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봄의 전령1-1> oil on canvas, 25F, 2013

 

휴일이다.

우리는 찜질방에 갔다.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그 사우나는 쾌적한 환경에 피트니스 룸까지 있어 우리 부부가 휴일마다 즐겨 찾는 곳이다. 찌뿌듯한 겨울 날씨는 사람들을 찜질방으로 불러들인다. 지하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사이드 주차를 하려다가 운 좋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는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30분 후에 홀에서… 아니, 피트니스 룸에서 만나자.”

카운터 앞에서 표를 끊은 뒤 남편이 말했다. 번번이 늦게 나타나는 나를 기다리느니 먼저 가서 운동을 시작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번에는 안 늦을 테니 걱정 마. 조금 있다 봐.”

나는 남편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고 손까지 흔들었다. 남자들은 사우나에 갈 때 거의 빈손이다. 내 남편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말하면 그가 들고 온 커다란 가방 안에는 오로지 나를 위한 것들만 들어 있다. 샴푸, 때 타월, 트리트먼트, 목욕 소금, 화장품, 그리고 이런저런 잡동사니들.

목욕탕 안에는 시간을 잡아먹는 하마가 한 마리 살고 있다. 그 하마에게 꼬리를 밟히지 않으려면 시간 분배가 중요하다. 먼저 실내복과 수건을 챙긴다. 옷장으로 가서 재빨리 옷을 벗어 구겨지지 않게 접어 넣고, 앞으로 사용할 순서대로 물건을 정리한다. 체중계에 올라 몸무게를 재고, 간단히 샤워를 한 뒤 허브 탕에 몸을 담근다. 머리를 감고, 때비누로 몸을 문지르고, 다시 헹군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문 앞에서 발을 한 번 더 씻는다. 탈의실로 나와 실내복을 입고 머리를 한 번 더 털어 말린 뒤 얼굴에 로션을 바른다.

이 모든 과정을 나름의 초스피드로 해치웠지만, 그 사이 시간은 이미 30분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찜질복을 입고 피트니스 룸으로 향했다. 남편은 벌써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빼고 있었다. 당연하다. 물속에서 대충 첨벙거리다만 나왔을 테니까.

“왔어? 내가 매점에서 식혜 사왔지.”

남편이 거울 속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창턱 위에 식혜 한 통이 놓여 있었다. 동그란 플라스틱 통을 집어든 내 표정이 단박에 흐려졌다.

“뭐야? 얼음이 별로 없잖아. 주는 대로 그냥 받아왔지?”

“아냐. 얼음 좀 많이 달라고 했어.”

“이건 냉장고에 있던 거잖아. 통에서 떠달라고 하지.”

“부탁했지. 그런데 똑같다면서 그냥 주잖아.”

“그래도 그냥 받아오면 어떡해? 나 식혜 얼음 좋아하는 거 알잖아.”

남편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단 음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찜질방에서 먹는 식혜만큼은 양보하기 어렵다. 덥고 갈증 날 때 살짝 언 식혜를 조금씩 떠서 아삭아삭 씹어 먹는 그 맛. 나에게 얼음이 다 녹아버린 식혜는 그저 밍밍한 설탕물에 지나지 않는다. 찜질방 식혜에 대해 내가 까다롭게 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매점에서 일하는 아줌마다. 그녀는 늘 자기 방식대로 식혜를 한꺼번에 퍼서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손님이 주문하면 차례로 꺼내 준다. 그리고 늘 같은 말을 한다.

“똑같은 거예요. 통에서 막 푼 거나 냉장고에 있던 거나.”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식혜 통에서 막 퍼준 것은 국물 전체가 슬러시처럼 살짝 언 상태라 한참을 떠먹어도 그 느낌이 유지된다. 반면 냉장고에 있던 식혜는 윗부분에만 얼음이 떠 있을 뿐 금세 녹아버린다.

“손님이 주문한 대로 주면 어디 덧나나. 잠깐 기다려봐. 내가 가서 더 받아 올게.”

나는 식혜 통을 들고 매점으로 갔다. 남편이 두어 모금 마신 뒤였지만 아직까지 소비자 권익을 주장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면서.

 

그림 <봄의 전령1-2>oil on canvas 73×60cm 2019

 

남녀 공용 홀과 피트니스 룸 사이에 있는 매점에는 두 명의 여자가 일하고 있다. 한쪽은 매점의 터줏대감 같은 나이 든 여자, 다른 한쪽은 주말에만 가끔 나오는 젊은 아가씨다. 마침 손님도 없이 한가했다.

문제의 인물은 당연히 나이 든 점원이다. 괜히 맞붙어 좋을 일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아가씨 점원 쪽으로 다가갔다.

“미안하지만 식혜 얼음 좀 더 주실 수 있나요?”

나는 미소까지 띠며 공손하게 말했다.

“리필은 안 되는데요.”

“리필이 아니라… 식혜 얼음이 벌써 다 녹았잖아요. 통에서 조금만 더 떠 주세요.”

“그건 안 되는데…”

아가씨 점원이 스낵 진열대 앞에서 물건을 정리하던 외통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건 냉장고에 있던 거잖아요.”

“그래도 더 드릴 수가 없어요.”

내 말을 들은 외통수가 이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귀신처럼 눈치가 빠른 여자다.

“왜 그러세요? 뭐가 필요해요?”

그녀가 다가오며 물었다. 표정에는 어딘가 초등학교 교감선생 같은 분위기가 있다. 깔끔한 화장에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이 없다. 그에 비해 나는 후줄근한 실내복 차림에 욕탕에서 벌겋게 익어버린 얼굴이다. 괜히 기가 죽는다.

“아니… 그게 아니라 식혜 얼음 좀… 냉장고에 있던 걸 주셨잖아요. 통에서 떠 주시면…”

말이 어쩐지 매끄럽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뜻은 통했다.

“똑같은 거예요. 주말에는 손님들이 밀려서 미리 떠 놓는 거예요.”

카운터 앞에 서 있는 손님은 나 하나뿐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식혜 통이 스무 개쯤 들어 있었다.

“주문할 때 손님이 통에서 떠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서 주면 안 되나요? 저는 얼음 많은 걸 좋아해서요.”

“글쎄, 새로 푸는 거나 냉장고에 있는 거나 똑같다니까요.”

외통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늘 듣던 대답이다. 맥이 빠진다.

“벌써 다 녹았거든요. 저는 얼음 때문에 식혜를 먹는 건데요.”

내 목소리가 점점 더 궁색하게 들린다.

“그럼 그냥 얼음만 좀 드려요?”

외통수가 얼음 나오는 기계를 가리키며 빈정대듯 물었다.

“제가 말하는 얼음은 그게 아니잖아요.”

“리필은 안 돼요. 다시 시키세요.”

“다시 시키라고요?”

“네, 다시 시키세요.”

머릿속에서 뭔가가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가상의 스팀 분사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지금 내가 생떼를 쓰는 걸까. 무식한 여편네처럼 어거지를 부리는 걸까.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겨우 식혜 한 통을 둘러싼 쪼잔한 아줌마의 사소한 분노 심리학 같은 것이었다.

겨우 식혜 한 통 아닌가. 이런 일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냥 돌아서려고 했다. 앞으로 살아가며 겪게 될 일들에 비하면 식혜 한 통쯤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다른 손님들이 내 뒤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순간 외통수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이 참, 알았어요. 진작 말씀하시지. 다 똑같은 건데… 그럼 식혜 얼음만 조금 더 드리면 되는 거죠?”

초등학생을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아, 나는 사는 게 가끔 너무 힘들다!

다시 피트니스 룸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여전히 러닝머신 위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얼음 더 줬어?”

“여기.”

나는 식혜 통을 창턱에 툭 내려놓았다. 남편은 아무 잘못도 없다. 그저 나를 위해 식혜를 사왔을 뿐이다. 그래도 괜히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의 뒤통수를 흘겨보게 된다.

남편이 거울 속에서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러닝머신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스팀 분사기의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찜질방 주인을 불러 항의를 해야 하나. 그렇다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는 거지.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는 뜻 모를 소음들에 둘러싸인 채 나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잠자리 소녀>
oil on canvas, 53.0×45.53.0cm, 2013

 

온종일 작업을 하다 보면 하루는 금세 저문다.
<잠자리 소녀>에 등장하는 잠자리는 오래전 설악산에서 그려 두었던 드로잉의 일부다. 파일 한쪽에 끼어 있던 것이 거의 20년 만에 유화 작품 속으로 다시 스며들었다. 시간은 그렇게, 잊힌 것들을 엉뚱한 자리에서 불러낸다.

제목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붙여볼까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나 문장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어떤 그림은 말보다 먼저 와 있고, 말은 그 뒤를 따라오지 못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야기를 덜어낸 채, 그림만 남겨두기로 했다.

 

그림 <스카치 한 잔>

보드 종이 위에 유채, 2013

 

낮에 잠시 우체국에 다녀오는 길, 구름 낀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공기가 축축하게 가라앉아 마음까지 무겁게 눌러앉는 느낌이었다.

<스카치 한 잔>은 하드보드지에 유화로 그린 작은 소품이다. 유화는 수채화에 비해 물성이 무겁고, 오일을 동반하기 때문에 종이에 그냥 올리기에는 다소 까다로운 매체다. 젯소를 입혀 바탕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세심한 조율이 필요하다. 그에 비해 문방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하드보드지는 같은 종이 계열이면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지지체가 되어준다.

컵 받침 위에 놓인 작은 유리잔 하나. 단순한 구성이지만, 그 안에는 생각의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림은 반복할수록 수월해지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난해함 속으로 들어가는 일에 가깝다.

   

그림 <지난여름, 덕포리에서>

oil on canvas, 65.2×53.0cm, 2013

 

작년에 다녀온 덕포리의 풍경이다. 한 차례 수채화로 옮겼던 장면을, 다시 유화로 불러냈다. 붓의 움직임을 최대한 남기고 싶었다. 마무리 단계에서 화면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한 감각이 남아, 노란 물감을 짜 손가락으로 문지르듯 꽃 한 송이를 더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한 송이의 꽃을 품고 살아간다. 그것의 색이나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것이 놓인 자리, 그 자리에 얼마나 어울리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어느새 1월의 끝자락이다.
하루가 또 지나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김미진 <거울의 저편-2>

oil on canvas 53×46cm 2013

 

요즘은 셀카로 자신의 얼굴을 찍는 일이 하나의 유행이다. 팔을 뻗은 거리 안에서 사진이 잘 나오는 각도를 신경 쓰는 것은 물론, 자연스러운 포즈와 표정을 위해 자신만의 노하우를 만들기도 한다. 한 번은 인터넷에서 명화 속 자화상과 흡사한 모습으로 자신의 얼굴을 찍어 올린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화가가 손으로 직접 그린 원화와는 또 다른 위트와 참신성이 느껴지는 아이디어였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비밀과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것은 결국 '나'일 것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신비, 그 비밀스러움, 알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낯선 감각. 그래서 사람들은 수시로 어떤 매개를 통해 거기에 비친 자기 모습을 확인한다. 화장실 거울일 수도 있고, 식탁 위에서 밥을 먹기 위해 집어든 숟가락의 뒷면일 수도 있고,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의 반짝거리는 벽면일 수도 있다. 


때론 타인의 동공에 비친 내 모습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저 사람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무엇 때문에 내 얼굴을 그토록 유심히 바라보는 걸까. 어딘가에 반사된 자기 모습을 은근히 훔쳐보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어쨌든 매일 보는 얼굴이다. 눈 코 입은 제대로 붙어 있는지 매번 확인할 필요는 없다. 화장은 들뜨지는 않았는지, 머리카락을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그런 것도 궁금하겠지만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 본질과 뿌리 같은 것이 더 궁금할 때도 있다.


냇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매혹되어 그 자리에서 끝내 수선화가 된 사람이 있다. 바로 나르키소스다. 자기 모습에 매혹되어 결국 자신에게 갇혀버린 남자. 화가들 가운데에도 자기 얼굴에 집착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렘브란트와 빈센트 반 고흐가 대표적인 경우다.

 

<렘브란트 자화상> 1640년 작품

 

바로크 시대의 빛의 화가였던 렘브란트는 인간의 내면과 정서를 포착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비슷한 계열의 영화 중에도 유난히 진한 감수성을 전해오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그 감독이나 배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유한 결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그러했다. 같은 얼굴을 그려도 그의 작품은 어딘가 달랐다.


그는 수시로 자신의 얼굴을 화폭에 담았다. 오랜 생애 동안 제작한 60여점의 자화상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화가로서 성숙해 가는 모든 내적 과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그가 남긴 자화상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실험적인 단계’ ‘극적으로 분장한 단계’ 그리고 ‘솔직하고 자기 분석적인 단계’다.


위의 그림은 두 번째 단계, 화가로서 한창 성공의 가도를 달리던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두둑하게 살이 오른 얼굴과 자만심이 어린 표정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부드러운 벨벳 옷에는 족제비 털 장식이 달려 있고, 모자 역시 값비싼 털로 장식되어 세련되면서도 품위를 드러낸다. 매일 같이 작업에 몰두하는 화가라기 보다는 명망있는 귀족이나 성공한 상인처럼 자신을 치장한 모습이다.

 

<렘브란트 자화상>1661년 작품

 

그로부터 21년 후의 자화상은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마음씨 좋은 노인, 혹은 소박한 성자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화려한 모자 대신 흰 천을 두른 머리, 손에는 낡은 책이 들려 있다. 젊은 시절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던 그는 노년에 재정적 곤궁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런 환경 때문인지 그림 속 인물은 한층 순수하고 겸허해 보인다.


수수한 옷차림과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에서는 인생을 어느 정도 통과해낸 사람의 평온함마저 느껴진다. 당시 네덜란드에 설탕이 처음 유입되었다고 하는데, 단 것을 지나치게 즐긴 탓에 치아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실한 치아 상태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두 작품 모두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려졌다는 점도 흥미롭다.


<고흐의 자화상> 1886년 작품

 

얼굴은 다양한 회화 기법을 실험하기에 더없이 좋은 대상이다. 빈센트 반 고흐 역시 거울을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열악한 경제적 여건으로 모델을 구하기 어려웠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그의 자화상을 통해 화풍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어떤 전환을 거치며 점차 무르익어 갔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1886년 파리에 도착한 그는 4년 동안 40점에 가까운 자화상을 남겼다. 초기 작품은 네덜란드 거장들의 방식과 당시의 관습을 따르고 있다. 모자를 쓴 인물은 사색에 잠긴 듯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고,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얼굴은 렘브란트의 화풍을 연상시킨다. 다만 색채와 붓질은 훨씬 더 표현적이다.

 

<고흐의 자화상> 1886년 작품

 

같은 해에 그린 또 다른 자화상에는 이미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이 드러난다. 짧은 붓질과 순수 색채에 대한 열정, 빛에 대한 민감한 감각이 엿보인다. 밀레를 좋아했던 소박한 화가였던 그가, 초기의 신고전주의 화풍과 인상파를 넘어 어느새 자신만의 표현주의 세계로 성큼 들어선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의 빈센트 반 고흐> 사진

 

모순된 감정과 불안 속에 잠겨 있던 10대 시절의 그는 다소 거칠고 무뚝뚝한 인상이지만, 동시에 제법 살이 오른 얼굴에 건강한 생기를 지니고 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한동안 탄광촌에서 전도사로 지내다가, 마침내 자신이 바라던 그림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화가의 삶은 그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갉아먹는다.

 

1889년 아를의 겨울은 차고 매서웠다. 한기만이 감도는 1월 어느 날, 노란집으로 돌아온 고흐는 이젤 앞에 앉아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을 응시한다. 거울 속 세계는 현실을 닮아 있으면서도 또 다른 차원의 리얼리티로 구성되어 있다. 얇은 판유리 안의 또 다른 세계, 그 안에 있는 한 남자가 고흐를 바라본다. 그 시선 속에서 꿈과 희망, 갈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그림 <강가에서, 양평>

oil on canvas 61×50cm 2013

 

화가의 자화상은 자아 탐구에 대한 절대적인 욕구, 이 우주에 단 하나뿐인 내면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호수나 강가에 비친 수면 또한 이 세계를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이다. 가끔은 그 위에 떠오른 존재의 떨림을 향해 묻게 된다. 잘 지내고 있는 거야? 그럭저럭 괜찮은 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겨울 어느 날, 고촌>
oil on canvas, 92×73cm, 2012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서울과 경기도가 만나는 도시 외곽 지역이다. 깊은 밤이면 지나다니는 차들도 거의 없어 적막하다. 창밖 저 아래로 신호등 불빛만 깜빡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온다.


지난여름, 작업실 창밖 풍경을 수채화로 한 번 그린 적이 있다. 최근에는 눈이 많이 내려 여름과는 또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흑백의 대비가 강조된 도로 주변 풍경과, 그로 인해 더욱 또렷해진 겨울 능선이 마치 단색조의 추상화를 연상시킨다.


30호 캔버스에 그린 <어느 겨울날, 고촌>은 작업실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 풍경이다. 아직 완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손을 댈수록 오히려 분위기를 해칠 것 같아 일단 멈췄다. 누군가 이 그림을 내 눈앞에서 십 년쯤 치워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일단 여기에 올려두고 더 지켜볼 생각이다. (결국 다시 작업했다. 여기에 올린 사진은 세 번째 단계의 그림이다.) 최근에 작업한 다른 그림 세 점도 올해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함께 소개한다.

 

어느새 2012년의 마지막 주말이다. 이렇게 한 해를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워 어젯밤에는 모처럼 밖에 나가 저녁도 먹고 영화도 한 편 보았다. 줄곧 집에서 다운로드 된 영화만 보다가 극장에서 개봉작을 보니 몰입도도 높고 감동도 더 진하게 다가온다. 

 

그림 <길, 리치몬드(3)>
Watercolor on paper, 34×23.5cm, 2012

 

어제 본 영화는 레미제라블이다. 빵 하나를 훔친 죄로 거의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장발장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영화의 플롯은 ‘사랑’과 ‘구원’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다시 도둑질을 하다 붙잡힌 장발장은 신부의 은혜로 자신의 영혼이 정화되는 경험을 하고, 그 이후 평생을 사랑으로 보답하며 살아간다.

 

한편 감옥에서부터 그를 괴롭히고, 출옥 후에도 집요하게 뒤쫓던 형사 자베르는 장발장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 그 치욕스러운 구원과 감당할 수 없는 사랑 앞에서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림 <집, 리치몬드(5)>
Watercolor on paper, 34×23.5cm, 2012

 

카메라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자유를 쟁취하려는 젊은 이들의 얼굴에도 시선을 맞춘다. 근대사의 격동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가혹한 운명,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장 말하고자 한 핵심인지도 모른다.


민초들의 삶은 여전히 버겁고 가혹하다. 우리가 피 흘려 얻었다고 믿는 자유는 때로 착시를 일으켜 시야를 흐리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지금처럼 각박한 시대에 장발장이 보여준 사랑과 희생만이 해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림 <램프가 있는 정물>
oil on canvas, 92×73cm, 2012

 

밤이 깊었다. 창밖의 신호등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깜빡인다. 모두에게 따듯한 연말연시가 되기를 바란다. 내년에는 조금 더 많이 사랑하시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파란 지붕 집 - 리치몬드 타운(2)>
watercolor on paper, 50.5×37cm, 2012

 

요즘은 계속 오일 페인팅에 집중하고 있다. 유화는 중간중간 물감을 말려가며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작품을 번갈아 진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지금 다루고 있는 캔버스가 예닐곱 점쯤 된다. 오늘 올리는 그림은 유화 작업을 하는 틈틈이 그린 것이다. 캔버스들이 물감으로 젖어 있을 때면 이렇게 수채화 팔레트를 다시 펼칠 수밖에 없다.


올해도 어느새 저물어간다.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콜록콜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