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P.11 )
휄체어 댄스
눈물은
이제 습관이 되었어요
가닥가닥 온몸의 혈관으로
타들어오는 불면의 밤도
나를 먹어치울 순 없어요
보세요
나는 춤을 춘답니다
타오르는 휄체어 위에서
어깨를 흔들어요
오, 격렬히
어떤 마술도
마법도 없어요
단지 어떤 것도 날
다 파괴하지 못한 것뿐
어떤 지옥도
욕설과
무덤 저 더럽게 차가운
진눈깨비도, 칼날 같은
우박 조각도
최후의 나를 짓부수지 못한 것뿐
보세요
나는 노래한답니다
오, 격렬히
불을 뿜는 휄체어
휄체어 댄스 (P.22 )
* 강원래의 공연에 부쳐
파란 돌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을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러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P.33 )
해부극장*
한 해골이
비스듬히 비석에 기대어 서서
비석 위에 놓인 다른 해골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섬세한
잔뼈들로 이루어진 손
그토록 조심스럽게
가지런히 펼쳐진 손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이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을 들여다본다
(우린 마주 볼 눈이 없는걸.)
( 괜찮아, 이렇게 좀더 있자.) (P.44 )
* 17세기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안드레아 베살리우스의 책. 수년
간의 급진적 해부 연구 끝에 인간의 뼈와 장기, 근육 들 정교한
세부를 목판에 새겨 제작했다. 독특한 구도의 해골 그림들이 실
려 있다
저녁의 소묘 3
-유리창
유리창,
얼음의 종이를 통과해
조용한 저녁이 흘러든다
붉은 것 없이 저무는 저녁
앞집 마당
나목에 매놓은 빨랫줄에서
감색 학생코트가 이따금 펄럭인다
(이런 저녁
내 심장은 서랍 속에 있고)
유리창,
침묵하는 얼음의 백지
입술을 열었다가 나는
단단한 밀봉을 배운다 (P.65 )
괜찮아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P.76 )
저녁의 소묘 5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 살아 있으므로)
그 밑둥에 손을 뻗었다 (P.137 )
-한 강 詩集,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권. 한강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는 침묵의 그림에 육박하기 위해 피 흘리는 언어들이 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언어의 심장을 뜨겁게 응시하며 영혼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확인하려는 시인이 있다. 그는 침묵과 암흑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렸던 최초의 언어로 가닿고자 한다. 뜨겁고도 차가운 한강의 첫 시집은 오로지 인간만이 지닌 '언어-영혼'의 소생 가능성을 점검해보는 고통의 시금석인 셈이다.
저녁에 선물 받은 한강의 첫 詩集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읽는다.
여전히 불 속에서 끓고 있는 심장, 얼음 속에서 타고 있는 불, 투명하게 스스로
숨결마저..숨 죽이며 듣는 고요한 침묵과, 반짝이는 '빛'으로 나가고 있는 詩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