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하기, 소유되기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매일 돈을 벌고, 쓰고, 돈에 대해 고민하지만 정작 돈이 우리 삶과 내면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는 깊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안락함은 과연 어디에서 오며, 우리는 그 안락함의 대가를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가? 이 책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이 애써 외면하고 싶어 하는 물질, 계급, 그리고 특권의 모순을 저자 특유의 위트와 날카로운 자의식으로 파헤친 지적 탐구의 기록이다.

 

1. 위선과 물신주의로 포장된 자본주의의 풍경

저자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상류층 여성들의 슬럼가 탐방을 소환하며 자본주의적 위선의 민낯을 꼬집는다. 당시 유한계급은 빈민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며 이를 교화라 포장했고, 가난의 원인을 구조가 아닌 개인의 도덕적 나태로 치부했다. 이러한 위선은 현대 사회에서도 형태만 바뀐 채 작동한다. 한때 청춘을 위로한다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던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순식간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유도 이와 같다. 청년들이 마주한 참혹한 현실을 단순히 마음가짐의 문제로 치부하는 순간, 그 위로는 현실을 은폐하는 기만이자 정신적 학대가 되기 때문이다.

책의 여정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물과 인간관계의 왜곡을 다각도로 관찰한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타인 대신 물건과 관계를 맺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이케아의 저렴한 가구처럼 이토록 값싸게 삶을 만들거나 폐기할 수 있다는 자유 뒤에는 인간적 가치의 상실이라는 슬픔이 드리워져 있다. “집은 사는(live) 곳이지, 투자하는(invest) 곳이 아니다라는 할아버지의 지극히 당연한 경고가 오늘날 아득한 이상향처럼 느껴지는 현실은 어떠한가.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야 할 공간조차 투기판으로 전락해 버린 지독한 역설이야말로 이 시대 주거 불안의 진짜 얼굴이다.

 

2. 노동의 소외, 그리고 통제권이라는 이름의 자유

이러한 물신주의 속에서 인간의 '노동' 역시 철저히 계급화되고 소외된다. 책은 '(manus)'을 써서 일하지 않는 존재를 뜻했던 '매너(manners)''젠틀맨(gentleman)'의 어원을 통해 육체노동을 하대해 온 오랜 편견을 짚어낸다. 팝 밴드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노래 ‘Money for Nothing’의 가사처럼, 땀 흘려 일하는 육체노동자 앞에서 기타나 퉁기며 버는 돈을 '거저먹는 돈'이라 칭했던 세태는 노동을 바라보는 씁쓸한 시선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치열하게 노동하는가? 사람들은 일에서 단지 '일용할 양식'뿐 아니라 '일용할 의미'를 찾고자 한다. 시키는 대로 기계처럼 일하기를 거부하며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응수했던 허먼 멜빌의 소설 속 필경사 바틀비의 비극은, 인간이 노동에서 자율성을 박탈당할 때 얼마나 쉽게 시들어가는지를 보여준다. 이 우울한 저항은 오늘날 화장실 변기 뒤에 비자금을 숨기는 팍팍한 월급쟁이 가장들의 모습과도 묘하게 겹친다. 푼돈을 몰래 숨기는 행위는 대단한 일탈을 꿈꿔서가 아니라, 세상과 가족의 통제에서 벗어나 온전히 내가 쥐고 흔들 수 있는 작은 숨구멍주도권을 갖고 싶기 때문이다. 돈의 진짜 가치는 액수가 아니라 통제권이라는 이름의 자유에 있다.

 

3. 불평등의 역사와 구조적 착취

나아가 책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자산 불평등과 착취의 구조를 신랄하게 폭로한다. 16~17세기 유럽의 마녀사냥이 극한의 기후 위기와 기근 속에서 생산성 없는 약자(여성, 독거 노파)를 희생양 삼아 공동체의 부양 부담을 줄이려 했던 구조적 비극이었듯, 역사 속에서 빈곤과 약자는 늘 거대한 권력과 이기심의 희생양이 되어왔다.

여성의 지적 자유를 위해 투표권보다 자기만의 방(물질적 토대)’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버지니아 울프의 통찰처럼, 고결한 이상이나 정치적 권리조차 경제적 독립 없이는 무력할 뿐이다. 오늘날 주식 시장의 과열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얻는 투자 수익이나 안락한 은퇴 자금이 실상은 누군가의 노동 몫을 희생시켜 얻은 결실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착취 경제에 기대어 은퇴하는 셈"이라는 불편한 자각을 안겨준다. 결국 부의 불평등은 건강과 교육의 결핍으로 이어지며, 가난은 개인의 실패가 아닌 공동체가 떠안아야 할 뼈아픈 사회적 비용이 된다.


4. 안락함의 모순 속에서 중산층을 꿈꾼다는 것

저자는 자신이 쌓아 올린 지적 자산과 안락함이 백인 중심의 시각과 돈에 관한 백인의 거짓말위에 세워졌음을 담담히 인정하며 특권의 시선을 스스로 해체하고자 시도한다. “나는 불편감을 놓고 싶지 않았고, 안락도 놓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은 그 모순의 산물이다라는 솔직한 고백은 자본주의적 풍요 속에 발을 담근 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월급 액수보다 물가가 더 빨리 오르고 '중산층 붕괴'라는 경고가 쏟아지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끊임없이 '중간의 삶'을 열망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가 꿈꾸는 중산층이라는 지위는 거창한 부의 축적이나 호의호식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불행 앞에서 길거리에 나앉지 않을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자 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돈을 보면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게 뭔지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우리가 진정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5. 추천의 말

자전거를 타려 핸들을 잡았을 때의 기민함이 자동차 운전대를 잡는 순간 사라지고 타인을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기게 되듯, 우리는 자신이 선 위치에 따라 너무나 쉽게 타인의 처지를 잊고 마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결국 이 책은 단순한 경제 서적이 아니라, 비정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우리가 지켜내야 할 인간적 존엄을 묻는 철학서다. 안락함의 달콤함을 누리면서도 부끄러움을 잃지 않으려는 '양심적 중산층', 그리고 매일 밥벌이에 시달리면서도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어 마음 한구석이 헛헛한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서늘하고도 따뜻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타인의 희생 위에 세워진 내 특권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사람, 그리고 물질의 풍요 속에서 잃어버린 '삶의 주도권'을 다시 거머쥐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펼쳐보시기 바란다.

 

 

#풍요의그늘속에서묻는삶의가치와물질의무게 #온라인북클럽 #한달한권할만한데 #소유하기소유되기 #율라비스 #열린책들 #중산층 #자본주의 #소비는미덕 #무소유실천 #소유는곧존재인가 #딱마음에드는판형 #내용은좋은데제본은안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어 어원 80일간의 세계 일주 - 지구를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1,000개의 영어 어휘가 저절로 쌓였다
폴 앤서니 존스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지성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일반 사전을 나침반 삼아 떠나는 세계 일주

언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책은 언제나 가성비 최고의 여행 수단이다. 진짜 여행을 떠나기 힘들 때, 책 한 권만 펼치면 순식간에 낯선 이국의 땅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 책은 바로 그 매력을 가장 극적으로 살려낸 작품이다. "지도나 지명 사전 대신, 일반 사전을 나침반 삼아 세계를 여행하면 어떨까?"라는 신선한 질문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저자는 지명에서 따온 영단어들의 발자취를 따라 유럽,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오세아니아, 남북미 대륙까지 65개국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여정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 책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은 단연 저자의 탁월한 말솜씨와 지적 유희다. 빌 브라이슨이나 마크 포사이스 같은 세계적인 대중 교양 작가들이 떠오르면서도, 과하거나 느끼하지 않은 특유의 경쾌한 유머를 보여준다. 참고문헌에 제시된 고전 속어 사전부터 현대 전문 사전까지 15권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썼음에도, 마치 친한 친구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구어체로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책을 읽다 보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너 이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 하며 배운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릴 정도다.



* 단어 하나에 담긴 역사와 인간의 아픔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우리가 무심코 쓰는 단어들에 얼마나 깊고 다양한 세계사가 숨어 있는지 잘 보여준다.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온 '포트와인', 벨기에 스파에서 유래한 '스파(Spa)', 체코 야히모프에서 나온 '달러' 같은 직관적인 단어들은 가벼운 몸풀기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한쪽 팔을 잃은 영국군 사령관의 이름에서 나온 '라글란 재킷', 태국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전 세계를 돌았던 창과 엥 벙커 형제에게서 비롯된 '샴쌍둥이' 이야기는 단어 하나에 얽힌 개인과 시대의 아픔을 묵직하게 보여준다.

 

원자폭탄 실험이 있었던 마셜 제도의 비키니 환초가 어떻게 수영복 '비키니'가 되었는지, 19세기 인도 데올랄리 주둔지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정신병 사태가 어떻게 일시적인 광기를 뜻하는 '둘랄리(doolally)'가 되었는지 추적하는 과정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흥미진진하다. 독일의 호전적인 태도가 싫어서 독일 멧돼지 사냥개가 '그레이트 데인(덴마크 개)'으로 국적을 바꿔야 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는 언어가 가진 정치적 속성까지 보여준다.

 


* '80개 단어'라는 즐거운 속임수와 출판사의 정성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는 '80개의 단어'라는 제목이 사실 즐거운 속임수라는 점이다. 저자는 하나의 목적지에서 연상되는 또 다른 단어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낸다. 각주마저 본문 못지않게 알차서 캘리코, 덤덤탄, 방갈로, 타마린드 같은 단어들까지 합치면 실제로는 160~200개 이상의 어원을 배우게 된다. 단어를 단순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어원 탐구의 방향을 뒤집어 지명에서 파생된 기원을 찾아가는 '발굴'의 대상으로 접근했기에 학습 효과가 배가된다.

 

특히 출판사 현대지성의 꼼꼼하고 완성도 높은 편집 기획이 빛을 발한다. 원서에는 없는 풍부한 시각 자료(컬러판 사진)를 공들여 대거 가득 채워 넣음으로써 지리적 배경과 단어의 맥락을 시각적으로 훌륭히 보완해 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독자의 이해도를 대폭 높였을 뿐만 아니라, 표지 역시 한국 독자들에게 익숙한 단어들로 구성하여 자칫 진입 장벽이 높을 수 있는 책을 한층 친근하고 매력 있게 내놓았다.

 


* 아쉬운 점과 한계

물론 아쉬운 점도 존재한다. 영국의 언어 연구자가 학술적·교양적 어휘 위주로 집필했기 때문에 영문학을 전공한 필자라 할지라도 실생활 활용 면에서는 체감도가 낮고 낯선 단어투성이로 느껴졌다. 지명과 어원을 매끄럽게 연결해 읽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독자 자신의 세계 지리에 대한 감각이 어느 정도 요구되기도 한다.

 

또한 챕터 제목과 실제 핵심 내용이 겉도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예를 들어 덴마크가 그레이트 데인의 어원이라면 굳이 코펜하겐을 제목으로 삼을 이유가 없고, '리마 증후군'을 다루는 장에서는 정작 스톡홀름 증후군 설명이 훨씬 많아 흐름이 끊기기도 한다. 무엇보다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편입 연도를 틀리는 등 일부 사실 확인이 누락된 점이나, 완독 후 전체 내용을 되짚어볼 수 있는 '어휘+의미' 형태의 표제어 색인 목록이 책 뒷부분에 따로 마련되지 않은 점은 엄밀한 지식을 기대한 독자에게 아쉬움을 남긴다.

 


* 그런데도 추천하는 이유

하지만 이러한 단점에도 이 책 본연의 매력을 가리지는 못한다. 애초에 이 책은 무거운 학술서가 아니라,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오마주로 런던에서 시작해 런던으로 돌아오는 쾌활한 여행기이기 때문이다. 자버니즘, 앰프스터 같은 생소한 단어부터 쥐라기, 칠면조, 보드빌까지 다채로운 단어의 성찬을 즐기다 보면 굳이 머리 싸매고 공부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세계 역사와 문화가 머릿속에 녹아든다.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짧은 비행, 혹은 휴가지에서 가볍게 읽을거리나 지적 자극을 찾는 이들, 그리고 언어가 가진 마술 같은 맥락에 빠져보고 싶은 모든 독자에게 기꺼이 일독을 권한다.

 

#아마존베스트셀러 #현대지성 #폴앤서니 #핵심영어어휘 #영어어원80일간의세계일주 #신박한어휘학습법 #왜아는단어가없는거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어 어원 80일간의 세계 일주 - 지구를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1,000개의 영어 어휘가 저절로 쌓였다
폴 앤서니 존스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지성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아는 영단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하시다면 이 책을 추천 드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행 너머의 금융 - 21세기 화폐금융론
차현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학생들에게 수능 영어 지문을 막힘없이 해독하고 관계대명사를 설명할 때면 제법 유능한 교사가 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교무실로 돌아와 대출 원리금 상환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이 얕은 지적 자만심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영어 어휘나 문법에는 훤할지언정 숫자와 돈의 생태계 앞에서는 세상에 이런 초짜가 없다


돌이켜보면 내가 이렇게 금전 감각에 젬병이었던 이유는 돈이라는 존재의 속성을 깊이 이해하려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주체적이고 지혜롭게 쓰며 경험을 쌓아볼 기회조차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산이라고 해봐야 은행 대출을 쥐어짜 마련한 아파트 한 채가 전부이고, 매달 들어오는 월급은 각종 공과금과 이자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기 일쑤다. 재테크는커녕 노후 준비조차 손대지 못한 채 막막한 현실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조 섞인 한숨뿐이었다.

 

이런 답답한 인간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냐며 대책 없이 자신을 위로하던 중 이 책을 만났다. 전문서와 교양서의 경계에 있는 이 책은 시중에 넘쳐나는 단편적인 투자 기술 대신, ‘화폐금융론이라는 기술적인 주제를 통해 금융의 근본적인 뼈대와 역사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경제 뉴스를 알아듣고 당장 경제 활동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감기약 같은 금융 상식이라기보다, 금융 감각을 키워주는 보약이라 하겠다.

 

저자는 무거운 동전을 대신하려 만든 당나라의 '비전'이나 유성 잉크로 양면 인쇄를 가능케 한 송나라의 어음 '교자'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돈이 어떻게 모습을 바꾸어왔는지 들려준다. 특히 어음의 환금성을 보장하는 '배서'라는 장치는 부도 시 연쇄 위험을 낳기도 하지만 그만큼 담보력을 높여준다는 어음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수표의 한 종류인 여행자수표가 식당이나 상점에서 서명을 한 번 더 확인하는 '부서(countersignature)' 절차 덕분에 현금보다 안전할 수 있었고, 이것이 조건부 지급을 이행하는 현대 스마트 계약(이더리움)의 원조였다는 대목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한 1825년 금융위기 때 영란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하며 자금 경색을 완화했던 역사를 통해 중앙은행이 '최후의 구원자' 역할을 하게 된 진짜 배경을 이해하게 된다. 뱅크런을 막는 예금보험제도가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켜 전액 보호 대신 부분 보호를 원칙으로 삼게 된 과정, 1978년 미국의 '전자자감이체법'으로 은행이 독점하던 송금 영역에 ATM이나 카드사 같은 제삼자가 개입하게 된 흐름도 흥미롭다. 최근 우리나라의 티몬·위메프 사태 역시 현행법상 전자지급결제대행업(PG)이 고객 자금을 잠시 보관하고 정산하는 구조적 결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면서 뉴스 속 복잡한 사건들이 비로소 하나의 맥락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비트코인 같은 최신 디지털 화폐를 바라보는 시각도 한결 명쾌해진다. 처음엔 기존 화폐를 대체할 혁신으로 홍보되었지만, 예산이나 세금 집행에 쓰이지 못하며 결국 기존 금융권이 투자하는 '암호자산'으로 자리 잡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짚어준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 책에서 당장 내일 대출금을 다 갚는다거나 부자로 만들어주는 기적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갚아야 할 빚'이라는 답답한 틀에서 벗어나, 세상을 움직이는 돈의 흐름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뜰 수는 있다. 둔감했던 금융 감각도 돈의 작동 원리를 익히며 조금씩 기지개가 켜지는 느낌이다. 돈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세상을 읽는 하나의 언어로 바라보게 된 것만으로도 문과 감성 충만했던 나에게는 커다란 진전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자산 증식 기법에 피로감을 느끼며 돈의 근본적인 생태계를 알고 싶었던 보통의 월급쟁이들과 금융 초보자들에게 가장 먼저 권하고 싶다. 나아가 비트코인이나 핀테크 등 쏟아지는 최신 기술의 역사적 맥락이 궁금하거나, 돈과 지급수단의 진화 과정을 흥미롭게 탐구하고 싶다거나, 실제 금융 제도의 구조적 과제를 고민하는 독자라면 세상을 해석하는 명쾌한 안목을 얻을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 나의 노후 대비는 어쩐다지?

 

#메디치 #차현진 #은행너머의금융 #경제상식 #금융지식 #화폐금융론 #문과라숫자싫어 #고마해라걱정 #돈마이까뭇다아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국 언론 자랑 - ‘소멸’이 아니라 ‘삶’을 담는 지역 언론 이야기
윤유경 지음 / 사계절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주 일요일 낮 1210, "빰빠빠 빰빠 빰~~" 경쾌한 시그널 음악과 함께 시작되던 국민 예능 <전국노래자랑>. 윤유경 작가의 전국 언론 자랑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자마자 그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책의 목차를 살피면서 작가가 왜 하필 수많은 제목 중에 이 친숙한 프로그램의 이름을 빌려왔는지 무릎을 '' 치며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전국노래자랑> 활자판 같다.

 

솔직히 요즘 TV나 포털 사이트 뉴스를 보면 한숨부터 나올 때가 많다. 매일 같이 싸우는 정치인들, 자극적인 사건 사고, 서울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같은 이야기들만 가득할 뿐, 정작 사람들이 하고픈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특히 지방으로 갈수록 뉴스는 십중팔구 우울한 소식뿐이다. 인구가 줄어서 마을이 통째로 사라질 위기라는 이른바 '지방 소멸' 이야기 말이다. 그래서 처음엔 '언론'이라는 단어 때문에 좀 딱딱하고 지루한 책이 아닐까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지역 소멸이라는 알맹이 없는 말 대신 우리는 서울 중심주의’, ‘실패한 지방 분권’,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의 불균형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수도권을 중심에 둔 우리의 시선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중략) 많은 사람들이 언론과 기자를 불신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정보를 요구하고, 기사에 오류나 왜곡이 있어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다. (73)

 

<전국노래자랑>의 진짜 매력이 화려한 가창력을 뽐내는 가수가 아니라, 우리 앞집 세탁소 아저씨, 뒷집 반찬가게 할머니가 무대에 올라와 마이크를 잡고 춤추는 그 '사람 냄새'에 있는 것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동네 신문과 지역 방송의 주인공들 역시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다. 전북 진안의 동네 신문 이야기는 흡사 <전국노래자랑> 진안군 편을 보는 것 같았다. <전국노래자랑> 무대 위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스타가 되듯, 진안신문에서는 80대 할머니도, 발달장애가 있는 동네 청소년도 직접 펜을 들고 자기들의 일상을 기사로 써낸다. 할머니가 쓴 삐뚤빼뚤한 기사가 신문에 실리고 그걸 동네 사람들이 함께 읽으며 왁자지껄 웃는 모습은, 동네 할아버지가 방송에 나와 엇박자로 트로트를 부를 때 객석의 주민들이 다 같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는 풍경과 완벽하게 겹쳐 보였다. 주류 언론에서는 절대 마이크를 주지 않을 사람들에게 기꺼이 멍석을 깔아주고 마이크를 쥐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동네 언론의 진짜 역할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지역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지역민들의 삶을 듣고 기록하는 것, 그들의 삶을 지역의 역사로서 보존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단독이나 속보 경쟁, 조회 수 올리기에서 벗어나 지역 언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87)

 

그런가 하면 부산일보의 '산복빨래방' 프로젝트는 송해 씨의 따뜻한 진행을 똑 닮아 있었다. 부산의 가파른 산동네에 작은 무료 빨래방을 차린 기자들은 취재 수첩을 들이밀며 딱딱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마치 진행자가 참가자들의 손을 꼭 잡고 살아온 이야기를 먼저 묻듯이, 기자들은 어르신들의 무거운 이불을 대신 빨아드리며 자판기 커피 한 잔과 함께 그분들의 팍팍하고도 눈물겨운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노래 대신 삶의 애환을 듣고 그것을 기사로 써 내려간 이들의 모습에서, 뉴스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따뜻하게 어루만질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충남 태안, 당진과 충북 옥천의 동네 신문들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전국노래자랑>이 그 동네의 특산물을 자랑하고 동네 사람들의 소소한 경사를 축하하는 자리인 것처럼, 이곳 기자들은 서울에서 일어난 큰 사건보다 주민들의 삶에 찰떡같이 붙어있는 진짜배기 뉴스들을 찾아다닌다. 동네 버스 노선이 갑자기 바뀌어서 할머니들이 시장에 가기 힘들어졌다, 옆집 철수네 강아지를 잃어버렸는데 같이 찾아보자, 동네에 들어오려는 냄새 나는 공장을 막아보자, 그리고 무려 18년 동안 발로 뛰는 취재를 멈추지 않고 보도하는 전대미문의 기자 정신 이야기까지. 중앙 뉴스에서는 '!' 하고 탈락시킬 사소한 이야기들이지만, 동네 사람들의 삶에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딩동댕' 같은 소식들이다.

 

지역은 다 버릴겁니까. KBS, MBC 등 공영 방송은 좌도 우도 아니고 아래고 가서 주민들과 어떻게 접촉면을 넓히고 필요한 방송을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148)

 

그런데, 돈도 별로 못 벌고 늘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면서 이 동네 기자들은 대체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마 그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된다. 억울한 일을 당한 이웃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사를 써서 동네에 작은 변화가 생기는 걸 보는 기쁨, 그리고 길을 가다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이 "김 기자, 그 기사 잘 읽었어!"라며 건네는 박수갈채. 그것이 이들을 계속 뛰게 만드는 힘이었다. 무대 아래서 쏟아지는 동네 이웃들의 환호성과 응원이 이들에게는 최고의 출연료였던 셈이다.

 

우리는 4만 인구도 안 되지만, 그 사람들도 사람이지 않나요. 우리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줄 사람, 내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지역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172)

 

서울깍쟁이 같은 차가운 주류 뉴스들은 통계와 숫자를 들이밀며 이제 지방은 끝났다고, 소멸할 거라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전국 언론 자랑이 비춰준 동네의 진짜 모습은 달랐다. 그곳에는 여전히 서로의 안부를 묻고 돕고 살아가는 '뜨거운 사람들의 삶'이 요동치고 있었고, 그 곁에는 우리 이웃들의 삶에 경쾌한 '딩동댕' 실로폰 소리를 울려주는 다정한 동네 기자들이 있었다.

 

가짜인데다 자극적인 뉴스 제목에 낚여 늘 신경이 곤두서고 질려있던 참에, 오랜만에 일요일 낮 <전국노래자랑>처럼 사람 냄새가 폴폴 나고 훈훈한 책을 만났다. 문득 내가 사는 동네에는 어떤 지역 신문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내일은 출근길에 동네 구석에 놓여 있는 지역 신문 가판대를 한번 유심히 살펴봐야겠다. 세상이 아직은 살 만한 곳이고, 우리 주변엔 좋은 이웃이 참 많다고 믿으며, 억압당할지언정 폐간도 무릅쓰던 정론직설 시절이 그리운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귓가에 "~! 언론 자랑~!" 하는 정겨운 외침과 딩동댕 실로폰 소리가 맴돌지도 모른다.


#사계절 #윤유경 #미디어오늘 #전국언론자랑 #진짜언론 #정론직설 #지역신문 #민초이야기 #구독자가곧주주 #주류언론반성하라 #전국노래자랑활자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