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봄 햇살이 은은하게 감도는 연청빛 하늘 아래, 텅 빈 시간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서윤은 작은 종이 가방을 손에 들고 별장을 나섰다. 가방 안에는 아버지가 김 씨 할아버지께 전해 달라며 챙겨주신 종합 비타민과 홍삼 캔디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출입문을 잠그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 일 없으셔야 할 텐데


집 앞 돌층계를 내려선 서윤은 산등성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길 양옆에는 파릇한 새싹과 양치류가 돋아 있었고, 이끼 낀 자갈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 산길은 동네 사람들만 다니는 평범한 길이었지만, 산새들의 지저귐과 발밑을 스치는 나뭇잎의 바스락거림이 새봄의 기운을 더욱 싱그럽게 했다.


잠시 오르막을 지나 시냇물을 건너 조금 더 내려서자, 마침내 김 씨 할아버지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담장에 붙은 대문은 빗장이 채워지지 않은 채, 조금 열려 있었다. 손으로 밀자 삐걱낮게 신음하듯 소리를 내며 문이 더 벌어졌다. 서윤은 흰색 종이 가방을 가볍게 매만진 뒤 대문턱을 넘었다.


-할아버지, 안에 계세요?


툇마루 앞 댓돌 위에는 검정 고무신 한 켤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비어 있는 곳간과 축사를 차례로 살핀 뒤, 내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방 문고리에 걸린 자물통 역시 채워져 있지 않은 걸 보니, 그리 멀리 나가신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여기서 지내시나 보네.


집안 곳곳에 사람 사는 흔적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서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중에 다시 올까 망설이다가, 결국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나뭇결이 허옇게 드러난 툇마루에 앉아 침묵 속에 가라앉은 집안을 둘러보자니, 큰할머니가 머물던 그 낡은 기와집의 포근하고 정겨운 풍경이 눈앞을 스쳤다. 집안 어딘가에서 장작불이 탁탁 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반갑게 맞아주시던 큰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커다란 소쿠리를 들고 숨을 고르며 집안을 살피시던 그분의 목소리, ‘서윤아!’ 지금도 귓가를 스치는 듯 고요한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오래전 시간의 창 너머, 뒤뜰 외양간에서는 코뚜레를 단 황소가 나지막이 음매 울고, 자기 집 울타리를 뛰쳐나온 돼지는 앞마당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푸드덕거리며 서까래를 향해 날아오르던 닭들, 부엌 아궁이에 묻어둔 고구마가 서서히 익어가던 구수한 냄새, 펌프질로 길어 올리던 찬물의 맑고 청량한 기운까지모든 풍경이 큰할머니의 옛집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기억 속에서 서윤은 아늑하고 풍성했던 유년의 뜨락을 거닐며,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추억의 온기를 느꼈다.


시간은 숨을 죽인 채 더디게 흘렀다. 늦은 오후 햇살이 투명한 적막 속으로 내려앉아, 마당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돗가 근처, 맨흙이 드러난 마른 땅 위에는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처마 끝에서 꺾인 해그림자는 장독대를 향해 멈춰 섰다. 그때까지도 김 씨 할아버지는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환한 봄볕을 오래 쐰 탓인지, 몸이 점점 나른해지면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돌아갔다가 다시 오는 게 낫겠어.


손바닥으로 하품을 가리며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때,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던 자동차 소리가 점차 또렷해졌다. 신작로와 맞닿은 언덕 위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던 차 한 대가, 마침내 대문 밖 저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서윤은 선물 가방을 챙겨 들고, 잡풀이 드문드문 돋아난 마당으로 내려갔다. 커다란 구형 랜드로버가 집 앞 공터에 천천히 멈춰 섰다. 험한 산길과 오프로드를 견뎌온 차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찻길은 여기서 끝이 났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외길이었다. 왜 저 차는 여기까지 온 걸까. 길을 잘못 든 걸까, 아니면 김 씨 할아버지가 외출했다가 누군가와 함께 돌아온 걸까. 그녀는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랜드로버를 바라보았지만, 전면 유리창에 반사된 햇빛으로 차 안은 잘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운전석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렸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얼핏 보기에도 단단하게 균형 잡힌 체격이었다. 그는 잠시 차 문에 손을 얹은 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눈빛은 마치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는 듯했다.


서윤은 불안과 호기심이 엇갈린 마음으로 남자의 표정과 몸짓을 살폈다. 이 외딴 길 끝자락까지 일부러 차를 몰고 왔다면, 그에게는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 씨 할아버지와 관련된 상황 외에, 다른 가능성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주인 없는 집에 이렇게 허락도 없이 혼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왠지 더 움츠러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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