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꽃
꽃만 따먹으며 왔다
또옥, 또옥, 손으로 훑은 꽃들로
광주리를 채우고, 사흘도
가지못할 향기에 취해 여기까지 왔다
치명적으로 다치지 않고
허기도 없이 말의 꽃을 꺾었다
시든 나무들은 말한다
어떤 황홀함도, 어떤 비참함도
다시 불러올 수 없다고
뿌리를 드러낸 나무 앞에
며칠째 앉아 있다
헛뿌리처럼 남아 있는 몇마디가 웅성거리고
그 앞을 지나는 발바닥이 아프다
어떤 새도 저 나무에 앉지 않는다. (P.18 )
꽃바구니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
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이 꽃들의 화음을.
너무도 작은 오아시스에
너무도 많은 꽃들이 허리를 꽂은
한 바구니의 신음을.
대지를 잃어버린 꽃들은 이제 같은 시간을 살지요.
서로 뿌리가 다른 시간을.
향기롭게, 때로는 악취를 풍기며
바구니에서 떨어져내리는 꽃들이 있네요.
물에 젖은 오아시스를 거절하고
고요히 시들어가는 꽃들,
그들은 망각의 달콤함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꽃바구니에는 생기로운 꽃들이 더 많아요.
하루가 한 생애인 듯 이 꽃들 속에 숨어
나도 잠시 피어나고 싶군요.
수줍게 꽃잎을 열듯 다시 웃어보고도 싶군요.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
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P.20 )
어떤 그물
나무들이 공중 가득 펼쳐놓은 그물에
물고기 한 마리
잠시 팔딱거리다 날아간다
나무 그물은 상하는 법이 없이
물고기 날아오른다
비늘 하나 떨어뜨리지 않고
열렸다 닫히는 나무그늘 아래로
거꾸로 걸어가는 사람들
누가 물을 건너가는지
흰 징검돌 몇개 보였다 안 보였다 하고
그물 위로 흘러가는 물결 속에는
저렇게도 많구나
나무들이 잡았다 놓아준 물고기들이 (P.105 )
-나희덕 詩集, <야생사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