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물고기에 대한 추억>
Mixed media on canvas, 53 × 45.5 cm, 2010
요즘은 영화에 깊이 빠져 지내고 있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부쩍 길어졌다. 그림을 거의 그리지 못한 지도 꽤 되었다. 그저 한동안 영화를 몰아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영화를 틀어 놓는다. 한 편이 끝나면 또 다른 영화가 이어진다. 어둠이 깊고 조용한 밤이 되어서야 화면을 끈다. 하루에 세 편을 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어느새 대여섯 편쯤은 무리 없이 넘기게 되었다. 영화가 끝날 때마다 노트에 짧은 메모를 남긴다. 책상 위에는 관련 서적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온종일 영화를 보다가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쯤 영화나 감독에 대한 글을 찾아 읽는다.
조금 전에는 이레이저헤드 Eraserhead를 보다가 잠시 멈추었다.
이 영화는 David Lynch의 초기 장편 가운데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흑백 화면 위로 낯선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거친 질감의 그림자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기계음 같은 소리들. 장면들은 이어지면서도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림으로 치면 추상화에 가까운 인상이다.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무의식적인 환상을 먼저 건드리는 영화다.

사진 <이레이저 헤드>미국,1978.감독:데이비드 린치
어느 순간 남자 주인공의 머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형체의 머리가 붙어 있다. 그것이 죽은 아이인지, 지워버리고 싶은 또 하나의 자아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영화는 아무것도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기묘한 이미지들만 남긴다.
린치는 인터뷰에서 영화를 볼 때 모든 것을 해석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영상이나 음향, 이야기, 음악, 연기 가운데 한 가지 요소에만 집중해도 충분하다는 이야기였다.
이 영화를 바라보는 방식도 여러 갈래로 나뉠 수 있다. 이미지만 따라갈 수도 있고, 음향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다. 린치는 자신의 영화에서 사운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음향은 묘하게 신경을 자극한다. 이른 시간부터 그런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볼륨을 낮추자 화면이 지나치게 밋밋해졌다.
컬트 영화의 세계에서 린치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다. 젊은 시절 회화를 공부했던 감독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에는 설명되지 않는 이미지들이 오래된 감각의 입자처럼 화면을 떠돈다. 의미를 밝히기보다 화면 속 어딘가에 머물며 천천히 번져간다.
사실 이 영화는 예전에 두어 번 보다가 중간에 포기한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졸았다.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처음부터 다시 보고 있는 중이다.

사진<이레이저헤드>미국,1978.감독:데이비드 린치
영화 속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원하지 않았던 아이이다. 아이의 모습도 정상적이지 않다. 새의 머리 같기도 하고 물고기 같기도 한 기묘한 형체다. 아이의 엄마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며 짜증을 내다가 결국 아이를 남겨 둔 채 떠나 버린다.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신경을 긁는다. 남자 주인공은 혼자서 그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
영화는 끝내 더욱 끔찍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머릿속 악몽 같은 세계, 지워지고 왜곡되는 정신의 풍경 속에서 설명되지 않는 불안이 화면 전체를 뒤덮는다.
이 작품은 약 5년에 걸쳐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작 여건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긴 시간 동안 영화는 점점 더 기묘한 구조를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다. 대신 상징과 암시가 끝없이 이어진다. 마치 초현실주의자의 지하실을 천천히 걸어 다니는 기분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화면 속에는 사진이 있고, 그림이 있고, 음악이 있다. 서로 다른 예술들이 한 화면 안에서 겹쳐진다. 영화라는 매체가 여전히 쉽게 설명되지 않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이 글 맨 앞에 소개한 그림 〈물고기에 대한 추억〉은 오래전 수족관에서 본 장면을 기억의 구조로 다시 풀어낸 작업이다. 물고기의 형상은 남아 있지만, 그것을 둘러싼 선과 색면은 이미 현실의 풍경을 벗어나 시간의 흔적과 심상의 기록으로 변해 있다.
한동안 영화를 보고 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나 자신의 작업을 돌아볼 틈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오래된 그림 한 점을 다시 꺼내어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오늘은 문득 고맙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