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일 밤의 우주 - 잠들기 전 짤막하게 읽어보는 천문우주 이야기 Collect 22
김명진 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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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를 꿈꾸는 이들뿐 아니라 지구과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의 천문학 길라잡이 또는 입문서로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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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찍어내는 제왕, 연준 - 미국 중앙은행은 어떻게 세계 경제를 망가뜨렸나
크리스토퍼 레너드 지음, 김승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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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분야 전문기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연준이 미국 경제 정책 결정의 중심 동력이 되었다고 경고한다. 그는 전 캔자스시티 연준 총재이자 FDIC 부의장인 토마스 호니그의 완고한 우려를 중심으로 연준의 양적완화 정책이 은행의 위험 감수를 증가시키고 자산 거품을 부추기며 자산을 소유한 부자와 빈곤층 간의 격차를 확대하는 '배분 효과'를 일으켰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호니그는 금융 위기 당시 연준의 개입을 지지했지만, 연준의 단기적 위험성과 지속적인 완화 통화 정책의 장기적 영향을 우려한 제도주의자로, 양적완화를 "악마와의 거래"로 규정했다. 저자는 호니그를 존경하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연준 정책에 대해 논평하고, 양적완화와 제로 금리에 대한 그의 예측이 이후 10년 동안 현실화하였음을 우려한다.

양적완화의 수혜자는 이 정책을 가장 강력히 옹호한 월스트리트, 부동산 개발업자, 채무자(가장 큰 수혜자는 미국) 등이라고 설득력 있게 말한다. 양적완화는 초저금리 고수익을 추구하기 위해 과도한 위험을 감수하도록 부추겨 자산 거품을 만들고 결국에는 터질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저축에 대한 실질 금리가 마이너스가 되는 등 금융 억압을 가한다. 의회는 연준을 설립하고 연준의 임무로 물가 안정, 고용 극대화, 장기 금리 적정화를 명시했다.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는 7명의 연준 총재와 뉴욕 연준 총재, 나머지 11개 지역 연준의 순환 총재 4명으로 구성된 중앙은행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ederal Open Market Committee)는 이 임무를 뒷받침하는 통화 정책을 시행한다.

중앙은행 총재들은 이 의무를 이행하는 방법과 구속력의 정도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연준에는 인플레이션을 반대하는 매파와 양적완화를 지지하는 비둘기파가 공존하고 있다. 반인플레이션 매파는 비둘기파에 비해 중앙은행이 경제에서 더 광범위한 역할을 맡는 데에 회의적이다. 동정심이 많고 경제와 근로자를 돕고 싶어하는 비둘기파가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는 반면, 매파는 가혹하고 엄격하며 연준이 사람들을 돕지 못하게 막으려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비둘기파의 관념적 동정심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

중앙은행은 돈을 찍어내면 시장이 살아나고, 일자리와 부를 창출하며, 문제가 있는 금융 기관과 기업을 구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다. 그러나 연준은 가치를 창출할 수 없으며, 연준이 경제를 관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오만이다. 연준의 전략가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시장의 방대한 분산 지능과 자정 능력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월스트리트는 끊임없이 연준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 재닛 옐런, 제롬 파월 등 최근 연준 의장을 역임한 4명의 연준 의장 아래서 연준은 의무적으로 시장에 개입했다. 하지만 시장이 불안해할 때마다 개입하면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다.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 주니어(1951~1970)와 폴 볼커(1979~1987) 연준 의장은 경제가 쉽게 돈을 벌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마틴은 연준의 임무는 파티가 한창 달아오를 때 펀치볼을 빼앗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볼커 이후 어떤 연준 의장도 파티를 망치려 들지 않았다.


다른 듣기 좋은 완곡한 표현과 마찬가지로 '양적완화'라는 경제용어는 위기를 피하고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불러일으킨다. 벤저민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연준 할인 창구에서 현금을 조달하는 대형 은행들을 위해 금리를 제로 수준(또는 그 이하)으로 유지하기 위해 만든 이 용어는, 현재 진행 중인 금리 연착륙 시도와 함께 깔끔하고 면밀하게 검토된 법의학적 느낌을 전달한다. 한마디로 ‘이제 모두가 잘하고 있다.’라는 뜻으로 읽힌다. 저자는 양적완화 시대와 그 유산을 흥미진진하고 면밀하게 보고한 이 책에서 양적완화의 숨은 의미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자산 거품을 만들어낼 테다’에 훨씬 가깝다고 밝힌다.

버냉키는 2008년 경제 붕괴 이후 더디게 굴러가던 경기 회복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특히 약 2년이 지난 지금도 두 자릿수에 육박하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사실상의 양적완화 정책을 개척했다. 연준은 대침체가 한창일 때 담보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례 없이 불안정한 담보 부채를 직접 매입하면서 이 정책을 처음 실험했다. 하지만 2010년 버냉키 의장은 훨씬 더 광범위한 조치, 즉 주요 은행에 무이자 대출을 제공하여 경제 전반에 새로운 현금을 공급하는 계획을 제안했다. 연준은 단 몇 달 만에 6,000억 달러의 양적완화 자금을 경제에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는 위기 이전에는 그 정도의 달러를 통화 기조에 추가하는 데 약 60년이 걸렸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연준의 통화 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한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버냉키는 투자자들이 더 잦은 빈도로 더 많은 금액을 소비하도록 투자자들의 안전한 자산을 압류하였다. 이제 은행은 원하든 말든 돈을 빌려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양적완화는 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피난처를 제한하는 동시에 금융 시스템에 돈이 넘쳐나게 한다. 2010년 부진한 경제 성장으로 양적완화는 더 많은 돈과 더 저렴한 대출, 쉬운 신용으로 시중에 자금을 공급하여 은행이 이전에는 자금을 지원하지 않았던 새로운 비즈니스에 자금을 지원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양적완화가 향후 10년 동안 국가의 기본 통화 정책으로 자리 잡으면서 매우 다른 역학 관계가 시작되었다. 시장에 걷잡을 수 없는 현금의 물결이 넘쳐나면서 투자 경제는 점점 더 필사적인 돈세탁 작업과 비슷해졌고, 실제 경제 성과와 상관없이 투자자와 규제 당국에 서류상으로는 생산적인 기업처럼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조작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따라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수익성 있는 투자 공식이 기능적으로 역전되어, 무분별한 자본이 더욱 기발하고 위험한 상품으로 빠져나가고 실물 경제의 기초 자산은 악의적인 방치 상태로 침체하였다.

첫 1분기 경제성장률 결과는 분명 모호하고 고무적이지 않았다. 일자리 증가는 여전히 빈약했고, 주류 경제 언론은 실현되지도 않은 인플레이션에 대해 걱정했다. 이에 버냉키는 2012년 여름 더 큰 규모의 새로운 양적완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연설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투자자들에게 더 많은 공짜 자금이 공급될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한편, 그는 연준 의장의 정책 권고안을 승인하는 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12개 지역 위원들에게 ‘5,000억 달러 규모로 시작하되 이후 경제 상황에 따라 개방형으로 진행하겠다’는 새로운 양적완화에 대한 단합된 입장을 제시하기 위해 조용히 로비 활동을 펼쳤다.


투표에 앞서 버냉키는 일부 연준 경제학자들에게 월스트리트에 더 많은 양의 공적 자금을 공급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에 대한 발표를 준비시키는 동안, ‘이 새로운 자금 공급은 긴급한 조치이고 쉽게 철회할 수 있으며 위기 동안 연준이 관리해 온 익숙한 통화 정책 채널 내에서 억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저자는 방대한 문서로 작성된 이 예측이 거의 모든 중요한 예측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였음을 지적한다. 그는 2013년과 2014년까지 제로 금리를 유지한 후, 단기 금리가 4.5% 이상으로 점차 성장 친화적이지만 덜 과열된 현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 주장했다. 실제 2016년 말 금리는 0.4%에 불과했고 2018년 중반에는 2% 미만으로 새로운 양적완화 구상에서 목표한 금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가상 수요의 공짜 자금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던 월스트리트는 더 많은 자금에 대한 끝없는 욕구를 드러냈다. 연준이 5천억 달러로 제한하였던 양적완화 규모는 2013년 말 1조 달러 이상으로 급증했고, 연준 대차대조표의 자산도 급증하여 2016년에는 4조 2천억 달러로 늘어났으며, 그 후 2년 동안 그 수치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반면, 냉정한 FOMC 보고서는 새로운 양적완화 정책의 첫 상반기 동안 3조 5,000억 달러로 정점을 찍고 2019년에는 1.9조 달러로 소폭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거시 경제 예측과는 별도로, 버냉키 계획의 또 다른 큰 문제는 이 모든 현금이 어디에 축적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버냉키는 침체된 노동 경기를 부양하려고 했지만, 제로금리정책이 주로 투자 세계의 최상위층에 윤활유를 공급했다. 자산 가격 인플레이션은 양적완화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인데 정확히 바로 그 자체가 목표였다. 자산 가격 상승이 경제 전반으로 파급되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부의 효과'가 기대되었다. 연준의 고위 지도자들은 부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최상위 부유층에게 먼저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연준의 자체 분석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자산을 광범위하게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012년 초, 미국인 중 상위 1% 부자가 전체 자산의 25%를 소유했고 하위 절반의 미국인은 전체 자산의 6.5%만 소유했다. 연준이 한 일이라고는 자산 가격을 부추기면서 극소수 최상위층을 도와준 것뿐이다.

2013년 버냉키가 양적완화 축소 계획을 조심스럽게 발표했을 때, 전반적인 성장세가 둔화되고 노동 경제의 일부가 회복될 조짐을 보였다. 월스트리트는 패닉 상태에 빠졌고, 경제 전문가들은 버냉키가 연준 지원 자산 거품에서 살짝 벗어난 데에 경의를 표하였으나 곧 '테이퍼 탠트럼'이라고 부르는 시장 침체를 겪게 되었다. 투자자들은 연준이 그동안 유도해 온 고위험 자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국채 금리는 급격히 치솟았다. 테이퍼 탠트럼은 연준에게 양적완화를 지속하는 데 더욱 전념할 것을 강요했다. 매입을 계속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매입을 이어갔으며 계속 그러리라는 확신을 시장에 심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실행했다. 은행 시스템에 현금이 계속 넘쳐나자, 민첩한 브로커와 펀드 매니저들은 전이되는 부채를 잡기 위해 이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금융 상품인 대출채권담보부증권(CLO)으로 몰려들었다. 2008년 세계 경제를 무너뜨릴 뻔했던 악명 높은 담보부 대출채권과 마찬가지로, CLO는 위험하고 모호한 레버리지 부채를 트랜치로 재포장하여 대형 펀드들이 계속해서 더 큰 수익과 은행 수수료로 전환하는 데 활용하였다. 물론 문제는 호황을 누렸던 CLO 시장이 부채담보부증권(CDO)의 전신과 마찬가지로 투기 열풍으로 변질되면서 실제 경제 상황과 괴리되었다는 점이다.

정크본드의 사기성과 무능을 밝혀내 투자자들이 정크본드를 버리거나 이자를 올려서 자금을 조달하는 데 몰두하는 정크본드 분석가인 비키 브라이언은 2014년과 2015년 투기 광풍이 한창일 때 자신의 연구 결과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이는 연준이 2010년에 시작하여 이후에도 계속했던 일의 결과다. 인위적인 바닥이 있고, 그 바닥의 더 높은 부분은 연준이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시장에서는 손실을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손실 없는 시장은 있을 수 없다. 양적완화 시기의 CLO 시장은 2010년 3,000억 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2018년 6,170억 달러로 두 배 이상 성장하였다.

시장을 휩쓸었던 또 다른 주요 버블 지표는 주식 환매였는데, 환매는 막대한 부채 위험 때문에 외환위기 이전에는 비교적 드물었던 수단이다. 2010년대 바닥을 쳤던 시장에서는 자사주 매입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는데, Forbes에 따르면 대표적인 사례로 맥도날드는 2014년부터 2019년까지 210억 달러의 채권과 어음을 차입한 후 투자자들에게 500억 달러 이상의 자사주 매입을 제안했으나 310억 달러의 이익만 실현한 것으로 밝혀졌다. 시장에서 훨씬 덜 튼튼한 기업의 경우, 이 새로운 거꾸로 된 부채 조달 논리는 자기 자본을 직접적으로 먹어 치웠고, 경기 침체와 인수 입찰에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밀워키에 본사를 둔 산업 부품 제조업체 렉스노드의 운명을 살펴본다. 대부분의 거품 금융과 마찬가지로, 이 회사 이름에 큰 의미나 근거는 없다. 2006년 제롬 파월 당시 미 연준 의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규모 사모펀드인 칼라일 그룹이 이 회사를 인수한 후, 렉스노드는 연이은 부채 중심의 인수 입찰에 휘청거렸다. 칼라일은 회사를 다른 대형 증권사인 아폴로 그룹에 매각했고, 아폴로 그룹은 다시 회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CLO 상품을 출시하는 등 저자가 ‘위험 기계’라고 칭한 월스트리트의 부채 조립라인이 무너져 내렸다. 그 결과 렉스노드는 완전히 새로운 경제적 존재 이유를 얻게 되었으며, 저자의 표현대로 사모펀드 업계의 상징이 되었다. 더 이상 빚을 내서 목표를 달성하는 회사가 아닌, 부채 상환을 목표로 하는 기업이 되었다. 2014년 기업 부채가 20억 달러에 달했던 해에 렉스노드는 1억 9,000만 달러의 이자를 지불하였고 수익은 3,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기존의 시장 논리를 모두 무시하고 이사회는 2015년에 2억 달러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승인했으며, 향후 2년간 1억 2,100만 달러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추가로 승인했다. 월스트리트의 대부호들에게 매력적인 회사로 보이기 위해 렉스노드는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주요 볼 베어링 공장을 폐쇄하고 공장과 300명의 일자리를 멕시코 몬테레이로 이전했다.

저자는 댈러스의 집에서 15시간을 운전해 면접을 보러 온 후 그곳에 고용된 기계 운전사 존 펠트너의 격정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펠트너와 그의 아내는 인디애나폴리스 외곽 교외에 정착할 주택 구입을 위해 저축을 시작했다. 펠트너는 렉스노드에서 노조 대표를 맡고 있었고, 2016년 선거 기간 동안 도널드 트럼프가 인디애나의 또 다른 대형 제조업체인 캐리어 에어컨 회사가 700개의 일자리를 더 저렴한 글로벌 노동 시장으로 이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규모의 공허한 싸움을 벌였을 때 펠트너는 공화당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펠트너와 동료 노동자들이 언론을 통해 자신들의 처지에 알리고 트럼프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했으나 캠페인은 실패로 돌아갔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실직 노동자들의 대의를 선전하려는 그의 관심은 예상대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제롬 파월을 연준 의장에 임명함으로써 일부 시장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파월은 월스트리트와의 긴밀한 관계 덕분에 연준 공개시장위원회에 합류했을 때 초기 양적완화 회의론자였다. 그러나 테이퍼 탠트럼 이후 파월은 버냉키의 프로그램을 사실상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러한 확신은 연준의 '레포 시장'위기에 직면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레포 거래에서는 위험을 회피하는 투자자들의 안전한 피난처인 국채가 대출 담보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2019년 9월, 이 거래의 금리가 놀라운 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은행이 대출을 감당할 수 있는 현금 보유액이 부족하다는 대출 기관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대개 레포 금리가 0.3% 인상되면 경고 신호로 받아들여졌으나 지금은 2.5~3%까지 상승했고 결국 9% 이상 오를 것으로 예상되었다.

투자 경제의 전반적인 변화를 주도한 헤지펀드가 레포 자금을 인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설상가상으로 헤지펀드는 소위 그림자 금융 시스템의 주도 기관으로서 장부 내용을 연준에 공개할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연준은 손실 규모를 제대로 측정할 수 없었다. 다만, 다른 종이 경제와 마찬가지로 레포 시장에서 헤지펀드 거래가 2008년 약 1조 달러에서 2019년 약 2조 달러로 양적완화 하에서 급격히 확대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또 다른 시장 붕괴의 유령이 구체화하면서 파월의 연준은 또 다른 대규모 구제금융을 조율했는데, 이 구제금융은 연준 정책의 지루한 관료주의적 논리에 가려있어 저자는 이를 ‘보이지 않는 구제금융’이라 부른다.


저자가 위기 상황을 다룬 한 법의학 보고서를 요약한 바에 따르면, 레포 시장이 헤지펀드에 폐쇄되면 헤지펀드는 2008년에 청산한 금액의 두 배에 달하는 수준에서 국채와 모기지 증권을 청산해야 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다시 말해, 수년간의 양적완화 끝에 연준은 2008년 끔찍한 폭락 당시의 두 배에 달하는 강제 청산 사태를 간신히 피한 셈이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은 시장이 안정적인데다 상승 중인 날씨 화창한 시장 호황에 벌어진 일임을 지적한다. 당연히 당황한 연준은 붕괴가 우려되던 첫날 750억 달러를 레포 시장으로 옮겼고, 한 달 반 후 레포 시장을 하루에 100억 달러씩 부양하고 있었다.

이듬해에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고 미국 경제의 상당 부분을 봉쇄하는 긴급 공중 보건 조치가 취해지면서 경제가 본격적으로 추락했다. 연준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의회가 미국 기업과 가계에 대한 소득 이전 자금을 직접 지원하는 2020 케어스 법안을 통과시켰을 때, 미국 정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공공 자원의 최대 지출을 감독했다. 그러나 2020년의 경제 회복은 특정 기관에만 자금이 흘러 들어가는 게이트형 회복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중산층은 소득력, 협상력, 임금에서 길고 깊은 하락세를 경험했다. 2010년부터 2020년까지 10년 동안 이 궤적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경제는 성장했으나 그 성장의 혜택은 점점 더 적은 인구가 나눠 가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결과는 충분히 예상된 결과였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현대 역사상 최초로, 그리고 가장 강력한 종속 규제 기관, 즉 공익을 위해 억제해야 할 대상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연방 감독 기관 중 하나이다. 진보적 개혁가들은 통화 가치에 노동과 농작물 교환에 가중치를 두려는 포퓰리스트당의 급진적 하위 재무부 계획에서 그 구조를 차용했다. 금융 부문의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새로운 연방 준비 제도를 설계한 사람들은 산업화 시대 미국에서 광대하고 점점 더 많은 경제적 불안정의 원인인 은행 산업에 전권을 넘겼다. 이러한 시장 경련의 최전선에 있는 미국인 계층의 대표자는 공개시장위원회에 배정되지 않았고, 그들의 곤경은 일반적으로 실업률과 원자재 가격 변동을 감시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Fedspeak에서 다루어졌다. 연준 정책 엘리트와 금융 저널리즘계 모두의 골칫거리인 인플레이션조차도 일반적으로 레포 시장에서 헤지펀드가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관대한 조건으로 대출받아야 하는 채무자에게 유리하다. 통화 가치가 하락하면 대출 기간의 이자를 적게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19세기 포퓰리스트 운동이 금본위제에 반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2010년 미국 민주주의 붕괴를 반영하고 분열을 가속하여 타락한 미국 미디어 생태계 덕분에 양적완화 시대의 모든 함의가 실시간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음을 냉철하게 지적한다. 연준이 수십 년 동안 쉽게 돈을 찍어내면서 초래한 막대한 경제적, 사회적 피해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옳은 지적이긴 하나, 아쉽게도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금융 평론가 및 경제학계 역시 연준이 심각한 결함이 있는 도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강력한 연준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비둘기파적인 연준의 정책은 버냉키의 후임자인 경제학자 재닛 옐런의 재임 동안 대부분 지속되었다. 하지만 2017년부터 연준은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자산을 축소하기 시작했다. 2018년에는 제롬 파월이 옐런을 대신했다. 금리 매파는 아니었지만, 파월은 냉철하고 사려 깊었으며 사모펀드에 대한 배경을 고려할 때 양적완화의 매력과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19 팬데믹과 정부에 의한 봉쇄 조치가 시작되었다. 파월의 연준은 2020년 6월 10일까지 대차대조표가 7조 2,000억 달러에 달하는 등 유동성 공급의 소화전을 열었다. 그리고 당파 싸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악연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2020년 3월 25일 2조 달러 규모의 CARES 법안을 통과시켰다. 봉쇄 조치 이후 연준은 계속해서 쉽게 돈을 풀고 있다. 2022년 3월 말까지 대차대조표는 8조 9,000억 달러로 늘어났고 인플레이션은 1981년 12월 이후 최고치인 8.5%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여전히 시장의 자기 조절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현대 국가는 신뢰할 만한 형태의 통화가 필요하므로 자유 은행을 ‘미치광이’라고 가볍게 일축하며 중앙은행 없이는 모든 것이 작동불능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중앙은행은 역사와 최근의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마법 같은 존재가 아니다. 1913년 연준이 설립된 이래 미국은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여러 차례의 경제 및 금융 위기를 겪었으며, 그중 상당수는 연준이 직접 초래한 것이었다. 밀턴 프리드먼은 미국의 어떤 주요 기관도 이렇게 오랫동안 저조한 실적을 기록하면서도 대중의 평판이 높았던 기관은 없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경제 #돈을찍어내는제왕연준 #세종 #서평단 #리뷰어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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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찍어내는 제왕, 연준 - 미국 중앙은행은 어떻게 세계 경제를 망가뜨렸나
크리스토퍼 레너드 지음, 김승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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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구적 경제를 쥐락 펴락하는 필요악 연준의 실체를 파헤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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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심리학자, 메타버스를 생각하다 - 사람이 모이는 가상공간은 무엇이 다른가
김지헌 지음 / 갈매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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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이사를 오가면서 실제 입주에 앞서 가구회사의 도움으로 가상의 공간에서 가구를 배치해볼 수 있었다. 물론 수백만 원어치 새 가구를 구매하는 고객에 대한 서비스이기도 했다. 담당 직원이 직접 집을 방문하여 필요한 곳을 실측하고 수치를 DB화한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이사 당일의 수고로움과 혼잡을 피하고 최적의 공간을 활용하였다. 덕분에 모든 가구가 한 번에 깔끔하게 배치되었고, 일상에서 가상공간의 영향력을 처음으로 직접 겪어볼 수 있었다.

 

오늘날 메타버스 논의는 주로 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 분야의 기술 발전, 그리고 가상현실을 비즈니스 모델에 적용해 돈을 버는 방법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와 달리 나는 소비자 심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인간이 가상세계의 여러 자극을 감각기관(, , , , 피부)을 통해 어떻게 받아들이며, 또 어떻게 처리하여 반응하는지에 관심이 많다. 인간은 이러한 정보 처리 과정과 반응을 거쳐 가상세계에서의 경험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9)

 

요즘 한참 떠오르는 용어 메타버스는 현실에서의 상호작용을 가상공간에 구현한 여러 가지 형태나 콘텐츠들을 통칭하는 신조어이다. 초월(beyond), 가상을 의미하는 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universe의 합성어로, 1992년 출간된 소설 '스노우 크래시' 속 가상 세계 명칭인 '메타버스'에서 유래한다. 컴퓨터와 콘솔게임으로 모니터를 보며 즐기던 2차원 게임 방식에서 3차원 체험형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 확장현실로 형태가 급속도로 진화 중이다. 단순히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일선 기업과 산업 현장에도 적용되어 메타버스를 이용해 설계와 공정 작업 등 현장에서 더 입체적이고 정밀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심리학의 관점으로 메타버스 가상현실을 바라본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대부분의 과학적 연구는 실험으로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개념을 가상세계에 접목하면, 심리학 관점의 가상세계 연구는 가상세계에서 인간이 보이는 생각과 행동의 이유와 방향을 실험을 통해 밝혀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36)

 

마케팅의 한 분야로서 브랜드 심리학자인 저자는 서문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이 될 수 있는지, 거대한 고래에 비유한 메타버스를 보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가상공간이 과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등을 물으며 심리학자의 관점에서 메타버스 세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우선, 다양한 가상공간의 종류와 개념부터 훑어보자.

첫째,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은 현실세계와 이와 관련된 디지털 정보를 통합한 것으로, 카메라를 통해 화면에 나타난 현실 모습에 가상의 물체를 실시간으로 표현하는 기술이다.

둘째,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은 현실세계 또는 그 현실세계 안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3D 가상 이미지로 완벽하게 구현한 것으로 현실을 왜곡하거나 사용자를 완전히 다른 가상의 환경으로 데려온다.

셋째, 혼합현실(MR, Mixed Reality)은 가상과 현실의 결합 측면에서 AR과 비슷하지만 현실과 가상이 실시간 상호작용을 한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섞어서 VR 헤드셋을 통해 보여주는 것으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VR 헤드셋의 카메라를 통해 현실 세계를 볼 때 가상 ​​객체가 시야에 매끄럽게 혼합되는 것처럼 가상 객체를 현실 세계에 혼합하는 방법이 있고, 다음으로 가상 세계에서 플레이하는 VR 게이머를 보는 이용자의 카메라 뷰처럼 실제 객체를 가상 세계에 혼합하는 방법이 있다.

넷째, 확장현실(XR, Extended Reality)MR의 확장된 개념으로 여러 사람이 동시에 접속하여 그들 간에 상호작용이 가능한 것이다.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을 포함한 몰입형 기술을 총칭하는 용어다.

 

기업은 다양한 레이아웃의 가상스토어를 구축한 후 소비자의 구매 동기와 패턴에 적합한 유형의 매장을 제시하는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빠른 시간에 원하는 제품을 구매하려는 실용적 소비 성향(utilitarian motivation)을 가진 소비자에겐 매장 이동의 편의성이 쇼핑의 즐거움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아방가르드 매장과 실용적 매정에서 쇼핑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이 유리하다.(82)

 

이 책은 전체 410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에서는 가상 세계에서도 심리학이 필요한 이유를 다룬다. ‘대성당 효과와 같이 천장의 높낮이와 형태를 바꿔 창의성 발현을 유도하고, 가상 공간의 회의실 좌석을 업무 특성에 맞도록 배치하는 등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공간의 재배치를 논한다.

2장은 사람을 모으는 메타버스 브랜딩이다. 본래 소의 소유권을 표시하던 용도의 낙인(브랜딩)21세기에 와서는 그 자체로 제품의 상표가 되었다. 실물 제품을 매장에서 직접 보거나 만지지 않아도 구매를 유도할 수 있는 기술적 방법을 논한다.

3아바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에서는 매장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상황별로 사람의 감정이 실린 아바타에게 외모와 성향을 부여함으로써 소비자의 구매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을 살펴본다.

4메타버스, 가치를 설계합니다에서는 시각과 촉각, 음성 등 실제에 가까운 감각을 제공하여 소비자의 만족도를 높이며, 매장의 온도와 색상을 적절히 활용하여 구매심리까지 미치는 영향을 돌아본다.

 

가상현실에서 시각 정보만이 아니라 촉각의 피드백을 함께 제공할 경우 신체 소유감과 실재감이 증가했으며 완벽한 촉각이 아닌 유사 자극, 즉 초음파 피드백만으로도 유의미한 효과가 나타났다. 이는 신체 소유감이 심리적 소유감을 높이고 제품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도록 만든다는 기존 연구를 참조해볼 때, 촉각 피드백의 중요성과 의미를 잘 보여준다.(175)

 

이 책의 근간은 실제와 마찬가지로 가상공간 역시 소비자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환경을 갖추어야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된다는 발상으로, 이를 위해서는 결국 인간의 특성을 깊고 상세하게 파악할 것이 요구된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될수록 인간다움이 더욱 중요해지고 인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는 기업이 메타버스 가상현실에서 소비자에게 노출하는 사전 시각 정보를 신중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미국의 메타버스 플랫폼 개발 업체인 스페이셜(spatial)과 같은 기업들이 가상건물의 로비와 매장 입구에 NFT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러한 NFT 작품들은 기업이 의도하지 않게 시각적 점화를 유발함으로써 소비자의 평가 기준을 바꿀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224)

 

저자는 우리가 메타버스 가상공간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과학적으로 준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세 가지에 유의할 것을 당부한다. 첫째, 인간은 다중 감각 정보에 노출되면 이를 통합 관점에서 인식하는 존재이므로 가상공간에서의 인간 행동을 예측하려면 여러 감각 정보 조합에 따른 인간 반응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이들 정보는 대개 무의식적 반응의 결과이므로 소비자를 기만하는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셋째,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가상공간 기술력에 지나친 기대는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인터넷 버전 소비자 마케팅으로 부를만한 이 책을 인터넷 쇼핑몰이나 가상공간에서의 마케팅과 소비자 심리 분석에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한 길라잡이로 추천해 드린다. (20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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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를 알면 보이는 것들 - 공간은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짓는가
정은혜 지음 / 보누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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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에 관한 기억 한 조각

나에게 지리 과목은 1987년 대입 학력고사에서 유일하게 만점을 받았던 암기과목의 대명사였다. 유명 코미디언의 형님이셨던 암기 9지리 선생님 덕분에 지리는 암기 능력과 더불어 2미터 거리에서 날아오는 침을 피하는 내공을 익힐 수 있었다. 위생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는 길거리 리어카에서 해삼 멍게를 팔았고, 동해안에서 가장 많이 잡혀 가출 청소년도 부담 없이 사 먹을 정도로 흔했던 꽁치는 연탄불에 바짝 구워 팔던 인기 술안주였다. 대학 졸업 후 기술 영업사원으로 취직하였을 때는 아직 GPS가 상용화되기 전이라 두툼하고 커다란 축소판 전국지도책을 펴들고 도로망을 공부하였고, 처음 가는 업체에 약도를 팩스로 넣어달라고 말하는 게 방문순서의 정석이었다. 고등학교 때 달달 외웠던 전국의 지명 덕분에 도로표지판만 읽으면 동서남북을 헤매지 않고 다닐 정도였다. 지리를 알면 길이 보였다.

 

장소는 우리 삶의 양식과 정체성을 규정짓는 틀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장소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러한 장소의 의미를 연구하는 지리학은 삶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31)




# 책의 구성

이 책은 전체 6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장은 지리와 연관된 각각 장소(지리상식), 세계(세계화), 경관(국가 정체성 및 상징성), 경제(돈이 모이고 퍼지는 곳), 도시 및 도시화(자연발생 및 계획도시), 도시구조와 디자인(역사의 격동성)을 다룬다. 1, 3, 4장의 끝에 제공된 지리학 특강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한, 딱딱하고 지루하기 마련인 지리학 관련 용어를 요점 나열식으로 술술 풀어내어 부담스럽지 않으며, 시각 자료가 모두 총천연색에 설명이 잘 곁들여져 있어 이것만 들여다보아도 좋을만큼 매우 알차고 유익하다. 전체 분량은 300쪽이 안 되지만 두꺼운 재질의 종이다 보니 400쪽 분량과 맞먹는 두께다. 한 손에 쥐고 앞뒤로 넘기며 읽기에는 조금 불편한 감이 있다.

 

정확히는 제퍼슨 동상의 눈이 백악관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요. 이는 미국의 법을 제창한 사람으로서 현재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항상 견제하고 있겠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165)

 

# 지리만 다루지 않는 지리책

지리 과목을 선택한 학생이 아니더라도 교양서로 고를 법한 제목이지만 사실 이 책이 다루는 분야는 지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지리를 앎으로써 무엇을 얻느냐고? 사실 지리와 관련되지 않은 일이 전혀 없다 할 정도로 세상 모든 일이 다 지리적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take place발생하다란 의미의 영 단어인데, 직역하면 장소를 차지하다 또는 가져가다가 된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는 뜻은 공간을 차지했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는 것을 알았다. 지리와 연계하여 발생하는 일이란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종교, 사회 등 인류가 지나온 거의 모든 기록의 영역을 아우른다.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다수의 영화이다. 영국의 한 탄광 빈민촌에서 발레리노의 꿈을 키운 <빌리 엘리어트>, 래퍼 에미넴이 주연하여 한때 자동차 산업의 성지였으나 쇠락한 도시의 사회적 인종적 갈등을 그려낸 <8마일>, 대항해시대에 외부 세계와의 충돌로 멸망해간 멕시코 문명의 비극을 그린 <미션><1492 컬럼버스>, 쌍둥이 같은 운명의 두 도시 홍콩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신흥 공업도시의 성장과 동성애자 삶의 애환을 그린 <해피투게더><엄마 찾아 삼만리>가 등장한다. 이외에도 <마루타>, <엘도라도>, <천국의 아이들>, <시티 오브 갓> 등 다수의 영화가 인용되며 공간적 배경으로서의 지리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도심재활성화(gentrification)라는 개념도 최근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어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되고, 이들이 기존의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으로, 원래 그곳에 살던 많은 주민이 쫓겨나듯 이주하는 등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2009년 용산 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일명 용산 사태)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예입니다.(252)

 

# 맺는말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모든 지역은 도시화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과거의 문명 발상지가 오늘날 폐허가 되듯 도시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흥망성쇠를 반복한다.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어떻게 기능을 하게 될지, 인간은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지, 생활 양식(genre de vie)은 어떻게 변화할지 등 자못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지리를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인간이 가져온 공간의 개념을 새로이 받아들인다. 인간과 공간이 서로를 변화시키며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단순한 암기과목에서 벗어나 공간을 연구하는 하나의 과학으로 접근하는 시각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재미난 지리 교양 서적으로 읽어둘 만하다. (202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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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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