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원목으로 만든 별장 출입문에는 묵직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현관 근처 작은 화분 아래에 숨겨둔 열쇠로 문을 열자, 맑은 햇살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집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족이 한동안 부담 없이 지낼 수 있도록 꾸민 친환경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1층은 거실과 부엌이 하나로 이어진 개방형 구조였고, 화이트와 블루 톤의 싱크대와 스토브, 나무 수납장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실내 오른쪽에는 욕실이 있었고, 왼편으로 돌출된 공간은 손님방으로 이어졌다. 그리스 전통 가옥을 연상시키는 소박한 손님방은 푸른 대리석의 차가운 질감과 레이스 커버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져, 한낮 햇살 속에 고요한 정취를 더했다.


욕실 옆 계단을 따라 오르면, 아래층과 허리 높이 가림막 하나를 사이에 둔 복층형 오픈 침실이 나타난다. 목재 난간 너머로 거실이 내려다보이는 이 공간은, 정갈하게 놓인 가구 덕분에 포근하면서도 넉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기울어진 천장 아래 불투명 채광창으로 은은한 햇살이 스며들어, 침대 위를 부드러운 빛으로 감쌌다. 이곳에서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아침 햇살 속에서 눈을 뜨는 바로 그때이다. 숲속에 내려앉은 고요한 빛은 하루의 시작을 부드럽게 물들이며, 마음 깊은 곳까지 아늑한 기운으로 스며든다.


서윤은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천장과 창틀을 점검했다. 지붕과 벽 어디에도 물이 배어든 자국이나 곰팡이 흔적은 없었다손님방 옆 보일러실에는 새로 설치한 경동 보일러가 낯설 만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부엌 싱크대 앞으로 돌아와 물을 틀자, 보일러가 조용히 작동했고 곧 온수가 흘러나왔다. 서윤은 실내 온도를 24도로 설정한 뒤, 방화동 본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가씨, 오늘 횡계 갔다면서요?


전화를 받은 올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살가웠지만, 일부러 과장된 듯한 말투가 오늘따라 신경 쓰였다.


-이제 막 도착했어요.

-물 새는 데는 없죠? 보일러는 어때요?

-다 잘된 것 같아요.


서윤은 차분한 어조를 유지한 채, 약간 거리를 두었다.


올케가 부모님 댁 살림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건, 오빠가 거듭된 사업 실패로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잃은 무렵부터였다. 신용불량자가 된 오빠는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길어졌고, 젖먹이 조카에게는 올케의 손길이 절실했다. 제 앞가림이 급했던 올케는 월셋집을 방화2동 주민센터 근처로 옮긴 뒤, 가사 도우미처럼 시댁을 들락거리며 미안한 척하면서도 은근히 생활비를 챙겨 갔다. 못난 자식을 둔 양친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말을 흘리며, 부모님 집을 사실상 제 아르바이트 일터처럼 드나드는 형국이었다.


전화선 너머로 배경음처럼 희미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올케는 라디오를 켜 둔 채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고, 엄마는 늦은 아침을 먹은 뒤 집 근처 한의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나가셨다고 했다. 지금 집에는 올케만 남아 있었고, 그녀는 파김치를 담그기 위해 재료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오늘 꼬리곰탕 끓이고 있거든요. 아가씨도 설비 가게 들렀다가 곧장 올라오실 거죠? 저녁 같이 먹어요.

-저녁이요? 여기 오는 데만 다섯 시간 걸렸어요.


서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누가 아니래요. 피곤하죠?

-오늘 하루는 여기서 쉬고 갈까 봐요.

-내일 출근은요?

-당분간 휴가예요.

-, 다행이네요. 이런 일은 선호 아빠가 나서야 하는데휴가 첫날부터 이게 무슨 고생이래요.


올케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오빠 때문에 속상하다며 한참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오빠가 빚쟁이들을 피해 집을 나간 뒤 보름 가까이 소식이 없다는 말에, 서윤은 가슴 한복판에 돌덩이를 얹은 듯 답답함을 느꼈다


식구들은 그녀의 결혼을 대체로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긍정적인 시선만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신우건설 장남 강태일과 약혼 이야기가 오가던 무렵, 오빠는 서윤을 불러 앉혀놓고 현실적인 차이에 대해 말했다.


-아버지는 퇴직 전에 너를 결혼 시키고 싶어 하셔. 하지만 우리 사정으로는 그쪽 집안 수준에 맞추는 건 불가능해. 그건 너도 잘 알잖아.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집안 분위기가 서서히 서윤을 압박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가씨, 신우건설에 오빠 취직자리 하나 부탁할 수 있을까요?

-그래라. 강 서방에게 말이라도 한번 슬쩍 건네보렴.


엄마도 딸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거들었다.


모처럼 식구들끼리 둘러앉은 밥상머리에서, 서윤은 점점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신용불량자인 데다 종종 노름판까지 드나드는 친오빠의 취직 건이라니아무리 결혼을 앞둔 사이라 해도, 집안의 위신까지 걸린 그런 부탁을 서윤은 차마 강태일 앞에서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껏 아무 말 없이 모른 척해왔는데, 또다시 오빠가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엇 하나 잘못한 일은 없었지만, 그녀는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진 사람처럼 괜스레 미안했고, 마음은 내내 불편했다.


-횡계 읍내까지 다시 나가려면 또 택시를 불러야 하잖아요. 에잇, 그냥 이참에 외제 차 하나 뽑아달라고 하세요. 시댁이 뭐, 으리으리하잖아요. 이미 그 집 며느리나 진배없는데, 우리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고생할 이유 뭐 있어요. 그죠?


올케는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가족 사이라도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가끔 의도적으로 무시하곤 했다. 외제 차라니. 이건 서윤의 입장을 너무도 쉽게 넘겨짚은 말이었다. 그녀는 아연실색하여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올케는 말실수인 척 흘리듯 말을 꺼냈지만, 실은 가족이라는 방패를 두른 채 서윤의 반응을 떠보려는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어디까지 서윤의 약혼자 집안에 손을 내밀어도 되는지, 태일이 어느 선까지 이번 혼사를 배려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그녀는 그 어색함을 덮으려는 듯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김 씨 할아버지는 왜 연락이 안 되는 건데요? 어디 편찮으신가?


김 씨 할아버지의 늙고 쇠약해진 모습이 떠올랐다. 가끔 별장 주변을 돌며 집 상태를 살펴주던 그가 홀로 지내시다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건 아닌지, 다시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제가 내려가서 한번 살펴볼게요.

-혼자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아유, 우리 아가씨는 어쩜 그렇게 순하고 착해빠졌을까

-지금칭찬하는 거예요?

-맞아요. 칭찬이죠. 그리고 진심이기도 하고요. 호호호.


이번 지붕 공사와 보일러 교체를 맡았던 대동종합설비는 횡계 읍내에 있었다. 오늘 밤을 이곳에서 보내려면 먹을거리도 좀 마련해야 했다.


-택시 부르면 거기까지 들어오는 데도 한참 걸릴 텐데, 자전거 탈 줄 알잖아요. 그죠?


올케는 다시 호호 웃더니 집 뒤편 창고에 한번 가보라고 했다. 그곳에는 작년에 오빠가 사다 놓은 중고 산악자전거가 있었다. 횡계 로터리까지라면 그걸 타고 금방 다녀올 수 있을 듯했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우선 짐을 풀고 잠시 쉬기로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이 텅 빈 고요함을 누리고 싶었다. 한동안 넓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무엇에 닿아 있는지, 혹은 그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일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루쯤 더 이곳에서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결 느슨해졌다. 이대로 휴가 기간 내내, 아무런 번뇌와 갈등도 없는 시간 속에 잠시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남들은 휴가를 받으면 외국으로 여행도 가는데


그녀는 짧은 미소를 지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 속 물건들을 하나둘 꺼내 놓았다. 랩톱을 꺼내 전원을 연결하려던 순간, 집안 구석구석에 내려앉은 먼지가 눈에 거슬렸다. 문이며 창문을 굳게 닫아두었건만, 손바닥 위에는 어느새 뿌연 먼지가 묻어났다. 그녀는 걸레를 빨아 테이블과 선반, 의자 위를 정성스럽게 닦았다.


그런데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녀는 문득 손을 멈추고, 물기 잔뜩 머금은 시커먼 천 조각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쓸고 닦는 일에 매달리는 걸까. 먼지가 쌓였다고 꾸중할 사람도 없는데. 자신이 왜 이렇게 정리에 집착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이 깔끔하고 질서정연해야 마음이 놓였다. 옷장 속은 늘 가지런했고, 서랍 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갤러리에서 전시 업무를 맡으면서 이런 성향은 더욱 깊어진 듯했다.


당분간 정리 박사 노릇은 잊자.’

그래. 오늘만은 눈감아 주자.’


그녀는 물걸레를 툭 물통 속으로 던졌다믹스커피가 건강에는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뜨겁고 달곰한 맛은 묘하게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머그잔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그녀는 창가에 서서 다시금 밖을 바라보았다.


건물 아래,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넓은 터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세월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온 대추나무도 이제는 남은 기운마저 다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아버지 말로는 김 씨 할아버지가 수시로 들러 마당의 낙엽을 쓸고, 나뭇가지를 다듬어 주셨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가는 대추나무를 보자, 혹시 김 씨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더욱 커졌다.


우선 김 씨 할아버지 댁부터 살펴볼 생각으로 외출 준비를 하던 참에 전화벨이 울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늘 붙어 다닌 단짝, 제이였다.


-너희 올케가 너 횡계 갔다고 하더라. 지금 누구랑 있어?

-나 혼자 왔어.

-강태일이 데려다준 거 아냐?

-오늘 나 쉬는 날인 줄 몰라.

-?

-여행 가자고 하잖아. 12. 그래서 오늘 출근한다고 했어.

-같이 하룻밤 지내는 거 아직도 불편하다! 그런데 알아? 그건 너의 콤플렉스야.

-무슨 소리야?

-집안 격차에서 오는 박탈감을 그렇게 방어하는 거지.

-여보세요. 제이 씨, 그건 내 콤플렉스 아니고, 너의 열등감이거든요.

-그래서 난 네가 좋아. 남자랑 여행 가지 마. 앞으로도 쭉. 대신 나랑 가자.

-너랑? 돌아버리겠네.


제이는 요즘 몹시 지쳐 있다며 하소연했다. 4년째 작은 출판사를 운영 중인 그녀는 신간 출간 일정에 맞추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편집부 직원 하나가 장기 휴가를 내고 자리를 비운 탓에, 그 일까지 고스란히 떠맡게 되었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제이에게 갑작스럽게 인쇄소에 가봐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조심해서 갔다 와. 밥 잘 챙기고.

-너도 잘 지내. 특히 남자 조심하고.

-, 하여튼


서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전화를 끊고는, 문득 생각이 나 평창동에 있는 명명희 선생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 신호음 끝에 선생의 양녀 김순자 씨와 연결되었다. 명명희 선생은 동문전 참석차 일본 오사카에 머무는 중이며, 전시 일정과 여행을 함께 소화하느라 다음 주에나 돌아오실 거라고 했다서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주 안으로 개인전에 대해 상의하려던 계획은 일단 미뤄야 할 것 같았다.


-,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죠.


전화선 너머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메마른 신호음이 공허한 정적 속에서 길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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