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기억은 수많은 더듬이를 지닌 촉수처럼, 다른 차원과 이어진 은밀한 통로에 닿아 있는 듯하다. 훗날 그녀는 그해 봄날 오후의 풍경을 반복해서 떠올리며,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조금씩 아껴가며 되짚곤 했다.
당시엔 지루한 기다림과 이곳이 남의 집이라는 불편함 외에, 특별한 감정이 뚜렷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떤 장면도 의식 깊숙이 새겨졌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눈을 감기만 해도 마치 꿈속 장면처럼 그날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오래 접어 두었던 담요를 다시 펼치듯, 뽀얀 실밥 사이사이에 스며 있던 적막과 긴장이 손끝에 만져진다.
익숙한 냄새를 따라 기억의 문이 열리고, 그 감각은 서서히 그녀를 감싸안는다. 김 씨 할아버지가 사는 함석집 뜨락 한편에 서 있던 바싹 마른 감나무 한 그루. 빈집의 정적을 지키며 댓돌 위에 놓여 있던 검정 고무신. 텅 빈 축사 한쪽 흙벽에 걸린 그물 망태기. 반질거리던 낫과 쇠스랑, 그리고 곡괭이들. 깊은 샘에서 물을 퍼 올리던 무쇠 펌프와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 안방 문고리에 비뚤게 걸린 자물통. 서늘한 바람결에 실려 오던, 이름 모를 새소리. 그런 것들이 여러 장의 오래된 스틸 사진처럼 하나씩 의식 위로 떠오른다.
그 장면들이 이토록 또렷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그날 마주친 한 사람 때문이다. 남자는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와 낡은 사륜구동 랜드로버에서 내렸다. 잠시 멈춰 선 그는 열린 운전석 문에 오른손을 얹은 채, 오래전 말보루 담배 광고 속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모습으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 순간,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며 그녀의 머릿결이 흩날렸다.
남자는 차 문을 닫고, 서두르지 않는 보폭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역광 속에서 윤곽만 또렷해진 그의 모습은, 현실의 한 장면이라기보다 기억 속에서 다시 조립되는 이미지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시공간의 감각이 서서히 흐려지고, 그가 마침내 대문간을 지나 집 안에 고여 있던 적요를 가르며 가까워졌다. 아주 멀리서부터 걸어와 마침내 그녀 앞에 선 남자. 그가 바로 도준이다.
그녀는 주인이 없는 집 마당에 홀로 서 있었다. 저 먼 경계 너머에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뚜벅뚜벅, 느릿하지만 망설임 없는 걸음이었다. 그녀 앞에 멈춰 선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이 가슴께로 번져 왔다.
‘누군데, 나를 저렇게 보고 있는 거지?’
남자는 크고 다부진 체형에, 오랫동안 야외 생활을 해온 사람처럼 햇빛에 짙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무심하게 하나로 묶은 꽁지머리가 조금은 특이하게 보였다. 그밖에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지만, 유독 그의 눈빛이 서윤의 마음을 파고드는 듯했다. 오래 쌓인 피로와 깊이 가라앉은 사념들이 겹쳐 있는 듯한 눈동자였다. 친절도, 경계도 아닌,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여백이 그 안에 남아 있었다. 그 여백이 그녀의 심장을 살짝 조여 왔다. 몸은 먼저 반응하듯 어깨가 움츠러졌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이해하려는 마음과,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교차했다.
-저, 어떻게 오셨죠?
남자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김 씨 할아버지를 뵈러 왔다고 말했다.
-저는 저 위쪽 집에 살고 있어요.
-아, 그러시군요.
-아무도 안 계시는데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죄송해요.
-아, 괜찮습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는데, 그 안에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여운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번져 오는 그 묘한 감정에 마음이 흔들렸다. 남자의 목에는 작은 통 모양의 은색 펜던트가 매달려 있었다. 햇빛에 오래 노출된 피부와 세월 속에서 다져진 몸은, 그가 일상에 쉽게 얽매이지 않는 사람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어쩐지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이 남자의 정체가 문득 궁금했다.
그는 자신이 김 씨 할아버지의 처조카라고 소개했다. 김 씨 할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고 지금은 서울 큰형님 댁에서 요양 중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젠 많이 나아지셨어요.
-어머나, 큰일 날 뻔했네요. 아, 참… 이거.
그녀는 손에 든 선물 가방을 들어 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바로 건네기엔 난처했고, 다시 들고 돌아가기에도 망설여졌다. 결국 가방을 마루 한쪽에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가 할아버지 드리라고 보내신 거예요. 비타민인데, 전해주시겠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누구라고 전하면 될까요?
-저는 김순내 할머니 손녀예요. 저희 큰할머니와 할아버지 내외분은 오랫동안 각별하게 지내셨어요.
-그럼 혹시… 저 위쪽에 있는, 막다른 길 끝 집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거기 파란 지붕 집이요.
그 순간,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그림자가 스쳤다.
-하하… 이게 우연은… 그러니까,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말끝을 흐리는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운명…?’
서윤의 내면은 한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처음 만난 남자의 입에서 나온 ‘운명’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낯설었고, 어딘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금기어처럼 불길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 흥미는 순식간에 씻겨 나가고, 대신 날카로운 경계심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의 시선과 말투,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집 안에 고요히 가라앉은 적막까지, 모든 것이 문득 위험한 징후처럼 느껴졌다.
-저,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서윤은 한 걸음 물러선 뒤 몸을 돌렸다. 대문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심장은 어쩐지 엇박자로 뛰는 듯했다. 등 뒤에서 무언가 잡아당기는 느낌에, 대문간에 이르러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남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서윤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그 집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