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삶과 동물 해방에 관한 내용을 학교 교육과정에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는 한편, 법제화된 안전교육마저도 서면 자료 제공이나 시청각 자료 시청 등 다분히 형식적으로 흐르고 마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본다. 동물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여건이기 매우 어려운 도심지의 학교이기도 하고, 스마트폰 밖의 세상과 만나기도 그리 쉽잖은 아이들의 생활 습관에서, 과연 이들의 삶 속에서 동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 수 있을까. 동물 해방이라는 좀 거창한 명칭 대신 공장식 축산의 비윤리적, 구조적 문제점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 등을 주제로 한 탐구발표의 소재로 추천해봄 직하다. 동물성 단백질 식단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계속 소비해야 하므로, 육가공 제품의 생산 유통 등 최종 소비자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지식부터 공유하면 어떨까 싶다.
동물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만든 GMA(Generically Modified Animals)를 접해보니, 공상과학 영화 <닥터 모로의 DNA>가 떠오른다. 어느 외딴섬의 비밀 연구소에서 동물의 특별한 능력을 인체에 결합하는 실험으로 과학계의 주목을 받던 모로 박사의 빛나는 업적이, 사실은 비난받아 마땅한 인체 유전자 조작이었음이 드러나고 끝내는 괴물이 된 합성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며 자기 파멸에 이른다는 내용으로, 과학에 대한 몰이해와 기술의 오남용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온토마우스, 형광 물고기, 품종견 대회처럼 비단 의약품 개발뿐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호기심이나 재미로 행하는 동물 유전자 실험의 비윤리성 그리고 동물들에게 남겨지는 고통스러운 유전병 등은 모로 박사처럼 창조주를 빙의해 저지르는 인간의 크나큰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저지르는 객기가 있다면 미리 방지하는 용기 또한 필요하다.
동물원에 살던 유인원이 자신이 사는 우리에 떨어진 어린아이를 구해준 똑같은 두 경우가 있는데, 결과는 판이했다. 먼젓번 경우의 침팬지는 우상으로 취급받았고 나중의 경우는 즉각 사살당했다. 동물은 말을 못 하니 그 행동을 보고 의중을 짐작할 뿐이라 이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생겼다. 단지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울 뿐, 동물은 자신들 나름의 소통 방식과 체계를 지녔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히 동물을 말 못하는 미물로 치부해왔고 인간에게만 언어능력이 있다며 오만한 모습을 보였다. 동물을 사랑하는 만큼 좀 더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인간은 오랫동안 가장 저열하고 폭력적인 정치 수단인 전쟁터로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동물들을 동원하고 희생하였다. 말과 당나귀는 수송과 의무병으로, 귀소본능을 이용한 비둘기는 통신병으로, 뛰어난 후각을 지닌 개는 가스와 폭발물 탐지병으로, 힘 좋고 순박한 코끼리는 대형 병기이자 운송 수단으로 투입되었다. 일부 인간의 목숨을 구하려는 선의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나, 거의 모든 동물에게 자아의식이 없다는 점을 활용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의 목숨을 마음껏 빼앗았을 뿐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심지어 군-동물 산업 복합체를 통해 동물의 노동과 사체를 밟고 야욕을 채우려 드니, 동물 착취를 생각하면 이제 만물의 영장이라는 호칭은 좀 삼가야 하지 않을까?
수년 전 미국 동부 끄트머리의 도시 시애틀과 바로 위 밴쿠버 사이의 리아스식 해안지역을 방문했을 때, 고래 박물관에 전시된 뼈대만 보고 시큰둥했다가 바닷가에서 실물 범고래, 일명 오르카를 보고 그 크기와 헤엄 속도에 탄성을 질렀던 적이 있다. 너그럽게도 자신들의 사냥터를 인간에게 내어주며 협업으로 고래를 사냥하던 이들은 불과 40년쯤 전 처음 생포되고 좁디좁은 수조에 갇혀 학대받으며 인간의 돈벌이에 희생당하기 시작했다. 본래 친구라는 뜻으로 이름 붙었던 범고래 틸리쿰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세 차례나 인명사고를 일으키며 살인자 고래(Killer Whale)라는 오명이 생겼음을 그때 알았다. 두 살 때 인간에게 잡힌 이후 33년을 놀이공원에서 인간의 쾌락을 위해 착취당하다가 숨을 거둔 틸리쿰의 마지막 이후 세계는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범고래쇼는 사양길에 접어들었으니 사필귀정이라 하겠다.
국립공원 대 사냥 허가 정책의 경우는 병 주고 약 주는 인간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아울러 자연을 정복과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서구인 특유의 세계관은 다른 세계에는 오만함으로 비쳤으며 오늘날 세계의 서구화에 힘입어 지배적 시각이 되어가는 점이 우려스럽다. 이 같은 시각은 자원확보를 핑계로 아무 거리낌 없이 원주민을 학살하는, 우주판 미국 서부 개척사를 연상케 하는 영화 <아바타>에서 잘 드러난다. 다소 희망적으로 보자면 동물에 대한 인간의 고압적 태도는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바꿀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