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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장소에서 ㅣ 언더그라운드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2011년 5월 21일 새벽 2시경 의문의 남자가 우리 아파트 16층에서 투신 자살을 했다.
난 다행히 그 날 근무가 아니었다. 아침에 출근하자 마자 전 날 근무조 분들은 나에게 그 소식을 알려왔다. 새벽에 아파트 보도 블럭 위에 있는 피를 치우고, 경찰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게다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봐야 했다고 말이다. 그 분들의 충혈된 눈을 보며 비참했던 상황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관리 사무소의 지시로 경찰들에게 그 남자가 투신 자살을 하기 위해 우리 아파트 입구에 들어 온 모습과 엘레베이터에 탄 모습이 찍힌 cctv를 USB에 저장을 해야 했다.
난 경비 초소에서 영상에 저장된 남자를 봤다. 40대 중반 정도, 스포츠 머리, 아래 위 색상이 똑같은 츄리닝 차림,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는 모습. 입구에 들어 올 때도 엘레베이터를 탈 때도 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서성거림도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들어서고 내렸다.
그 영상이 녹화된 시각은 밤 12시 반 그가 투신 자살하기 전 1시간 반이나 미리 죽을 장소에 와 있었던 것이다. 영상을 보고 답답한 마음에 그 아파트로 올라가 봤다. 16층의 복도 창문을 열고 그 남자는 뛰어 내렸다. 그가 뛴 장소에는 여러 개의 같은 담배 꽁초가 뒹굴고 있었고, 창문 문턱에는 그의 발자국인 듯 어지럽게 신발 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는 도대체 1시간 반 동안 이곳에 서서 담배를 피며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이 동네의 모든 정보는 한 손에 쥐고 계시는 경비 반장님의 조사에 따르면 그는 이 아파트 주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금산에서 이 곳으로 올라와 공장의 조그만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뛰어 내린 아파트 옆 동에는 그가 다니는 공장의 공장장이 살고 있고 말이다.
그렇게 그는 뛰어 내린 보도 블럭 위에 자신의 핏자국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2011년 5월 30일 오전에 관리사무소의 지시로 사무실 옆 창고를 말끔하게 치워났다. 오전부터 힘든 일을 한 탓이어서 그런지 피곤에 쩔어 점심을 먹고 내가 치운 창고에 앉아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소장님, 과장님의 다급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급히 달려나가 보니 직원들은 소방용 에어 메트를 들고 달리고 있었고, 소장님은 소리를 치며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 가고 있었다.
아파트 6층 베란단 난간에 젊은 아주머니 한 분이 뛰어 내릴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람이 불어서 인지 그 아주머니의 긴 머리카락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때문일까, 밑에 펼쳐지는 소방용 에어 메트 때문일까. 그 아주머니 갑자기 난간에서 자기 집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누가 신고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119 구급대, 경찰들이 출동 했고, 소장님의 지시로 나는 이 분들을 데리고 그 집으로 올라갔다. 문 앞에는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이 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119 구급대원들은 자동 반사적으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장비를 이용해 현관 문을 뜯어내 버렸다. 그리고 안으로 번개 같이 들어갔다. 하지만 거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방문이 꽉 닫힌 작은 방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쏠렸고, 구급 대원들은 바로 그 문 역시 부수고 들어갔다.
부수고 들어 간 방에는 목을 멘 그 아주머니가 있었다. 밑에서 잡고 위에서 목을 멘 줄을 번개 같이 잘라 버렸다. 난 그 후덕지근한 날씨에 그리고 사람이 앞에서 목을 메고 있다는 사실에 완전 얼어 붙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서 있기만 했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젊은 아주머니는 집에서 흔히 들 입는 원피스 차림의 츄리닝이었는 데 목에 아주 빨갛게 목 멘 자국이 확연하게 나 있었다.
<통곡>은 저런 와중에 읽은 책이다. 사실 <통곡>의 섬뜩함을 느끼며 저런 일들을 접하며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했다. 더욱이 그러고서 읽은 책이 <약속된 장소에서>라서 더 더욱 그랬고 말이다. 투신 자살한 사람도, 자살을 시도한 아주머니도 <통곡>의 '그'도 <약속된 장소에서>의 옴진리교 신자들도 분명 공통점이 있다.
그것이 대체 무엇일까? 무엇이 서로가 연관돼 있는 것일까? 연결은 돼 있다고 직감적으로 느끼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지를 못하고 혼자서 계속 리뷰를 썼다 지우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통곡>에 대한 내 추억이 떠 올라 리뷰를 한 편 써 버렸다.
<통곡>에서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뇌에 짓눌려, 가슴에 구멍이 난 채 더운 여름 방황을 하며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하다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소녀를 통해 신흥종교에 들어가고 거기서 자신의 믿음을 그 종교의 이야기로 대체해 버린다.
하루키가 <약속된 장소에서> 지적한 부분도 바로 저런 부분이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 지는 시대적 특성일 때 아사하라 쇼코라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지닌 자가 나타나 그런 사회 시스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흡수해 버렸다. 그리고 흡수된 사람들은 고뇌를 극복하고자 자신의 믿음을 쇼코가 만들어 낸 이야기에 '절대귀의'를 해 버렸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이 과연 어디까지 주체적으로 최종 책임을 지느냐 하는 점이죠.(중략) 그들은(옴진리교 신자들) 결국 그것을 구루나 교의에 떠넘겨버리는 겁니다. - <약속된 장소에서> 294쪽
투신 자살한 사람도 자살을 시도한 아주머니도 나도 어찌보면 이야기는 틀릴 지라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내뿜고 있는 이름모를 어두운 이야기에 끌려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나름대로 추측하자면,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죽으면 인생은 리셋 된다. 아무런 고통도 없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나도 잡지사 기자 시절 내 발로 일궈낸 360개의 거래처를 뺏기고 4류 기자라는 칭호만 얻은 채 사장에게 내쫓김 당할 때 그 감당 할 수 없는 분노에 한강 변에 가서 서 있었던 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 혼을 뺏겼던 것은 아닐까?
또 나는 헌책방 시절 노조를 만든다고 사직서를 쓰고 일을 그만두라고 강요했던 사장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분노에 또 저 죽음의 이야기에 혼을 뺏겼던 것은 아닐까?
또 나는 헌책방을 나온 후 취직하려고 기를 썼지만 넣는 이력서마다 퇴짜를 맞고 1년 동안 백수로 지내며 한 마리의 덜 떨어진 짐승처럼 집에 처박혀 스스로를 저주하고 있을 적에 난 저 죽음의 이야기에 혼을 마구 마구 뺏겼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전에도 또 그 후에도 항상 내 옆에서 나에게 조근 조근 이야기를 하던 저 죽음의 이야기 속에서 난 자유로웠을까?
하루키는 말한다. 그런 죽음의 이야기의 구조성에 대해
우리는 본능적으로 (중략)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한 겹 바깥에는, 혹은 한 겹 안쪽에는 또 하나의 다른 상자가 있을 거라고 잠재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 이해가 우리 세계에 형체를 부여하고 깊이를 주는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옴진리교 사람들은 입으로는 '다른 세계'를 희구하지만, 실제 그들의 세계의 성립 방식은 기묘하게 단일하고 평면적입니다. 어느 부분에서 전개가 멈춰버렸어요. 상자 하나의 분량밖에 세계를 바라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약속된 장소에서> 295쪽
자살이라는 하나의 단편적이고 기묘한 상자 하나의 분량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바라본다. 물론 투신 자살한 사람의 그럴 수 밖에 없던 고민과 자살을 시도한 아주머니의 그 처절한 고통을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니다. 또 그럴 수도 없고 말이다.
다만 우리는 그리고 나는 그 누구도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마치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는 듯이 저 기묘한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려 있는 것은 아닐지 하고 추측을 해 본다.
<약속된 장소에서>는 말한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가진 것을 버리는 동시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고통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사람은 진정으로 신용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갈등이라는 게 사라져 버리니까요. - 298쪽
이 책을 읽으며 단순히 옴진리교라는 이해할 수 없는 컬트 종교에 대한 인터뷰 집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결국 옴진리교가 발생된 뿌리,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도 결국은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의 거대한 주제와 밀접해 있다.
사람들은 욕망이란 것이 다 채워지지 못할 때 그리고 고난이라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짓누를 때 자살이라는 죽음이 그것에 대한 해답인 것처럼 행동을 한다. 이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신이 그 고통을 감수하고 인내하고 가야하는데 그것이 인생인데, 그러지 않고 죽음의 이야기 모든 것을 절대귀의하고 자신의 믿음을 그곳에 바쳐 버린다.
그럼 그런 죽음의 이야기에서 회복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야오 : 작은 상자에 들어가서 자꾸 생각에만 잠기려고 할 때, 그것을 저지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인간관계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죠. 감정입니다. 그것이 작동하면 왠만해선 그런 조그만 상자에 들어 가지 않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질 테니까요.
하루키 : 균형감각이 작동한다는 뜻이군요. - 313쪽
자살 시도를 한 아주머니는 며칠 뒤 관리사무소로 편지를 한 장 보내왔다.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너무 어려워져.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말이다. (이 집은 한 달 임대료 15만원이 3백만원이나 밀려 있었고, 가스비도 백만원이나 밀려 있었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남은 것은 이 집 뿐이다. 그 집 만큼은 지키고 싶다고 편지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서 썼다.
소장님은 그 편지를 읽으신 후 그 아주머니를 찾아가 대화를 하셨고, 소방대원이 열쇠고리들을 다 뜯어내 문이 완전 찌그러져 문을 잠그지도 못하고 민망하게 집 안에 있는 아주머니를 위해 현관 문을 공짜로 달아주셨다. (아파트 현관문은 70~80만원 정도 한다.)
나는 같이 일하는 전기 주임님과 함께 그 집에 올라가 열쇠를 달아 주라는 관리 사무소의 지시를 받았다. 우리가 열쇠를 달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계단에 앉아 힘 없이 있는 아주머니를 보며 괜히 우리는 아주머니에게 기분 좋은 이야기도 해 드리고 많이 웃어도 드렸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머니의 자살 시도는 전혀 모른다는 듯이, 열쇠를 고쳐드리고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베시시 하고 힘 없이 미소를 짓는 아주머니를 보며 뭐랄까...마음이 정말 먹먹했다. 그래도 웃는 모습은 예쁘셨다.
그렇다! 지랄 맞고, 이해가 안 가도 웃으며 균형감각을 불 태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약속된 장소에서>는 결국 내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거칠게 읽어 버렸다. 다만 그 안에 있는 심도 있는 주제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깊이 있게 탐구할 작정이다.
하루키는 경고한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위험성을 내포한 컬트 종교 사이에 가로놓인 한 장의 벽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얇을 지도 모른다. - 333쪽.
방심하지 말자. 절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