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문체로 귓속말을 하듯 편안하게 말을 건네는 듯한 책이다. 불편한 ‘나‘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처럼 용기를 북돋워준다. 딱딱한 지식의 향연 같은 책들보다 어떤 면에선 더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 준다.
아버지는 노인처럼 쉬엄쉬엄 밭일을 하거나 거실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우리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것도 힘겨워하는 아버지는 몸만 아니라 마음 깊은 곳까지 아파 보였다. 혼자우두커니 앉아 있는 아버지 옆에 가면 아버지는 내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둘이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다. - P354
"저 아들이 꼭 우리 같다. 우리 인생도 파도타기 아이가."아이들과 송화를 좇고 있던 버들은 홍주가 하는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홍주 말대로 자신의 인생에도 파도 같은 삶의 고비가 수없이 밀어닥쳤다.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 그 뒤의 삶, 사진 신부로 온하와이의 생활………. 어느 한 가지도 쉬운 게 없었다. 홍주와 송화가 넘긴 파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 P326
버들과 홍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식당을 뛰어나가 103호로 갔다. 방문을 벌컥 열자 송화가 구석에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버들네 방과 달리 마루로 된 바닥이었고 한옆에 개켜 놓은 이부자리가있었다. 버들과 홍주는 신발을 벗어 던지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홍주가 송화를 끌어안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 P85
공부몬 해도, 호강몬 해도, 당신이 지주가 아니라 캐도 괘않았습니더, 기왕지사 부부가 됐으니까네 서로 아껴 주메 도와 가메 살고싶었는 기라예. 그란데 당신은 이레 죽은 여자를 맘에 품고 내한테는 손톱만치도 틈을 안 주니 내는 어쩝니꺼? 말해 보이소 지를 한번이라도 각시라고 생각한 적 있습니꺼?"말을 할수록 설움이 커진 버들은 아예 두 다리를 뻗은 채 엉엉울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풀을 뜯어 던지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태완은 점점 더 빨게지는 얼굴을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 P174
태완은 한쪽 밥을 떠서 뚜껑에 담아 버들에게건네주었다. 그러고 도시락에 아직 남은 개미들을 후후 불어 날린뒤 밥을 입에 떠 넣고 우적우적씹었다. 늘 그래왔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뜨겁고 고요한 묘지에 앉아 개미가 꾀었던 밥을 먹는 태완을 보자 버들은 무언가 울컥 치밀었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속내를 쏟아부었던 조금 전과 다른 감정이었다. 태완이 남의 땅에 와 살아낸 시간을 한순간에 다본 것 같았다. 버들이 살아봤기에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 P176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상처가 어떤 것인지 버들도 잘 알았다. 그 모든게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 태완이 그동안 닫아 두었던 문은 새 사람 쪽으로 향한 문이 아니라 자기 과거의 문이었을지 몰랐다. 버들은 태완에게 연민을 느꼈다. - P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