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태리의 봄 편지>oil on canvas 61×50cm 2014

 

봄이 오면 묵은 빨래들을 깨끗이 빨아 마른 햇살에 널고 싶다. 따스한 커피 한잔 손에 들고 창가에 앉아 아직 오지 않은 그대를 기다리리라. 춥고 소란했던 계절이 아쉬운 듯 천천히 걸어간다. 오후 한기 드리워진 창틀에 수국 한 다발 올려놓고 낮은 음악소리에 귀 기울이며. 저기 멀리서 오는 그대. 성큼성큼, 어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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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동막골, 어느 농가 앞에서>oil on canvas 61×50cm 2014

 

바람결에 따스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봄이 오면 시간을 쪼개 써야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요즘에는 가능한 그림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날짜의 흐름이 속도를 점점 높여 가는 듯해서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종일 작업실에만 있다 보면 세상이 흐릿하게 멀어집니다. 낯선 질문들 앞에서 종종 당황스러워 할 때도 있고, 산중턱에 이르러 숨이 가빠질 때도 있습니다. 집을 찾지 못해 헤매는 아이처럼 좁은 골목길을 빙빙 돌다보면 견딜 수 없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그래도 이 세상에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고마운 일입니다.

 

 그림<금요일의 정물 '멕시코 밀짚모자와 과일들'> oil on canvas 61×50cm 2014

 

오래전 멕시코에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고대 아즈텍 문화가 융성하게 꽃을 피웠던 치첸이차에는 젊은 여자들을 제물로 삼았던 깊고 어두운 우물이 있습니다. 소설가 하루키의 작품에는 초원의 끝이나 주택가 뒤편에 존재하는 잊혀진 우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우물의 실체와 마주한 듯 잠시 신비한 환영 속에 사로잡혔습니다.

     

아즈텍 피라미드는 이집트 가자 지역의 피라미드들 보다는 고대 동방의 지구라트 쪽에 가깝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들이 한 사람을 위한 무덤이었다면 지구라트는 수메르인들의 중심축 역활을 하던 신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즈텍의 피라미드 역시 신을 모시던 거대한 석재 건축물입니다. 지구상에 더 이상 아즈텍 문명은 존재하지 않지만  오랜 세월 묵묵히 견뎌온 그 존재만으로도 경이롭습니다. 

 

깎이지를 듯한  피라미드를 오르는 일은 꽤나  버겁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거의 정상까지 올라 가서 오후 햇살을 맞으며 한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아득하게 멀어지던 지표면의 흔적들, 신전의 계곡들 사이를 맴돌던 서늘한 바람결, 어딘선가 다가와 잠시 메이리치던 소리의 울림, 신탑을 배경으로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던 하늘. 그런 기억의 감각들이 아직도 고운 빛깔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올린 정물화에는 당시 치첸이차 근처에서 구입한 멕시코 모자를 담았습니다. 모자를 부서지지 않게 서울까지 가져오느라 당시에는 고생도 좀 했지만 이제는 멕시코의 광휘를 한껏 머금은 추억의 기념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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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꽃에 관한 명상> oil on canvas 53×45cm 2014

 

밤 늦게까지 텔레비전 화면이 들썩거립니다. 소치 올림픽 스케이트 경기를 중계방송 중입니다. 파리 여행 중에 민박집에서 쇼트트랙 선수 김동성 씨를 직접 만난 적도 있는 터라 더욱 관심이 쏠립니다. 전지훈련 중에 한국 음식이 그리워 그곳에 왔다는 김동성 씨의 발은 대단한 명성을 지닌 선수답지 않게 의외로 작고 여리게 보였습니다. 젊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에 스케이트 부츠 사이즈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선수들 신발은 맨발에 직접 본을 떠서 만든다고 해서 신기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선수 생활을 하느라 항상 꽉 끼는 슈즈를 신어서 발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탕! 총소리와 함께 선수들이 달리기 시작합니다. 아나운서 목소리가 빨라지고 관중석 열기도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빙판 위의 선수들이 산소 탱크처럼 가쁜 숨을 뿜어냅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케이트 날이 빠르게 교차합니다. 선수가 도는 건지 얼음판이 도는 건지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시합 초반 50미터 안에 제대로 된 포즈를 잡아야 자기 페이스를 쫓아갈 수 있다고 해설자가 말합니다. 시선은 화면에 둔 채 괜히 딴 생각을 더듬고 있습니다. 우리는 몇 미터 안에 포즈를 잡아야 하는 걸까. 어떤 포즈가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걸까. 인생 또한 만만치 않은 자신만의 경주입니다.

 

선수들은 빙상 위를 돌고, 또 돕니다. 우리도 인생이라는 빙판 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습니다. 선수들의 근육질 허벅지가 오늘따라 더욱 든든해 보입니다. 우리에게도 인생의 근육이 필요합니다. 0.1초를 사이에 두고 순위가 뒤엉켜 있는 박빙입니다. 0.1초가 그토록 긴 시간이었다는 게 새삼 놀랍습니다. 그 자리에 서기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마지막까지 선전을 기원하며 열띤 응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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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에 관한 명상> oil on canvas 61×50cm 2014

 

‘어느 날 책 한 권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내 몸이 앉아 있던 책상과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내 몸이 나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존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내 영혼뿐 아니라 나를 나이게 만드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책상 앞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터키 출신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장편소설 ‘새로운 인생’에 나오는 첫대목입니다. 책을 펼쳐들고 처음 두 문장을 읽고는 잠시 멍했습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쉽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 같은데 그 단순함 안에 꽤나 심도 깊은 포스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도대체 그 안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책이 있습니다. 요즘은 어딜 가나 스마트 폰이 대세라지만 책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까지 모두 대체할 수는 없겠지요. 독서는 하나의 경험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읽었다 해도 다른 이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은 수십 권 수백 권의 책이 되고, 수만 갈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글자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듯 읽다 보면 심연 깊은 곳에서 뭔가 따스하게 번져옵니다. 나만의 공감, 위로와 행복 같은 것들이 온기를 품은 작은 알갱이처럼 회오리칩니다. 

 

이제 책은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인테리어 장식물처럼 옛 유물의 화석으로 고착되는 동안 책들은 꺼칠하니 누렇게 들뜬 모습입니다. 책 페이지마다 가득한 언어 부호들도 시름이 깊어진 표정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립니다. 그래도 어딘가에 '그 책'이 존재합니다. 내 가슴을 단숨에 사로잡고 영혼 밑바닥까지 흔들어 놓을 '그 책'이 나를 기다립니다. 생의 신비와 고독의 비밀스러움을 알려주기 위해서 함께 떠나자고 내가 다가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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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네팔의 서쪽 마을에서> oil on canvas 61×50cm 2013

 

네팔에 여행을 몇 번 간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4번씩이나 다녀왔으니 나름 인연이 깊은 장소입니다. 덕분에 그 나라에 대한 여행기도 쓰고, 소설 속에도 몇 번이나 우려먹고, 그림 또한 각각의 주제로 다뤘으니 내게는 무궁무진한 예술적 자양분, 상상력의 보고라고 할 만합니다.

 

‘네팔’하면 무엇보다도 만년설로 뒤덮인 히말라야의 신비로운 풍광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히마’는 ‘신’, ‘말라야’는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히말라야는 ‘신들의 거처’라는 의미입니다. 네팔의 지형은 길쭉하게 반죽해 놓은 에그 롤 같은 형상입니다. 여행객들이 주로 찾는 북쪽 산악지대는 구름 저편에 우뚝 솟은 설산들이 장관을 이룹니다. 밤이나 낮이나 하얀 야광 빛으로 반짝이는 설산 어딘가에 신화 속 인물인 설인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네팔인들 중에 실제로 목격한 사람도 있다는 소문입니다.

 

남쪽에는 코끼리나 라이코스가 사는 정글과 드넓은 초원, 끝도 없이 광활한 유채 밭이 있습니다. 네팔의 서쪽 끝에 있는 그 동네 이름은 이제 기억 속에 지워졌습니다. 다만 그곳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했던 저녁 한때가 그리운 풍경처럼 떠오를 뿐입니다. 가난하지만 더없이 순박하고 행복해 보였던 그들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여행객들의 발길도 거의 닿지 않는 오지에서 저는 꽤나 환대를 받았습니다. 제 손을 흔들며 신기해하던 어린 꼬마들, 수줍은 미소 하나로 모든 대화를 대신하던 동네 아낙네들, 마을 어귀까지 오토바이를 태워준 젊은 목사님...가도 가도 끝이 없던 초원의 푸른 빛, 연녹색 물빛을 가로지르며 유영하듯 날아오르던 새 떼들...그런 아름답고도 소중한 추억들이 이 한 장의 그림에 담겨 있습니다.

 

그림<설악산 가는 길>oil on canvas 41×32cm 1997-2014

 

두 번째 그림 역시 오래전 추억 한 스푼을 담고 있습니다. 햇살 뜨거운 어느 날 차를 몰고 설악산으로 여행을 갔는데 그때 그렸던 스케치들 중 하나가 이 작품의 밑그림이 되었습니다. 비록 소품이지만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때 다녀온 여름 여행이 97년도의 일이니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옛 추억의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림은 순식간에 끝나기도 하고 어떤 그림은 바위틈의 이끼처럼 오래오래 세월을 먹으면서 자라나기도 합니다. 그런 흔적들이 모여서 결국 인생이라는 도화지를 색칠해 가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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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 2014-03-0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림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리따운 여인처럼 곱고, 아련하기도 합니다
오래전 작가님의 여행책을 읽었는데... 제목을 찾아보니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이었네요.
그 책 여러번 읽었던것 같아요. 일반여행서라기엔 너무 특별한 책, 작가님의 솔직한 내면과 숨길수 없는 많은 재능 그리고 눈을 즐겁게했던 스케치들.. 참 멋있는 분이라 생각했었습니다.
98년 발간된 책을 읽었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우연히 이 사이트를 알고 님의 그림과 단상을 접한 지 몇달이 됩니다. 가끔 들어와 그림을, 글을 읽으며 즐거움과 편안함을 얻습니다.
작가님과 비슷한 연배인 저는 대구에 살고있습니다. 대구쪽에 아는 지인이 있으신가요?
혹시 대구에 오실 때 연락주시면 도움이 될 무언가를 하고싶습니다.
작가님이 제게 많은 즐거움과 행복주시니 저도 작가님의 잠깐만이라도 선물이 되고싶네요.
감사합니다.

김미진 2014-03-07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한동안 마음이 어수선했는데 큰 힘을 주시네요. 멋진 봄날 맞이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