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봄의 전령1-1> oil on canvas, 25F, 2013

 

휴일이다.

우리는 찜질방에 갔다.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그 사우나는 쾌적한 환경에 피트니스 룸까지 있어 우리 부부가 휴일마다 즐겨 찾는 곳이다. 찌뿌듯한 겨울 날씨는 사람들을 찜질방으로 불러들인다. 지하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사이드 주차를 하려다가 운 좋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는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30분 후에 홀에서아니, 피트니스 룸에서 만나자.”

카운터 앞에서 표를 끊은 뒤 남편이 말했다. 번번이 늦게 나타나는 나를 기다리느니 먼저 가서 운동을 시작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번에는 안 늦을 테니 걱정 마. 조금 있다 봐.”

나는 남편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고 손까지 흔들었다. 남자들은 사우나에 갈 때 거의 빈손이다. 내 남편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말하면 그가 들고 온 커다란 가방 안에는 오로지 나를 위한 것들만 들어 있다. 샴푸, 때 타월, 트리트먼트, 목욕 소금, 화장품, 그리고 이런저런 잡동사니들.

목욕탕 안에는 시간을 잡아먹는 하마가 한 마리 살고 있다. 그 하마에게 꼬리를 밟히지 않으려면 시간 분배가 중요하다. 먼저 실내복과 수건을 챙긴다. 옷장으로 가서 재빨리 옷을 벗어 구겨지지 않게 접어 넣고, 앞으로 사용할 순서대로 물건을 정리한다. 체중계에 올라 몸무게를 재고, 간단히 샤워를 한 뒤 허브 탕에 몸을 담근다. 머리를 감고, 때비누로 몸을 문지르고, 다시 헹군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문 앞에서 발을 한 번 더 씻는다. 탈의실로 나와 실내복을 입고 머리를 한 번 더 털어 말린 뒤 얼굴에 로션을 바른다.

이 모든 과정을 나름의 초스피드로 해치웠지만, 그 사이 시간은 이미 30분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찜질복을 입고 피트니스 룸으로 향했다. 남편은 벌써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빼고 있었다. 당연하다. 물속에서 대충 첨벙거리다만 나왔을 테니까.

왔어? 내가 매점에서 식혜 사왔지.”

남편이 거울 속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창턱 위에 식혜 한 통이 놓여 있었다. 동그란 플라스틱 통을 집어든 내 표정이 단박에 흐려졌다.

뭐야? 얼음이 별로 없잖아. 주는 대로 그냥 받아왔지?”

아냐. 얼음 좀 많이 달라고 했어.”

이건 냉장고에 있던 거잖아. 통에서 떠달라고 하지.”

부탁했지. 그런데 똑같다면서 그냥 주잖아.”

그래도 그냥 받아오면 어떡해? 나 식혜 얼음 좋아하는 거 알잖아.”

남편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단 음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찜질방에서 먹는 식혜만큼은 양보하기 어렵다. 덥고 갈증 날 때 살짝 언 식혜를 조금씩 떠서 아삭아삭 씹어 먹는 그 맛. 나에게 얼음이 다 녹아버린 식혜는 그저 밍밍한 설탕물에 지나지 않는다. 찜질방 식혜에 대해 내가 까다롭게 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매점에서 일하는 아줌마다. 그녀는 늘 자기 방식대로 식혜를 한꺼번에 퍼서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손님이 주문하면 차례로 꺼내 준다. 그리고 늘 같은 말을 한다.

똑같은 거예요. 통에서 막 푼 거나 냉장고에 있던 거나.”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식혜 통에서 막 퍼준 것은 국물 전체가 슬러시처럼 살짝 언 상태라 한참을 떠먹어도 그 느낌이 유지된다. 반면 냉장고에 있던 식혜는 윗부분에만 얼음이 떠 있을 뿐 금세 녹아버린다.

손님이 주문한 대로 주면 어디 덧나나. 잠깐 기다려봐. 내가 가서 더 받아 올게.”

나는 식혜 통을 들고 매점으로 갔다. 남편이 두어 모금 마신 뒤였지만 아직까지 소비자 권익을 주장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면서.

 

그림 <봄의 전령1-2>oil on canvas 73×60cm 2019

 

남녀 공용 홀과 피트니스 룸 사이에 있는 매점에는 두 명의 여자가 일하고 있다. 한쪽은 매점의 터줏대감 같은 나이 든 여자, 다른 한쪽은 주말에만 가끔 나오는 젊은 아가씨다. 마침 손님도 없이 한가했다.

문제의 인물은 당연히 나이 든 점원이다. 괜히 맞붙어 좋을 일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아가씨 점원 쪽으로 다가갔다.

미안하지만 식혜 얼음 좀 더 주실 수 있나요?”

나는 미소까지 띠며 공손하게 말했다.

리필은 안 되는데요.”

리필이 아니라식혜 얼음이 벌써 다 녹았잖아요. 통에서 조금만 더 떠 주세요.”

그건 안 되는데

아가씨 점원이 스낵 진열대 앞에서 물건을 정리하던 외통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건 냉장고에 있던 거잖아요.”

그래도 더 드릴 수가 없어요.”

내 말을 들은 외통수가 이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귀신처럼 눈치가 빠른 여자다.

왜 그러세요? 뭐가 필요해요?”

그녀가 다가오며 물었다. 표정에는 어딘가 초등학교 교감선생 같은 분위기가 있다. 깔끔한 화장에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이 없다. 그에 비해 나는 후줄근한 실내복 차림에 욕탕에서 벌겋게 익어버린 얼굴이다. 괜히 기가 죽는다.

아니그게 아니라 식혜 얼음 좀냉장고에 있던 걸 주셨잖아요. 통에서 떠 주시면

말이 어쩐지 매끄럽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뜻은 통했다.

똑같은 거예요. 주말에는 손님들이 밀려서 미리 떠 놓는 거예요.”

카운터 앞에 서 있는 손님은 나 하나뿐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식혜 통이 스무 개쯤 들어 있었다.

주문할 때 손님이 통에서 떠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서 주면 안 되나요? 저는 얼음 많은 걸 좋아해서요.”

글쎄, 새로 푸는 거나 냉장고에 있는 거나 똑같다니까요.”

외통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늘 듣던 대답이다. 맥이 빠진다.

벌써 다 녹았거든요. 저는 얼음 때문에 식혜를 먹는 건데요.”

내 목소리가 점점 더 궁색하게 들린다.

그럼 그냥 얼음만 좀 드려요?”

외통수가 얼음 나오는 기계를 가리키며 빈정대듯 물었다.

제가 말하는 얼음은 그게 아니잖아요.”

리필은 안 돼요. 다시 시키세요.”

다시 시키라고요?”

, 다시 시키세요.”

머릿속에서 뭔가가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가상의 스팀 분사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지금 내가 생떼를 쓰는 걸까. 무식한 여편네처럼 어거지를 부리는 걸까.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겨우 식혜 한 통을 둘러싼 쪼잔한 아줌마의 사소한 분노 심리학 같은 것이었다.

겨우 식혜 한 통 아닌가. 이런 일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냥 돌아서려고 했다. 앞으로 살아가며 겪게 될 일들에 비하면 식혜 한 통쯤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다른 손님들이 내 뒤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순간 외통수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이 참, 알았어요. 진작 말씀하시지. 다 똑같은 건데그럼 식혜 얼음만 조금 더 드리면 되는 거죠?”

초등학생을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 나는 사는 게 가끔 너무 힘들다!

다시 피트니스 룸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여전히 러닝머신 위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얼음 더 줬어?”

여기.”

나는 식혜 통을 창턱에 툭 내려놓았다. 남편은 아무 잘못도 없다. 그저 나를 위해 식혜를 사왔을 뿐이다. 그래도 괜히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의 뒤통수를 흘겨보게 된다.

남편이 거울 속에서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러닝머신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스팀 분사기의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찜질방 주인을 불러 항의를 해야 하나. 그렇다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는 거지.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는 뜻 모를 소음들에 둘러싸인 채 나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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