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화석정의 6월>유채 2014

 

길 잃은 잠자리 한 마리가 창가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안으로 들어올래? 그냥 갈 거니?


학교가 방학을 하자마자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다. 붓과 팔레트, 코끝에 어리는 이 물감 냄새가 어찌나 반갑고 고마운지. 초라한 방랑자처럼 어딘가 먼 곳을 떠돌다 마침내 집에 돌아온 것처럼 마냥 마음이 흐뭇하다.


그림<장암동에서>

Oil on canvas, 53.0×45.5cm, 2014


새 붓이랑 물감, 캔버스도 잔뜩 주문했다. 올 여름 휴가는 이미 정해졌다.

바로 너, 작업실 이젤 앞으로. 그리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FM 음악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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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넛과 파이>

oil on canvas 61×50cm 2014

 

살아간다는 것은 먹어야 할 것먹지 말아야 할 것을 전제로 한다. 끼니마다 챙겨 먹는 주식이 삶을 지탱하는 음식이라면, 간식은 그 사이에 놓인 작은 쉼표 같은 것이다. 온종일 무언가에 몰두하다 보면, 혹은 아무것에도 마음이 가지 않는 날이면 괜히 달달한 것이 당긴다속이 허하고 마음이 뒤숭숭하다는, 그런 신호일지도.


이런 오후에는 향기 좋은 원두커피 한잔과 베이커리의 온기가 남아 있는 도넛이 떠오른다.


도넛은 소비자가 좋아하는 맛만큼이나 종류도 다양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부드럽고 촉촉하면서도 쫄깃한 허니딮이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노란 표면 위에 하얀 설탕가루가 살짝 얹힌 모습. 한입 베어 물면 적막하던 오후가 햇살처럼 반짝인다.


도넛 가운데 구멍이 있는 이유는 반죽을 튀길 때 기름 온도를 고르게 퍼뜨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동그라미는 안이기도 하고 밖이기도 하다. 존재를 긍정하는 형상이면서 동시에 부재를 암시하기도 한다. 두 개의 동그라미로 이루어진 도넛, 그리고 그 전체가 이루는 또 하나의 동그라미.

커피와 함께 그 동그란 세상을 조금씩 음미하다 보면, 오래된 기억 한 조각이 혀끝에 맴돈다.


추억 하나의 도넛과 추억 하나의 동그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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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 2014-04-07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넛에 대한 글을 읽으며, 고 김지원 작가를 생각했습니다. 인상적이어서 메모를 해두었는데..
"나는 가끔 동그라미라는 생각을 한다. 이리 봐도 절대 안전한 동그라미 이고, 저리 봐도 절대 안전한 동그라미 인데, 살아가며 여러 경험을 하는 동안에 이해의 영역이 넓혀지면 그 동그라미는 커진다, 아니 안 커지고는 배겨낼 수가 없다." 김지원씨가 이상문학상을 받은 뒤 수상소감에 쓴 말이라고 합니다.
저는 도넛 중에 가장 기본인 팥빵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동그라미의 의미는 생각지도 않은채 먹는 행위에 집착해 허겁지겁 쑤셔넣은 기억밖에 없습니다.
승화된 현실을 지향하면서도 먹는 행위에 있어서 저는 너무 본능적 입니다.언제 저라는 사람은, 빵을 먹으면서 동그라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을 투영해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림이 주는 달달한 도넛의 풍요롭고 충만한 느낌은 저의 오후시간을 행복하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4-08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림 <태리의 봄 편지>oil on canvas 61×50cm 2014

 

봄이 오면 묵은 빨래들을 빨아 마른 햇살에 널고 싶다.
따스한 커피 한 잔 손에 들고 창가에 앉아 아직 오지 않은 그대를 기다리리라.
춥고 소란했던 계절이 아쉬운 듯 천천히 걸어간다.
오후 한기 드리운 창틀에 수국 한 다발 올려놓고 낮은 음악소리에 귀 기울이며.
저기 멀리서 오는 그대. 성큼성큼, 어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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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금요일의 정물 ‘멕시코 밀짚모자와 과일들’>
oil on canvas, 61×50cm, 2014


오래전 멕시코에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고대 아즈텍 문화가 융성하게 꽃을 피웠던 치첸이차에는 젊은 여자들을 제물로 삼았던 깊고 어두운 우물이 있다. 소설가 히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는 초원의 끝이나 주택가 뒤편에 존재하는 잊혀진 우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우물의 실체와 마주한 듯, 잠시 신비한 환영에 사로잡혔다.


아즈텍 피라미드는 이집트 가자 지역의 피라미드들보다는 고대 동방의 지구라트 쪽에 가깝다. 


Giza의 피라미드들이 한 사람을 위한 무덤이었다면 지구라트는 수메르인들의 중심축 역할을 하던 신탑이라 할 수 있다. 아즈텍의 피라미드 역시 신을 모시던 거대한 석재 건축물이다. 지구상에 더 이상 아즈텍 문명은 존재하지 않지만 오랜 세월 묵묵히 견뎌 온 그 존재만으로도 경이롭다.


깎아지른 듯한 피라미드를 오르는 일은 꽤나 버겁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거의 정상까지 올라가 오후 햇살을 맞으며 한동안 앉아 있었다. 그때 아득하게 멀어지던 지표면의 흔적들, 신전의 계곡들 사이를 맴돌던 서늘한 바람결, 어딘선가 다가와 잠시 메아리치던 소리의 울림, 신탑을 배경으로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던 하늘. 그런 기억의 감각들이 아직도 고운 빛깔로 남아 있다.


마지막에 올린 정물화에는 당시 치첸이차 근처에서 구입한 멕시코 모자를 담았다. 모자를 부서지지 않게 서울까지 가져오느라 그때는 고생도 좀 했지만 이제는 멕시코의 광휘를 한껏 머금은 추억의 기념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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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꽃에 관한 명상1> 

oil on canvas 53×45cm 2014

 

밤늦게까지 텔레비전 화면이 들썩거린다. 소치 올림픽 스케이트 경기를 중계방송 중이다. 파리 여행 중에 민박집에서 쇼트트랙 선수 김동성 씨를 직접 만난 적이 있는 터라 더욱 관심이 쏠린다. 전지훈련 중 한국 음식이 그리워 그곳에 왔다는 그의 발은 대단한 명성을 지닌 선수답지 않게 의외로 작고 여리게 보였다. 


젊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 스케이트 부츠 사이즈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선수들 신발은 맨발에 직접 본을 떠서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신기했다. 어려서부터 선수 생활을 하느라 항상 꽉 끼는 슈즈를 신어 발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탕! 총소리와 함께 선수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아나운서 목소리가 빨라지고 관중석 열기도 뜨겁게 달아오른다. 빙판 위 선수들이 산소 탱크처럼 가쁜 숨을 뿜어낸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케이트 날이 빠르게 교차한다. 선수가 도는 건지 얼음판이 도는 건지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그림<꽃에 관한 명상2> 

oil on canvas 53×45cm 2014

*〈꽃에 관한 명상1〉을 수정한 작품이다. 이전 그림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의 화면 아래 물감의 한 층으로 남아 있다.


시합 초반 50미터 안에 제대로 된 포즈를 잡아야 자기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해설자가 말한다. 시선은 화면에 둔 채 괜히 딴생각을 더듬는다. 우리는 몇 미터 안에 포즈를 잡아야 하는 걸까. 어떤 포즈가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걸까. 인생 또한 만만치 않은 자신만의 경주다.


선수들은 빙상 위를 돌고 또 돈다. 우리도 인생이라는 빙판 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다. 선수들의 근육질 허벅지가 오늘따라 더욱 든든해 보인다. 


우리에게도 인생의 근육이 필요하다. 0.1초를 사이에 두고 순위가 뒤엉켜 있는 박빙이다. 0.1초가 그토록 긴 시간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그 자리에 서기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을까. 마지막까지 선전을 기원하며 열띤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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