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포치가 있는 집, 리치몬드 타운(1)>
watercolor on paper, 50.5×37cm, 2012

 

스테이튼 아일랜드는 뉴욕 맨해튼 남쪽에서 페리를 타고 갈 수 있는 자그마한 섬이다. 뉴욕의 다섯 번째 구지만, 옛날식 가옥과 거리 풍광은 80년대 초반 미국의 전원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느긋하면서도 인간적인 기운을 풍기는 사람들의 표정 또한 맨해튼의 팍팍함과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띤다. 


페리 선착장에서 버스로 45분쯤 걸리는 리치몬드 타운은, 예전에 퇴역 군인들이 모여 살며 형성된 동네라고 한다. 지금도 개발을 늦춘 채 당시의 거리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섬에 도착한 직후, 터미널에서 버스를 하나 놓쳤다. 작은 읍내처럼 생긴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한참 만에 다른 버스를 타고 정오 무렵 리치몬드에 닿았다. 버스는 나 혼자만 남겨둔 채 낙엽들이 또르르 굴러다니는 2차선 도로를 따라 쏜살같이 사라졌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약간 차멀미를 했던 것 같다. 주위에는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딱히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풍경이나 지표도 보이지 않았다. 찬바람만 휘감기는 11월 오후의 풍경이 꽤 을씨년스러웠다.


괜히 볼 것도 별로 없는데 여기까지 온 건 아닌지,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는 언제쯤 다시 오는 건지, 낯선 장소에서 길치 특유의 경계심이 점점 마음을 위축시켰다. 아무도 없는 휑한 길바닥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길 건너 도로변 저쪽에 있던 그 낡은 집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집 창가에 켜진 불빛 하나에도 깊은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집이라는 존재는 마음을 끌어당기고 귀속시키는 특별한 힘을 지닌 듯하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만의 ‘드림 하우스’를 꿈꾸기도 한다. 생활의 편리함뿐 아니라 개인의 개성과 성향까지 반영된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벅찬 일이다. 그러나 모든 집이 집주인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꿈에 그리던 집이라 해도, 그 울타리 안에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세상의 집들은 저마다 얼굴을 가지고 있다.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목소리이고 태도이며 몸짓이다. 그래서 집은 곧 그 사람의 몸과도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열심히 일한 대가로 그 집을 얻었다고 믿고, 그것을 소유물이자 분신으로 여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저마다의 인연이 있듯 집 또한 스스로의 주인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사를 위해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 보면, 첫눈에 ‘내가 살 곳이다’ 싶은 집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느낌이 신기해 스스로의 안목을 믿게 되고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의 착각일 수 있다. 사람이 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집이 사람을 선택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리치몬드 타운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정거장 근처에서 발견한, 포치가 달린 그 오두막집은 오래된 서부영화 속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미국식 시골집을 떠올리게 했다. 시대의 유행에서 한참 벗어난 구식의 외형이지만, 그 안에는 세월의 완고함과 집주인의 단단한 고집 같은 것이 함께 느껴졌다.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한 계절이었다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마당에서는 아이들이 뛰놀고, 집 앞 포치에는 노부부가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며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겨울이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 집 근처 어디에서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 풍경 속에서 집만이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문을 굳게 닫은 채 겨울잠에 들어간 듯한 적막한 모습으로.


집 앞의 2차선 도로는 비교적 한가하지만, 차량들은 끊이지 않고 지나간다. 밤낮 없이 들려오는 찻소리를 견디는 일은 무척 성가시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누가 이렇게 시끄러운 도로 옆에 집을 세운 것일까. 다른 선택지는 없었던 걸까. 그러나 집은 그런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이 세상 모든 집은 저마다의 세월과 사연을 품고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아스팔트 길이 놓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길 옆의 오두막집은 오늘도 묵묵한 표정으로 꿈쩍도 하지 않다.


시간이 흐른다. 집 울타리 사이로, 창문 틈으로, 지붕 위로 시간이 흘러간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뒤에도 그 오두막집은 침묵 속에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아직 할 말을 남겨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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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벚꽃>
oil on canvas, 55×46cm, 2012

 

온종일 눈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다. 밖에서 일하는 분들은 얼마나 춥고 힘들었을까. 어느새 겨울이다. 지난여름 양평으로 야외 스케치를 나갔던 일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두 계절이 흘러갔다. 그리고 12월.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한 해가 너무 짧은 것 같고, 어쩌면 우리 인생은 그보다 더 짧은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마음이 착잡해진다.

 

뉴욕을 다녀온 뒤, 죽어 있던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자극이 워낙 강해서 한동안 혼미한 상태로 미로 속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림 몇 장을 망치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정물화에 매달렸다. 문 밖에 내놓았던 탁자를 끌어다 놓고, 전에 한 번 다뤘던 벚꽃 화병을 올려놓았다. 특별한 배경이나 장식 없이 화병 하나에만 집중했다.

 

오늘 올린 ‘벚꽃’은 완성이라 부르기에는 아직 미완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완성’이 무엇인지 묻게 되어, 그 지점에서 작업을 멈췄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상황에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간하지 못할 때가 많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은 소설도 초고를 쓴 뒤 석 달쯤 서랍에 넣어두라고 조언한다. 그림도 다르지 않다. 너무 오래 방치하면 곰팡이가 슬겠지만, 열기를 식히는 정도의 거리는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객관적인 시선이 생긴다.

 

뉴욕에서는 블로그 덕분에 심심할 틈이 없었다. 자연사 박물관에 갔을 때, 그 안의 작은 도서관에서 인터넷을 하다가 처음으로 내 글에 달린 댓글을 보았다. 무척 기뻤다. 예전 작가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홀로 작업하며 외로움과 싸워야 했던 이들에 비하면 지금은 송구할 만큼 여건이 좋아졌다. 물론 작업에 따른 고충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하겠지만, 이렇게 컴퓨터 안에 가상의 갤러리를 만들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다.

 

오늘 하루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내일은 무엇을 그릴지, 캔버스 사이즈를 더 키워야 할지 그런 궁리를 한다. 과거의 화가들은 여러 면에서 현실의 제도에 묶여 있었다. 후원자의 눈치를 봐야 했고, 주문자의 취향과 요구를 세세히 파악해야 했다.


반면 오늘의 작가들은 훨씬 넓은 자유를 누린다. 어떤 이들은 그 자유 자체를 주제로 삼기도 한다. 그런 작업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과연 ‘자유’란 무엇일까. 새로운 도전을 부추기고, 심장을 뛰게 만들며, 무언가를 밀어붙이게 하는 힘. 그러나 때로는 그 자유가 두렵고 위태롭게 느껴진다.


예전의 화가들은 선택의 폭이 좁았지만, 무엇을 그려야 할지로 괴로워할 필요는 없었다. 교회 벽화를 그릴 때는 성경을 따르면 되었고, 초상화를 의뢰받으면 인물의 이목구비와 옷감의 질감, 장신구의 반짝임에 집중하면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작가들에게는 끝없는 자유와 함께, 어디로든 떨어질 수 있는 추락의 자유까지 주어진다.


스스로 후원자이자 고객이 되어 자신에게 주문을 내리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계몽주의가 남긴 자유라는 선물은 지나치게 달콤해서 때로는 치명적이다. 기준점이나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쉽게 길을 잃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방이 안개처럼 흐릿하다. 이 공백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저 어딘가에서 내 얼굴만 노려보는 그 존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방법은 하나다. 한 번에 하나씩. 한 번에 한 주먹씩. 그러다 보면, 어느 쪽이든 먼저 쓰러질지 모른다. 그게 나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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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입장 배지> (2012)


어느새 뉴욕을 떠날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내일 오후 7시쯤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 자정을 넘긴 시각에 비행기에 오르게 되니, 계산해 보면 오늘 밤과 내일 하루를 더 머무는 셈이다. 내일 낮 12시까지 체크아웃을 해야 하니, 이렇게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시간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다.


15박 17일 동안의 뉴욕 체류는 길었다고도, 짧았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나는 일기를 쓰고, 이것저것을 담아 두기 위한 작은 크로키북을 들고 다닌다. 이번에도 어쩌다 보니 그럭저럭 한 권을 거의 채워가고 있다.


인천공항을 떠난 순간부터 이 작은 노트는 나의 유일한 말벗이자 친구였고, 때로는 동반자였다. 이런 여행일기조차 끄적거리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그 긴 시간을 거리에서 혼자 보낼 수 있었겠는가. 생각할수록 대견한 크로키북이다.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지만,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적거나 그리거나 오려 붙인 것들은 사진으로 찍은 이미지들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사진이 포착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겉모습의 구도와 윤곽만 비슷할 뿐, 색채나 분위기는 전혀 다를 때가 많고 중요한 디테일도 사라지기 쉽다.

요즘은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을 사용하기 때문에 어디서든 사진을 찍는 횟수는 늘어났지만, 그만큼 희소가치도 줄어들었다. 예전에 필름으로 찍을 때는 사진을 현상해 오래 들여다보기도 하고, 잘 나온 사진을 골라 벽에 걸어 두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파일이나 폴더 속에 담아 두고 마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여행일기란 들고 다니기도 버거운 구식 카메라로 흑백 필름을 찍어, 기억을 현상하고 인화해 오래 간직하는 일과 비슷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도 미술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다. 친구나 아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사실 집중하기 어려운 곳이 바로 미술관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였고, 정말로 줄기차게 미술관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짐가방을 꾸리다 보니 그동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갈 때마다 받았던 입장 배지가 한쪽에 쌓여 있었다. 옷깃에 달고 다니는 얇은 금속 배지들이다. 세어 보니 모두 아홉 개였다. 그러니까 아홉 번이나 메트에 다녀왔다는 뜻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다른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보러 다니는 동선이 길어져 메트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긴 했지만, 나름 뿌듯한 하루하루였다.


메트에는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부터 현대의 미니멀 아트와 개념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 에드워드 호퍼, 보나르, 마티스, 모네, 르누아르, 마네, 척 클로즈, 클레, 피카소, 베르메르, 드가, 고흐, 로트렉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볼 수 있어 더욱 기뻤다.


그림을 보다가 다른 관람객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잠깐씩 작품을 모사하기도 했다. 눈으로 보는 것과 직접 손으로 그려보는 경험은 전혀 다르다. 내가 언제 또 뉴욕에 와서 이렇게 혼자 느긋한 시간을 보내며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을 따라 그려 보겠는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보든 말든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림 앞에서 펜을 쓱쓱 움직였다.

  

펜 드로잉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 자화상 모사>

크로키북 중, 2012

 

어제는 스태튼아일랜드에 다녀왔다. 일반 가정집처럼 생긴 작은 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마주친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은 조금 뜻밖이었다. 고야는 아마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다큐멘터리적 시선을 그림으로 남긴 화가가 아닐까 싶다. 아래 스케치는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였는데,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는 장면이라 나중에 자료가 필요할지도 몰라 어설프게나마 비슷하게 그려 보았다. 

 

드로잉 <여행 일기 중 고야의 판화와 스태튼 출신 화가 콜맨 루킨의 판화 모사>

크로키북 중에서, 2012


중앙에 있는 악마처럼 생긴 폭군의 하반신 묘사가 그다지 정확하지 않아 조금 난감했다. 이렇게 작가들의 그림을 따라 그리다 보면 작업 과정에서 생긴 실수나 고민, 갈등과 다시 시도한 흔적 등을 그대로 집어낼 수 있다. 물론 그림의 외형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때 관람객은 나 혼자뿐이었다. 경비원은 백인 중년 여성이었는데,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때때로 친절한 말벗이 되어 주었다. 스태튼 출신 화가 콜먼 루킨의 판화와 모노톤 추상이 강조된 유화 작품들도 무척 신선했다.


스태튼아일랜드는 뉴욕 맨해튼과 분위기가 전혀 다른 곳이었다. 이탈리아계 주민들이 많이 정착해서일까. 도로와 건물에서 어딘가 시칠리아 섬 같은 인상이 풍겼다. 여러 면에서 아직 소박한 구석이 많이 남은 섬이었다. 오가는 선상에서 자유의 여신상도 덤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 박물관만 둘러본 것은 아니다. 시청 건물 안의 프레스코화도 감상하고, 히스토릭 리치먼드 타운에서는 오래된 저택들의 사진도 많이 찍었다.


날씨도 춥고 허리케인 센디가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그곳에서도 여행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래도 나름 뜻깊은 시간이었다. 마치 1980년대 초반의 미국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때 나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진짜 미국의 모습을 그 섬에서 다시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오늘 오전에는 메트에 가기 전에 77번가의 아쿠아벨라 화랑에 잠깐 들렀다. 거기서 웨인 티보의 작품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 넣으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간단한 스케치로 그림을 따라 그려 보기도 했다.


드로잉 <웨인 띠보 ‘Boston Cremes’ 모사>

크로키북 중, 2012

 

캘리포니아 화가 띠보의 ‘파이 그림’은 인간의 식욕을 자극하는 동시에, 반복해서 진열된 음식의 이미지를 통해 그것을 하나의 기호로 환원시킨다. 그는 현재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작업을 하고 있다. 팝 아트 계열의 그림들, 여자 구두나 사탕, 아이스크림 같은 먹거리, 도시 풍경 등을 주로 그려 왔는데, 아흔이 넘어 추상 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또 다른 흥미로운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그래도 나는 그의 1960~70년대 작품이 더 끌린다. 조금 더 진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며칠 전 서점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띠보의 여든 번째 생일을 휘트니 미술관에서 직접 축하해 드렸다고 한다. 노구의 화가는 여전히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분이라며 칭송이 자자했다.


오늘은 또 다른 이야기를 귀동냥했다. 전시를 보러 온 어느 강사가 띠보의 요즘 근황을 들려주었다. 젊고 활동적인 부인과 함께 살고 있고, 다섯 살쯤 된 쌍둥이 아이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 뜻밖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멋진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띠보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수영복 차림이나 가운 차림의 여자가 혹시 지금의 부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


뉴욕 사람들은 띠보의 작품을 아주 좋아한다. 작품 전시회 역시 연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미술관 같은 데서는 더 이상 현대 작가들의 대규모 전시를 열기 어렵다고 한다. 소장자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데다, 이동은 물론 보험 문제 등도 까다롭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이렇게 화랑에서만 전시를 열 수 있다고 하는데, 덕분에 나는 시간 날 때마다 들러서 실컷 그림을 구경하고 이렇게 작품 모사도 할 수 있었다. 

 

크로키북 중에서 <웨인 띠보 ‘Hot Dog Stand’, ‘Pastel Scatter’ 모사>

숙소의 작업대 모습 일부, 2012

 

짐을 정리하다 보니 크로키북 속에 그동안 그려 놓은 모사 스케치들이 제법 쌓여 있었다.
오늘은 계속 펜 스케치만 하다가 색을 한번 얹어 보고 싶어 수채 물감을 꺼냈다. 하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펜으로만 그렸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위에 물감을 얹으니 밑그림이 뭉개져 버렸다. 갤러리에서 다리가 뻣뻣해질 때까지 공을 들여 그린 그림이라 더욱 아쉬웠다.

막상 떠날 날이 가까워지니 뉴욕에 머무는 동안 센트럴파크에 나가 하루쯤 사생 스케치를 하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 밤이 깊었다. 잠깐 나가 숙소 근처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와야겠다. 오탈자나 문장 정리는 시간이 날 때 다시 살펴볼 생각이다. 그런 것까지 꼼꼼히 챙기다 보면 오늘 밤 안에 이 글을 끝내지 못할 것 같다. 서울에 돌아가 이 기록을 올리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이곳에서 글을 마무리한다. 뉴욕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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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모네, 유채, Garden at Sainte-Adresse, 유채, 1867>      

 

오늘도 모네의 정원에는 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미술관은 애송이 화가에게 ‘오픈 북’ 같은 장소다. 선대의 화가는 무덤 속에서도 말을 하고 눈짓을 보내며 우리를 경청하게 만든다. 그것은 언어가 없는 언어, 전언 이전의 전언, 그리고 깨달음이다.

 

늙은 경비원은 오래된 석고상처럼 움직일 줄을 모른다. 관람객들은 전시실 통로를 따라 공기처럼 부유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서로의 간격을 좁히며 지나간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저기 전시실에서 이곳 전시실로. 그리고


바라본다. 나 여기 앉아서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팔걸이의자의 남자는 파라솔을 든 여자와 신사복의 남자를 바라보고, 허공에 걸린 두 개의 깃발은 파리 인상파의 빛과 색채를 바라보고, 출렁대는 바다는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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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2012-11-19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지내다 오길~

김미진 2012-11-20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려의 말씀 고맙습니다.
 

사진 <뉴욕의 쓰레기들, 어제 오전 모습> (2012)

 

아침에 뉴욕 거리를 걷다 보면 절로 고개를 젓게 된다. 많아도 너무 많다. 바로 쓰레기들이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쏟아낸 흔적들. 어제도 이렇게 버렸는데, 오늘은 더 큰 쓰레기 봉지가 거리 곳곳에 쌓여 있다. 최대한 많이 벌고 많이 쓰자! 이런 모토로 살는 현대인들이라 해도, 이건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미국인들이 마구 소비하고 내다 버린 쓰레기들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이 가라앉지는 않겠지만, 팽창을 멈추지 않는 거대한 자본주의가 미국을 통째로 깔고 앉아 숨통을 조이는 듯하다.

 

사진 <뉴욕의 쓰레기들, 오늘 오전 모습> (2012)

 

아침마다 거리의 그늘진 모습을 연출하는 쓰레기 더미들은 뉴욕 도시의 작은 단면에 불과하다. 쓰레기의 부정적 면만 부각하는 것도 낯선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쓰레기는 한 사회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런 모습, 삶의 흔적들이 모여 결국 시대의 화석대를 이루고 역사의 타임캡슐이 되기도 한다. ‘History comes to life’, 이 도시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일상이 역사가 되는 순간들을 수시로 목격할 수 있다.


어제는 소호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한 소규모 갤러리에서 샤갈 그림을 직접 판매하는 걸 보고 적잖이 놀랐다. 유화로 그린 작품의 크기는 50호쯤 되어 보였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걸려 있었다. 마치 화랑의 주인공처럼 정면 벽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작년 겨울 서울 시립미술관 샤갈 전에서 전시된 그림과 흡사한 면모를 지닌 작품이었다. 회색빛이 감도는 거리 풍경, 마을 사람들, 세로로 긴 화면 구성…. 그때 그 그림의 주인공은 십자가를 멘 예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호의 작은 갤러리에서 만난 샤갈 그림은 시립미술관에 걸려 있던 그림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작품성과 예술적 성취도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저거 진짜 샤갈이죠?"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서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백인 여자에게 물었다.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만,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작은 화랑에서 샤갈의 진품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네, 그럼요. 샤갈 맞아요.” 여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진짜로 파는 거예요? 샤갈 그림을?”


“맞아요. 정말로 파는 거예요.”


여자의 대답에 내 눈은 더욱 동그래졌다.


“혹시 가격은 얼마나 돼요?”


여자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파이브 포인트 밀리언이에요.”


‘밀리언’이란 단어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가격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거래되는 액수가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갤러리 밖으로 나온 뒤에야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포인트는 뭐지?’


‘파이브 포인트 밀리언’이라는 말에서 중간의 ‘포인트’가 이해되지 않았다. 마침 지나가던 백인 여자에게 물어보았다. ‘파이브 포인트 파이브’를 줄여 그렇게 말한 것 같다고 그녀가 설명했다.

즉, 그 샤갈 그림이 5.5밀리언 달러에 거래된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5억? 50억? 500억? 숫자 감각에 둔한 내 머리로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 당시 환율로 치면 대략 60억 원 정도 되는 금액이다.)


소호에 있는 다른 화랑에 들어갔더니 남자 큐레이터가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전시 작품에 관해 이리저리 설명해 주었다. 필요하면 작품 가격이 적힌 리스트도 보여주겠다고 했다. 아마도 나를 미술품 컬렉터로 여긴 모양이었다.


젊어서는 이런 데 오면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이제는 고가의 그림 한 점쯤은 구매할 경제적 여력이 있는 연배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만큼 내가 늙어 보인다는 뜻일까. 어쩌면 경제력이 높아진 동양인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이 예전보다 훨씬 우호적으로 바뀐 탓일지도 모른다. 가끔 이곳 화랑을 찾아와 직접 작품을 구매해 가는 한국인이나 일본인 여성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말로도 들렸다.


사진 <뉴욕의 어느 화랑에서, 작품 목록 안의 로스코와 수틴을 만나다> (2012)


어제에 이어 오늘도 미술관 순례에 나섰다. 메디슨 에비뉴 76번가를 지날 무렵, 쇼윈도에 근사한 미로 그림을 걸어 놓은 갤러리를 발견하고는 무조건 안으로 들어갔다. 뉴욕에서는 길거리 화랑에 들어가려면 대부분 밖에 달린 초인종을 눌러야 한다. 그러면 안에서 누군가 스위치를 누르는 찌잉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딸깍 열린다. 이내 문이 다시 잠겨 버리는 시스템이라 타이밍을 잘 맞추어 손잡이를 잡아당기거나 문을 안으로 밀어야 한다.


화랑 안에 들어가면 저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며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라고 말한다. 괜히 쭈뼛거릴 필요는 없다. 물론 예의 차원에서 옷은 조금 깨끗하게 입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 중에 옷차림에까지 큰 신경을 쓸 여유는 없다. 청바지에 패딩 점퍼, 운동화, 어깨에 둘러멘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 차림의 나에게까지 적극적으로 말을 건네는 걸 보면 아무래도 요즘 뉴욕 화랑가의 경기가 썩 좋지 않은 모양이다. 어쨌거나 어제도 소호에서 몇 번 비슷한 대접을 받은 터라 이제는 제법 익숙하다. 내 표정 또한 한결 느긋해졌다.

 

76번가 그 고급스러운 화랑에서는 Pablo Picasso 그림을 다섯 점이나 소장하고 있었다.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레제 Fernand Léger, 마그리트 René Magritte, 후안 미로 Joan Miró, 웨인 띠버드 Wayne Thiebaud 등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작가들의 작품이 벽에 주르륵 걸려 있었다.


이층에도 작품이 있다고 해서 올라갔더니, 2층 데스크에 앉아 있던 여자 직원이 전시 작품들의 가격 정보가 들어 있는 카탈로그를 건네주었다.


나는 한쪽 소파에 앉아 그것을 들여다보며 필요한 내용들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미술책에 나오는 유명 작가들의 리얼한 진면목(?)을 그대로 지나칠 수야 없었다. 그런데 베껴 써야 할 내용이 꽤 많았다. 이걸 무슨 수로 한 번에 옮겨 적나 난감해하던 차에, 마침 데스크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절묘했다. 아마도 나는 전생에 스파이거나 첩보 공작원이었을지 모른다. 보통 때는 버걱거리던 머리가 그 순간 쾌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했으니까.


지체 없이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조금 손이 떨렸다. 약간의 흥분, 결코 나쁘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나를 밀어붙였다. 그다지 두꺼운 카탈로그는 아니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작품 정보를 한꺼번에 카피하는 방법은 그 수밖에 없었다.


카탈로그는 활짝 펼칠 수 없게 제본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 손으로는 이쪽 페이지를 누르고, 오른쪽 발끝으로는 다른 쪽 페이지를 눌러 고정한 다음 한 장씩 넘겨가며 디카로 펑펑 찍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건 아니었다. 재빨리 셔터를 누르는 동안 1층에서 직원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찻잔 부딪치는 소리, 복사기가 돌아가는 기계음 같은 것도 들린 듯했다. 여직원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곧 위로 올라올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미 층계참까지 올라온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아직 수집해야 할 정보들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한순간 스쳤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들은 늘 가장 평범한 얼굴로 어딘가에 숨어 있지 않은가. 단 하나의 키워드 같은 것, 생의 어떤 암시 같은 것, 이대로 지나치면 끝내 섭섭해질 것이 분명한 바로 그것.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직감이었고, 나는 그걸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한 사람의 목격자이자 수행자였고, 동시에 사악한 염탐꾼이기도 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부여한 역할이었지만, 어쩐지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임무처럼 느껴졌다.

나는 더욱 속도를 올리며 셔터를 눌러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카메라까지 통째로 빼앗기지는 않겠지. 오로지 믿는 구석이라고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찰칵, 한 장 넘기고 찰칵, 또 한 장 넘기고, 또 넘기고, 또 넘기고…


마침내 임무 완성!


사진 <파블로 피카소 작품 목록이 들어 있는 또 다른 페이지> (2012)

 

피카소 작품에는 확실히 ‘0’이 많이 붙어 있었다. 휴, 이게 몇 개야? 하나, 둘, 셋, 넷… 그런데 내가 뭐 한 거지! 겨우 이런 걸 찍으려고 그랬단 말이야? 그렇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누가 감히 뉴욕 화랑의 심장부에 들어가 이런 희귀한 사진을 찍어 올 수 있었겠는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뉴욕 거리의 쓰레기에 관한 이야기다.

아침마다 길모퉁이에 쌓이는 쓰레기 더미는 이 도시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폐기물이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생산해내는 이미지의 잉여, 즉 과잉의 또 다른 얼굴처럼 보인다. 뉴욕 거리의 쓰레기 더미와 현대 미술 작품 사이에는 어쩌면 어떤 은밀한 연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메디슨 에비뉴의 갤러리를 나온 뒤, 나는 곧장 휘트니 미술관으로 향했다.


현대 미술의 흐름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그곳에서는 마침 웨이트 가이튼 Wade Guyton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아티스트는 보통 무언가를 표현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떤 작가들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지우거나 부정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웨이드 가이튼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하는 작가처럼 보였다.


웨이드 가이튼은 미국 인디애나에서 태어나 테네시에서 성장했고, 뉴욕 헌터 대학에서 로버트 모리스 밑에서 수학했다. 지금 그의 나이는 마흔. 그를 과연 ‘청년 작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미술사의 시간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여든셋까지 작업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역시 노년에 이르기까지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길어진 오늘날이라면 가이튼 역시 앞으로 반세기 가까운 시간을 더 작업실에서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마흔의 나이에 휘트니 미술관에 입성한 작가를 보며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부러움이라기보다는 연민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제 그는 앞으로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작업실에서 고독한 내면의 순간들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작품과의 끝없는 씨름. 끝을 알 수 없는 긴 노동의 흔적들. 긴 수명은 때때로 축복이 아니라 또 다른 숙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림 <웨이드 가이튼 'Untitled'> 2012

 

그의 작품은 대개 ‘X’라는 단순한 부호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과거의 화가들은 손과 붓으로 세상을 묘사했다. 그러나 사진기가 등장하면서 화가들은 점차 기계와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카메라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감각과 상상력을 앞세워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인상주의의 색채 실험, 입체파의 공간 해체, 초현실주의의 상상력 등 20세기 현대 미술은 그렇게 탄생했다.


웨이드 가이튼은 그 흐름을 다시 뒤집는다. 그는 붓 대신 컴퓨터와 프린터를 사용한다. 잡지나 신문에서 가져온 이미지 위에 기계적으로 ‘X’를 찍어 캔버스에 출력한다. 때로는 프린터의 오류나 잉크 번짐까지 그대로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현대인은 컴퓨터와 프린터를 통해 하루 종일 이미지에 노출되어 있다. 광고, 뉴스, 사진, 화면 속 데이터들. 그 양은 이미 인간의 감각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넘쳐난다. 가이튼은 그 과잉 이미지를 끌어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다시 배열한다. 일종의 이미지 재활용이자 해체 작업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어딘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나 앤디 워홀의 팝아트와도 닮아 있다.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끌어와 새로운 맥락 속에 놓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이튼의 관심은 소비문화의 화려함보다는, 이미지가 과잉 생산되는 시대의 공허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의 ‘X’는 단순한 삭제 표시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현대 사회의 과잉 이미지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표시, 혹은 지워진 자리 위에 남겨진 흔적일지도 모른다. 기계적 방식으로 만들어진 화면이지만, 그 안에는 묘한 고독과 공허가 담겨 있다.

 

그림 <웨이드 가이튼 'Untitled'> 2012

 

생각해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풍요롭지만 동시에 공허한 나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문득 폴 오스터의 소설 속 인물들이 떠올랐다. 『우연의 음악』의 남자는 끝없이 차를 타고 달리고, 『달의 궁전』의 젊은이는 정처 없이 뉴욕 거리를 떠돈다.

 

그림 <잭슨 폴락>]

 

회화에서도 비슷한 정서를 발견할 수 있다. 잭슨 폴락의 화면에는 우주적 규모의 고독이 담겨 있고,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는 거대한 도시 속 인간의 왜소함과 고립이 스며 있다.


휘트니 미술관에서 마주한 웨이드 가이튼의 X 시리즈 속에서도 비슷한 감각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지워버린 뒤 남겨진 자리, 텅 빈 흔적. 그 위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표시.

나는 그 이미지 위에 조심스럽게 한 단어를 올려놓는다.


실종.


그림< 에드워드 하퍼, 유채, Office in a Small City, 1953>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정작 인간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이거 뭐야? 누가 그린 거야?” 친구가 묻는다.

“아, 그 드로잉? 피카소 거지. 사인을 보고도 모르겠어?” 내가 대답한다.

“피카소? 진짜 피카소?” 친구가 눈을 크게 뜬다.

“그럼. 가짜 피카소도 있니? 난 뭐든 가짜는 안 키워.”


토마토 주스를 홀짝이며 턱을 높이 들어 올린다.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않은가.


그러나 예술이 본업인 사람들의 일상은 엄혹하기 그지없다. 이 세상에는 눈이 먼 돈들이 넘쳐나지만, 현실의 민낯은 불공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 구조 안에서 이름 없는 예술가들 역시 사회 구성원이자 생산의 주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의 슬픔과 외로움을 기억한다.


“나도 그 정도는 그릴 수 있어. 내 능력이 그들만 못할까? 노력하면 보여줄 수 있어… 복수할 거야!”


이런 생각을 곱씹으며 오늘도 작업에 몰두하는 무명 작가들이 많다. 어쩌면 그런 마음 하나로, 배가 고파도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X’라는 기호는 또 다른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플랫폼과 자본의 언어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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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하늘 2012-11-17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60억 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