고 따뜻한 게 만들어지는지 궁금
그것은 껍질에 대한, 형식에 대한, 내 첫 번째 질문
날계란을 다 마신 아버지는 그 속에 쌀을 안치고
우리에게 특별한 밥을 해주셨네
계란은 세상에서 가장 작고
예쁜 솥
아버지는 조심조심 쌀을 넣고 물을 붓고 아궁이 불씨 속
에 그 솥을 안쳤지
계란 속에 든 밥은 언제나 된밥
그러나 신기하고 재밌고 맛있어
계란은 세상에서 가장 앙증맞고
귀엽고 독특한 솥
그 솥으로 짓는 밥은
형식과 내용에 관한 내 첫 번째 경험 이야기 (P.72 )
불이 물에 가닿는 소리
낙안읍성 대장간 앞이었다 불이 물에 가닿는 소리, 나는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그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조
선낫 한 자루를 샀다 겨울 해 질 무렵이었다 어떻게 하면 단
단해지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아버지는 벌겋게 달아오른 아
궁이 앞에서 내게 시범을 보여주셨다 벌겋게 달아오른 식칼
을 잽싸게 끄집어내어 물동이로 가져가셨다 푸시식 푸시식
연기가 피어올랐다 물이 불에 가 닿던 소리...... 낙안읍성
대장간 앞에서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단단해질 필요가 있
다 나는 단단한 것을 움켜쥐고 내 물렁한 무엇을 가차없이
베어낼 필요가 있다
나는 조선낫 한 자루를 샀다
엄지손가락 지문으로 조선낫 날을 문질러보았다 (P.78 )
- -유홍준, <북촌-까마귀>-에서
권위와 전통의 한국 정상의 시문학상(詩文學賞)!
2013 제28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북천 - 까마귀>
유홍준 시인의 신작시 52편 수록!!!
권위와 전통의 한국 정상의 시문학상(詩文學賞)!
2013 제28회 소월시문학상 <북천 - 까마귀>
2013 제28회 소월시문학상에 유홍준 시인의 <북천 - 까마귀> 외 24편이 선정됐다. 지난해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주요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들을 대상으로 100여 명의 문학평론가, 시인, 대학 교수 및 문예지 문학 담당자와 언론사 문학 담당 기자들의 추천을 거쳐 예심이 진행되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시인은 공광규, 김경미, 김소연, 김행숙, 손택수, 유홍준, 윤제림, 이병률, 이진명, 조용미로 총 열 명이었으며, 소월시문학상 심사위원회(김남조, 오세영, 김승희, 권영민, 문태준)는 이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숙고 끝에 유홍준 시인의 <북천 - 까마귀> 외 24편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들은 유홍준 시인에 대해 “1998년 시단에 등단한 후 자신의 특이한 시 세계를 구축해왔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시는 “아무런 특권을 갖지 못한 서민들이 발 딛고 사는 격랑의 현실에서 태어난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또한 수상작으로 선정된 <북천—까마귀>를 비롯한 여러 시편에 대해 “북천을 죽음의 거처로 단순화시키지 않고 생명의 종말과 그 새로운 탄생이라는 순환적 의미의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냈다”고 상찬했다. 아울러 “이러한 시적 상상력의 통합을 바탕으로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제28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북천 - 까마귀
어제 앉은 데 오늘도 앉아 있다
지푸라기가 흩어져 있고 바람이 날아다니고
계속해서
무얼 더 먹을 게 있는지,
새카만 놈이 새카만 놈을 엎치락뒤치락 쫓아내며 쪼고 있다
전봇대는 일렬로 늘어서 있고 차들은 휑하니 지나가고
내용도 없이
나는 어제 걸었던 들길을 걸어나간다
사랑도 없이 싸움도 없이, 까마귀야 너처럼 까만 외투를 입은 나는 오늘 하루를 보낸다
원인도 없이 내용도 없이 저 들길 끝까지 갔다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