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된 인생 - 쓰레기장에서 찾은 일기장 148권
알렉산더 마스터스 지음, 김희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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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은 평소 애정하는 범죄 스릴러나 고전 문학, 또는 특정 주제를 깊게 파고드는 부류의 글은 아니지만 읽는 경험은 의외로 상쾌했다. 저자 알렉산더 마스터스는 겉으론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특별한 삶을 기록해 온 전기 작가인데, 이번에는 이름조차 모르는 한 인물의 전기를 쓰는 데 도전한다. 시작은 케임브리지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148권의 일기장이었다. 그는 주인공을 그냥 라고 부르며, 겉으로는 보통이지만 속으로는 열정과 좌절, 분노와 미완의 야망으로 출렁였을 삶을 가능한 한 성실하게 복원하려 한다. 제목만 보면 거창하고 극적인 복수전이 기다릴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름 없는 보통 사람 한 명의 삶을 끝까지 존중하는 법을 배워가는 여정에 가깝다.

 

일기는 1950년대 초 의 십대 시절부터 시작해 수십 년에 걸친 보통의 시간을 빈틈없이 적어 내려간 기록이다. 저자는 필체 감정가의 도움까지 구해 가며 탐정 놀이하듯 단서들을 맞춰 나간다. 추적 끝에 드러난 일기의 주인은 로라 프랜시스(Laura Francis)’. 케임브리지에서 한 노교수의 집에 상주하며 동거·가사 돌봄을 맡았던 인물로, 마스터스는 그녀의 일기에서 뽑은 문장들로 단편을 엮어 파리 리뷰에 실어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 책이 곧장 전기의 전형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실상은 전기 그 자체라기보다 전기를 쓰는 사람의 이야기에 가깝다. 일기가 발견된 순간부터 마스터스의 추적이 시간순으로 이어지지만 정작 일기 본문은 굳이 재배열하지 않는다. 덕분에 미스터리가 하나씩 풀려가는 긴장감이 살아난다. 전기를 쓴다는 일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가설에 의존하는지, 방대한 자료를 앞에 두고도 끝내 메울 수 없는 빈칸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메타 전기다.

 

마스터스의 추진력은 집요함에서 나온다. 그는 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동네 도서관의 지리 코너부터 필적학자, 음악학자, 철학자, 심지어 사설탐정까지 두드린다. ‘가 남긴 일기의 양만 놓고 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일기를 쓴 사람으로 기록될 만하다는 말도 따라붙는다. 이 탐사는 우연히도 마스터스의 개인적 인생사와 겹친다. 함께 일기를 건져 올린 친구 다이도 데이비스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던 때, 오히려 는 점점 선명한 존재감을 획득하며 작가에게 목적과 추진력을 준다. 이 감정선은 쉽게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호기심과 열정으로 단단히 조율된다.

 

한편으로 전기문을 구성하는 그의 방식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그는 일기를 손에 잡히는 대로 뒤적이며 오랫동안 연대기적 정리를 미룬다. 필적학자의 조언에도 반신반의하고, 정답에 가까운 단서를 한동안 외면하기도 한다. 그는 이를 세계 최초의 무명 전기라는 이상과 탐정 놀이의 즐거움으로 정당화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때때로 일부러 속도를 늦추는 것처럼 느껴진다. 몇 페이지에 걸쳐 글씨의 기울기와 팔 길이로 의 키를 계산하는 장면은 뜻밖의 웃음을 주면서도, 정작 핵심을 피하려는 엉뚱함으로 비치기도 한다.

 

일기 속 의 목소리는 기발하고 코믹하며 때로는 뭉클하다. ‘c느낌같은 독창적인 표현이 불쑥 등장하고, “내 일기는 불멸의 가치가 있다는 선언이 반복된다. 초반에는 신체 감각과 유명 배우에 대한 집착이 눈에 띄고, 후반으로 갈수록 TV 시청 기록과 주변 인물 ‘E’, 그리고 그녀가 간수라 부르는 고용인과의 관계가 중심을 이룬다. 젊은 시절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60년대를 만끽했지만 일과 관계에서는 번번이 좌절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연민을 자극하면서도 쉽게 호감 가는 인물은 아닌, 불편하지만 솔직한 초상이다.

 

중반부에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온다. 마스터스가 단서들을 엮어 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아내고, 과연 비밀의 문을 두드릴지 말지 고심하는 지점에 이르는 것이다. 이 발견은 독자에게도 심장이 뛰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다만 정체를 공개하는 방식에는 윤리적 고민이 따라붙는다. 책 속 이름 로라 프랜시스가 실명이 아닐 수 있고, 이미 세상을 떠난 주변 인물들의 이름 역시 가명일 가능성이 있다. 사생활 보호라는 당연한 이유가 있지만, 텍스트가 만들어 내는 미학적 긴장과는 어긋나는 지점이 있다. 마스터스의 문장은 유려하고 유머러스하며 세심할 때가 많지만, 종종 기행과 곁길로의 우회가 길어져 독자는 피로해진다. 특히 연대기적 정리나 큰 그림의 제시를 늦추는 선택은 미스터리의 긴장을 살리면서도 독서의 보폭을 더디게 만든다.

 

그럼에도 이 책의 성과는 분명하다. 첫째, 전기 쓰기의 본질가설과 환상, 과도한 기대와 오류가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고 또 무너뜨리는지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둘째, 방대한 일기 속 지루함과 진실성을 꾸밈없이 기록한다. 셋째, 실패와 일상의 질감을 연대기라는 평범한 결말로 내려놓으며 기대와 현실의 간극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개인적으로도 공명하는 지점이 많다. 띄엄띄엄 일기를 써 본 경험이 있거나, 오래 누군가의 글을 해독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일방적 관계의 밀도와 더 알고 싶은 갈증을 선명히 느낄 것이다. 짧은 장 구성과 경쾌한 문체는 잠들기 전에 한 장만 더읽고픈 스릴러 같은 흡인력을 지녔다. 동시에 주인공도, 저자도 끝내 완전히 사랑스럽지는 않다는 냉정한 인상도 남긴다. 좋은 소재를 아깝게 흘려보낸 것 같으면서도 그 실패에는 나름의 품위가 있다는 양가적 평가가 공존한다.

 

결국 회계 용어를 빌리자면 이 책은 마치 이중장부 같다. 하나는 라는 인물의 흩어진 삶의 기록, 다른 하나는 그것을 쫓으며 자신의 한계와 집착, 애정과 미루기를 낱낱이 드러낸 사람 냄새 나는 전기 작가의 기록이다. 미스터리의 긴장과 메타 전기의 자의식을 원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충분히 매혹적일 것이다. 반대로 탄탄한 조사, 빠른 결론, 입체적인 인물상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불친절할 수 있다. 한 줄 평을 달자면, 이 책은 불완전하지만 솔직한 전기적 모험담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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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된 인생 - 쓰레기장에서 찾은 일기장 148권
알렉산더 마스터스 지음, 김희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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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작가가 쓴 불완전하지만 솔직한 전기적 모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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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의 산
레이 네일러 지음, 김항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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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020년 발표작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My Octopus Teacher는 인간과 문어의 훈훈한 교감을 통해 잊혀진 감성을 회복하는 감동 드라마다. 작품은 인간과 문어가 서로 정말 다를까?”라는 궁금증으로 시작해 결국 사실 닮았다!”로 훈훈하게 마무리 짓는다. 하지만 이 소설 바닷속의 산은 그 따스한 결말에 시원하게 찬물을 끼얹는다. “닮긴 뭐가 닮아?”라고 반박하면서 독자의 세계관을 통째로 흔들기 때문이다.

 

주인공 하 응우옌 박사는 베트남 깐다오 제도에서 특이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문어 집단을 조사한다. 원래 문어는 혼자 사는 외톨이에 평균 수명도 짧아 지적 발달이 어렵다. 하지만 이곳의 문어들은 복잡한 색채 패턴으로 소통하고 마치 자신만의 SNS 문화를 만들어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함께 하는 인물들 역시 평범한 조력자가 아니라 하 박사의 심리를 흔드는 거울들이다. 완벽한 기억력을 가진 안드로이드 에브림은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인간을 비추고, 말수가 극히 적은 경비원 알탄체체그는 불편한 침묵 속에 갇힌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낸다. 하 박사 자신도 결국 타인과의 단절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깨닫는다.

 

작가는 여기에 병렬 서사 두 개를 끼워 넣어 이야기를 더 쫄깃하게 만든다. 러시아 해커 러스템과 AI가 지배하는 어선에 잡혀간 일본 청년 에이코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인간이 인간을 기계처럼 취급하는 씁쓸한 현실을 비추며,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를 고민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슬쩍 꼬집는다. 다만 소설이 철학적 대화를 과하게 늘어놓아 종종 설교 같다는 점은 아쉽다. 하지만 그 빈자리는 박진감 넘치는 묘사와 긴장감 있는 전개가 충분히 메워준다. 특히 저자는 해양 생태 전문가답게 문어를 귀여운 바다 친구가 아니라, 우리와 완전히 다른 지성을 가진 진짜 타자로 그려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작품은 결국 인간 중심적 사고에 유쾌한 반기를 드는 소설이다. 인간이 인간과의 관계마저 어려워 반()인격 AI를 선호하는 세상에서, 또 다른 지성체와의 연결을 갈망하는 우리의 이상한 욕망을 지적한다. 문어들이 던지는 명확한 메시지 닝겐들, 우리를 방해하지 마!”는 독자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정말 연결되어 있기는 해?”

 

소설은 최신작답게 기업 스파이물, 군사물, AI 스릴러 장치를 두루 활용하지만, 핵심은 결국 인간이 정말 세상의 중심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주인공들이 깨닫는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두 가지 진실이다. 첫째, 개인은 절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고 둘째, 인류도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섬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의 무대가 이라는 점은 이 메시지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작중 섬은 결국 세계의 모든 사건과 얽히고설킨 운명을 보여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발견되는 언어를 가진 문어 사회는 인간학의 기준으로도 분명 사회다. 하지만 이들의 지각이나 개념 체계는 인간과 너무 다르다. 따라서 소설의 중심은 문어의 언어 해독이 아니라 탐욕·오만·자기기만 등 우리의 윤리적 문제를 깊이 파고드는 데 있다. 환경 파괴나 인권 침해 문제도 특정 개인이나 기업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작가는 문제의 원인을 전 인류의 무관심과 탐욕으로 넓히고, 책임 역시 한두 영웅이 아니라 모두의 몫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개성을 지우지도 않는다. 문어의 신경망을 비유 삼아 각 개인이 자신의 자리에서 능동적으로 행동할 때 세상이 변화한다고 귀띔한다.

 

흥미롭게도 세 명의 주인공은 서로 만나지도 않으면서 협력해 문어 사회를 보호한다. 각자 자신이 세상의 일부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설이 불교적 세계관을 빌려 '올바른 관점(정견)''무관심'을 대비시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진짜 적은 악의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난 어차피 아무것도 못해라는 체념을 가장 경계하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독자의 귀를 사정없이 잡아당긴다.

 

결과적으로 공상과학 소설이라 하면 흔히 생각하듯 외계 지성체와 만나는 단순함을 넘어, 이 소설은 독자를 능글맞게 꼬드겨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문제작이다. 등장인물들이 자꾸만 진지한 철학적 대화로 빠지지만, 놀랍게도 재미는 끝까지 유지된다. 그래서 Scientific 대신 Speculative Fiction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다는 평을 듣는다. 결국 이 소설은 독자에게 행복한 결말을 약속하면서도 꾸준한 책임과 관심이 없으면 언제든 다시 불행해질 수 있다고 짓궂게 경고한다. 다 읽고 나면 웃으며 책을 덮을 수는 있어도, 인류의 연결성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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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의 산
레이 네일러 지음, 김항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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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fic Fiction에서 Speculative Fiction으로 한층 진화하는 신예 작가의 기염. 지구가 마치 자기 것인 양 구는 닝겐들, 당신들부터 대화를 나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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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보다
셔우드 앤더슨 지음, 박희원 옮김, 김선옥 해설 / 아고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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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의 생애

셔우드 앤더슨(Sherwood Anderson, 1876~1941)은 미국 오하이오주 캠든에서 태어나 빈곤한 유년기를 보냈다.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경험을 쌓았다. 광고업과 비즈니스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전념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단편집 와인즈버그, 오하이오(1919)는 미국 모더니즘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내면 심리의 복합성과 개인의 소외감을 탁월하게 묘사하였다.

 

2.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세계관

앤더슨의 작품에는 20세기 초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겪는 개인의 고립과 소외, 인간 내면의 억압된 욕망과 심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사회의 관습과 억압적인 구조가 인간의 진정한 자아 발견을 방해한다고 보았으며,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내면의 혼란과 갈등 속에서 정체성을 찾기 위해 투쟁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체적·주제적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한국 작가 김유정과 가장 흡사해 보인다.


3. 다른 미국 작가들에 미친 영향

앤더슨은 미국 문학의 중요한 전환점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존 스타인벡 등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의 결합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둔 새로운 서술 방식을 제시했다. 헤밍웨이는 앤더슨으로부터 간결한 문체를, 포크너는 복잡한 내면세계 묘사를 배우는 등 각기 다른 측면에서 앤더슨의 영향을 받았다.

 

4.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는 작가의 위로

앤더슨의 이야기는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속에서는 열정이 끓어 넘치는 사람들의 일상을 잘 묘사한다. 잘나가는 성공담보다는 실패담을 통해 어딘가 마음이 비어있는 순간을 오래 들여다본다. 사람들이 서로 스쳐 가면서 말은 주고받지만 정작 마음은 잘 와닿지 못한다는 사실을 차분히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단편을 읽고 나면 큰 사건이 없어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앤더슨의 글에서는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물건을 놓아둔다. 달걀은 무언가 잘될 것 같은 기대를 품게 하지만 동시에 쉽게 깨질 수 있는 취약성을 드러내는 물건이다. 우유병의 반질반질한 표면은 깨끗하고 신선해 보이지만 한편으로 상하기 십상이다. 씨앗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흙과 날씨, 사람의 손길이 조금만 어긋나도 금세 자라지 못하는 물건이다. 이런 물건들은 우리가 믿는 하면 된다같은 말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조용히 말해 준다.

 

등장인물들은 자주 자기 자신과 싸운다. 나는 바보다의 주인공은 이성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괜한 허세를 부리다가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여기서 바보 같음은 타고난 결함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비뚤어진 결과일 뿐이다. 어느 현대인의 승리: 변호사 불러줘요에서는 얄팍한 승리감이 얼마나 빈약할 수 있는지 드러난다. 절차대로 이겼다고 말하는 순간, 정작 사람 사이의 의미는 사라진다. 겉으로는 승리처럼 보이는 일이 속으로는 패배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과 말의 힘도 흔들린다. 슬픈 나팔수들에서 연주자들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 애쓰지만 그 소리에는 어딘가 외로운 기운이 섞여 있다. 소리는 관객에게 닿는 다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가림막이 되기도 한다. 앤더슨은 잘하고 못하고의 기준으로 사람을 재지 않는다. 끝까지 표현해 보려는 마음 자체가 이미 사람을 지탱해 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몸과 시선의 문제도 솔직하게 다룬다. 그 여자 저기 있네. 목욕중이야에서 목욕은 깨끗해지는 일이면서 숨기고 싶은 내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서로를 슬쩍 보거나 피하고, 욕망을 규칙의 말로 포장하려다 더 큰 침묵에 빠진다. 앤더슨은 누구를 어떻다고 먼저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외로운 마음을 어떻게 다루지 못해 엇나가는지를 찬찬히 따라간다.

 

장소도 사람의 어깨를 누른다. 어느 낯선 동네에서의 길은 자유의 상징이 아니라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불안의 길이다. 형제에서는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달래고 누구와든 이어져 있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 신문 속 인물들까지 자신과 같은 결핍을 지닌 형제라 사칭하는 고립된 노인의 이야기다. 전쟁은 총소리보다 먼저 사람들의 삶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멀리서 들려오는 구호와 소문이 사람의 마음을 먼저 소모시킨다는 점이 핵심이다.

 

앤더슨의 문장은 짧고 단정하다. 꾸미는 말이 적고, 망설임과 멈칫거림을 그대로 둔다. 그의 인물들은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아직 만들어지고 있는 사람이다. 실패는 낙인이 아니라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는 과정이다. 그래서 달걀의 껍질, 우유병의 유리, 씨앗의 작은 몸체는 허무의 표시가 아니라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돌볼 수 있는 삶의 크기로 느껴진다.

 

결국 앤더슨의 세계에서는 사람의 허물을 쉬이 나무라지 않는다. 그는 산업화 시대의 미국식 성공 이야기의 밝은 면만 보지 않고 그 뒤에 남는 빈자리와 그림자를 오래 바라본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어긋난 약속, 부끄러운 고백, 잘 깨지는 물건들 사이에서 그는 다시 시작하려는 작은 움직임을 발견한다. 그의 단편을 읽는 일은 실패가 많은 세상에서 그래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연습이다. 이 연습이 남기는 태도는 단순하다. 서로의 부족함을 알아도 등을 돌리지 않는 마음이다. 이것이 앤더슨 소설이 건네는 가장 조용하지만 단단한 힘이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깨닫게 된다. 나만 바보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 말이다. 다들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저마다 달걀 하나씩을 안고 조심조심 하루를 건너는 사람들이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을 뿐 마음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실패와 수치의 순간도 나만의 흠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사연이라는 점을 부각한다. 그 생각을 붙들면 숨이 조금 길어지고 어깨가 조금 펴진다. 오늘도 내 보폭대로 걸어가도 괜찮다는 용기가 생긴다. 앤더슨의 작품을 읽는 일은 결국 괜찮다, 너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말을 배우는 것이며, 그 말을 먼저 나에게 조용히 건네보는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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