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권력 - 매혹하고 행동하고 저항하는 동물의 힘
남종영 지음 / 북트리거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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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동물은 본래 평등하며 서로 돕는 관계였다. 늑대는 스스로 가축이 되어 야생을 버리는 대신 인간과의 오랜 동반관계를 유지한다. 고양이는 늑대보다는 늦게 가축화의 길을 걸었고 아직은 인간을 자신들과 동격으로 여긴다. 범고래의 시각에서 보자면 어느 날 불쑥 그들의 삶터에 인간이 끼어든 것이고 잠시 협력관계를 유지했지만 결국 생존을 위협받기에 이른다. 인간의 치명적인 간섭으로 망가진 지구 생태계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동물을 희생하여 이룬 문명의 발달로 많은 혜택을 받는 지금, 인간은 이제라도 동물과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야만의 시대에 동물들은 단지 인간의 돈벌이와 쾌락의 대상, 정권 유지 수단, 전쟁 병기로 쓰였으며, 문명이 발달한 산업화 시기 이후에는 공해와 오염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다 못해 멸종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자연계에서는 서로 맞닥뜨릴 일조차 없지만, 순전히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해 서로 다른 종끼리 목숨을 놓고 싸우는 구경거리이자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인간은 생태계 파괴와 같이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돌려받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인간의 삶 역시 피폐해진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지능이 높고 문명화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지구를 지배하다시피 하지만, 그것이 동물들을 학대해도 되는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렵 채집의 시대에 인류는 동물에게도 이성과 감정이 있음을 믿었다. 사냥당한 동물을 섭취하기 전에 영혼을 위로하며 그들과 한 세계에 살았다. 진화에 결정적 구실을 한 불의 사용으로 대뇌피질 용량이 커지고, 농경사회로 진입하면서 인류는 가축으로 길들인 동물의 힘을 이용했다. 자유와 자율성을 포기하는 대신 사회적 기술을 터득한 개의 경우처럼, 인류도 소통과 협력으로 문명을 일구어냈다. 인간의 대뇌피질이 다른 영장류에 비해 월등히 큰 이유는 복잡한 사회성 때문이라는 추론이 설득력을 얻는다.

어릴 적 시골에서 밭갈이에 동원되었던 누렁이는 가축이면서도 든든한 일꾼이자 집안의 한 밑천 재산으로, 누가 도회지에 유학이라도 간다 치면 처분 1순위의 동산(動産)이었다. 누렁이가 암송아지를 낳자 할아버지는 동네 막걸리 잔치를 벌였고, 늙어서 더 이상 일을 못 해 읍내 우시장에서 헐값에 처분하던 날은 목놓아 우셨다. 농경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옮겨오면서 동물은 더 이상 반려 관계가 아닌 인간의 자본 확보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누리는 자본주의의 달콤한 열매는 사실 동물들이 희생된 결과이다. 할배가 이름 붙여준 누렁이는 차마 못 잡아먹지만 이름 모를 육우는 고급진 단백질 공급원으로 뱃속에서 녹는다. 오늘날 내연기관과 농기계가 노동하는 동물을 대체했지만, 아직도 동물원과 수족관 등지에 갇힌 동물은 간신히 목숨만 이어가고 있다. 동물을 친구라 여긴다면서 과연 언제까지 가두고만 있을 것인가.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자연계에는 꼭 필요한 만큼만 소비되고 모든 물질이 자연분해 되기 때문에 쓰레기가 생겨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선순환이었다. 인류가 지금처럼 잘 먹고 잘살게 된 지는 문명이 생겨난 이래 불과 300년도 되지 않는다. 오로지 섭식을 위해 동물을 대량으로 생산 소비하는 무자비한 자본주의가 생태계를 무너뜨리고 우리는 오늘도 아무 거리낌 없이 저렴한 가격으로 육류를 소비하고 있다.

인간과 닮은 구석이 많은 동물일수록 인간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그렇지 않은 동물보다 훨씬 덜 잡아먹힌다는 주장은 흥미로우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인류는 서로에게 공감하는 지능을 키움으로써 협력할 수 있었고 지구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도축을 위해 기차에 실려 가는 영국의 어린 양 얼굴이나 진통제 주사로 고통의 존재를 입증하는 물고기 실험의 결과처럼, 인간과 동물 사이의 공감 역시 그간 주목받지 못했을 뿐 분명 작용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이런 인간과 동물 사이의 공감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무감각하게 만든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간이 지닌 또 다른 욕망의 그늘이 아닐까.


윤리적 삶과 동물 해방에 관한 내용을 학교 교육과정에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는 한편, 법제화된 안전교육마저도 서면 자료 제공이나 시청각 자료 시청 등 다분히 형식적으로 흐르고 마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본다. 동물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여건이기 매우 어려운 도심지의 학교이기도 하고, 스마트폰 밖의 세상과 만나기도 그리 쉽잖은 아이들의 생활 습관에서, 과연 이들의 삶 속에서 동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 수 있을까. 동물 해방이라는 좀 거창한 명칭 대신 공장식 축산의 비윤리적, 구조적 문제점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 등을 주제로 한 탐구발표의 소재로 추천해봄 직하다. 동물성 단백질 식단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계속 소비해야 하므로, 육가공 제품의 생산 유통 등 최종 소비자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지식부터 공유하면 어떨까 싶다.

동물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만든 GMA(Generically Modified Animals)를 접해보니, 공상과학 영화 <닥터 모로의 DNA>가 떠오른다. 어느 외딴섬의 비밀 연구소에서 동물의 특별한 능력을 인체에 결합하는 실험으로 과학계의 주목을 받던 모로 박사의 빛나는 업적이, 사실은 비난받아 마땅한 인체 유전자 조작이었음이 드러나고 끝내는 괴물이 된 합성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며 자기 파멸에 이른다는 내용으로, 과학에 대한 몰이해와 기술의 오남용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읽힌다. 온토마우스, 형광 물고기, 품종견 대회처럼 비단 의약품 개발뿐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호기심이나 재미로 행하는 동물 유전자 실험의 비윤리성 그리고 동물들에게 남겨지는 고통스러운 유전병 등은 모로 박사처럼 창조주를 빙의해 저지르는 인간의 크나큰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저지르는 객기가 있다면 미리 방지하는 용기 또한 필요하다.

동물원에 살던 유인원이 자신이 사는 우리에 떨어진 어린아이를 구해준 똑같은 두 경우가 있는데, 결과는 판이했다. 먼젓번 경우의 침팬지는 우상으로 취급받았고 나중의 경우는 즉각 사살당했다. 동물은 말을 못 하니 그 행동을 보고 의중을 짐작할 뿐이라 이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생겼다. 단지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울 뿐, 동물은 자신들 나름의 소통 방식과 체계를 지녔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히 동물을 말 못하는 미물로 치부해왔고 인간에게만 언어능력이 있다며 오만한 모습을 보였다. 동물을 사랑하는 만큼 좀 더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인간은 오랫동안 가장 저열하고 폭력적인 정치 수단인 전쟁터로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동물들을 동원하고 희생하였다. 말과 당나귀는 수송과 의무병으로, 귀소본능을 이용한 비둘기는 통신병으로, 뛰어난 후각을 지닌 개는 가스와 폭발물 탐지병으로, 힘 좋고 순박한 코끼리는 대형 병기이자 운송 수단으로 투입되었다. 일부 인간의 목숨을 구하려는 선의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나, 거의 모든 동물에게 자아의식이 없다는 점을 활용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의 목숨을 마음껏 빼앗았을 뿐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심지어 군-동물 산업 복합체를 통해 동물의 노동과 사체를 밟고 야욕을 채우려 드니, 동물 착취를 생각하면 이제 만물의 영장이라는 호칭은 좀 삼가야 하지 않을까?

수년 전 미국 동부 끄트머리의 도시 시애틀과 바로 위 밴쿠버 사이의 리아스식 해안지역을 방문했을 때, 고래 박물관에 전시된 뼈대만 보고 시큰둥했다가 바닷가에서 실물 범고래, 일명 오르카를 보고 그 크기와 헤엄 속도에 탄성을 질렀던 적이 있다. 너그럽게도 자신들의 사냥터를 인간에게 내어주며 협업으로 고래를 사냥하던 이들은 불과 40년쯤 전 처음 생포되고 좁디좁은 수조에 갇혀 학대받으며 인간의 돈벌이에 희생당하기 시작했다. 본래 친구라는 뜻으로 이름 붙었던 범고래 틸리쿰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세 차례나 인명사고를 일으키며 살인자 고래(Killer Whale)라는 오명이 생겼음을 그때 알았다. 두 살 때 인간에게 잡힌 이후 33년을 놀이공원에서 인간의 쾌락을 위해 착취당하다가 숨을 거둔 틸리쿰의 마지막 이후 세계는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범고래쇼는 사양길에 접어들었으니 사필귀정이라 하겠다.

국립공원 대 사냥 허가 정책의 경우는 병 주고 약 주는 인간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아울러 자연을 정복과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서구인 특유의 세계관은 다른 세계에는 오만함으로 비쳤으며 오늘날 세계의 서구화에 힘입어 지배적 시각이 되어가는 점이 우려스럽다. 이 같은 시각은 자원확보를 핑계로 아무 거리낌 없이 원주민을 학살하는, 우주판 미국 서부 개척사를 연상케 하는 영화 <아바타>에서 잘 드러난다. 다소 희망적으로 보자면 동물에 대한 인간의 고압적 태도는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바꿀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21세기 들어 가장 유명한 두 동물은 범고래 ’틸리쿰‘과 사자 ’세실‘로 대표된다. 이들은 동물원 혹은 수족관, 국립공원 보호구역이라는 장소만 다를 뿐 동시대 야생 동물을 이용한 착취 수단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백수의 왕 사자는 인간이 만든 법적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지만, 국립공원만 벗어나면 트로피 사냥꾼의 표적일 뿐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트로피 사냥으로 엄청난 액수의 관광 수입을 벌어들이는 동안 엄청난 수의 야생 동물들이 사라지고, 동물들에게 역차별당해 국립공원 안에 살다 쫓겨난 원주민은 삶의 터전을 잃고 황폐해진다. 식민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바뀌었을 뿐, 동물에 대한 착취는 오늘날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코끼리나 범고래처럼 동료 혹은 새끼의 죽음을 애도하고 오랜 기간 장례식을 치르는 동물들의 사례를 통해 그들에게도 사람과 닮은 감정을 지녔다는 어렴풋한 인식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들에게는 매우 미안하게 앞으로도 동물성 단백질 섭취를 포기할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소중한 식자재가 되어줄 그들의 운명에 공감하고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으로 윤리적 육식을 한다면 이 책을 읽은 보람이 느껴질 것 같다.

굳이 언어를 전공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언어와 다를 뿐, 돌고래, 코끼리, 유인원 등 일부 동물에게도 엄연한 의사소통 체계가 있을 것으로 능히 짐작된다. 왜 굳이 인간 언어의 체계와 비슷해야 언어로 인정한단 말인가? 만약 인간보다 더 지능적이고 정교한 언어를 지닌 외계인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의 언어로 소통해야만 인정받는다면, 우리가 순순히 따를 수 있을까? 1977년생 오랑우탄 찬텍과 같은 유인원들의 교차 양육과 수화 교육 실험은 처음부터 비극적 종말이 예고된 것으로, 인간의 호기심과 오만함으로 그들을 섣불리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인간도 동물도 아닌 존재로 만든 사례다.

퇴근길 전철역에서 집으로 향하는데 웬 남성이 목청 돋워 외친다. “여러분,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되었지만, 저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선택받을 수 있습니다!” 이게 대체 뭔 소리람? 나는 선택받지 못한 원숭이 가운데 하나였단 말인가? 원숭이-인간 진화설 주장도 경천동지할 말이거니와, 인류와 유인원의 공동 조상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주 오래전 과거 어느 지점에선가 분기했다는 기초 개념조차 모르면서 다윈의 진화론을 말 한마디로 뭉개버리는 저 용기는 대체 무어람. 오랑우탄 거울 실험에 드러났듯 수동적 객체이기를 거부한 동물(비인간인격체)도 있건만, 어찌 인간이면서 그리 자의식 없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연과 동물은 그대로이건만 때로 인간은 스스로 똑똑한 바보임을 증명하기도 한다.

사람 살기도 마땅찮은 좁은 국토를 지닌 우리나라만 해도 지리산 오삼이의 경우처럼 동물에게 그들의 공간을 마련하고 내어주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을 보면, 상대적으로 동물에게서 그들의 영역을 빼앗아 오기는 매우 쉬웠을 것이다.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린다는 명분을 앞세워 국토개발에 열중하느라 자연을 훼손한 결과는 어떠한가. 한 번 손을 댄 자연이 복구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 않던가. 그나마 개발에 앞선 환경영향평가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하고는 있지만, 우리의 동물 이웃이 설 자리를 점점 사라지고 있다. 자연 방사 프로그램이 왜 자꾸 성공하지 못하는지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어느 고래의 외로운 노래가 같은 고래가 아닌 인간으로부터 응답받았다. 고래에 매료된 활동가들이 동물과의 교감, 정동을 통해 그들 존재의 아름다움에 공감하고 인간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스스로 자, 그러할 연. 스스로 그러한 것이 자연이다. 인간의 오만한 간섭이나 탐욕 대신 함께 어울려 살아가려는 태도가 자본의 달콤한 유혹을 극복하기란 참으로 쉽잖아 보인다. 그러나 자연 앞에 겸손했던 탐사대의 마음가짐처럼 아주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 애지중지 키운 동물 가운데 특히 개의 경우는 자신이 사람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소위 개 버릇 남 주지 못하는 부류인데, 개통령 강형욱 씨를 만나야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운명이다. 애완동물이 아무리 이쁘고 사랑스러워도 주인이 동물을 개별 존재로서 인식하고 키우지 않으면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허물어져 문제 행동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은 후로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연민의 정과 같은 변화가 오기를 기대하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나아가 나 자신부터 동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대할 마음이 생겼으니 더더욱 훌륭한 일이다. 사소한 시각의 변화가 세상을 바꾸는 힘의 시작이다. 굳이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더라도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일독을 권해드린다. (2023-03-30)

#동물권력 #남종영 #동물보호 #동물행동 #환경보호 #인간과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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