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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를 알면 보이는 것들 - 공간은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짓는가
정은혜 지음 / 보누스 / 2023년 5월
평점 :

# 지리에 관한 기억 한 조각
나에게 지리 과목은 1987년 대입 학력고사에서 유일하게 만점을 받았던 암기과목의 대명사였다. 유명 코미디언의 형님이셨던 ‘암기 9단’ 지리 선생님 덕분에 지리는 암기 능력과 더불어 2미터 거리에서 날아오는 침을 피하는 내공을 익힐 수 있었다. 위생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는 길거리 리어카에서 해삼 멍게를 팔았고, 동해안에서 가장 많이 잡혀 가출 청소년도 부담 없이 사 먹을 정도로 흔했던 꽁치는 연탄불에 바짝 구워 팔던 인기 술안주였다. 대학 졸업 후 기술 영업사원으로 취직하였을 때는 아직 GPS가 상용화되기 전이라 두툼하고 커다란 축소판 전국지도책을 펴들고 도로망을 공부하였고, 처음 가는 업체에 약도를 팩스로 넣어달라고 말하는 게 방문순서의 정석이었다. 고등학교 때 달달 외웠던 전국의 지명 덕분에 도로표지판만 읽으면 동서남북을 헤매지 않고 다닐 정도였다. 지리를 알면 길이 보였다.
『장소는 우리 삶의 양식과 정체성을 규정짓는 틀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장소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러한 장소의 의미를 연구하는 지리학은 삶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 (31쪽)

# 책의 구성
이 책은 전체 6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장은 지리와 연관된 각각 장소(지리상식), 세계(세계화), 경관(국가 정체성 및 상징성), 경제(돈이 모이고 퍼지는 곳), 도시 및 도시화(자연발생 및 계획도시), 도시구조와 디자인(역사의 격동성)을 다룬다. 1, 3, 4장의 끝에 제공된 지리학 특강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한, 딱딱하고 지루하기 마련인 지리학 관련 용어를 요점 나열식으로 술술 풀어내어 부담스럽지 않으며, 시각 자료가 모두 총천연색에 설명이 잘 곁들여져 있어 이것만 들여다보아도 좋을만큼 매우 알차고 유익하다. 전체 분량은 300쪽이 안 되지만 두꺼운 재질의 종이다 보니 400쪽 분량과 맞먹는 두께다. 한 손에 쥐고 앞뒤로 넘기며 읽기에는 조금 불편한 감이 있다.
『정확히는 제퍼슨 동상의 눈이 백악관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요. 이는 미국의 법을 제창한 사람으로서 ‘현재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항상 견제하고 있겠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165쪽)

# 지리만 다루지 않는 지리책
지리 과목을 선택한 학생이 아니더라도 교양서로 고를 법한 제목이지만 사실 이 책이 다루는 분야는 지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지리를 앎으로써 무엇을 얻느냐고? 사실 지리와 관련되지 않은 일이 전혀 없다 할 정도로 세상 모든 일이 다 지리적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take place는 ‘발생하다’란 의미의 영 단어인데, 직역하면 ‘장소를 차지하다 또는 가져가다’가 된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는 뜻은 공간을 차지했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는 것을 알았다. 지리와 연계하여 발생하는 일이란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종교, 사회 등 인류가 지나온 거의 모든 기록의 영역을 아우른다.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다수의 영화이다. 영국의 한 탄광 빈민촌에서 발레리노의 꿈을 키운 <빌리 엘리어트>, 래퍼 에미넴이 주연하여 한때 자동차 산업의 성지였으나 쇠락한 도시의 사회적 인종적 갈등을 그려낸 <8마일>, 대항해시대에 외부 세계와의 충돌로 멸망해간 멕시코 문명의 비극을 그린 <미션>과 <1492 컬럼버스>, 쌍둥이 같은 운명의 두 도시 홍콩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신흥 공업도시의 성장과 동성애자 삶의 애환을 그린 <해피투게더>와 <엄마 찾아 삼만리>가 등장한다. 이외에도 <마루타>, <엘도라도>, <천국의 아이들>, <시티 오브 갓> 등 다수의 영화가 인용되며 공간적 배경으로서의 지리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도심재활성화(gentrification)라는 개념도 최근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어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되고, 이들이 기존의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으로, 원래 그곳에 살던 많은 주민이 쫓겨나듯 이주하는 등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2009년 용산 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일명 용산 사태)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예입니다.』 (252쪽)

# 맺는말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모든 지역은 도시화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과거의 문명 발상지가 오늘날 폐허가 되듯 도시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흥망성쇠를 반복한다.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어떻게 기능을 하게 될지, 인간은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지, 생활 양식(genre de vie)은 어떻게 변화할지 등 자못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지리를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인간이 가져온 공간의 개념을 새로이 받아들인다. 인간과 공간이 서로를 변화시키며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단순한 암기과목에서 벗어나 ‘공간을 연구하는 하나의 과학’으로 접근하는 시각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재미난 지리 교양 서적으로 읽어둘 만하다. (202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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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