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어키퍼의 딸
안젤린 불리 지음, 김소정 옮김 / 문학서재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진행형인 인종차별과 마약밀매의 어두운 사회 이면을 정면으로 다룬 현실 고발 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물권력 - 매혹하고 행동하고 저항하는 동물의 힘
남종영 지음 / 북트리거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과 동물은 본래 평등하며 서로 돕는 관계였다. 늑대는 스스로 가축이 되어 야생을 버리는 대신 인간과의 오랜 동반관계를 유지한다. 고양이는 늑대보다는 늦게 가축화의 길을 걸었고 아직은 인간을 자신들과 동격으로 여긴다. 범고래의 시각에서 보자면 어느 날 불쑥 그들의 삶터에 인간이 끼어든 것이고 잠시 협력관계를 유지했지만 결국 생존을 위협받기에 이른다. 인간의 치명적인 간섭으로 망가진 지구 생태계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동물을 희생하여 이룬 문명의 발달로 많은 혜택을 받는 지금, 인간은 이제라도 동물과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야만의 시대에 동물들은 단지 인간의 돈벌이와 쾌락의 대상, 정권 유지 수단, 전쟁 병기로 쓰였으며, 문명이 발달한 산업화 시기 이후에는 공해와 오염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다 못해 멸종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자연계에서는 서로 맞닥뜨릴 일조차 없지만, 순전히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해 서로 다른 종끼리 목숨을 놓고 싸우는 구경거리이자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인간은 생태계 파괴와 같이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돌려받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인간의 삶 역시 피폐해진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지능이 높고 문명화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지구를 지배하다시피 하지만, 그것이 동물들을 학대해도 되는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렵 채집의 시대에 인류는 동물에게도 이성과 감정이 있음을 믿었다. 사냥당한 동물을 섭취하기 전에 영혼을 위로하며 그들과 한 세계에 살았다. 진화에 결정적 구실을 한 불의 사용으로 대뇌피질 용량이 커지고, 농경사회로 진입하면서 인류는 가축으로 길들인 동물의 힘을 이용했다. 자유와 자율성을 포기하는 대신 사회적 기술을 터득한 개의 경우처럼, 인류도 소통과 협력으로 문명을 일구어냈다. 인간의 대뇌피질이 다른 영장류에 비해 월등히 큰 이유는 복잡한 사회성 때문이라는 추론이 설득력을 얻는다.

어릴 적 시골에서 밭갈이에 동원되었던 누렁이는 가축이면서도 든든한 일꾼이자 집안의 한 밑천 재산으로, 누가 도회지에 유학이라도 간다 치면 처분 1순위의 동산(動産)이었다. 누렁이가 암송아지를 낳자 할아버지는 동네 막걸리 잔치를 벌였고, 늙어서 더 이상 일을 못 해 읍내 우시장에서 헐값에 처분하던 날은 목놓아 우셨다. 농경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옮겨오면서 동물은 더 이상 반려 관계가 아닌 인간의 자본 확보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누리는 자본주의의 달콤한 열매는 사실 동물들이 희생된 결과이다. 할배가 이름 붙여준 누렁이는 차마 못 잡아먹지만 이름 모를 육우는 고급진 단백질 공급원으로 뱃속에서 녹는다. 오늘날 내연기관과 농기계가 노동하는 동물을 대체했지만, 아직도 동물원과 수족관 등지에 갇힌 동물은 간신히 목숨만 이어가고 있다. 동물을 친구라 여긴다면서 과연 언제까지 가두고만 있을 것인가.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자연계에는 꼭 필요한 만큼만 소비되고 모든 물질이 자연분해 되기 때문에 쓰레기가 생겨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선순환이었다. 인류가 지금처럼 잘 먹고 잘살게 된 지는 문명이 생겨난 이래 불과 300년도 되지 않는다. 오로지 섭식을 위해 동물을 대량으로 생산 소비하는 무자비한 자본주의가 생태계를 무너뜨리고 우리는 오늘도 아무 거리낌 없이 저렴한 가격으로 육류를 소비하고 있다.

인간과 닮은 구석이 많은 동물일수록 인간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그렇지 않은 동물보다 훨씬 덜 잡아먹힌다는 주장은 흥미로우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인류는 서로에게 공감하는 지능을 키움으로써 협력할 수 있었고 지구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도축을 위해 기차에 실려 가는 영국의 어린 양 얼굴이나 진통제 주사로 고통의 존재를 입증하는 물고기 실험의 결과처럼, 인간과 동물 사이의 공감 역시 그간 주목받지 못했을 뿐 분명 작용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이런 인간과 동물 사이의 공감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무감각하게 만든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간이 지닌 또 다른 욕망의 그늘이 아닐까.


윤리적 삶과 동물 해방에 관한 내용을 학교 교육과정에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는 한편, 법제화된 안전교육마저도 서면 자료 제공이나 시청각 자료 시청 등 다분히 형식적으로 흐르고 마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본다. 동물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여건이기 매우 어려운 도심지의 학교이기도 하고, 스마트폰 밖의 세상과 만나기도 그리 쉽잖은 아이들의 생활 습관에서, 과연 이들의 삶 속에서 동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 수 있을까. 동물 해방이라는 좀 거창한 명칭 대신 공장식 축산의 비윤리적, 구조적 문제점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 등을 주제로 한 탐구발표의 소재로 추천해봄 직하다. 동물성 단백질 식단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계속 소비해야 하므로, 육가공 제품의 생산 유통 등 최종 소비자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지식부터 공유하면 어떨까 싶다.

동물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만든 GMA(Generically Modified Animals)를 접해보니, 공상과학 영화 <닥터 모로의 DNA>가 떠오른다. 어느 외딴섬의 비밀 연구소에서 동물의 특별한 능력을 인체에 결합하는 실험으로 과학계의 주목을 받던 모로 박사의 빛나는 업적이, 사실은 비난받아 마땅한 인체 유전자 조작이었음이 드러나고 끝내는 괴물이 된 합성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며 자기 파멸에 이른다는 내용으로, 과학에 대한 몰이해와 기술의 오남용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온토마우스, 형광 물고기, 품종견 대회처럼 비단 의약품 개발뿐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호기심이나 재미로 행하는 동물 유전자 실험의 비윤리성 그리고 동물들에게 남겨지는 고통스러운 유전병 등은 모로 박사처럼 창조주를 빙의해 저지르는 인간의 크나큰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저지르는 객기가 있다면 미리 방지하는 용기 또한 필요하다.

동물원에 살던 유인원이 자신이 사는 우리에 떨어진 어린아이를 구해준 똑같은 두 경우가 있는데, 결과는 판이했다. 먼젓번 경우의 침팬지는 우상으로 취급받았고 나중의 경우는 즉각 사살당했다. 동물은 말을 못 하니 그 행동을 보고 의중을 짐작할 뿐이라 이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생겼다. 단지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울 뿐, 동물은 자신들 나름의 소통 방식과 체계를 지녔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히 동물을 말 못하는 미물로 치부해왔고 인간에게만 언어능력이 있다며 오만한 모습을 보였다. 동물을 사랑하는 만큼 좀 더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인간은 오랫동안 가장 저열하고 폭력적인 정치 수단인 전쟁터로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동물들을 동원하고 희생하였다. 말과 당나귀는 수송과 의무병으로, 귀소본능을 이용한 비둘기는 통신병으로, 뛰어난 후각을 지닌 개는 가스와 폭발물 탐지병으로, 힘 좋고 순박한 코끼리는 대형 병기이자 운송 수단으로 투입되었다. 일부 인간의 목숨을 구하려는 선의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나, 거의 모든 동물에게 자아의식이 없다는 점을 활용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의 목숨을 마음껏 빼앗았을 뿐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심지어 군-동물 산업 복합체를 통해 동물의 노동과 사체를 밟고 야욕을 채우려 드니, 동물 착취를 생각하면 이제 만물의 영장이라는 호칭은 좀 삼가야 하지 않을까?

수년 전 미국 동부 끄트머리의 도시 시애틀과 바로 위 밴쿠버 사이의 리아스식 해안지역을 방문했을 때, 고래 박물관에 전시된 뼈대만 보고 시큰둥했다가 바닷가에서 실물 범고래, 일명 오르카를 보고 그 크기와 헤엄 속도에 탄성을 질렀던 적이 있다. 너그럽게도 자신들의 사냥터를 인간에게 내어주며 협업으로 고래를 사냥하던 이들은 불과 40년쯤 전 처음 생포되고 좁디좁은 수조에 갇혀 학대받으며 인간의 돈벌이에 희생당하기 시작했다. 본래 친구라는 뜻으로 이름 붙었던 범고래 틸리쿰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세 차례나 인명사고를 일으키며 살인자 고래(Killer Whale)라는 오명이 생겼음을 그때 알았다. 두 살 때 인간에게 잡힌 이후 33년을 놀이공원에서 인간의 쾌락을 위해 착취당하다가 숨을 거둔 틸리쿰의 마지막 이후 세계는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범고래쇼는 사양길에 접어들었으니 사필귀정이라 하겠다.

국립공원 대 사냥 허가 정책의 경우는 병 주고 약 주는 인간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아울러 자연을 정복과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서구인 특유의 세계관은 다른 세계에는 오만함으로 비쳤으며 오늘날 세계의 서구화에 힘입어 지배적 시각이 되어가는 점이 우려스럽다. 이 같은 시각은 자원확보를 핑계로 아무 거리낌 없이 원주민을 학살하는, 우주판 미국 서부 개척사를 연상케 하는 영화 <아바타>에서 잘 드러난다. 다소 희망적으로 보자면 동물에 대한 인간의 고압적 태도는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바꿀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21세기 들어 가장 유명한 두 동물은 범고래 ’틸리쿰‘과 사자 ’세실‘로 대표된다. 이들은 동물원 혹은 수족관, 국립공원 보호구역이라는 장소만 다를 뿐 동시대 야생 동물을 이용한 착취 수단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백수의 왕 사자는 인간이 만든 법적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지만, 국립공원만 벗어나면 트로피 사냥꾼의 표적일 뿐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트로피 사냥으로 엄청난 액수의 관광 수입을 벌어들이는 동안 엄청난 수의 야생 동물들이 사라지고, 동물들에게 역차별당해 국립공원 안에 살다 쫓겨난 원주민은 삶의 터전을 잃고 황폐해진다. 식민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바뀌었을 뿐, 동물에 대한 착취는 오늘날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코끼리나 범고래처럼 동료 혹은 새끼의 죽음을 애도하고 오랜 기간 장례식을 치르는 동물들의 사례를 통해 그들에게도 사람과 닮은 감정을 지녔다는 어렴풋한 인식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들에게는 매우 미안하게 앞으로도 동물성 단백질 섭취를 포기할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소중한 식자재가 되어줄 그들의 운명에 공감하고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으로 윤리적 육식을 한다면 이 책을 읽은 보람이 느껴질 것 같다.

굳이 언어를 전공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언어와 다를 뿐, 돌고래, 코끼리, 유인원 등 일부 동물에게도 엄연한 의사소통 체계가 있을 것으로 능히 짐작된다. 왜 굳이 인간 언어의 체계와 비슷해야 언어로 인정한단 말인가? 만약 인간보다 더 지능적이고 정교한 언어를 지닌 외계인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의 언어로 소통해야만 인정받는다면, 우리가 순순히 따를 수 있을까? 1977년생 오랑우탄 찬텍과 같은 유인원들의 교차 양육과 수화 교육 실험은 처음부터 비극적 종말이 예고된 것으로, 인간의 호기심과 오만함으로 그들을 섣불리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인간도 동물도 아닌 존재로 만든 사례다.

퇴근길 전철역에서 집으로 향하는데 웬 남성이 목청 돋워 외친다. “여러분,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되었지만, 저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선택받을 수 있습니다!” 이게 대체 뭔 소리람? 나는 선택받지 못한 원숭이 가운데 하나였단 말인가? 원숭이-인간 진화설 주장도 경천동지할 말이거니와, 인류와 유인원의 공동 조상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주 오래전 과거 어느 지점에선가 분기했다는 기초 개념조차 모르면서 다윈의 진화론을 말 한마디로 뭉개버리는 저 용기는 대체 무어람. 오랑우탄 거울 실험에 드러났듯 수동적 객체이기를 거부한 동물(비인간인격체)도 있건만, 어찌 인간이면서 그리 자의식 없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연과 동물은 그대로이건만 때로 인간은 스스로 똑똑한 바보임을 증명하기도 한다.

사람 살기도 마땅찮은 좁은 국토를 지닌 우리나라만 해도 지리산 오삼이의 경우처럼 동물에게 그들의 공간을 마련하고 내어주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을 보면, 상대적으로 동물에게서 그들의 영역을 빼앗아 오기는 매우 쉬웠을 것이다.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린다는 명분을 앞세워 국토개발에 열중하느라 자연을 훼손한 결과는 어떠한가. 한 번 손을 댄 자연이 복구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 않던가. 그나마 개발에 앞선 환경영향평가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하고는 있지만, 우리의 동물 이웃이 설 자리를 점점 사라지고 있다. 자연 방사 프로그램이 왜 자꾸 성공하지 못하는지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어느 고래의 외로운 노래가 같은 고래가 아닌 인간으로부터 응답받았다. 고래에 매료된 활동가들이 동물과의 교감, 정동을 통해 그들 존재의 아름다움에 공감하고 인간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스스로 자, 그러할 연. 스스로 그러한 것이 자연이다. 인간의 오만한 간섭이나 탐욕 대신 함께 어울려 살아가려는 태도가 자본의 달콤한 유혹을 극복하기란 참으로 쉽잖아 보인다. 그러나 자연 앞에 겸손했던 탐사대의 마음가짐처럼 아주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 애지중지 키운 동물 가운데 특히 개의 경우는 자신이 사람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소위 개 버릇 남 주지 못하는 부류인데, 개통령 강형욱 씨를 만나야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운명이다. 애완동물이 아무리 이쁘고 사랑스러워도 주인이 동물을 개별 존재로서 인식하고 키우지 않으면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허물어져 문제 행동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은 후로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연민의 정과 같은 변화가 오기를 기대하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나아가 나 자신부터 동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대할 마음이 생겼으니 더더욱 훌륭한 일이다. 사소한 시각의 변화가 세상을 바꾸는 힘의 시작이다. 굳이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더라도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일독을 권해드린다. (2023-03-30)

#동물권력 #남종영 #동물보호 #동물행동 #환경보호 #인간과동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반 일리치의 죽음 (러시아어 원전 번역본) - 죽음 관련 톨스토이 명단편 3편 모음집 현대지성 클래식 4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우섭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품은 이야기의 연대기적 끝에서 시작된다. 판사이자 이반 일리치의 절친인 피터 이바노비치가 이반의 죽음을 발표하자 판사들은 법원의 밀실에 한데 모인다. 자신들이 아니라 이반이 죽었다는 것으로 위안 삼지만, 방에 있던 사람들은 이반의 죽음으로 인해 일어날 승진과 전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저녁 피터는 이반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반의 집으로 향하고, 이반의 시신을 바라보던 중 이반의 얼굴에 나타난 불만과 경고의 표정에 내심 괴로워한다. 이반의 아내 프라스코비야는 피터에게 죽은 남편의 정부 연금을 최대한 불릴 방법을 묻는다. 퇴근길에 피터는 이반이 가장 좋아했던 간병인 게라심을 만난다. 피터가 이반의 죽음과 장례식을 슬픈 일이라고 말하자, 게라심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로 피터를 놀라게 한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30년 이상 과거로 이동하여 이반의 삶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이반은 세 아들 중 둘째로 모든 면에서 정상적이었다. 열세 살 무렵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가치관과 행동에 동화되고, 개선된 사법 기관의 시험 치안 판사가 되어 새 근무지로 옮겨간다. 그가 결혼하고 아내 프라스코비야가 임신할 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이반이 소중히 여기고 사회가 인정하는 적절하고 형식적인 생활 방식에 프라스코비야의 행동이 방해되기 시작하면서 이반은 점점 더 공무에만 몰두하고 가족과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직장에서 그는 모든 개인적인 관심사를 공적인 업무에 연결 짓지 않는 데 자부심이 있으며 가정에서조차 가족에게 형식적이고 사무적인 태도를 보인다. 시간이 지나고 이반은 승진한다. 그는 대학 도시의 재판장 직을 맡게 되리라 기대하지만 승진에서 탈락한다. 불공평함에 분노한 이반은 휴직계를 내고 가족과 함께 시골에 있는 처남의 집으로 이사한다. 자신의 월급으로는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난다. 그는 법무부 행정부의 인사이동으로 절친이 고위직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친구 덕에 도시에서 더 높은 보수를 받는 직책을 맡게 되고, 가족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린 이반은 가족들이 도착할 준비를 위해 집을 사고 가구를 마련하기 위해 홀로 떠난다. 어느 날 커튼을 걸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던 중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면서 창틀에 옆구리를 부딪친다. 하지만 부상은 대수롭지 않았고 잘 마무리된 집의 모습에 매우 만족한다.



이반은 왼쪽 옆구리에 약간의 불편함과 입에서 특이한 맛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불편함은 점차 커지고 곧 이반은 짜증을 내며 잘 다투게 된다. 찾아갔던 의사들 모두 병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하자 이반은 우울한 두려움에 빠져 그 좋아하던 카드놀이조차도 흥미를 잃는다. 몸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던 어느 날 밤, 어둠 속에 홀로 누워 있던 그는 처음으로 죽음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공포에 휩싸인다. 그는 자신의 병이 건강이나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프라스코비야가 이런 남편의 처지를 이해할 줄도,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자 이반은 그녀에 대한 증오심을 간신히 억누른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죽음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마음속 죽음에 관한 생각을 차단하기 위해 가림막을 세우려 노력하지만 죽음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이런 고통의 한가운데 이반의 일꾼이자 간병인인 게라심이 등장한다. 이반의 배설물 처리 임무를 맡은 게라심은 곧 죽어가는 남자와 밤새도록 함께 지내기 시작한다. 이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게라심은 이반의 다리를 어깨에 받쳐주고, 그 어떤 살아있는 사람보다 이반에게 필요한 연민과 정직함을 보여준다. 이반의 일상은 단조롭고 정신없이 흘러간다. 주변 사람들은 이반이 단지 아프기만 할 뿐 죽어가는 척한다 생각하지만, 이반은 자신이 인위적인 것에 둘러싸여 있다고 느낀다. 누구도 이반의 임박한 죽음에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반은 조용히 분노하며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은 게라심 말고는 어린 아들뿐임을 깨닫는다. 그날 밤 이반은 짙은 검은 색 자루 꿈을 꾼다. 그는 자루에 격렬하게 밀려들어 가고 있지만 떨쳐낼 수 없다. 자루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렇게 되기를 욕망한다


꿈에서 깨어난 이반은 게라심을 떠나보내고 처음으로 자신의 영혼이 자신에게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열이틀이 더 지나고 이반은 이제 소파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죽음을 생각하며 고통의 원인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뒤돌아볼수록 더 많은 기쁨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듯 자기 삶도 점점 더 나빠졌음을 알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게라심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반은 자신이 제대로 살았는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는 다시 검은 자루를 상상하고, 그가 경험하는 엄청난 고통이 일부는 자루 안으로 밀려들어 가는 것에서, 다른 일부는 자루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됨을 깨닫는다. 자기 삶이 그런대로 괜찮았다는 확신 때문에 자루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갑자기 어떤 힘이 이반의 가슴과 옆구리를 강타하고 자루를 통해 그를 밝은 빛으로 밀어 넣는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손이 아들의 머리에 놓이자 그는 아들이 불쌍하다고 느낀다. 아내가 눈물 젖은 얼굴로 침대에 다가오자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공직 생활과 가족 그리고 사회적 관계 모두 인위적이었음을 깨닫는다. 죽음을 앞두고 불과 두 시간 전 그는 인생의 참뜻을 알게 되면서 극도의 기쁨을 경험한다. 한숨을 쉬던 이반은 몸을 뻗으며 죽음을 맞이한다.

 

<주인과 일꾼>

<주인과 일꾼>은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던 상류층 주인 브레후노프가 일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평온히 눈감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는 부의 축적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일꾼을 무지몽매한 인물로 무시하며 그들의 임금을 착취하는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동사 위기에 처한 일꾼 니키타를 자신의 체온으로 살려내게 된다. 니키타는 브레후노프와는 다르게 고단한 삶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아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났고, 그는 알면서도 브레후노프에게 임금을 착취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동물을 사랑하고 자신의 현 상황에 만족할 줄 안다. 이뤄놓은 것도 많고 아직 이뤄야 할 것이 너무 많은 브레후노프와는 달리 니키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독실한 믿음을 지녔고, 죽음이란 삶을 포기하고 새로움에 적응하는 하나의 자연적 현상이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브레후노프는 극한의 상황에서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하게 되고, 부를 축적했을 때와는 다른 좀 더 깊은 기쁨을 맛본다. 그는 이제 더는 자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니키타가 살아남기를 진심으로 원했으며 결국 하나님을 받아들여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세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상류층의 속물근성과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자들의 순수함을 이반 일리치와 일꾼 게라심으로 비교하였듯, <세 죽음>에서는 귀부인과 마부를 놓고 비교한다. 작품 속 귀부인과 마부 역시 노령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죽음을 맞이하는 둘의 자세는 사뭇 다르다. 귀부인은 자신을 수행하는 젊은 하녀에게 짜증을 내며, 병이 깊어 회복될 가능성이 없으면서도 자꾸만 삶에 집착하여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고집하여 남편은 물론이고 주변인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한다. 이 작품의 주변인들 역시 <이반 일리치의 죽음>처럼 위선적으로 그녀의 죽음을 숨기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반면, 늙은 마부는 죽음을 삶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가죽ㅍ장화를 젊은 마부에게 넘겨주는 등 관용적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남의 잠자리를 병 때문에 너무 오래 차지하는 것을 미안해하기까지 한다. 그의 그런 자세는 마지막에 등장하여 늙은 마부의 묘비를 위해 베어지지만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나무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올바른 삶

소설의 시작부터 톨스토이는 이반, 프라스코비야, 피터, 그리고 이반의 동료 대부분이 대표하는 인위적인 삶과 게라심이 대표하는 진정한 삶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믿는다. 인위적인 삶은 얕은 인간관계, 이기심, 물질주의로 특징지어진다. 고립되고 성취감이 없으며 궁극적으로 인생의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인위적인 삶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숨기고 죽음의 순간에 기만적으로 두려움과 외로움을 남긴다. 반면 진정한 삶은 연민으로 가득하며 다른 사람을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고유한 생각, 감정, 욕구를 가진 개별적인 존재로 바라본다. 또한 고립을 허물고 진정한 대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상호 긍정하는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인위적인 삶은 사람을 외롭고 공허하게 만드는 반면, 진정한 삶은 공감을 통한 연대와 위로를 통해 힘을 키우며, 유대감을 형성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한다. 자기 삶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며 외로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라심은 타인에 대한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삶에 의미를 불어넣는다. 이반의 처지에 공감하고 고립감을 덜어주는 그의 정신적 지지는 이반의 다리를 잡아주는 육체적 지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는 이반의 고통을 공유함으로써 자신의 고통 또한 덜어낸다. 진정한 삶의 미덕은 타인을 돕는 동시에 자신도 그 관계로부터 혜택을 받는다. 연민과 사랑이 양방향으로 오고 가야 진정 올바른 삶이다.

 

죽음의 필연성

죽음을 향해 꾸준히 다가가는 이야기는 이반이 죽음을 인정하고 무력한 힘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삶의 끝, 인간관계, 인생 계획, , 자신의 존재 자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톨스토이는 소설 전반에 걸쳐 죽음에 대한 준비는 삶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분명히 말한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전망으로 인해 삶에 대한 이반의 태도가 변화함에 따라 그의 감정은 순수한 공포에서 완전한 기쁨으로 발전한다. 이반의 사회적 환경을 특징짓는 죽음에 대한 회피는 불쾌한 현실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망상에 기반하며 공허함, 공포, 불만족으로 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죽음을 받아들이고 예측할 수 없는 진정한 삶의 본질을 인식하면 죽음의 순간에 자신감과 평화, 심지어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바르게 사는 삶을 통해 죽음을 이해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

톨스토이는 인위적/본질적 이분법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재를 내면과 외면, 영혼과 육체적 삶 사이의 갈등으로 묘사한다. 9장에 이르기까지 이반은 순전히 육체적인 존재일 뿐 영적인 삶의 흔적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기 육체의 안위를 위해 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촉진하는 선에서만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육체적 삶을 진정한 영적 삶으로 착각한다. 자기 존재를 올바른 것으로 믿으며 삶의 오류를 외면한다. 영적인 것을 부정한 나머지 이반은 육체를 초월할 수 없게 되며 극심한 고통과 압도적 불행, 절대적 공포를 경험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이반은 자신의 고독과 마주하게 되고, 점차 영적인 삶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해를 향해 성장하고 육체를 영적인 것으로 대체하면서 그는 고통을 넘어 죽음을 정복하고 극도의 기쁨을 경험한다. 톨스토이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각 개인이 할 일은 자아의 이중성을 인식하고 덜 중요한 육체적 삶이 더 중요한 영적 삶에 부합하도록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반전

톨스토이는 소설의 구조에 몇 가지 반전 패턴을 통합한다. 이야기의 연대기적 결말인 이반 일리치의 실제 죽음은 첫 번째 장에서 일어난다. 소설의 나머지 부분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반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삶을 다루고 있다.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을 뒤집는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힘과 자유, 지위가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약함과 속박, 고립으로 치닫는 시기이다. 7장 이후 이반이 서재에 갇혀 육체적 퇴화와 소외를 겪을 때, 그는 실제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몇 가지 언어적 형식을 통해 이 점을 강조한다. 이반은 자신의 영적 각성을 마치 자신이 위로 올라가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아래로 내려가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는 삶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갑작스러운 통찰을 기차 안에서 진정한 여행 방향이 예상 방향과 반대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감각에 비유한다.

 

소외

순수한 육체적 삶을 비롯한 인위적 삶의 특징은 소외를 향한 관점이다. 이반은 자신의 즐거운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나 관계를 마주할 때마다 그로부터 거리를 두며 이러한 반응은 내적 삶 대 외적 삶이라는 더 큰 주제와 연결된다. 이반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다른 사람을 온전한 개인으로 볼 줄 모른다. 그는 오직 자신을 위한 선을 얻기 위해 행동하며, 자신의 쾌락을 침해하는 대상에게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다. 따라서 이기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반은 개인을 차단하며, 결국 이렇게 함으로써 타인으로부터 자신 역시 차단한다. 톨스토이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폐쇄와 고립에 대한 여러 이미지를 활용한다. 검은 테두리로 둘러싸인 장례식 통지서부터 벽에 기대어 있는 관 뚜껑까지, 톨스토이는 이반이 자발적으로 분리되었음을 암시한다.

 

유쾌한 것, 적절한 것, 그리고 장식

소설 전체에서 톨스토이는 유쾌/적절/장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사회생활에서 받아들여지는 규범을 언급하는데, 이는 올바른 삶이라는 주제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반이 예의, 예절, 행동 규범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는 것은 그가 진정한 삶이 아닌 인위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내면의 실체보다는 외적인 모습에, 실제 진실보다는 진실의 모습에 더 관심이 있다. 상류 사회의 의견에 신경 쓰지 않고 참된 것을 위해 유쾌/적절/장식을 무시하는 사람이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이다.

 

시간과 공간의 수축

소설에서 쉽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모티브는 시간과 공간의 수축이다. 이 수축은 영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삶이 탄생과 죽음 사이의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개념을 강화하기 때문에 내적 삶과 외적 삶이라는 주제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톨스토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효과를 달성한다. 소설의 첫 네 장은 40년 이상, 두 번째 네 장은 몇 달, 마지막 네 장은 4주가 조금 넘는 기간에 걸쳐 펼쳐진다. 톨스토이는 시간적 틀을 축소하는 것 외에도 공간적 차원을 축소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어린 시절 이반은 이 마을 저 마을로 이사 다니다 중년이 되어서는 아파트를 얻어 한 도시에 정착한다. 발병 직후 그는 서재에 갇히게 되고 소설이 끝날 무렵에는 소파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소설의 각 장은 대부분 이전 장보다 점차 짧아진다. 시간과 공간은 이반이 죽는 순간, 즉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단 한 순간을 경험하는 0점에 도달할 때까지 축소된다. 이반의 영혼이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 경계를 초월하는 이 순간은 죽음의 종말을 의미하며 영적인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부르주아 사회

소설 전체에서 톨스토이는 귀족 사회를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얄팍한 개인들의 집합체로 묘사한다. 귀족 사회의 구성원들은 진정한 인간관계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들은 지위와 쾌락을 원하며 소위 친구를 희생해서라도 목표를 달성하려고 드는데, 이런 묘사는 올바른 삶이라는 주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반이 속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인위적인 존재를 이끌고 있으며, 이는 물질주의와 사회적 지위 상승이 올바른 삶에 장애물임을 암시한다.

 

외국어 인용

소설 본문 곳곳에 여러 외국어 인용이 등장한다. 각 문구는 이반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전달함으로써 작품의 주요 주제를 알리는 데 도움을 준다. 이반을 가족의 정점 le phenix de la famille‘ 이라 칭하며 그가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은 가족 구성원이라 비유한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이반의 영적 부활, 즉 인위적인 삶으로 인한 불타는 죽음 이후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서는 신화 속 불사조를 떠올리게 하며, 이반이 결국 영적인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이라는 주제를 강조함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그의 메달에 새겨진 좌우명 끝까지 보라 respice finem‘는 미래의 법조인이 될 결과에 집중하라는 조언이자 인위적인 삶을 사는 한 남자에게 죽음을 준비하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검은 자루의 상징성

9장에서 이반은 처음 검은 자루 꿈을 꾸고, 자루로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드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는 자루 속으로 떨어지고 싶은 한편 동시에 자루를 두려워한다. 가방을 죽음의 상징으로 이해하면 이반의 양면성이 명확해진다. 그는 죽음의 유예를 갈망하면서도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두려워한다. 이반이 가방을 뚫고 나옴으로써 죽음의 힘에서 벗어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가방은 죽음뿐 아니라 생명의 근원인 자궁을 상징하는 기능도 한다. 이반이 가방을 통과해 빛으로 들어가면서 겪는 고통과 아픔은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트라우마를 의미한다. 이 상징의 이중성은 이야기의 핵심을 담고 있다. 이반의 삶에서 육체적 죽음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영적 재탄생이며, 그의 옛 삶은 영적 죽음의 원인이었다.

 

맺는말

세 이야기 모두 죽음이란 삶과 연결된 동전의 양면과도 같으며 모든 살아있는 인간이면 거쳐야 할 자연스러운 통과의례를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언젠가 죽는 무상한 존재이므로 세속적 쾌락을 추구하기보다 도덕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2023-03-26)


#현대지성 #톨스토이 #이반일리치 #서평단 #죽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렌즈 싱가포르 - 최고의 싱가포르 여행을 위한 한국인 맞춤형 해외여행 가이드북, ’23~’24 최신판 프렌즈 Friends
박진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싱가포르에 도착한 다음 날 주롱 새 공원에서 누렸던 여유로운 아침 식사, 말레이시아 국경 철책과 맞닿아 있어 넘어오면 발포한다는 경고 표시가 붙어 있어 분위기 살벌했던 보타닉 가든, 해상 150미터 높이에서 센토사섬으로 들어가며 투명 바닥으로 파도가 보여 무섭던 해상 케이블카, 절대 떠들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맨발이어야 입장이 허락되는 신성한 술탄 모스크, 이틀간 먹고 자고 헤엄치다 나온 기억밖에 없는 빈탄섬 호텔 휴양지. 이들은 비교적 신혼일 때 적금을 깨서 다녀왔던 2001년 싱가포르 방문 당시에 들렀던 장소다. 제주도와는 또 다른 남방의 이국적이고 세련된(?) 풍광과 가지각색 모양과 형체를 자랑하던 도심지 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걸 여태 기억하는 나를 신통하다 칭찬하면서, 주로 관광 안내원에게서 듣고 보고 배웠던 재미난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해본다. 20년도 더 지난 옛날이라 달라진 점이 있을 수 있으니 참작하시길.

 

싱가포르에는 매일 정오 무렵 20분 정도 스콜이라는 소나기가 쏟아져 길바닥에서 공짜로 세차를 할 수 있다. 말은 소나기인데 간혹 얼음 알갱이도 섞여 있고 춥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온이 내려간다. 실제로 한국의 주유소에 흔한 자동 세차 기계가 싱가포르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이하게도 길바닥에 그 흔한 껌 자국이 전혀 없다. 판매하지 않는 것은 물론 공항에서 모든 입국자의 소지품 가운데 껌 종류는 압수당한다.

 

국민의 준법정신이 대단해 보인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는 물론 운전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황색 신호등 정지위반 하나 없다. 좀 소름 돋기는 하지만 이는 사실 민간인들 가운데 사복경찰이 섞여 있어 위법행위를 발견하는 순간 현행법으로 체포되고 태형(엉덩이 회초리)을 받기도 한다. 도심지에서 25인승 소형 버스로 이동할 때는 정확히 시속 50km를 유지한다. 기사님에게 좀 더 빨리 가도 되지 않느냐 물었더니 법규 위반에 따른 손해가 너무 커서 그냥 지키고 만다고 답한다. 아무래도 빨리빨리 병은 대한민국 국민병이었나보다. 안내원 양반도 처음 한국에서 갓 도착했을 때 과속 딱지깨나 떼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하던 대로 운전했을 뿐인데 현지인들에게는 자동차경주 선수로 보였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보편적으로 쓰이는 LED 교통 신호등이지만, 2001년 당시는 아직 도입 전이었다. 국회의원들이 맨날 놀러만 다니는 줄 알았는데 교통위 위원들이 다녀갔다는 소릴 들은 지 몇 개월 만에 신호등이 지금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햇빛에 반사되어도 잘 보이고 알전구 하나 깨지면 먹통이 되고 교통순경들 근무에 비상이 걸리던 불편함이 사라졌다.

 

공무원에 대한 급여 수준 및 사회적 처우가 매우 양호한 한편, 공무원이 되기 위한 자격요건은 까다로운데다 재직 시 엄격한 준법을 요구받는다. 일례로 마법에 걸린 날 어느 여성 공무원이 슈퍼마켓에서 사소한 물건을 슬쩍했다가 적발되었는데, 이튿날 신문 1면에 본인은 물론 시댁과 형제자매들의 신원까지 강제 공개 당했다. 법적 조치로 공무원 파면 징계와 인근 국가로의 도피성 이민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데 대개는 이민을 택한다고 한다. 큰 죄를 짓고도 벌 받지 않는 우리 일부 공무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우리가 볼 때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재산권 침해가 분명해 보이는 사례가 빈번하다. 성인 누구나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지만 판매 구입 등의 시기가 5년에 한 번으로 정해져 있고, 5년 이내 기간 중 파손되더라도 무조건 해당 시기에만 거래할 수 있으니 다들 차를 애지중지한다. 싱가포르 전체의 자동차 대수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한다. 한번은 신호대기로 죽 늘어선 차량 행렬을 두고 빨간 불 한 번에 통과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 이를 두고 관광 안내원과 만 원을 걸고 내기했는데 결국은 지고 말았다. 시내 도로가 좁기는 해도 정체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그제야 실감했다.

 

싱가포르 국민은 누구나 자기 집에서 산다. 아니, 사실은 누구도 자기 집이 아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30년 장기 저리 임대주택에 살면서 매달 아주 저렴한 월세를 낸다. 아버지가 사망하면 아들이 대를 이어 내니 사실상 종신 임대나 마찬가지다. 전세 제도가 없지는 않으나 일반적이지는 않다. 부동산 정책이 이 모양이니 집을 사고팔아 돈을 벌자는 생각 자체가 이상할 지경이다.

 

우리나라의 대규모 아파트처럼 똑같이 생긴 건물이 단 한 채도 없다. 건축 허가를 내어줄 당시 어딘가 한 군데라도 다르게 설계하지 않으면 퇴짜를 받으며, 심사 기준은 심미성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국가 수입 1순위가 괜히 관광이 아니다. 참고로 수입 2순위는 동서양 해상로의 중간 기착지인 항만 통행료이고 3위는 금융 서비스다.

 

덥고 습한 기후라 대부분 건물에 필로티 구조가 일반적이며 놀이와 휴식 공간으로 쓰인다. 모든 공공건물에 냉방 시설이 갖춰져 있는데 재미나게도 눈에 뜨이는 실외기의 상당수에 한국기업 LG의 로고가 선명하다. 세계적인 기업의 냉방 기술력은 어딜 가나 인정받는다.

 

싱가포르는 여성, 특히 기혼 여성에게는 천국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웃한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출신의 영어 가능한 젊은 여성들이 가정부로 대거 취업하여 보모 노릇을 한다. 주중 저녁에는 동네 공원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외국 여성들로 북적이는데 서로 국적을 알아보고 민망할까 봐 서로 외면한단다. 주말에는 보모가 남편들로 바뀌고 엄마들은 모임에 나가기 바쁘다. 안내원은 같은 남자이지만 그런 모습은 영 마뜩잖다고 했다. 괜히 독신이겠는가.

 

예전에 삼합회와 같은 무시무시한 조직 폭력배와 정치권이 결탁하여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 리콴유 수상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조폭 조직을 일망타진한 후 이들을 배에 가둬 태평양에 산 채로 수장시켰다. 5년 후 잔존 조폭을 다시 소탕하여 2차 수장하려 했으나 조폭들이 간청하여 목숨만은 살려주고 오늘날까지 바퀴 셋 달린 자전거 트라이시클 운전으로 먹고살게 해주었다. 얼굴에 문신과 칼 자국난 험악한 대머리 아저씨가 괴랄한 미소와 한국말로 언니 오빠 멋있어를 외치며 도로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데 모든 차량이 다 비켜준다. 관광 수입 1순위가 우선이라 법규상 어떤 자동차라도 트라이시클에 1차로를 양보해야 한다.

 

관광 안내인이 사비를 털어 싱가포르에서 판매되는 음료수와 두리안을 사주는 바람에 맛볼 기회가 있었다. 달콤하니 톡 쏘는 맛의 음료 기술은 한국이 단연 앞선 상태였지만 입맛에 좋은 게 몸에는 더 해롭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처음 맛본 두리안의 특이한 맛은 잘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신혼부부가 두리안을 먹고 입을 맞추다가 트림하면 이혼당한다는 안내원의 말에 또 뻔한 내기를 할뻔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 책은 저자가 직접 발로 뛰어다녀 찍은 어마어마한 수량의 현장 사진과 알짜배기 유익한 정보로 넘쳐난다. 사진 전문기자가 촬영한 듯 그림의 구도 또한 수려하고 색감이 좋다. 여행을 계획하는 단계부터 마무리까지 고려해야 할 모든 조건이 담겨 있어 그야말로 이 책 한 권이면 만사 오케이다. 소장용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여행용 안내 책자로서의 사명에 투철하게 구성된 나머지 차 두어 잔 정도 액면가격에 이래도 되나 미안할 정도다.

 

새로운 경험, 볼거리 먹거리 탈것 외에도 방문지의 역사와 문화도 함께 배우고 이해할 수 있어야 진정한 여행이라 생각한다. 여행의 재미를 더할 양이면 영어 말고도 현지 언어를 조금씩 배워두면 더 좋을 것이다. 2001년 당시는 패키지에다 해외여행이 처음이었고 안내 책자는커녕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어 답답한 점이 많았는데, 조만간 장성한 아이들과 함께 싱가포르를 다시 방문할 때는 이 안내 책자를 손에 들고 친절한 관광 안내인이 되어주리라 다짐해본다. (2023-03-25)

 

#여행 #프렌즈싱가포르 #안내책자 #도서추천 #리뷰어스클럽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렌즈 싱가포르 - 최고의 싱가포르 여행을 위한 한국인 맞춤형 해외여행 가이드북, ’23~’24 최신판 프렌즈 Friends
박진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딱 한 권이면 충분하도록 야무지게 잘 만든 여행 안내서의 정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