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말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법 -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되지 않는 대화의 기술
샘 혼 지음, 이상원 옮김 / 갈매나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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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선생은 고참 국어과 교사였다. 언제나 미소 띤 시골스러운 얼굴로 타인을 대하며 상대를 해칠 의사가 없음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다니던 그는 사실 누구나 마주치고 싶지 않은 대화 기피 대상 1호였다. 그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의 역설을 기가 막히게 활용할 줄 알았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불쾌감은 그가 얘기 들어 줄 상대의 상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그의 일방통행 연설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소재로 시작하여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점을 들춰내고 요청하지 않은 조언으로 끝맺는 게 정해진 순서였다. 쉬어빠진 음색, 화려하다 못해 휘황찬란한 인맥, 무불통지에 무소불위 오지랖 넓은 잡지식, 어색함을 덮으려는 더 어색한 미소, 반경 1미터까지 쏘아대는 로열젤리 타액은 무대장치일 뿐이었고, 역시나 화룡점정은 아무리 들어도 친근감이 생기지 않던 거친 사투리였다. 그와 단 한 번도 대화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두 번 이상 대화에 응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의 퇴임식 날 더 이상 그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정과 성을 다하여 있는 힘껏 손뼉을 쳐주었다.


우리 대부분은 크면서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배운다. 배운 대로 행하면 내 주변을 착한 사람들이 둘러쌀 것이라 굳게 믿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최고의 선이며 황금률이라 믿고 싶었던 듯하다. 하지만 착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이 들어가면서 깨달은 것 하나가 있다면, 본인은 착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남들을 세 치 혀로 괴롭히는 일당백의 괴물들이 어느 집단에나 한둘씩은 있으며 특히 직장에서 동료나 상사로 만날라치면 피해 갈 방법이 묘연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대응한답시고 그들과 씩씩거리다 보면 어느덧 우리도 괴물이 되어가는 일이 흔하다.


이 책의 저자는 착한 사람이 동네북으로 취급받을 만큼 황금률을 실천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소위 악질(villain)들에게 일반 대응책으로 사용해오던 전술을 나열하면서,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그들의 악행을 도와주는 결과를 얻을 뿐인 이유를 설명해준다. 더불어 괴물을 물리쳐 자신도 지키고 괴물을 닮아가지도 않는 꿀팁 오십 가지를 선보이고 있다. 먼저 유명 인사들의 격언과 그에 어울리는 상황을 제시하고, 실천 방안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묻는 여러 조건과 해결책을 내놓는다. 문체에 다분히 번역체의 향기가 풍기기는 해도 큰 틀에서의 대처법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그 가운데 가장 효과적이고 인상적인 모범답안을 추려보았다.


상대가 괴물이라고 본능적으로 판단된다면 스미스 제독의 말처럼 반대 방향으로 진군한다. 자존심보다는 안전 확보가 먼저다. 상황이 끝나고 괴물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도 우리 마음에는 그 상흔이 여전히 남아 있다. 괴물은 배려하면 할수록 더 못되게 군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골라 습관적으로 잔인하게 군다. 힘센 사람은 절대로 고르지 않는다. 침묵은 괴물의 기를 살려준다. 괴물들은 자기 행동을 돌이켜보지도 않고, 잘못을 깨닫지도 못한다. '막 대했는데도 항의하지 않네? 그럼 계속 이렇게 해도 되는 거지?'라고 생각한다. 괴물에게 섣불리 공감 어린 관심을 보였다가는 관계의 주도권까지 빼앗길 수 있다. 못된 행동을 말없이 인내한다면, 그것을 용납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괴물들로부터 존중받으려면 나 또한 그들처럼 괴물의 수준에 올라야 한다. 그들이 존중해주고 건드리지 않는 상대는 오로지 하나, 자기보다 더한 괴물뿐이다. 계속 형편없이 행동하는 상대에게는 강하게 나가는 것이 옳다. 이들에게는 분노를 발산하는 것이 이성적으로 반응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인내가 악을 선으로 바꿔주리라는 생각은 철저한 착각이다(프레야 스타크, 여성 탐험가). 침묵하며 괴로워해 봐야 문제를 고착시킬 뿐이다. 나쁜 상황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으니, 바로 자신이 무언가를 실천해야 한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상대의 언행이 공격적이거나 불쾌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계속될 수밖에 없다. 당신이 반박하거나, 항의하지 않았다면 그건 괜찮다는 의사를 전달한 셈이다. 다 같은 지렁이라도 꿈틀대면 덜 밟힌다고나 할까?


화를 내는 괴물에게 맞춰줄 기분이 아니라면 종이와 펜을 꺼내 단호하게 물어보자.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상대방의 행동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생각은 거기 갇혀버리고 만다. 깨어있는 매 순간, 그 파괴적인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괴물이 원하는 바이다. 모욕에 대처하는 최고의 방법은 ''가 아닌 '당신'을 주어로 삼아 답변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깔보는 듯한 말을 던졌다면, 그 말을 받아 상대방에게 던져보라. '저기요, 방금 뭐라고 하셨지요?'라고 되묻고는 입을 다무는 것이다.


마땅히 받을 것보다 적게 합의하는 순간, 당신은 그 합의한 것보다도 훨씬 적게 받게 된다(모린 다우드, 칼럼니스트). 남을 욕하는 말은 결국 자신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그 사람이 정말 욕을 먹어 마땅하다 해도 당신의 말을 듣는 사람은 수긍하는 동시에, 언젠가 자기도 당신에게 그런 욕을 먹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괴물을 욕해봐야 상황은 전혀 개선하지도 않으며 우리 마음의 평화, 그리고 우리에 대한 주변인들의 평가만 망가뜨린다.


지나친 배려는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병리적 열망이다. 상대방을 지나치게 배려하고 맞춰주는 사람은 가정환경이나 부모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다. 남에게 맞춰주고 배려하는 성향은, 잘못하면 괴물을 불러들일 가능성이 있다. 모두의 인정을 받고픈 마음은 비정상적이고, 더 나아가 병이다. 남의 기분만 맞추려는 사람은 자기가 제일 마지막에 잡아먹히기를 바라면서 악어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과 같다(윈스턴 처칠)


남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해올 때 대처법은 첫째, 시간을 두고 결정한다. 생각할 시간을 확보하고 그래도 상대가 재촉한다면 지금 당장 답을 원한다면 아니요입니다'라고 답하면 된다. 둘째, 간명하게 말한다. 짧고 분명하게 답할수록 설득력이 커진다. 구구절절하게 말하면 반격할 빌미를 주게 된다. '지금까지 늘 이런 일을 맡아 해주었잖아?'라고 상대방이 불평한다면 거절의 말만 다시 반복한다. 결정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 없다. '내 마음은 이미 결정했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아줘'라고 말해도 좋다. 더 이상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방을 기쁘게 만들 필요가 없다. 거기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도를 넘은 요구에 대해서는 이유를 설명할 것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한다.


괴물에게 대항할 자신감을 가지려면 명료함이 꼭 필요하다. 몸을 곧게 펴 당당하게 걸음으로써, 괴물에게 약하게 보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옳은 일을 위한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당당한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범죄자들은 범행 대상을 찾을 때 먼저 자세부터 살핀다고 한다. 걷거나 앉아있을 때 허리가 구부정한 사람은 표적이 되기에 십상이다. 고개를 숙인다거나, 시선이 불안정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힘없이 터덜터덜 걷는 것도 위험하다. 이런 소심한 자세는 괴물을 불러들인다. 가슴에 책을 안고 다니는 것도 어깨가 앞으로 굽혀지고 수동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좋지 않다.


모욕받았다면 벌떡 일어서서 당당하게 대처한다. '충분히 들었으니, 그만하지', '이봐. 좀 건설적으로 조언하면 안 되나?' 일어선다는 것 자체가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어'라는 의사를 표시한다. 앉은 자세는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대의 우위를 인정 혹은 용인하는 의미이고, 결국 괴물의 행동을 강화한다.


불평꾼의 투덜거림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방법은 일일이 방어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것이다. 상대방이 '너는 게을러. 자신을 좀 더 가꿔'라고 한다면 거리 두는 말을 한다. '아무리 그래도 난 지금이 좋다.', '각자 나름의 의견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유감이다',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다'라고 말해준다. 마음 상하게 하는 사람을 자청해서 자꾸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본다. 전갈은 끝까지 전갈일 뿐이고 언젠가는 독침을 찌르게 되어 있다. 독침을 피하는 방법은 등에 태우지 않는 것뿐이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말>

1) 그런 생각은 속으로만 하세요.

2)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말씀하신 분의 이미지만 나빠집니다.

3) 설마 진심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4)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린다)

5) 제가 잘못 들은 모양입니다. 다시 말씀해보시겠어요?

6) 앞으로 저와 함께 있을 때는 그런 말은 말아주세요.

7) 듣기 불편하군요. 점잖게 말씀하시지요

8) 제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해가 갈수록 사람은 고쳐 못쓴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스스로 괴물이나 악질이 된, 고쳐 못 쓸 사람들을 평생 피해 다니느라 지쳤다면 지금이라도 이 책이 알려주는 대처법을 익혀 써먹어 보자. , 최소한 자신은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좀비가 아무리 배고파도 자기 팔을 물어뜯지는 않듯이.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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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여정 - 부와 불평등의 기원 그리고 우리의 미래
오데드 갤로어 지음, 장경덕 옮김 / 시공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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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 년 전 이 행성의 아프리카 대륙에 등장하여 수렵채집인으로 살던 호모 에렉투스는 약 200만 년 전 유라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현생 인류의 선조인 호모 사피엔스는 6~9만 년 전 동굴 밖으로의 여정을 시작하였고 대규모 이주를 통해 각 대륙으로 더 멀리 진출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달리기도 느려 언제든 야생 동물들에게 잡아먹히는 게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유약했지만, 이들은 불의 힘과 협동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아 여러 차례 혁명을 일으키며 문명 세계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렀다. 경제학자의 시선에서 저자는 앞으로 인류가 살아남아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여행의 1부는 성장의 수수께끼를 풀어본다. 인류가 오랜 세월 생존 유지형 삶의 덫에 갇혔던 구조를 밝히고, 유럽 위주의 사회가 덫을 벗어나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을 실현했던 힘의 근원을 찾는다. 여행의 2부에서는 지난 200년간 사회마다 발전 경로가 달랐던 이유와 국가별 생활 수준에서 격차가 대폭 확대된 근본 원인을 탐구한다. 이 여행의 시작점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벗어난 시기이며 이 과정에서 인류의 제도와 문화, 지리, 사회 등 요인을 두루 고려한다. 저자는 세계가 왜 갑자기 그렇게 부유해졌는지, 그리고 국가들 사이에 왜 엄청난 불평등이 존재하는지를 물으며 이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는 과정을 통해 원대한 통찰을 제시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영장류에 비해 매우 큰 대뇌피질을 새로운 기술개발에 사용함으로써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높아진 인구 밀도는 더 세분된 분업과 전문화를 가능하게 하고 혁신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결과적으로 교육과 혁신을 선호하는 문화적 속성이 더욱 큰 가치를 지니게 되었으며 그러한 속성을 지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번식할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이는 부가적인 기술 발전에 더 유리한 인구로 귀결된다. 1798년 토마스 맬서스는 사회가 잉여 식량을 생산하면 인구와 소비도 증가하므로 생활 수준이 일시적으로 상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인류의 생활 수준은 꾸준히 상승했다. 이후 기대수명은 2배 이상 늘었고 출산율은 급감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급등세를 보였다. 저자는 인류 역사상 생활 수준의 발전에 대하여, 대부분 기간 소득이 정체된 것은 맬서스의 함정 때문이라고 일관되게 설명한다. 소득을 증가시키는 기술적 진보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면서 생활 수준이 다시 생계 수준으로 떨어질 때까지 토지에 압력을 가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기술 진보의 가속화를 인구 증가와 연결한다. 기술 진보가 가속화됨에 따라 사회는 전환점에 도달했다. 부모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손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과 기술을 갖추어야 함을 깨달았다. 아이들을 위한 이 값비싼 투자에는 이윽고 출산율 조절이 필요해졌다. 이때부터 인구 증가는 더 이상 기술 진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생활 수준이 급상승했다. 이 논쟁은 경제 발전과 저개발 국가의 문화, 제도, 유전학의 역할로 이어진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저자는 그러나 우리가 인류 역사상 가장 극심한 빈곤의 덫에 걸렸다고 주장한다. 수렵채집인 시대의 영양 많고 다양한 식단을 포기하고 개체수 대량 증식에 성공한 인류는 대신 일상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려야 했다. 식량 보급 기술의 향상으로 늘어난 인구의 입을 먹여 살리는 데 성공은 했으나, 과도하게 늘어난 인구가 생산성 향상을 상쇄하고 생활 수준을 생존 수준으로 되돌리기까지 인류의 기술 진보는 거침없이 19세기 전환점에 도달하였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인적 자본의 가치는 부모들이 자녀를 적게 낳고 양육에 더 많은 투자를 선택하는 지점에 도달하였으며, 늘어난 기대수명은 인적 자본을 훨씬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 여성의 평균 임금이 남성의 평균 임금에 근접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를 갖기 위한 노동임금 포기 비용은 더욱 비싸졌고 출산율을 떨어뜨렸다. 이러한 인구 통계학적 변화와 인구 증가를 훨씬 웃도는 기술적 진보는 물질적으로 풍부한 현재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저자는 인류 전체의 역사를 최초의 원시 도구에서 저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슈퍼컴퓨터로 가는 불가피한 발전이라 설명한다. 동시에 과학전 진보가 왜 세계의 일부 지역을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부유해졌는지를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신석기와 농업혁명 이후 오랫동안 노동자들은 자기 아이들을 일터에 내보내 추가 수입을 얻었고, 이는 더 많은 아이를 낳도록 장려하여 결과적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산업혁명 이후 19세기가 되자 직장에서는 읽고 계산할 줄 아는 노동자들이 필요해졌다.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 많지 않아 일부 기업들은 점차 보편적 무상교육을 위한 운동에 동참했다. 아이들은 더 높은 보수를 받는 직업에 숙련되면서 가치가 증가하는 인적 자본이 되었다. 돈도 벌지 않는 취학 자녀들에게 많은 투자를 하면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더 적게 가졌다. 학교 출석률은 증가하고 출산율은 떨어진다. 이런 전 세계적인 현상은 심지어 개발도상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빈곤은 감소하고 있으나 환경 악화의 지속적인 원인이 될 정도로 번영은 증가하고 있다.

 

모든 인류는 6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이주 사슬이 갈라지는 각 지점에서 인구 일부만이 이동을 선택했다. 인구의 하위 집합은 집단 전체보다 덜 다양할 가능성이 컸고 멀리 이동하는 무리일수록 더 동질적이었다. 최근 몇 세기 전 가장 높은 수준의 다양성은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고 가장 낮은 수준의 다양성은 남아메리카에서 발견되었다. 다양성은 사회적 응집력을 감소시켜 경제 성장을 저해할 수 있지만 전문화와 혁신을 촉진하여 성장을 증가시킬 수도 있으므로 중간 수준의 다양성을 가진 지역의 경제 발전 수준이 가장 높았다. 지리 또한 경제 발전의 중요한 요소였다. 이집트 북부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곡물과 동물을 가장 쉽게 길들였고, 장벽 없는 유라시아의 동서 이동은 농업 기술의 확산을 촉진했다. 초기에 가축을 길들인 개체군은 감염성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더 강해졌다. 다양성과 지리는 지역 경제 차이의 핵심 동력이었고 문화와 정치는 그보다 더 작은 역할을 했다.

 

경제 발전은 기술 혁신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사회와 진화 사이의 상호 작용에 의해 주도된다. 세계적 불평등은 이주 거리, 지리, 질병, 문화, 정치제도의 다섯 가지 요소의 산물이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을 280페이지에 달하는 간결한 텍스트로 다루고 있다. 경제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류의 역사라니, 독자들은 무언가 배울 것이 많고 흥미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초 장기적 관점은 역사의 원동력을 각각 수천 개의 그럴싸한 에피소드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괜찮은 방법이다. 해저의 거센 물살을 모른 채 파도에 휩쓸리면 표류하기에 십상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인류의 여정을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늘날 인류의 번영은 축적된 기술 발전에서 비롯되었으며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가 기술 발전을 촉진한다는 주장은 반박하기 어렵다. 그러나 왜 언제 어디서 벌어진 일인가를 묻는 중요한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왜 유럽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 되었는지에 대한 오래된 질문을 들어보자. 유럽은 교육에 대한 투자 증가와 성별 임금 격차의 감소로 인해 19세기에 빈곤의 덫에서 벗어났다. 이탈리아의 상업 혁명은 11세기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1000년에 유럽의 인구는 본질적으로 천 년 전과 같았고 현재의 인도나 중국 인구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유럽은 또한 중국, 특히 이집트와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보다 더 가난하고 기술적으로 덜 발전했다. 기술 발전과 인구 밀도의 선순환이 경제 성장의 근본 원인이라면 유럽은 뒷전으로 남았어야 했다.

 

저자는 경제적 도약이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서 먼저 일어났다는 흔한 이유를 인용한다. 영국이 자랑하는 산업혁명은 재산권과 상업 계급의 정치적 힘을 보장했으며, 유럽 대륙 개신교 지역의 종교 개혁은 더 높은 수준의 문맹률과 기업가정신으로 이어졌다. 계몽주의는 과학과 기술 진보에 유리한 냉정한 사고방식인 경험을 장려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문화적 요소들은 모두 16세기와 17세기의 산물이었다. 저자는 1500년경 도시가 경제 활동의 중심지가 되면서 유럽의 낮은 농업 생산성이 유리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왜 유럽이 앞서 50년 동안 상업 부문에서 번성하는 자치 도시 국가를 발전시켰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뿐이다. 저자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등장하는 모든 왕과 왕비들은 잠시 등판했다 사라지는 선수들일 뿐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영악한 머리로 산업혁명을 예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천 년 전에 일어났을 수도 있고 천년 후에나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18세기 유럽의 춥고 습한 영국이라는 섬나라에서 왜 그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 시기와 장소에 영향력을 행사한 요인과 배경부터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왜 11세기부터 소수의 이탈리아 도시들이 지중해 무역의 번창하는 상업 중심지가 되었고, 결국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을 잉태하여 후세의 발전을 이룬 기반을 마련했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저자의 공로는 단순히 과거를 잘 해석한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인류 역사의 숨겨진 동력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도전, 즉 기후 변화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 해결책은 인류를 오늘에 이르게 한 추동력에 기대를 걸어보는 데 있다. 출산율 하락, 즉 인구 감소는 화석 연료로부터의 전환을 설계하는 기술 혁신에 필요한 시간을 벌면서 우리 종의 환경적 영향을 줄여줄 요인이 될 것이다. 더불어 앞으로 수 세기 동안 이러한 요소들로 이 기후 위기를 사라져가는 기억으로 바꾸는데 필요한 혁명적인 기술의 발전을 제때 허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인류는 어떻게든 기후 변화에서 살아남을 것이고, 지금으로부터 천년 뒤쯤 후손의 눈에는 우리 모습이 원시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류의 오랜 이야기가 중단 없는 기술 진보의 행진이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저자의 말이 옳았음을 알게 되리라는 점이다. (2023-03-14)

 

#인문 #인류의여정 #시공사 #인류학 #빈곤 #불평등 #세계경제 #리뷰어스클럽 #서평단 #책추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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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여정 - 부와 불평등의 기원 그리고 우리의 미래
오데드 갤로어 지음, 장경덕 옮김 / 시공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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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불평등, 우리의 미래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훑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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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잃어버린 사람들 - 뇌과학이 밝힌 인간 자아의 8가지 그림자
아닐 아난타스와미 지음, 변지영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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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의 어느 시점이든 자신이 정확히 누구인지 궁금해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기 정체뿐 아니라 내 생각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이라거나, 자기 팔다리에 이질감을 느끼거나, 심지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고 육신은 나날이 썩어간다고 믿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정체성과 자아 확립 사이의 혼란을 겪는 청소년기를 거치면서도 우리는 보통 기본적인 자아의식을 잘 지켜낸다. 또 한편으로는 알츠하이머병으로 뇌 손상을 입고 자신을 거의 잃어버리는 경우처럼 우리의 자아 감각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취약하다는 점을 간과하기도 한다. 우리 뇌의 많은 부분은 자신이 온전히 자신일 수 있도록 서로 돕지만, 매우 사소한 손상이나 무해한 오작동으로도 완전히 균형을 잃을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런 부류의 ‘비범한’ 인간 자아 여덟 가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장.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 남자.

나는 누구인가? 우리 대부분은 자아, 즉 주체인 ‘나’를 변함없는 존재라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 몸과 마음에 애착을 느끼면서도 정말로 몸과 행동을 통제하고 있는지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아감은 우리 뇌가 공들여 일한 결과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 뇌가 적절한 자아 감각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적으로 자신이 실제로 죽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코타르증후군 환자는 정말로 자신이 죽었다고 확신한다. 어느 정신과 병동의 중년 환자 그레이엄은 자신이 뇌사 상태라고 주장했다. 이혼과 연이은 자살 시도 실패 이후 그는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고 그의 모든 감정은 생기를 잃었다. 그의 결론은 그가 죽은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잠자고 먹고 마시는 행위를 계속하면서도 그럴 필요성을 잃었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 양치질도 중단했다. 자신이 아직 산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도 그는 믿기를 거부했다. 뇌의 특정 영역은 우리의 자아 감각에 필수적이다. 코타르증후군 환자의 손상된 뇌는 살아있다는 느낌 같은 자아 감각의 기본 요소들을 방해한다. 그레이엄의 뇌를 스캔해본 의료진은 의식적인 인식과 관련된 영역, 즉 전두엽 부분에 대사 활동이 거의 없음을 발견했다. 특히 감정과 같은 내적 활동을 인식하는 연결망에 영향을 주어 자신의 감정과 신체적 필요에 대한 인식을 잃음으로써 자신이 죽었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2장. 나의 이야기를 모두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이야기의 형태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서사적 자아를 형성한다. 알츠하이머 환자는 서사적 자아 유지 능력을 잃어가며 그 결과는 매우 치명적이다. 의미 기억은 특정한 형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와 개념을 ‘자기표현 시스템’에 저장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찬 이 기억 저장소는 우리의 서술적 자아에 통합되는데,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는 이 과정을 수행할 수 없다. 뇌에서 해마를 제거한 환자가 보이는 증상은 결과적으로 알츠하이머 환자들과 유사했다. 어머니에 대해 가장 좋아하는 기억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글쎄요, 어머니는 그냥 어머니였어요’라고 말한 유명한 환자 H.M.(헨리 몰레슨)은 어머니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으로 그녀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할 수 없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 우리의 자아에 대한 모든 감각이 서술적 자아로 귀결되는 듯 보이지만, 알츠하이머에 대해 다르게 증명되는 예도 있다. 오히려 환자의 자아의식의 일부가 보존되기도 하는데 이는 신체가 기억하는 ‘체화된 자아’(몸에 밴 습관, 몸짓, 동작들이 인간성과 개성을 지지하고 전달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마치 손가락 끝에 뇌가 저장된 듯 타이핑은 거의 자동으로 수행되는 작업인데, 이런 체화된 지식은 뇌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동안에도 지속된다. 말을 잃어버린 어느 알츠하이머 환자는 유대인들의 휴일에 유대교 회당에서 기도하려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섰다. 놀랍게도 그는 이 의식에 참여하면서 보낸 몇 년 동안 기도문을 그의 몸에 ‘새겨’ 넣었기 때문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기도문을 암송할 수 있었다. 


우리 뇌는 몸이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뇌도 있다. 자기 손을 보고 당연히 자기 몸의 일부라 인식한다면, 아직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지가 자기 일부라는 느낌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대부분이 경험하는 주인의식을 형성하기 위해 뇌는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데, 쉽게 조작되기도 한다. 이 소유감의 조작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주는 실험이 있다. 정상적인 피실험자들에게 앉아서 한 손을 고무손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으라고 말한다. 피실험자는 분리벽에 가려 자기 손 대신 고무손만 보이게 하고, 진짜 손과 고무 손을 동시에 페인트 붓으로 쓰다듬었다. 피실험자들은 가짜 손에 붓질을 느꼈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고무손이 실제로 그들의 손처럼 느껴졌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이것은 신체 일부가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신체 완전성 정체성 장애(BIID, 팔다리가 낯설게 느껴지는 증후군)를 초래하는 반대 방향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BIID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신체의 특정 부분, 즉 전형적으로 내 몸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팔이나 다리의 절단에 집착한다. 그 이유는 뇌에 있다. 대개 우리 뇌는 모든 신체 부위를 나타내는 ‘지도’를 가지고 있으며 누군가 발을 간지럽히면 그에 상응하는 뇌 부위가 활성화된다. BIID는 선천적으로 또는 생애 초기 발달 단계에서 뇌의 한 부분이 잘못되어, 팔이나 다리가 뇌에 적절하게 표현되지 않아 보고 느끼는 것이 조화되지 않는 갈등상태로 정의된다. 지도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한 자신의 사지를 온전히 자신의 소유로 이해하는 반면, 만약 지도가 불완전하다면 이질감을 견디지 못하고 실제로 절단시킴으로써 ‘해방되고 행복해지는’ 사람들의 사례도 있다.


4장.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해줘!

자기 몸에서 가장 예민한 부위를 찾아 스스로 간지럼을 태우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일부 조현병 환자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 이런 걸까? 일반적으로 조현병 환자들은 자기 몸을 통제하고 있다는 ‘주체감’이 없어 대리 감각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리잔을 들어 올리는 행동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홀린 것이라 말한다는 사례를 통해 조현병 환자들이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다고 설명한다. 모두가 경험하는 일상적인 정신적 수다일 수도 있지만 이들은 자기 목소리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종류의 해리는 우리의 대리 감각을 생성하는 뇌 메커니즘이 손상될 때 발생한다. 이 메커니즘의 작동을 설명하는 예로 축구공을 차는 행위가 있다. 축구공을 차게 만드는 운동 피질은 두 가지 신호를 보낸다. 다리를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 명령의 복사본을 뇌의 다른 부분으로 보낸다. 이 복사본으로 우리 뇌는 다리에 가해질 감각을 예측하고, 뇌의 예측과 경험과의 일치가 대리 감각을 만들어낸다. 조현병 환자의 뇌는 이 복사 명령을 보내지 못해 신체가 경험하려는 감각을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예측이 없다면, 우리의 행동은 실제로 시작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대신 다른 누군가의 책임으로 느껴진다. 이로써 왜 일부 조현병 환자들이 쉽사리 스스로 간지럼을 탈 수 있는지 설명된다. 이들의 뇌는 손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으며 몸은 아무런 준비가 없어 간지럼을 타게 된다.

5장. 영원히 꿈속을 헤매는 사람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는데 여전히 꿈을 꾸는듯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자. 아프도록 몸을 꼬집어보아도 현실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면? 할리우드 영화의 대본처럼 들리겠지만 비인격화(이인증)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실제 살아있는 경험이 이렇다. 비인격화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자아의식과 전반적인 인식의 현실감을 방해한다. 비인격화 환자들은 자기 몸, 감정, 삶 그리고 주변의 세계로부터 완벽히 분리된 느낌을 받는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진다. 일상생활에서 겉보기에 정상적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깊은 소외감을 느낀다. 요약하자면 이 현상은 조현병과 마찬가지로 손상된 뇌의 예측 메커니즘 오작동으로 발생하며 뇌가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뇌는 본질적으로 예측 기계로서, 감각 신호의 원인을 예측하고 이를 현실과 비교하여 세상을 인식한다. 단순히 우리의 신체뿐만 아니라 분노와 즐거움 같은 매우 기본적인 감정 역시 신체 상태에 맞추어 예측된다. 자기감정에 대한 뇌의 예측이 정확해야 비로소 자기 것이라 느끼며, 이 감정은 우리의 자아 감각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비인격화의 경우 뇌는 들어오는 감정 신호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므로 자기감정이라 느끼지 못한다. 



6장. 자아의 걸음마가 멈췄을 때

‘자신을 생각한다’라는 뜻의 자폐증(auto + ism = autism)은 오늘날 빈번히 접하는 용어이다. 자폐증의 전형적인 증상 중 하나는 타인의 표정을 해석하고 감정 상태를 식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예컨대 자폐증 환자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걱정하느라 얼굴을 찌푸린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지 못하며, 새로운 단어를 배우듯 이 표정의 의미를 익혀야 한다. 또한, 이들은 종종 새롭고 예상치 못한 일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말을 반복하거나 같은 영화를 질리지 않고 반복 시청한다. 조현병이나 비인격화와 마찬가지로, 자폐증 역시 뇌의 예측 능력 고장이 원인이다. 뇌는 다가오는 경험을 예측함으로써 세상을 이해하며, 이러한 예측은 하나의 모형으로 뇌에 저장된 예전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때때로 이러한 모형이 부정확하여 예측이 잘못될 수 있다. 예측과 현실 사이의 격차에 놀란 뇌는 감각 기관을 통해 새로 들어온 신호의 도움으로 모형을 수정하려 한다. 하지만 자폐증 환자들의 뇌는 자기 몸에서 나오는 공복감이나 타인의 얼굴에 나타난 슬픔 등의 신호를 정확히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뇌 정적'으로 가득 차 있는 이들의 뇌에는 되먹임 신호가 지나치게 왜곡되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되먹임 신호는 뇌의 예측 모형을 업데이트하지 못하며, 새로운 지식이나 자극을 통합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규칙적으로 예측 오류를 겪으며 끊임없이 외부 자극에 놀라게 되고, 이 놀라움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므로 이미 익숙한 영화를 반복 시청하게 된다.

7장. 침대에서 자기 몸을 주운 사람

누군가의 복제품인 도플갱어(doppelganger) 현상은 책과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원래 독일어로 doppel은 영어의 double, ganger는 walker로 함께 걷는 두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이 현상은 너무나 사실적이며 도플갱어 효과를 겪는 이들은 실제로 자기 몸이 증식했다는 환각을 느낀다. 만약 이 복잡한 환각을 경험하게 된다면 또 다른 ‘나’를 보게 될 뿐만 아니라, 자기 몸과 환각 상태 사이를 넘나든다고 느낀다. 취리히 출신의 한 청년이 도플갱어 환각으로 자살할 뻔한 사례가 잘 기록돼 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발작 약을 끊고 맥주를 많이 마신 후, 출근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기로 결심했다. 얼마 후 침대에서 일어나 어지럽게 돌아선 그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게을러빠진 또 다른 나에게 분노한 그는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 즉 도플갱어를 흔들었다. 이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의식은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빠르게 옮겨갔고, 그는 두 사람 중 누가 실제로 자신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공포에 질린 그는 창문에서 뛰어내렸으나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무엇이 이런 복잡한 환각을 일으키는 걸까? 뇌에는 모든 종류의 감각 신호를 통합하는 ‘전방 섬엽’이라 불리는 영역이 있다. 자신이 자기 몸 안에 머무른다고 느끼게 하고, 자기 몸이 우주의 어디쯤 있는지를 식별하는 것이 바로 이 뇌 영역이다. 도플갱어 효과를 경험한 사람들은 왼쪽 전방 섬엽이 손상되어 자신이 몸 밖에 머무르는 유체 이탈을 경험한다. 자신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환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8장. 모든 것이 제자리에

지금까지는 괴상하고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뇌의 기능 부전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8장에서는 그 반대이다. 황홀한 뇌전증은 꼭 불쾌하지만은 않은 증상이다. 황홀한 발작이 일어나는 동안 뇌의 특정 부위에서 심한 전기 방전이 발생한다. 환자는 종종 의식을 유지하며, 행복감이나 완전한 안정감처럼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느낌을 겪는다. 러시아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는 상상할 수 없는 행복과 완벽한 조화의 느낌을 묘사하면서 그의 황홀한 발작에 대해 웅변적으로 썼다. 이러한 행복감과는 별개로, 갑작스러운 명료함과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느꼈다는 보고도 있다. 흥미롭게도 이 현상은 앞서 논의된 자폐증의 신경학적 설명과 관련이 있다. 자폐증 환자가 뇌의 예측이 틀리기 때문에 고통받는 한편 황홀한 뇌전증 환자는 자기 뇌가 항상 옳다는 느낌을 즐긴다. 황홀한 뇌전증이 의식과 주관적인 감정이 생성되는 전방 섬에서도 발생함을 발견하였다. 전방 섬은 신체로부터 오는 신호를 통합할 뿐만 아니라 이 신호를 감정으로 변환한다. 스위스의 신경학자 파비엔 피카르는 전방 섬이 우리가 다음에 경험할 것에 대한 뇌의 예측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가정한다. 뇌가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는 불안과 불확실을 경험하지만, 예측이 맞을 때는 안전과 확실함을 느낀다. 황홀한 발작이 일어나는 동안 전방 섬의 전기 폭풍은 뇌의 예측과 실제 경험을 비교하는 메커니즘을 방해한다. 황홀한 발작 환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의 모든 것이 정확하게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맺는말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몸과 마음, 그리고 뇌는 우리 각자가 세상을 얼마나 어떻게 달리 인식하는지를 거의 알려주지 않는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도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독특한 성격과 자아를 갖고 있다. 저자는 이 자아에 균열이 생긴 조현병, 자폐증, 알츠하이머, 탈인격화, 도플갱어 효과를 경험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뇌의 어떤 문제가 어떻게 우리가 자아를 인식하는지, 어떻게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등을 설명한다.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주변의 세계를 인지하고 그 세계와의 관계 맺음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의 뇌가 중요한 메커니즘, 예측, 모형 등을 잘못 이해할 때 이러한 노력은 뿌리째 흔들린다. 이 매력 넘치는 책에서 저자는 오늘날까지 알려진 최신 뇌 작동법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돌아본다. 그는 자아가 정의되고 창조되고 발견되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은 단백질 덩어리를 탐구하고 있다. 

결국, 우리 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과학자들은 뇌를 지도화하고 특정한 감정이나 행동을 관장하는 특정 부위를 자극하는 등 여러 주제들을 조사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에게 닫혀 있던 세계에 대한 이해를 얻어내고 있다. 다양한 양태로 고통받는 수많은 정신 질환 경험자들을 접한 저자는 항상 친절하고, 주의 깊고, 빈틈없이 경청하면서 힘들었거나 아직도 힘든 그들의 이야기와 경험을 공유한다. 동시에 일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려운 과학적 내용을 쉽게 풀어내려 최선을 다한다. 눈높이 과학 교육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써준 점에 감사한다. (2023-03-11)

#뇌과학 #인간자아 #아닐 #아난타스와미 #변지영 #더퀘스트 #인지과학 #더퀘스트 #서평단 #리뷰어스 #나는누구 #자아 #조현병 #알츠하이머 #이인증 #유체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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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그리고 유신 - 야수의 연대기
홍대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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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박정희가 주도했던 5.16 군사 반란은 당시 제3세계에 흔했던 여느 쿠데타와는 사뭇 달랐다. 우리의 유신은 메이지유신 전후의 사무라이들과 황도파 젊은 장교들이 주도했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던 쇼와 유신의 한국판 재탕이었다. 일본의 유신이 폭주해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병영으로 만들고 일본 국민을 인질로 삼아 위기에 이르렀듯, 박정희의 유신도 똑같이 국민 살해의 임계점에 도달했었다. 부마항쟁 당시 몇백만을 죽여도 괜찮다는 박정희의 뜻을 가까스로 막아낸 것은 의사가 아닌 최후의 유신 지사(志士) 김재규였다.


10월 유신은 19721017일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헌정 중단 사태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위헌적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제3공화국 헌법을 정지하며 일본 천황처럼 초법적 존재가 된 것을 말한다. 그는 유신 체제를 '한국식 민주주의'라며 포장했으나 5·16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명분처럼 정권을 민간에 이양할 뜻이 전혀 없어 보였다. YH 무역 사건과 김영삼 제명 파동이 터지고, 부마 민주항쟁도 일어나면서 유신 체제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사실 탄생과 몰락의 궤를 함께 하는 유신의 특성상 박정희 정권의 종말은 거의 정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유신 정권이 지속되기 어려웠던 원인으로 당시 매우 좋지 않았던 경제 사정과 박정희의 무한한 권력욕을 들 수 있다. 박정희는 조카사위 김종필을 극히 견제하여 세 차례나 가택을 수색하였고, 김종필에 의하면 박정희 본인이 심지가 약해 주변을 너무 의심했다고 한다.


더구나 말년으로 갈수록 분별력이나 판단력이 무뎌졌고, 조금씩 민주주의를 맛본 국민은 병영국가가 되어가던 대한민국을 거부했다. 게다가 차지철을 비롯한 측근이 횡포를 일삼았고, 중앙정보부장을 열 차례나 갈아 치울 만큼 부하를 믿지 못하였다. 결국 19791026(속칭 탕탕절) 심복이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를 총으로 쏘면서 끝났다. 공교롭게도 유신은 태어난 달에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자기 파괴를 완성한 것이다. 2018년 대법원에서 19721017일 비상계엄에 따라 발령된 계엄포고령은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위헌·위법해 무효라고 판단했다. 혹시라도 새마을운동과 경제부흥의 큰 틀로 박정희를 옹호하는 독자라면, 그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는커녕 핍박하고 위험에 빠뜨렸던 위헌사범이었다는 점만큼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서거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필자는 대통령의 피격 소식에 동네 사람들이 한쪽에서는 세상이 무너진 듯 울부짖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꽹과리를 치며 떡을 돌리던 모습을 기억한다. 어린 동생은 부모님께 다음 박정희는 누가 하느냐고 물었다가 애꿎은 꿀밤만 맞았다. 그날 이후로 오후 6시마다 사이렌 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동사무소에 게양된 국기가 내려가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로부터 8년 뒤 대학 신입생이던 1987년에는 반란수괴의 후계자가 세운 군부에 맞서 동기들과 함께 돌을 던지기도 했다. 대학 선배들로부터 빌린 소위 금지 서적을 돌려보며 유신이라는 존재가 일본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여전히 우리 역사에 미치고 있던 친일 잔재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내 인생의 유신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암울하다.


필독이라는 필명의 딴지일보 필진이었으며 육십갑자 악마의 필력을 자랑하는 저자는 유신을 역사적 사건이 아닌, 생성 소멸하는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독특한 접근법을 전개한다. 속칭 주류 사학자의 학술적 저술이 아닌 역사적 사건의 유기체적 해설이라니, 듣느니 참신하다. 그는 유신을 자신이 위대해지기 위해 남을 파괴해도 된다는 기괴한 신앙적 믿음이라 정의한다. 유신의 역사, 즉 일본에서 탄생 성장하고 한국에서 완성 소멸하는 150년간의 낭만 비극적 서사를 씨앗-잉태-탄생-팽창-폭주-광기-임종-부활-절정-완성의 10단계로 나누어 톺아본다.


그는 비록 유신의 제단에 바치는 글로 삼가 망자를 위로하는 후기를 삼고 있지만, 현재의 국내 정세를 돌아보면 우리가 체감하는 유신은 여전히 진행형인 듯하다. 유신은 죽었지만, 유신의 화신인 박정희를 사모하고 그 후계자 전두환을 존경한다는 통수권자가 친일을 옹호하며 자기 파괴적 언행을 눈에 일삼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름도 일본 정당을 따라 지은 어느 정치집단은 유신 지사도 아니면서 정명가도와 탈아입구를 외치며 동아시아의 맹주를 염원하던 군국주의 일본의 망령에 세뇌당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 책의 제목, <유신 그리고 유신>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한국의 10월 유신까지를 암시한다. 학계에서는 1868년을 메이지 유신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으나, 저자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1274년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공을 지목한다. 유신이라는 독특한 관념은 일본의 지정학적 특징에 기인한다. 일본 열도는 천 년이 넘도록 외부로부터 침공받은 역사가 없어 스스로 신의 영토(神土)라 칭했고 임금을 천황으로 승격시켜 신성불가침의 절대자로 만들었다. 탐라국이었던 인근 제주도의 경우 임금을 별들과 대화하는 자(星主)라 칭했는데 일본에서는 이러한 신화적 지위를 천황과 후지산에 부여했다. 단 한 번도 혈통이 끊긴 적 없는 자연물에 가까운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은 계속해서 일본이었으며 다른 존재였던 적이 없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 개념을 내재화한다.


지구인이 지구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생각하듯 일본인에게는 일본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이다. 이런 일본에 처음으로 닥쳤던 여몽 연합군의 침공은 사활을 걸고 물리쳐야 할 고질라 같은 괴수, 즉 무쿠리고쿠리 이다. 아마 그다음으로 충격적인 침공은 2차대전 당시 미군 폭격기의 본토 폭격과 원폭 투하일 테고, 그래서 유독 미국에는 저자세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지는 않는다. 일본 침공 당시 몽골의 부마국 지위를 간신히 유지하던 고려는 일본 정벌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세상의 모든 땅을 정복하겠다는 몽골의 관념에 밀려 정벌에 참여하게 된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일본 침공에 참여한 고려의 곤란한 입장은 일본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지독히도 운이 좋게 가미카제의 도움으로 멸망할 운명을 모면한 일본은 자신들이 속한 세계는 신성하며 그 세계를 위해 낭만적인 죽음을 감수할 수 있다는 대중적 믿음을 공유함으로써 훗날 유신의 정신적 토대로 삼는다. 무쿠리고쿠리의 원한을 갚기 위한 시도는 고려 연안에 출몰하던 왜구에서부터 20세기 대동아공영의 명목하에 아시아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한 이후에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거기다 걸핏하면 일본의 입장을 알아서 거들고 있는 대한민국 현직 통치자의 정체성 불분명한 언행은 뼈에 사무치도록 고마울 것이다. 개인적으로 유신 이후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도 저자의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리라 기대해 마지않는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이 정치·경제·군사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키는 과정과 일련의 대사건을 말하며 그 시기는 메이지(明治) 원년인 1868년으로 지금으로부터 불과 150년쯤 전이다. 당시 일본은 270년 이상 사무라이가 봉건 영주들을 다스리는 봉건제 사회였고, 조선 원정 실패 후 어수선했던 일본을 안정시키고 문화 발전을 이룬 계기가 되었다. 요시다 쇼인을 중심으로 정한론을 비롯한 팽창정책으로 주변 국가 특히 우리나라에 잊을 수 없는 잘못을 범하고도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 기이한 행태를 보이지만, 메이지유신은 사실상 오늘날의 일본을 있게 한 원동력이자 대변혁으로 근대 일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의 변곡점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막부에 의해 처형당한 유신과 정한론의 선구자인 요시다 쇼인은 역사적 비중에 비해 평가절상된 추앙을 받는다. 일본을 일으켜 세운 유신의 중심에는 훗날 일본 육군의 전신인 조슈 번이 있었고 이들이 보였던 사상과 패기의 바탕에는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신은 조슈와 사쓰마의 순혈이 아닌 일반 군인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황도파(皇道波)는 오직 천황이 제국의 모든 것을 친정(親政)해야 한다고 믿었던 육군 내 파벌로, 순혈보다 우월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피보다 더 순수한 정신성을 추구하였다.”

 

유신을 이해하려면 뜻있는 사무라이를 가리키는 지사(志士)의 개념을 잘 살펴야 한다. 지향하는 뜻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나 자신의 뜻이 있고 그 뜻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었다면 지사로 인정해준다는 관습은 오늘날 <바람의 검심>이나 <나루토>, <원피스> 같은 검객 애니메이션에서도 잘 드러난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에서는 법을 어기고 사회에 해를 끼쳐도 큰 뜻을 위한 각자의 투쟁방식을 실천한 사람이라면 멋쟁이로 존중해주는 독특한 문화가 생겨났다. 그런데 멋있는 건 이해하겠지만, 그 뒤가 이어지는 법이 없다. 애석하게도 폭발하는 멋짐(또는 멋진 의지)과 광기와 실행으로 그치고 만다. 유신이 자기 파괴적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오로지 미학적 가치만 중요할 뿐, 이렇다 할 윤리적 가치, 즉 철학이 없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윤리적 가치가 없는 행동은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으므로 결국 광기와 폭력 그리고 자멸로 이어진다. 이처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유신의 관념이 국가 단위의 에너지로 뭉쳐진 결과가 바로 일본 제국이다.


한창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이 밤새 내린 비에 단 하루 만에 모조리 지고 말면 그뿐이라는 일본인들의 미학적 정서를 한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벚꽃이 눈발처럼 휘날리는 장관을 보노라면 마치 현실 세계를 벗어난 꿈속의 한 장면 같은 아름다움에 취하기도 한다. 꽃이 짐으로써 피어났던 소명을 다한 것으로, 그러니까 꽃이 져버리는 그 모습에만 심취한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들의 진정성 넘치는 광기를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는 최익현, 안중근, 김옥균, 김재규 등을 의인으로 추앙받게 한다. 내 할 일은 다 했으니 인제 그만 가보겠다, 즉 목숨을 버리겠다는 결연한 모습에서 멋짐을 인정받은 것 아니겠느냐고 추측해본다. 대통령 시해 이후 재판정에서 김재규가 그토록 의연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정확히 들어맞는다. 비록 미학적 관점일 뿐이지만 어쨌든 이들은 가치를 위해 선뜻 자신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던지는 이를 지사로 여겨 최대한의 경의를 표한다.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말하듯, 모든 수익 활동도 마다하고 유신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한 해를 오롯이 저작 활동으로 보낸 저자의 노고가 빛을 발하는 책이며, 그가 한국인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밝혀보기로 작정했던 차기작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부산물이다. 저자가 유신 지사는 아니지만 어디, 멋짐이 폭발하는 것 같지 않으신가? 아무래도 당분간 대선진리교의 교세가 약진할 것 같은 느낌을 부정할 수 없다. 차와 포를 떼고 오로지 졸()의 힘으로 자칭 졸저(拙著)를 졸고(拙稿)한 저자에게 딴지일보식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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