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1997년 가을, 도준이 남긴 등반일지 한 귀퉁이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횡계에 있는 고모부 댁 마당에서였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니 한 여자가 마당에 서 있었다. 나는 온몸이 땀에 절어 엉망인 차림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묘하게 낯설지 않았다. 우리는 어디선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예감 같은 것이었다.


살면서 여자로 인해 이렇게 가슴이 뛰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 순간, 나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몸이 굳어졌다. 나는 늘 죽음의 바깥에서 살아온 자였다. 산의 벼랑 끝에서, 눈보라 속에서, 매번 살아남은 이유를 묻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본 순간, 처음으로 살아 있어도 좋다는 감정이 스쳤다. 생존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응답처럼.


그때 내가 횡계에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땠을까. 여전히 서로 다른 세계에 머물며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아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날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결국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인연이었다. 기억에서 사라져도, 멀리 흩어져 있어도, 결국 다시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으니까.


조금 전에, 우리의 인연을 설명할 만한 비유 하나가 떠올랐다. 한 사람이 걸어온 모든 길을 실로 묶어 이어 놓는다면, 나는 아마 다른 이들보다 훨씬 긴 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계 곳곳을 떠돌며 그 실의 길이를 늘여 가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조그마한 실타래의 일상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녀의 씨실과 나의 날실이 오래전에 한 번 엇갈린 적이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어린 꼬마 아가씨는 이제 어여쁘고 성숙한 여자로 자라 있었다. 그녀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내가 그녀를 구했던 일을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했다. 그녀를 구했던 순간, 사실은 나 역시 그녀에게 구원받고 있었다는 것을.


인생에서 중요한 건 실의 길이나 두께가 아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 긴 여정은 결국 공허와 외로움 속을 떠도는 덧없는 여로일 뿐이다. 나는 그녀를 보며 깨달았다. 죽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스물두 해 전 여름, 열세 살 도준은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의 바다에 잠겨 있었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날, 그의 세계는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어린 그에게 횡계의 고모만이 유일한 혈육이었다. 고모는 막내아들처럼 살뜰히 그를 보살피며 따스한 식사와 부드러운 말을 건넸지만, 도준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것은 절망이 쌓아 올린 성벽이었다.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가두는 장막이었다. 소년은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길 위에 홀로 선 작은 그림자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여름방학이 다가오던 7월의 어느 날, 도준은 학교를 빼먹고 집 근처 용천 계곡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떠올리기에 그보다 더 나은 장소는 없었다. 산이었다. 그곳에 가면 아직 아버지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주말마다 올랐던 푸른 능선. 땀에 젖은 목덜미를 닦아내며 건네던 시원한 물 한 모금, 정상에서 내려다보던 끝없는 풍경. 아버지 몸에서 번져 오던 그 냄새와 땀의 열기, 단조롭지만 어딘가 따스했던 그 목소리. 그렇게 눈을 감으면, 손끝에 스며드는 듯 아버지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도준, 너는 발이 빠르구나. 아버지를 곧 따라잡겠어.


너그러운 미소로 그를 격려하던 아버지의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그러나 이제 산은 더 이상 따뜻한 위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 한편에 보듬어 두고 싶은 추억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한 은신처에 가까웠다. 산자락에 홀로 앉아 아픈 시간의 장면들을 더듬다 보면, 그 고통이 서서히 뻗어 와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심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모든 순간을 삼켜버릴 듯했지만,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잔인한 물결에 몸을 내맡겼다.


그래. 나를 가져가거라.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해 한여름의 햇살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강렬했다. 나무 그늘조차 뜨거운 기운을 피하지 못하고, 흐릿한 열기로 공기마저 일렁였다. 도준은 녹아내릴 듯한 무력감 속에 스스로를 방치한 채, 개울가 근처 널찍한 바위 위에 무심히 걸터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의식의 저변을 가볍게 흔들었다.


-, 여기 있다!


고개를 돌리자, 개울 건너편에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어린 소녀가 물가를 따라 가볍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면 가까이 날아오르는 나비를 쫓아, 한 걸음 한 걸음 빛 속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된 개울물은 투명한 보석처럼 반짝였고, 소녀는 물비늘 사이를 부유하는 초롱한 그림자 같았다. 도준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릎 위에 무기력하게 얹힌 자신의 손등. 아무런 의욕도 없이 축 늘어진 채, 거기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소녀는 자신과 너무도 먼 세계의 사람이었다. 환한 빛살 아래 자유롭게 뛰노는 저 작은 몸짓은, 그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보드랍고 따스한 무엇처럼 느껴졌다. 어린 날의 바람도, 체온도, 품에 안기던 기억조차 비껴간 삶. 소녀는 그에게 꿈의 풍경 같았다. 아니, 꿈조차 꿔보지 못한 세계의 조각이었다.

 

그러나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 내 신발!


도준은 그 소리에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물가에 벗어놓은 소녀의 분홍신 한 짝이 개울물에 휩쓸려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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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기억은 수많은 더듬이를 지닌 촉수처럼, 다른 차원과 이어진 은밀한 통로에 닿아 있는 듯하다. 훗날 그녀는 그해 봄날 오후의 풍경을 반복해서 떠올리며,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조금씩 아껴가며 되짚곤 했다.


당시엔 지루한 기다림과 이곳이 남의 집이라는 불편함 외에, 특별한 감정이 뚜렷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떤 장면도 의식 깊숙이 새겨졌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눈을 감기만 해도 마치 꿈속 장면처럼 그날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오래 접어 두었던 담요를 다시 펼치듯, 뽀얀 실밥 사이사이에 스며 있던 적막과 긴장이 손끝에 만져진다.


익숙한 냄새를 따라 기억의 문이 열리고, 그 감각은 서서히 그녀를 감싸안는다김 씨 할아버지가 사는 함석집 뜨락 한편에 서 있던 바싹 마른 감나무 한 그루. 빈집의 정적을 지키며 댓돌 위에 놓여 있던 검정 고무신. 텅 빈 축사 한쪽 흙벽에 걸린 그물 망태기. 반질거리던 낫과 쇠스랑, 그리고 곡괭이들. 깊은 샘에서 물을 퍼 올리던 무쇠 펌프와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 안방 문고리에 비뚤게 걸린 자물통. 서늘한 바람결에 실려 오던, 이름 모를 새소리. 그런 것들이 여러 장의 오래된 스틸 사진처럼 하나씩 의식 위로 떠오른다.


그 장면들이 이토록 또렷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그날 마주친 한 사람 때문이다. 남자는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와 낡은 사륜구동 랜드로버에서 내렸다. 잠시 멈춰 선 그는 열린 운전석 문에 오른손을 얹은 채, 오래전 말보루 담배 광고 속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모습으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 순간,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며 그녀의 머릿결이 흩날렸다.


남자는 차 문을 닫고, 서두르지 않는 보폭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역광 속에서 윤곽만 또렷해진 그의 모습은, 현실의 한 장면이라기보다 기억 속에서 다시 조립되는 이미지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시공간의 감각이 서서히 흐려지고, 그가 마침내 대문간을 지나 집 안에 고여 있던 적요를 가르며 가까워졌다. 아주 멀리서부터 걸어와 마침내 그녀 앞에 선 남자. 그가 바로 도준이다.


그녀는 주인이 없는 집 마당에 홀로 서 있었다. 저 먼 경계 너머에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뚜벅뚜벅, 느릿하지만 망설임 없는 걸음이었다. 그녀 앞에 멈춰 선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이 가슴께로 번져 왔다.


누군데, 나를 저렇게 보고 있는 거지?’


남자는 크고 다부진 체형에, 오랫동안 야외 생활을 해온 사람처럼 햇빛에 짙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무심하게 하나로 묶은 꽁지머리가 조금은 특이하게 보였다. 그밖에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지만, 유독 그의 눈빛이 서윤의 마음을 파고드는 듯했다. 오래 쌓인 피로와 깊이 가라앉은 사념들이 겹쳐 있는 듯한 눈동자였다. 친절도, 경계도 아닌,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여백이 그 안에 남아 있었다. 그 여백이 그녀의 심장을 살짝 조여 왔다. 몸은 먼저 반응하듯 어깨가 움츠러졌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이해하려는 마음과,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교차했다.


-, 어떻게 오셨죠?


남자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김 씨 할아버지를 뵈러 왔다고 말했다.


-저는 저 위쪽 집에 살고 있어요.

-, 그러시군요.

-아무도 안 계시는데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죄송해요.

-, 괜찮습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는데, 그 안에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여운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번져 오는 그 묘한 감정에 마음이 흔들렸다. 남자의 목에는 작은 통 모양의 은색 펜던트가 매달려 있었다. 햇빛에 오래 노출된 피부와 세월 속에서 다져진 몸은, 그가 일상에 쉽게 얽매이지 않는 사람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어쩐지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이 남자의 정체가 문득 궁금했다.


그는 자신이 김 씨 할아버지의 처조카라고 소개했다. 김 씨 할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고 지금은 서울 큰형님 댁에서 요양 중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젠 많이 나아지셨어요.

-어머나, 큰일 날 뻔했네요. , 이거.


그녀는 손에 든 선물 가방을 들어 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바로 건네기엔 난처했고, 다시 들고 돌아가기에도 망설여졌다. 결국 가방을 마루 한쪽에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가 할아버지 드리라고 보내신 거예요. 비타민인데, 전해주시겠어요?

-,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누구라고 전하면 될까요?

-저는 김순내 할머니 손녀예요저희 큰할머니와 할아버지 내외분은 오랫동안 각별하게 지내셨어요.

-그럼 혹시저 위쪽에 있는, 막다른 길 끝 집 말씀하시는 건가요?

-, 거기 파란 지붕 집이요.


그 순간,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그림자가 스쳤다.


-하하이게 우연은그러니까,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말끝을 흐리는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운명?’


서윤의 내면은 한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처음 만난 남자의 입에서 나온 운명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낯설었고, 어딘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금기어처럼 불길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흥미는 순식간에 씻겨 나가고, 대신 날카로운 경계심이 온몸을 휘감았다그의 시선과 말투,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집 안에 고요히 가라앉은 적막까지, 모든 것이 문득 위험한 징후처럼 느껴졌다.


-,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서윤은 한 걸음 물러선 뒤 몸을 돌렸다. 대문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심장은 어쩐지 엇박자로 뛰는 듯했다. 등 뒤에서 무언가 잡아당기는 느낌에, 대문간에 이르러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남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서윤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그 집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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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봄 햇살이 은은하게 감도는 연청빛 하늘 아래, 텅 빈 시간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서윤은 작은 종이 가방을 손에 들고 별장을 나섰다. 가방 안에는 아버지가 김 씨 할아버지께 전해 달라며 챙겨주신 종합 비타민과 홍삼 캔디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출입문을 잠그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 일 없으셔야 할 텐데


집 앞 돌층계를 내려선 서윤은 산등성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길 양옆에는 파릇한 새싹과 양치류가 돋아 있었고, 이끼 낀 자갈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 산길은 동네 사람들만 다니는 평범한 길이었지만, 산새들의 지저귐과 발밑을 스치는 나뭇잎의 바스락거림이 새봄의 기운을 더욱 싱그럽게 했다.


잠시 오르막을 지나 시냇물을 건너 조금 더 내려서자, 마침내 김 씨 할아버지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담장에 붙은 대문은 빗장이 채워지지 않은 채, 조금 열려 있었다. 손으로 밀자 삐걱낮게 신음하듯 소리를 내며 문이 더 벌어졌다. 서윤은 흰색 종이 가방을 가볍게 매만진 뒤 대문턱을 넘었다.


-할아버지, 안에 계세요?


툇마루 앞 댓돌 위에는 검정 고무신 한 켤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비어 있는 곳간과 축사를 차례로 살핀 뒤, 내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방 문고리에 걸린 자물통 역시 채워져 있지 않은 걸 보니, 그리 멀리 나가신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여기서 지내시나 보네.


집안 곳곳에 사람 사는 흔적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서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중에 다시 올까 망설이다가, 결국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나뭇결이 허옇게 드러난 툇마루에 앉아 침묵 속에 가라앉은 집안을 둘러보자니, 큰할머니가 머물던 그 낡은 기와집의 포근하고 정겨운 풍경이 눈앞을 스쳤다. 집안 어딘가에서 장작불이 탁탁 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반갑게 맞아주시던 큰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커다란 소쿠리를 들고 숨을 고르며 집안을 살피시던 그분의 목소리, ‘서윤아!’ 지금도 귓가를 스치는 듯 고요한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오래전 시간의 창 너머, 뒤뜰 외양간에서는 코뚜레를 단 황소가 나지막이 음매 울고, 자기 집 울타리를 뛰쳐나온 돼지는 앞마당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푸드덕거리며 서까래를 향해 날아오르던 닭들, 부엌 아궁이에 묻어둔 고구마가 서서히 익어가던 구수한 냄새, 펌프질로 길어 올리던 찬물의 맑고 청량한 기운까지모든 풍경이 큰할머니의 옛집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기억 속에서 서윤은 아늑하고 풍성했던 유년의 뜨락을 거닐며,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추억의 온기를 느꼈다.


시간은 숨을 죽인 채 더디게 흘렀다. 늦은 오후 햇살이 투명한 적막 속으로 내려앉아, 마당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돗가 근처, 맨흙이 드러난 마른 땅 위에는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처마 끝에서 꺾인 해그림자는 장독대를 향해 멈춰 섰다. 그때까지도 김 씨 할아버지는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환한 봄볕을 오래 쐰 탓인지, 몸이 점점 나른해지면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돌아갔다가 다시 오는 게 낫겠어.


손바닥으로 하품을 가리며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때,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던 자동차 소리가 점차 또렷해졌다. 신작로와 맞닿은 언덕 위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던 차 한 대가, 마침내 대문 밖 저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서윤은 선물 가방을 챙겨 들고, 잡풀이 드문드문 돋아난 마당으로 내려갔다. 커다란 구형 랜드로버가 집 앞 공터에 천천히 멈춰 섰다. 험한 산길과 오프로드를 견뎌온 차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찻길은 여기서 끝이 났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외길이었다. 왜 저 차는 여기까지 온 걸까. 길을 잘못 든 걸까, 아니면 김 씨 할아버지가 외출했다가 누군가와 함께 돌아온 걸까. 그녀는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랜드로버를 바라보았지만, 전면 유리창에 반사된 햇빛으로 차 안은 잘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운전석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렸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얼핏 보기에도 단단하게 균형 잡힌 체격이었다. 그는 잠시 차 문에 손을 얹은 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눈빛은 마치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는 듯했다.


서윤은 불안과 호기심이 엇갈린 마음으로 남자의 표정과 몸짓을 살폈다. 이 외딴 길 끝자락까지 일부러 차를 몰고 왔다면, 그에게는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 씨 할아버지와 관련된 상황 외에, 다른 가능성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주인 없는 집에 이렇게 허락도 없이 혼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왠지 더 움츠러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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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원목으로 만든 별장 출입문에는 묵직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현관 근처 작은 화분 아래에 숨겨둔 열쇠로 문을 열자, 맑은 햇살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집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족이 한동안 부담 없이 지낼 수 있도록 꾸민 친환경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1층은 거실과 부엌이 하나로 이어진 개방형 구조였고, 화이트와 블루 톤의 싱크대와 스토브, 나무 수납장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실내 오른쪽에는 욕실이 있었고, 왼편으로 돌출된 공간은 손님방으로 이어졌다. 그리스 전통 가옥을 연상시키는 소박한 손님방은 푸른 대리석의 차가운 질감과 레이스 커버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져, 한낮 햇살 속에 고요한 정취를 더했다.


욕실 옆 계단을 따라 오르면, 아래층과 허리 높이 가림막 하나를 사이에 둔 복층형 오픈 침실이 나타난다. 목재 난간 너머로 거실이 내려다보이는 이 공간은, 정갈하게 놓인 가구 덕분에 포근하면서도 넉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기울어진 천장 아래 불투명 채광창으로 은은한 햇살이 스며들어, 침대 위를 부드러운 빛으로 감쌌다. 이곳에서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아침 햇살 속에서 눈을 뜨는 바로 그때이다. 숲속에 내려앉은 고요한 빛은 하루의 시작을 부드럽게 물들이며, 마음 깊은 곳까지 아늑한 기운으로 스며든다.


서윤은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천장과 창틀을 점검했다. 지붕과 벽 어디에도 물이 배어든 자국이나 곰팡이 흔적은 없었다손님방 옆 보일러실에는 새로 설치한 경동 보일러가 낯설 만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부엌 싱크대 앞으로 돌아와 물을 틀자, 보일러가 조용히 작동했고 곧 온수가 흘러나왔다. 서윤은 실내 온도를 24도로 설정한 뒤, 방화동 본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가씨, 오늘 횡계 갔다면서요?


전화를 받은 올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살가웠지만, 일부러 과장된 듯한 말투가 오늘따라 신경 쓰였다.


-이제 막 도착했어요.

-물 새는 데는 없죠? 보일러는 어때요?

-다 잘된 것 같아요.


서윤은 차분한 어조를 유지한 채, 약간 거리를 두었다.


올케가 부모님 댁 살림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건, 오빠가 거듭된 사업 실패로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잃은 무렵부터였다. 신용불량자가 된 오빠는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길어졌고, 젖먹이 조카에게는 올케의 손길이 절실했다. 제 앞가림이 급했던 올케는 월셋집을 방화2동 주민센터 근처로 옮긴 뒤, 가사 도우미처럼 시댁을 들락거리며 미안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생활비를 챙겨 갔다. 못난 자식을 둔 양친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말을 흘리며, 부모님 집을 사실상 제 아르바이트 일터처럼 드나드는 형국이었다.


전화선 너머로 배경음처럼 희미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올케는 라디오를 켜 둔 채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고, 엄마는 늦은 아침을 먹은 뒤 집 근처 한의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나가셨다고 했다. 지금 집에는 올케만 남아 있었고, 그녀는 파김치를 담그기 위해 재료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오늘 꼬리곰탕 끓이고 있거든요. 아가씨도 설비 가게 들렀다가 곧장 올라오실 거죠? 저녁 같이 먹어요.

-저녁이요? 여기 오는 데만 다섯 시간 걸렸어요.


서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누가 아니래요. 피곤하죠?

-오늘 하루는 여기서 쉬고 갈까 봐요.

-내일 출근은요?

-당분간 휴가예요.

-, 다행이네요. 이런 일은 선호 아빠가 나서야 하는데휴가 첫날부터 이게 무슨 고생이래요.


올케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오빠 때문에 속상하다며 한참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오빠가 빚쟁이들을 피해 집을 나간 뒤 보름 가까이 소식이 없다는 말에, 서윤은 가슴 한복판에 돌덩이를 얹은 듯 답답함을 느꼈다


식구들은 그녀의 결혼을 대체로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긍정적인 시선만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신우건설 장남 강태일과 약혼 이야기가 오가던 무렵, 오빠는 서윤을 불러 앉혀놓고 현실적인 차이에 대해 말했다.


-아버지는 퇴직 전에 너를 결혼 시키고 싶어 하셔. 하지만 우리 사정으로는 그쪽 집안 수준에 맞추는 건 불가능해. 그건 너도 잘 알잖아.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집안 분위기가 서서히 서윤을 압박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가씨, 신우건설에 오빠 취직자리 하나 부탁할 수 있을까요?

-그래라. 강 서방에게 말이라도 한번 슬쩍 건네보렴.


엄마도 딸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거들었다.


모처럼 식구들끼리 둘러앉은 밥상머리에서, 서윤은 점점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신용불량자인 데다 종종 노름판까지 드나드는 친오빠의 취직 건이라니아무리 결혼을 앞둔 사이라 해도, 집안의 위신까지 걸린 그런 부탁을 서윤은 차마 강태일 앞에서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껏 아무 말 없이 모른 척해왔는데, 또다시 오빠가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엇 하나 잘못한 일은 없었지만, 그녀는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진 사람처럼 괜스레 미안했고, 마음은 내내 불편했다.


-횡계 읍내까지 다시 나가려면 또 택시를 불러야 하잖아요. 에잇, 그냥 이참에 외제 차 하나 뽑아달라고 하세요. 시댁이 뭐, 으리으리하잖아요. 이미 그 집 며느리나 진배없는데, 우리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고생할 이유 뭐 있어요. 그죠?


올케는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가족 사이라도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가끔 의도적으로 무시하곤 했다. 외제 차라니. 이건 서윤의 입장을 너무도 쉽게 넘겨짚은 말이었다. 그녀는 아연실색하여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올케는 말실수인 척 흘리듯 말을 꺼냈지만, 실은 가족이라는 방패를 두른 채 서윤의 반응을 떠보려는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어디까지 서윤의 약혼자 집안에 손을 내밀어도 되는지, 태일이 어느 선까지 이번 혼사를 배려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그녀는 그 어색함을 덮으려는 듯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김 씨 할아버지는 왜 연락이 안 되는 건데요? 어디 편찮으신가?


김 씨 할아버지의 늙고 쇠약해진 모습이 떠올랐다. 가끔 별장 주변을 돌며 집 상태를 살펴주던 그가 홀로 지내시다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건 아닌지, 다시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제가 내려가서 한번 살펴볼게요.

-혼자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아유, 우리 아가씨는 어쩜 그렇게 순하고 착해빠졌을까

-지금칭찬하는 거예요?

-맞아요. 칭찬이죠. 그리고 진심이기도 하고요. 호호호.


이번 지붕 공사와 보일러 교체를 맡았던 대동종합설비는 횡계 읍내에 있었다. 오늘 밤을 이곳에서 보내려면 먹을거리도 좀 마련해야 했다.


-택시 부르면 거기까지 들어오는 데도 한참 걸릴 텐데, 자전거 탈 줄 알잖아요. 그죠?


올케는 다시 호호 웃더니 집 뒤편 창고에 한번 가보라고 했다. 그곳에는 작년에 오빠가 사다 놓은 중고 산악자전거가 있었다. 횡계 로터리까지라면 그걸 타고 금방 다녀올 수 있을 듯했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우선 짐을 풀고 잠시 쉬기로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이 텅 빈 고요함을 누리고 싶었다. 한동안 넓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무엇에 닿아 있는지, 혹은 그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일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루쯤 더 이곳에서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결 느슨해졌다. 이대로 휴가 기간 내내, 아무런 번뇌와 갈등도 없는 시간 속에 잠시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남들은 휴가를 받으면 외국으로 여행도 가는데


그녀는 짧은 미소를 지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 속 물건들을 하나둘 꺼내 놓았다. 랩톱을 꺼내 전원을 연결하려던 순간, 집안 구석구석에 내려앉은 먼지가 눈에 거슬렸다. 문이며 창문을 굳게 닫아두었건만, 손바닥 위에는 어느새 뿌연 먼지가 묻어났다. 그녀는 걸레를 빨아 테이블과 선반, 의자 위를 정성스럽게 닦았다.


그런데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녀는 문득 손을 멈추고, 물기 잔뜩 머금은 시커먼 천 조각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쓸고 닦는 일에 매달리는 걸까. 먼지가 쌓였다고 꾸중할 사람도 없는데. 자신이 왜 이렇게 정리에 집착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이 깔끔하고 질서정연해야 마음이 놓였다. 옷장 속은 늘 가지런했고, 서랍 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갤러리에서 전시 업무를 맡으면서 이런 성향은 더욱 깊어진 듯했다.


당분간 정리 박사 노릇은 잊자.’

그래. 오늘만은 눈감아 주자.’


그녀는 물걸레를 툭 물통 속으로 던졌다믹스커피가 건강에는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뜨겁고 달곰한 맛은 묘하게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머그잔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그녀는 창가에 서서 다시금 밖을 바라보았다.


건물 아래,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넓은 터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세월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온 대추나무도 이제는 남은 기운마저 다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아버지 말로는 김 씨 할아버지가 수시로 들러 마당의 낙엽을 쓸고, 나뭇가지를 다듬어 주셨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가는 대추나무를 보자, 혹시 김 씨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더욱 커졌다.


우선 김 씨 할아버지 댁부터 살펴볼 생각으로 외출 준비를 하던 참에 전화벨이 울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늘 붙어 다닌 단짝, 제이였다.


-너희 올케가 너 횡계 갔다고 하더라. 지금 누구랑 있어?

-나 혼자 왔어.

-강태일이 데려다준 거 아냐?

-오늘 나 쉬는 날인 줄 몰라.

-?

-여행 가자고 하잖아. 12. 그래서 오늘 출근한다고 했어.

-같이 하룻밤 지내는 거 아직도 불편하다! 그런데 알아? 그건 너의 콤플렉스야.

-무슨 소리야?

-집안 격차에서 오는 박탈감을 그렇게 방어하는 거지.

-여보세요. 제이 씨, 그건 내 콤플렉스 아니고, 너의 열등감이거든요.

-그래서 난 네가 좋아. 남자랑 여행 가지 마. 앞으로도 쭉. 대신 나랑 가자.

-너랑? 돌아버리겠네.


제이는 요즘 몹시 지쳐 있다며 하소연했다. 4년째 작은 출판사를 운영 중인 그녀는 신간 출간 일정에 맞추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편집부 직원 하나가 장기 휴가를 내고 자리를 비운 탓에, 그 일까지 고스란히 떠맡게 되었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제이에게 갑작스럽게 인쇄소에 가봐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조심해서 갔다 와. 밥 잘 챙기고.

-너도 잘 지내. 특히 남자 조심하고.

-, 하여튼


서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전화를 끊고는, 문득 생각이 나 평창동에 있는 명명희 선생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 신호음 끝에 선생의 양녀 김순자 씨와 연결되었다. 명명희 선생은 동문전 참석차 일본 오사카에 머무는 중이며, 전시 일정과 여행을 함께 소화하느라 다음 주에나 돌아오실 거라고 했다서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주 안으로 개인전에 대해 상의하려던 계획은 일단 미뤄야 할 것 같았다.


-,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죠.


전화선 너머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메마른 신호음이 공허한 정적 속에서 길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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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다음 날, 서윤은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 횡계에 도착했다. 차창 밖으로 읍내 중앙로의 공사 현장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의 별장은 시내에서 차로 20분쯤 더 들어간 산기슭에 있었다.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막다른 길 끝자락의 외딴집이었다.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탄 그녀는 울퉁불퉁한 숲길을 따라 한동안 달린 끝에 별장 앞마당에 이르렀다. 집 뒤편은 곧장 수풀 우거진 산속 오솔길로 이어져 있었고, 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도 거기까지였다. 뒷좌석에서 내리기 전, 서윤은 미터기 요금에 웃돈을 조금 얹어 건넸다. 빈 차로 되돌아가야 할 운전사를 향한 작은 배려였다.


-여기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손님이 가자면 어디든 가야죠.


차에서 내리려 하자, 택시 기사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긴 외진 곳이라 택시를 불러도 잘 안 들어올 겁니다. 혹시 필요하면 미리 연락 주세요. 사정되는 대로 제가 올 수도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택시에서 내린 서윤은 잠시 숨을 고르며, 비포장도로를 따라 차가 되돌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공기 속에 부옇게 흩날리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앞마당의 고요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언덕과 능선을 따라 초봄의 푸른 기운이 스며든 한적한 오후였다. 청바지에 스웨이드 재킷을 걸친 그녀는 어깨에 랩톱이 든 배낭을 메고 있었다. 셔츠 깃을 반듯하게 여민 그녀의 얼굴에는 햇살에 데워진 듯한 혈색이 감돌았다. 두 손을 깍지 끼고 크게 기지개를 켜자, 숲에서 불어온 청량한 바람이 뺨을 스치며 숨 깊은 곳까지 차올랐다. 신선한 공기 덕분인지 서울에서 이어온 긴 여정의 피로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씻긴 듯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하품을 하며, 언덕 위에 자리한 파란 지붕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본래는 낡은 농가였으나, 큰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가 시간을 두고 개축해 지금과 같은 2층 건물이 되었다. 삼각형 지붕과 테라스를 갖춘 현재의 구조는 아버지가 스위스를 여행하며 마음에 담아두었던 목조주택에서 영감을 얻어 직접 설계한 것이었다. 소박하면서도 독특한 멋을 간직한 이 별장은, 아버지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손수 다듬어 온 결과였다.


이 집에서 큰할머니는 암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거의 사십 년을 홀로 지내셨다. 큰할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하나뿐인 아들은 그 전쟁 통에 설사병을 앓다 목숨을 잃었다.


-그때 페니실린 한 방만 맞았어도 나았을 텐데.


살아생전 큰할머니가 혼잣말처럼 내뱉곤 하던 그 말은, 지금도 서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횡계는 돌아가신 큰할아버지의 고향이었고, 전쟁 미망인이 된 그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몸을 기댈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그러나 곁에 있던 그 아이마저 잃고 난 뒤, 그녀는 세상과 거리를 두듯 스스로 벽을 쌓고 살아왔다. 질병과 전쟁, 가난이 뒤엉켜 있던 시절. 큰할머니의 삶은 그 자체로 상실의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횡계는 서윤에게 전원의 소박한 삶을 처음 가르쳐준 거의 유일한 터전이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배려로 큰할머니 곁에 양자처럼 머물게 되었고, 독립한 뒤에도 여름이나 겨울 방학이면 가족을 데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덕분에 그녀의 기억 속에는 유년 시절 횡계에서 마주한 풍경들이 낡고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서울에서 온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고, 서윤은 그 애들 틈에 섞여 낯선 경험들을 하나씩 익혀갔다. 부뚜막 불구덩이에 넣어둔 감자를 들여다보다 볏짚을 타고 번진 불꽃에 놀라 뒷걸음질 치던 일, 아이들을 따라 산에 올라가 칡뿌리를 캐던 일, 겨울 어느 날 밭둑에서 쥐불놀이를 하다 동네 어른들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던 일들. 그 모든 기억은 오래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 마음속 풍경화로 간직되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상급 학년에 접어들면서부터 학업에 쫓겨 횡계를 찾는 일은 차츰 뜸해졌다. 큰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대학 입시 준비에 매달려 있던 그녀는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그 일은 이후로도 미처 갚지 못한 빚처럼 마음 한쪽에 줄곧 남아 있었다.


그동안 큰할머니의 옛집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곳을 다시 찾은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별장에 머문 건 2년 전 가을, 약혼자 태일이 차로 데려다주고 다시 데려갔을 때였다. 당시에는 학술지 마감을 앞두고 한 달 가까이 머무르며 자료를 검토하고 논문을 정리하느라 거의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집 밖의 풍경이나 계절의 빛깔이 기억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단순히 집수리 상태를 살피러 온 것이니, 적어도 일을 보는 동안만큼은 마음을 풀고 편히 머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횡계에 오길 잘한 것 같아.


그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모처럼 따스한 햇볕 아래 나온 탓인지 갑자기 갈증이 느껴졌다. 배낭에서 생수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며 언덕 위 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막 새순이 돋아난 나무들이 집 주변을 감싸며 싱그러운 기운을 더하고 있었다. 최근 공사를 끝낸 별장 지붕은 한결 든든해 보였다.


-이제 빗물이 새는 일은 없겠지.


서윤은 생수병을 손에 쥔 채 돌층계를 따라 천천히 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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