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베이스캠프 주변에는 거센 돌풍이 몰아치고, 굵은 눈발이 사방으로 매섭게 흩날렸다. 며칠 전 라마제 때 매달아 둔 초르파의 오색 천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람 속에서 허공을 휘저었지만, 식당 텐트 안은 분주한 움직임과 떠들썩한 목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중앙에는 저녁 식사가 차려진 길쭉한 플라스틱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스무 명쯤 되는 대원들이 그 주위에 둘러앉아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는 중이었다. 몇몇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깔끔한 차림의 도시 직장인이었지만, 이제는 하나같이 게릴라 전투에 나선 산적을 닮았다. 한낮의 맹렬한 햇볕을 피할 길 없는 히말라야 고산에서, 그들의 피부는 까무잡잡하게 그을리고 얼굴은 검붉게 타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씻지 못해 꾀죄죄한 사내들은 음식을 푹푹 떠 입에 넣으며 왁자하게 웃고 떠들었다. 식탁 위는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어쩐지 잔칫날처럼 풍성함이 느껴졌다. 하얀 쌀밥과 닭볶음탕, 김치와 조미김, 몇 가지 네팔식 반찬과 렌틸콩 수프가 전부였지만, 등줄기까지 텅 빈 듯 허기진 대원들에게는 무엇보다 위로가 되는 정성스러운 한 끼였다. 해발 5,200미터에 자리한 베이스캠프에서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금세 꺼지고, 계속해서 뭔가 속이 허전했다. 조리팀은 식탁 중앙의 큰 접시와 냄비가 바닥을 드러낼 때마다 말없이 음식을 다시 채워 올리며 그런 대원들의 식사를 챙겼다.

 

오늘 화제의 중심은 단연코 한국 원정대가 로체봉 정상에서 거둔 쾌거였다. 마침내 첫발을 내디딘 등정의 순간을 자축하듯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이성호는 치료 중인 우태길 대장을 대신해 위태로웠던 순간들의 조마조마한 뒷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다른 대원들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체라는 단어만으로도 모두의 얼굴에 긍지와 자부심이 깃든 미소가 번졌다.

 

그러는 동안 바깥 날씨는 점점 험악해졌고, 얼기설기 엮어 세운 식당 텐트는 모진 풍랑 속에서 표류하는 작은 배처럼 요동쳤다. 그 출렁이는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바람이 아니라, 거대하고 초자연적인 존재가 이 세계의 경계를 헤집으며 낮게 으르렁대는 경고의 울림처럼 들려왔다.


-오늘 조금만 늦게 내려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게나 말이야


대원들은 순간 말을 멈추고, 투명한 비닐창 너머로 매섭게 휘몰아치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텐트 천은 거세게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했고, 몇몇은 혹시 쓰러질까 두 손으로 기둥을 움켜쥔 채 숨을 죽였다.

 

식사가 끝난 후, 문형근과 청송은 다리가 흔들거리는 간이 식탁 앞에 앉아 주방장이 특별히 준비한 야크 버터 티를 마셨다. 청송은 손에 들고 있던 서바이벌 키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찌그러진 알루미늄 통은 본체와 뚜껑이 단단히 맞물린 채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도 품은 듯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요.

-그래, 조심해서 한번 꺼내봐라.


청송은 알루미늄 통의 상단과 하단을 고무줄로 감은 후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껏 비틀었지만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끈거리는 손바닥을 주무르며 밖으로 뛰어나간 그는 담당 주치의에게서 수술용 고무장갑을 얻어왔다. 또 다른 시도와 몇 번의 좌절 끝에, 조그만 캡슐의 뚜껑이 마침내 딸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주위에 있던 대원들 모두 입맛을 다시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보았다.


-뭔데 로체 정상에 묻어뒀을까?

-신상정보, 그런 거겠지.


키트 안을 살피던 청송의 입에서 갑작스레 흥분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있어요. 뭐가 있어요. 종이 같아요.


문형근이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이라고? 이리 줘봐라.


청송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서바이벌 키트를 통째로 문형근에게 건넸다. 내 손으로 직접 꺼내서 도준의 숨결을 제일 먼저 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까마득한 후배 처지에 대선배의 지시를 감히 거스를 수는 없었다.


문형근은 손마디 두 개가 잘려 나간 뭉툭한 손으로 작게 또르르 말린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어른 손바닥 한 개 반쯤 되는 불투명한 습자지였고, 네 겹으로 접힌 종이에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들여 쓴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잠시 숨을 고른 뒤, 그 글을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SY.


이틀 전부터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더니 결국 이곳에 갇히고 말았소. 이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해서 계속 텐트 안에서 버티고 있소.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정신은 흐려져 가오.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금씩이라도 몸을 움직이고, 연료가 넉넉지 않아도 하루에 열 잔 넘게 차를 마셔야 하오. 탈수가 오면 모든 게 끝장이요. 날씨가 개이길 기다리며, 침묵 속에서 체력을 아끼고 있소. 고독이란 녀석은 말없이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나는 그 무서운 적과 끝없이 싸우고 있소. 오늘 아침에도 스치듯 아주 잠깐, 이 산에서 내려가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오.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소. 나는 이 공포의 벽을 넘어설 것이오. 늘 그래왔듯, 그 어딘가에 길이 있을 거라 믿는다오.


언젠가 당신은 왜 나였어요?’라고 물었소. 그땐 대답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소. 이유 같은 건 없었소. 처음 만난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으니까. 설명이 불가한 힘, 방향성, 혹은 숙명 같은 것. 그저, 당신에게 가기 위한 오랜 여정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오. 전에도 말했듯, 당신을 만나 나는 새롭게 태어났소. 그 외엔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소. 사랑이란, 그 사람의 꿈을 막지 않는 거라 했던 당신의 그 말이 내겐 참으로 뼈아프게 남았소. 혹시 지금도 내가 떠난 것을 슬퍼하고 있소? 그 생각을 하면, 이 고도에서도 견디기 힘들다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이 조그만 텐트 안이 환해진다오. 낮에도 밤에도 당신의 이름이 내 마음속을 조용히 맴돌고 있소. 우리는 떨어져 있지만 늘 함께 있소. 처음부터... 아니,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는 하나였소. 지금도 당신은 내 곁에서, 함께 이 남벽을 오르고 있소. 약속한 대로, 이 편지를 정상에 남겨두려 하오. 만약, 올라갈 수 있다면.


삶이란 결국 출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라오. 나는 오래전에 이 산을 선택했고,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소. 죽음을 마주하는 등반과, 영원을 꿈꾸는 사랑... 그 둘 모두 내게 주어진 거스를 수 없는 특별한 운명이었소. 당신을, 나의 유일한 사랑, 영원히 사랑하오. 이곳의 라리그라스 향기를 실어 보내오. 부디 내게 행운을 빌어주오. LOVE, 도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김미진


늦은 오후, 베이스캠프 주변에 걸린 크고 작은 오색 깃발들이 차가운 그림자 속에 나부꼈다. 두꺼운 털모자를 눌러쓴 늙은 셰르파가 식당 앞에서, 마니차를 닮은 낡은 놋쇠 그릇을 천천히 두드렸다.


, , ......


그 소리는 회색빛 고원과 오래된 사원의 저녁 종처럼, 허기와 고독에 잠긴 이들의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날의 일과에 지친 대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늙은 셰르파는 두 손을 모아 나마스테인사하며 그들의 무탈한 밤과 내일의 건승을 조용히 축원했다. 고산 지대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베이스캠프의 한 끼 식사는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기도이자 의례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희망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한 대로 무사하기를......


문형근은 식당 텐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생애 첫 해외 원정에 오른 어린 대원, 청송이었다. 보송보송한 얼굴에는 긴장과 기대가 섞여 있었고, 목소리에는 밝으면서도 어딘가 조심스러운 기색이 감돌았다.


-대선배님, 그것 저도 잠깐 만져봐도 될까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문형근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청송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순한 선배가 아니라, 거의 큰아버지뻘로 보였다.


-도준 선생님은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에요.


스물두세 살쯤 되었을까. 청송의 얼굴에는 아침 햇살 같은 순수함과 원시 자연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어른거렸다. 그 젊음의 눈부심이 오늘따라 유난히 어여뻐 보였다.


문형근은 오랫동안 전문 산악인들과 동행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벌써 아홉 해째, 그는 카트만두에 터를 잡고 여행자 숙소를 운영하며 지내고 있었다. 히말라야에 반해 드나들다 보니 어느덧 고향처럼 정든 땅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고산의 위험을 온몸으로 감당할 만큼 몸도 나이도 예전 같지 않았다. 오랜 세월 산을 오르며 얻은 크고 작은 부상들이, 그의 한계를 무엇보다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번에 바쁜 숙소 일을 잠시 접어둔 채 한국 원정대를 따라 베이스캠프까지 오른 것은, 아마도 젊은 시절, 오직 산을 사랑한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격렬하고 벅찬 감각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말라야에 도전했던 수많은 선후배들처럼, 그도 한때는 집착에 가까운 열망으로 산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람이 머물다 간 옛 자리를 조용히 다음 세대에게 내어줄 때가 되었다.


-이거, 도준의 것 말이냐? 그래, 만져보아라.


문형근은 손에 들고 있던 서바이벌 키트를, 오래된 유산을 전하듯 조심스레 청송에게 건넸다. 히말라야를 꿈꾸는 이 젊은 산악인 역시 언젠가 저 설벽 어딘가를 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전설 속 주인공이 된 도준의 유품은 도전의 가치를 증명하는 가장 깊고도 분명한 실체였다. 부재의 기록을 품은 작은 캡슐 하나가, 저 먼 신들의 영역을 향한 오래된 동경을 다시 불러왔다. 청송은 그 상실의 흔적을 두 손에 받쳐 든 채 한동안 말없이, 감회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좋으냐?


문형근이 물었다.


-그럼요. 믿어지지 않아요.


청송의 대답은 맑고 또렷했다. 어릴 적부터 도준은 그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짤막한 기사에도 가슴이 뛰었고, ‘히말라야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출렁였다. 청송이 산을 향한 열망을 키우고 대학 진학 후 본격적인 등반길에 나선 것도, 모두 그 존재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한때 무지개처럼 아득히 아른거리던 환영이, 이제는 손에 쥔 유품 하나로 명료하게 되살아나, 짙은 감동으로 그의 가슴 깊은 곳을 두드렸다.


그때 문형근의 두 눈은 청송이라는 한 청년의 영혼을 관통해, 저 너머 오래전 푸른 느티나무 같았던 도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배님,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도준입니다.


그날도 도준은 조용히 말을 건넸다말보다 눈이 먼저 말을 거는 청년이었다세월은 강물처럼 흐르고상실의 흔적은 강기슭 어딘가로 스며든다언젠가 다시 피어오를 전설을 기다리며그는 청송을 향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이 젊은이도 언젠가 저 설산의 능선을 훨훨 날 수 있기를. 바람처럼 가볍고, 무한히 자유롭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김미진

 

베이스캠프에는 한국에서 함께 떠나온 원정대가 두 사람의 무사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 멀리,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요! 저기 와요!


본부 텐트 앞에서 망을 보던 대원 하나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몇몇 발 빠른 대원들이 달려 나가, 정상 공격을 마치고 돌아온 두 남자를 조심스레 맞아들였다.


원정대 대장 우태길은 깊은 숨을 내쉬며 몸을 휘청거렸다탈수로 갈라진 입술과 까맣게 변해가는 손가락 마디는 그의 위태로운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동상이 심한 오른손은 미세한 자극에도 극심한 통증을 불러왔다. 절단을 피하려면 혈관을 확장하는 응급 주사가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성호 역시 극도로 탈진한 상태였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강인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다험난한 하산을 무사히 마친 자부심과 동료들과 다시 만난 안도감이 그의 마음 깊숙이 차올랐다.


-이성호, 축하해. 우리 원정대 대표로 로체를 등정한 기분이 어때?

-형님이 저 대신 올라가셨어야 했는데요.

-무슨 소리야. 네가 잘 서포트해줬으니까, 대장도 마음 든든했을 거야.

-고마워요. 그런데, 도준 형... 지난번 단독 등정, 정말 성공하신 거 같아요. 로체 남벽을, 그것도 산소통 없이 혼자서요.

-그게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이성호는 품속에서 알루미늄 캡슐을 꺼냈다.


-정상에서 이 서바이벌 키트를 발견했어요. 준이 형 것 같아요. 2년 전에 여기서 실종된, 도준 선배님이요.



그 순간, 주위는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도준이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 앞에서,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캠프 내에서 최연장자인 문형근이 앞으로 나와 은색 캡슐을 건네받았다이번 정상 공격에 대한 우려와 책임감이 그의 얼굴에 짙게 어려 있었다. 그는 오랜 세월 도준과 호형호제하며 지내온 터라, 누구보다도 그의 고유한 습관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알루미늄 통에 감긴 파란 테이프를 확인한 순간, 문형근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뚜껑 위 ‘DJ’라는 이니셜은 도준과의 기억을 되살리며 가슴 한복판을 스치듯 아릿한 슬픔을 남겼다. 그는 잠시 눈을 질끈 감고, 밀려드는 감정의 물결을 다독였다.


-이거 준이 형 것 맞지요?


이성호가 재촉하듯 물었다.


-분명하군. 이건 도준 거야.


문형근이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노라마 사진 찍으려고 왔다 갔다 하는데, 뭔가 발에 걸리는 거예요. 주변을 좀 파봤죠. 태길이 형이 한눈에 알아봤어요. 이거야말로 도준 선배님이 혼자 로체 남벽을 돌파한 증거물이잖아요.

-너희가 그걸 찾으러 거기까지 간 거구나. 고맙구나, 정말.


문형근은 착잡한 심정으로 로체봉을 올려다보았다. 능선 위 험악한 삼각 직벽과 눈 덮인 흰 봉우리가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슬픔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아직도 저 산 어딘가에 누워 있을 도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히말라야에 바쳐진 성스러운 청춘은 여전히 동면하듯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추웠을까, 얼마나 외롭고 안타까웠을까.’


도준의 등반 실력과 재능을 믿는 사람들은 그의 실종을 둘러싸고 여러 의문을 제기했다. 2년 전 봄 이미 혼자 정상에 올랐고,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기에 세상을 등진 채 어딘가에서 홀로 살아 있을 거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산이라는 존재가 도준을 선택한 것처럼, 그는 태생부터가 거기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고독한 성취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정확한 등정 기록도, 사진 증빙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의 로체 남벽 등정 성공을 단언할 수 없었다. 도준은 결국 그 산에서 실종되었고, 한때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했으나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자로 사라졌다. 그의 단독 등정 여부는 끝내 수수께끼로 남았고, 그를 사랑한 산악인들의 기억 속에서도 그는 점차 바람처럼 희미해지고 있었다.


문형근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속으로 되뇌었다.


도준, 자네가 로체 남벽을 올라간 증거가 지금 내 손안에 있어. 결국 원하던 바를 이룬 거야. 이제는 편히 눈을 감게나.’


로체봉 정상에서 도준의 서바이벌 키트를 찾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았다. 이토록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 자체가, 어쩌면 신의 계시였는지도 몰랐다. 세상에는 아직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도준이 남긴 그 흔적은 우연한 기적이자, 설명할 수 없는 신비였다.


저 높은 설산을 바라보는 문형근의 눈가가 떨렸다하늘을 덮은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스며들자 지나온 시간의 아쉬운 잔상들이 떠올랐다. 그는 손바닥으로 먹먹한 가슴께를 눌러 가며 도준에 대한 기억과 그리운 추억들을 곱씹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산에 대한 거창한 꿈을 방패막이 삼아 너무 오랫동안 비관적인 감상주의자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김미진

 

저 높은 수직의 공간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갈망. 히말라야, 고도의 한계 끝자락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자연의 법칙과 운명을 초월하는 고독한 투쟁이 필요하다. 어딘가로 오르는 길이 허락되었다면, 다시 내려가는 길 또한 존재할 것이다.


두 남자의 하산길은 오름의 여정보다는 덜 힘들었지만, 험난한 구간을 피해 훨씬 먼 길을 우회해야 했다. 얼음빛 혹한의 바람을 맞으며, 그들은 하늘 가까운 빙벽을 마주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쉬지 않고 이어진 가파른 하강 속에서, 어디까지 내려온 걸까. 길이 조금씩 수월해지자 등반의 긴장감은 풀리고, 몸속 깊이 스며든 피로가 젖은 눈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날씨는 다행히 맑고 하늘도 푸르렀지만, 매섭게 휘몰아치는 냉기 속에서 두 사람의 몸은 점점 굳어갔다.


우태길은 오른손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얼어붙은 손가락은 신경을 찌르는 고통을 안겼다. 산소통의 무게를 잊으려 그는 이를 악물고 온몸을 밀어붙였다. 이성호는 선배의 상태를 살피며 천천히 뒤를 따랐다.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고, 불안은 끝없이 밀려왔다. 베이스캠프까지 이어진 길은 심신을 소진시키는 마지막 시련이자, 생과 사의 경계에서 한 치의 여유도 없이 계속되는 자신과의 처절한 사투였다.


다음날 새벽, 그들은 캠프2를 거쳐 아이스폴을 통과했다. 해발 7,200미터.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이 지점까지 내려왔지만, 두 사람의 다리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체력 고갈과 산소 부족은 하산길의 눈밭을 더욱 미끄럽고 위태롭게 만들었다.


우태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산소통 밸브를 돌려 공급량을 높였다.


-조금만 더 견디자. 조금만.


그의 숨결은 거칠게 이어졌다. 손가락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성호의 발걸음도 점점 느려졌고, 자신도 모르게 몸이 기울어지면서 서너 번 휘청거렸다. 그래도 젊은 혈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내려가 존경하는 선배를 돕고자 한 걸음씩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겨우 움직였다.


7,000미터 고지를 지날 때, 그들은 또 한 차례 지옥 같은 구간에 접어들었다. 하산의 피로가 묵직한 돌덩이처럼 온몸을 짓눌렀다. 하체의 힘이 거의 빠져나간 상태에서 눈 덮인 바위와 미끄러운 경사면을 넘는 매 순간이 공포와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성호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발을 디딜 때마다 균형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을 더욱 낮췄다. 그의 눈에는 생존에 대한 간절한 의지와 삶에 대한 뜨거운 애착이 서렸고, 자신보다 더 힘들어하는 우태길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저려왔다.


이틀 후, 우태길은 탈수와 동상으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한 손으로 자일을 붙잡은 채 무릎을 꿇고 기어가다 끝내 주저앉았다. 이성호는 허겁지겁 달려가 그의 어깨를 힘껏 부축했다. 바로 그때, 아래쪽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베이스캠프의 깃발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선배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버텨요.

-그래. 그렇구나.


두 사람의 눈빛에는 마침내 끝이 보인다는 안도감이 번져갔다. 그들은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쥐어짜며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김미진


2000517일 오후 2시경한국 원정대원 이성호는 그토록 멀고 고된 길을 걸어, 하늘과 맞닿은 수직의 극점, 로체봉 정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숨소리는 거칠었고, 몸은 쓰러질 듯 휘청거렸으나 그는 얼어붙은 눈과 빙하 위를 지나 묵직한 걸음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정점에 아이스 피켈을 깊숙이 박고, 태극기를 펼쳤다. 바람결에 펄럭이는 깃발 하나. 그는 가슴이 타는 듯한 환희에 몸을 맡겼다.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 속, 온몸이 떨리던 전율의 순간이었다.


-올라왔어. 드디어.


그의 얼굴에는 오랜 여정의 피로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고글 너머로 붉게 부푼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고, 입술에는 따개비처럼 굳은 물집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방한모의 족제비 털은 얼어 터진 뺨을 거칠게 스쳤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천계, 까마득히 높아만 보이던 로체봉 정상에 지금 그는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조차 실감은 희미했다. 여기는 인간의 욕망과 의지를 넘어선 또 다른 변방 지대. 숨이 막히도록 희박한 공기 속, 신들의 자치 구역이었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끝없는 지평선이 완벽한 원형을 그리며 눈앞에 펼쳐졌다. 이성호는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두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발 아래, 층층이 쌓인 설빙 절벽이 아득히 뻗어 있었고, 그 너머로 날카롭게 치솟은 눕체의 첨봉이 손에 닿을 듯 다가왔다. 에베레스트는 희뿌연 설연을 휘날리며 하늘 끝을 향해 솟구치고, 남쪽 어둠 너머에는 암벽에 가려진 마칼루가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발밑 깊고 깊은 낭떠러지에서는 구름이 고요히 흐르고, 돌풍에 휘말린 눈발은 황량하면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빚어냈다. 해발 8,511미터. 로체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아득한 비현실의 경지, 무한한 꿈의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듯했다.


-결국 우리가 해냈어!


조금 늦게 정상에 오른 등반대장 우태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로체야! 우리가 왔다! 드디어 올라왔다!


두 사람은 어깨를 힘껏 끌어안고, 철부지 아이들처럼 야호, 야호를 외치며 환호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정상의 설원 위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지독한 사투로 점철된 지난 7일간의 여정은 이 순간, 아득한 꿈처럼 가볍고 현실감이 없었다. 무슨 말로 이 감각의 온도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기쁨과 숭고함을 초월한 순백의 감정,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초현실적 떨림이었다.


이곳, 산소마저 극도로 척박한 고지에서는 인간의 감정 또한 무중력 속을 부유하며 그 경계조차 아스라이 흩어져갔다. 이 지구상에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고도가 존재하듯, 죽음의 계곡을 넘어 도달한 히말라야의 정상에서 인간의 감정은 점차 실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이 순간을 억지로 붙들려 하지 않고, 온몸으로, 온 감각으로, 정상에 선 감동을 고요히 흡수하는 것뿐이었다.


-베이스캠프에 무전을 쳐야겠군.


우태길이 무전기를 추켜들고 발신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이성호는 카메라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며 세계의 지붕이 첩첩이 뻗어나간 장엄한 풍경을 응시했다. 눈앞을 가득 채운 설산들은 묵묵히 침묵한 채, 인간 존재를 미세한 점처럼 삼켜버릴 듯 압도적이었다. 그는 북쪽에 우뚝 솟은 에베레스트를 배경 삼아, 웅장하게 솟은 설산의 봉우리들을 한 컷에 담았다. 이어 동쪽과 남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며 셔터를 눌렀다. 서쪽을 향해 마지막 인증 샷을 찍으려는데 아이젠 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리며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상체가 앞으로 기우뚱한 순간, 눈 속을 가르며 은빛으로 빛나는 가느다란 줄 한 가닥이 튀어나왔다.


-태길이 형! 여기 뭔가 있어요. 목걸이 같은데... 줄이 끊어졌어요.

-주위를 잘 살펴봐. 뭐가 더 있을지 모르니까.


무전기에서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릴 듯 말 듯 이어졌다. 배터리는 충분했지만, 우태길은 정체 모를 불안에 사로잡혔다.


-베이스캠프와 교신이 끊긴 것 같아.

-큰일이군요. 날씨가 변하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야 하는데...

-목걸이는 찾았어?

-잠시만요.


이성호는 장갑 낀 손으로 눈을 헤집었다. 차가운 알갱이 사이로 스치는 감촉이 문득 낯설고 날카롭게 다가왔다. 손끝에 닿은 건 작고 단단한 무언가였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지름 1센티미터, 길이 3센티미터 남짓한 은색 목걸이 통이었다.


-? 이건... 서바이벌 키트네요?


초강력 알루미늄 소재의 서바이벌 키트는 비상 상황에 대비해 신원 확인 및 생존 정보를 담기 위해 제작된, 방수 캡슐 형태의 물건이다. 고산 등반자같이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일종의 블랙박스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마련한 가장 원초적인 수단인 셈이다.


해발 8천 미터, 그 정상의 끝자락에서 발견된 이 조그마한 증언의 실체는 누군가의 마지막 침묵의 언어일 수도 있었다. 히말라야 고봉의 무심한 눈 속에서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표면에 붙은 얼음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는 그 메시지를 확인했다. ‘DJ’라는 이니셜, 파란색 테이프, 그리고 로체봉 정상에 남겨졌다는 사실. 모든 퍼즐이 수수께끼처럼 떠올랐다가, 한꺼번에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건... 도준, 그 자식 거야.


우태길이 눈가를 떨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뭐라고요? 준이 형이요?


이성호가 놀라 되묻자, 우태길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파란색 테이프, 뚜껑에 새긴 'DJ'... 이게 확실한 증거야. 그 녀석은 모든 장비에 파란색 테이프를 감아두곤 했지. 자일에도 말이야.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어.

-그렇다면, 도준 형이... 정말 2년 전에 단독 등정에 성공했다는 건가요?

-알파인 스타일로, 오로지 혼자서.

-그게... 정말 가능했다고요?

-그럼. 도준이니까. 허허.


우태길은 한숨처럼 짧게 웃었다.


오늘 두 사람이 오른 길은 노멀 루트였다. 에베레스트 쪽 베이스캠프에서 이어지는, 비교적 잘 알려진 코스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전 도준이 향했던 곳은 전혀 달랐다. 로체 남벽. 세계 최강의 등반가들조차 번번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아직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미지의 벽이었다.


-도준 형의 실종을 두고 말들이 많았잖아요. 로체 정상에 올랐을 거다, 아니다...

-그 지옥 같은 로체 남벽을 혼자 해치운 거지.

-완벽하게 초등 업적을 이루려면, 정상까지 갔다가 무사히 내려와야 하는 거잖아요.

-로체 남벽을 끝까지 올라온 자는 아직 아무도 없었어. 도준이 내려오지는 못했을지라도, 올라온 건 확실하잖아. 이 서바이벌 키트가 증명하는 거지. 무산소 최초 단독 등정이야. 결국, 도준이 혼자 해낸 거야.


그는 알루미늄 통을 손에 꼭 움켜쥔 채, 끝없이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설산들의 침묵과 그 차가운 광활함 속에서, 도준에 대한 기억과 그의 실종 이후 견뎌야 했던 참담한 시간들이 아른거렸다. 공기 속의 희박함마저 감정을 천천히 갉아먹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남은 것은 단 하나, 서늘하게 맑은 진실의 감각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