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러시아어 원전 번역본) - 죽음 관련 톨스토이 명단편 3편 모음집 현대지성 클래식 4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우섭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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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이야기의 연대기적 끝에서 시작된다. 판사이자 이반 일리치의 절친인 피터 이바노비치가 이반의 죽음을 발표하자 판사들은 법원의 밀실에 한데 모인다. 자신들이 아니라 이반이 죽었다는 것으로 위안 삼지만, 방에 있던 사람들은 이반의 죽음으로 인해 일어날 승진과 전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저녁 피터는 이반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반의 집으로 향하고, 이반의 시신을 바라보던 중 이반의 얼굴에 나타난 불만과 경고의 표정에 내심 괴로워한다. 이반의 아내 프라스코비야는 피터에게 죽은 남편의 정부 연금을 최대한 불릴 방법을 묻는다. 퇴근길에 피터는 이반이 가장 좋아했던 간병인 게라심을 만난다. 피터가 이반의 죽음과 장례식을 슬픈 일이라고 말하자, 게라심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로 피터를 놀라게 한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30년 이상 과거로 이동하여 이반의 삶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이반은 세 아들 중 둘째로 모든 면에서 정상적이었다. 열세 살 무렵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가치관과 행동에 동화되고, 개선된 사법 기관의 시험 치안 판사가 되어 새 근무지로 옮겨간다. 그가 결혼하고 아내 프라스코비야가 임신할 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이반이 소중히 여기고 사회가 인정하는 적절하고 형식적인 생활 방식에 프라스코비야의 행동이 방해되기 시작하면서 이반은 점점 더 공무에만 몰두하고 가족과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직장에서 그는 모든 개인적인 관심사를 공적인 업무에 연결 짓지 않는 데 자부심이 있으며 가정에서조차 가족에게 형식적이고 사무적인 태도를 보인다. 시간이 지나고 이반은 승진한다. 그는 대학 도시의 재판장 직을 맡게 되리라 기대하지만 승진에서 탈락한다. 불공평함에 분노한 이반은 휴직계를 내고 가족과 함께 시골에 있는 처남의 집으로 이사한다. 자신의 월급으로는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난다. 그는 법무부 행정부의 인사이동으로 절친이 고위직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친구 덕에 도시에서 더 높은 보수를 받는 직책을 맡게 되고, 가족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린 이반은 가족들이 도착할 준비를 위해 집을 사고 가구를 마련하기 위해 홀로 떠난다. 어느 날 커튼을 걸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던 중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면서 창틀에 옆구리를 부딪친다. 하지만 부상은 대수롭지 않았고 잘 마무리된 집의 모습에 매우 만족한다.



이반은 왼쪽 옆구리에 약간의 불편함과 입에서 특이한 맛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불편함은 점차 커지고 곧 이반은 짜증을 내며 잘 다투게 된다. 찾아갔던 의사들 모두 병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하자 이반은 우울한 두려움에 빠져 그 좋아하던 카드놀이조차도 흥미를 잃는다. 몸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던 어느 날 밤, 어둠 속에 홀로 누워 있던 그는 처음으로 죽음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공포에 휩싸인다. 그는 자신의 병이 건강이나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프라스코비야가 이런 남편의 처지를 이해할 줄도,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자 이반은 그녀에 대한 증오심을 간신히 억누른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죽음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마음속 죽음에 관한 생각을 차단하기 위해 가림막을 세우려 노력하지만 죽음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이런 고통의 한가운데 이반의 일꾼이자 간병인인 게라심이 등장한다. 이반의 배설물 처리 임무를 맡은 게라심은 곧 죽어가는 남자와 밤새도록 함께 지내기 시작한다. 이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게라심은 이반의 다리를 어깨에 받쳐주고, 그 어떤 살아있는 사람보다 이반에게 필요한 연민과 정직함을 보여준다. 이반의 일상은 단조롭고 정신없이 흘러간다. 주변 사람들은 이반이 단지 아프기만 할 뿐 죽어가는 척한다 생각하지만, 이반은 자신이 인위적인 것에 둘러싸여 있다고 느낀다. 누구도 이반의 임박한 죽음에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반은 조용히 분노하며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은 게라심 말고는 어린 아들뿐임을 깨닫는다. 그날 밤 이반은 짙은 검은 색 자루 꿈을 꾼다. 그는 자루에 격렬하게 밀려들어 가고 있지만 떨쳐낼 수 없다. 자루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렇게 되기를 욕망한다


꿈에서 깨어난 이반은 게라심을 떠나보내고 처음으로 자신의 영혼이 자신에게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열이틀이 더 지나고 이반은 이제 소파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죽음을 생각하며 고통의 원인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뒤돌아볼수록 더 많은 기쁨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듯 자기 삶도 점점 더 나빠졌음을 알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게라심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반은 자신이 제대로 살았는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는 다시 검은 자루를 상상하고, 그가 경험하는 엄청난 고통이 일부는 자루 안으로 밀려들어 가는 것에서, 다른 일부는 자루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됨을 깨닫는다. 자기 삶이 그런대로 괜찮았다는 확신 때문에 자루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갑자기 어떤 힘이 이반의 가슴과 옆구리를 강타하고 자루를 통해 그를 밝은 빛으로 밀어 넣는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손이 아들의 머리에 놓이자 그는 아들이 불쌍하다고 느낀다. 아내가 눈물 젖은 얼굴로 침대에 다가오자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공직 생활과 가족 그리고 사회적 관계 모두 인위적이었음을 깨닫는다. 죽음을 앞두고 불과 두 시간 전 그는 인생의 참뜻을 알게 되면서 극도의 기쁨을 경험한다. 한숨을 쉬던 이반은 몸을 뻗으며 죽음을 맞이한다.

 

<주인과 일꾼>

<주인과 일꾼>은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던 상류층 주인 브레후노프가 일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평온히 눈감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는 부의 축적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일꾼을 무지몽매한 인물로 무시하며 그들의 임금을 착취하는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동사 위기에 처한 일꾼 니키타를 자신의 체온으로 살려내게 된다. 니키타는 브레후노프와는 다르게 고단한 삶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아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났고, 그는 알면서도 브레후노프에게 임금을 착취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동물을 사랑하고 자신의 현 상황에 만족할 줄 안다. 이뤄놓은 것도 많고 아직 이뤄야 할 것이 너무 많은 브레후노프와는 달리 니키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독실한 믿음을 지녔고, 죽음이란 삶을 포기하고 새로움에 적응하는 하나의 자연적 현상이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브레후노프는 극한의 상황에서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하게 되고, 부를 축적했을 때와는 다른 좀 더 깊은 기쁨을 맛본다. 그는 이제 더는 자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니키타가 살아남기를 진심으로 원했으며 결국 하나님을 받아들여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세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상류층의 속물근성과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자들의 순수함을 이반 일리치와 일꾼 게라심으로 비교하였듯, <세 죽음>에서는 귀부인과 마부를 놓고 비교한다. 작품 속 귀부인과 마부 역시 노령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죽음을 맞이하는 둘의 자세는 사뭇 다르다. 귀부인은 자신을 수행하는 젊은 하녀에게 짜증을 내며, 병이 깊어 회복될 가능성이 없으면서도 자꾸만 삶에 집착하여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고집하여 남편은 물론이고 주변인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한다. 이 작품의 주변인들 역시 <이반 일리치의 죽음>처럼 위선적으로 그녀의 죽음을 숨기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반면, 늙은 마부는 죽음을 삶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가죽ㅍ장화를 젊은 마부에게 넘겨주는 등 관용적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남의 잠자리를 병 때문에 너무 오래 차지하는 것을 미안해하기까지 한다. 그의 그런 자세는 마지막에 등장하여 늙은 마부의 묘비를 위해 베어지지만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나무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올바른 삶

소설의 시작부터 톨스토이는 이반, 프라스코비야, 피터, 그리고 이반의 동료 대부분이 대표하는 인위적인 삶과 게라심이 대표하는 진정한 삶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믿는다. 인위적인 삶은 얕은 인간관계, 이기심, 물질주의로 특징지어진다. 고립되고 성취감이 없으며 궁극적으로 인생의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인위적인 삶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숨기고 죽음의 순간에 기만적으로 두려움과 외로움을 남긴다. 반면 진정한 삶은 연민으로 가득하며 다른 사람을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고유한 생각, 감정, 욕구를 가진 개별적인 존재로 바라본다. 또한 고립을 허물고 진정한 대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상호 긍정하는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인위적인 삶은 사람을 외롭고 공허하게 만드는 반면, 진정한 삶은 공감을 통한 연대와 위로를 통해 힘을 키우며, 유대감을 형성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한다. 자기 삶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며 외로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라심은 타인에 대한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삶에 의미를 불어넣는다. 이반의 처지에 공감하고 고립감을 덜어주는 그의 정신적 지지는 이반의 다리를 잡아주는 육체적 지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는 이반의 고통을 공유함으로써 자신의 고통 또한 덜어낸다. 진정한 삶의 미덕은 타인을 돕는 동시에 자신도 그 관계로부터 혜택을 받는다. 연민과 사랑이 양방향으로 오고 가야 진정 올바른 삶이다.

 

죽음의 필연성

죽음을 향해 꾸준히 다가가는 이야기는 이반이 죽음을 인정하고 무력한 힘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삶의 끝, 인간관계, 인생 계획, , 자신의 존재 자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톨스토이는 소설 전반에 걸쳐 죽음에 대한 준비는 삶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분명히 말한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전망으로 인해 삶에 대한 이반의 태도가 변화함에 따라 그의 감정은 순수한 공포에서 완전한 기쁨으로 발전한다. 이반의 사회적 환경을 특징짓는 죽음에 대한 회피는 불쾌한 현실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망상에 기반하며 공허함, 공포, 불만족으로 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죽음을 받아들이고 예측할 수 없는 진정한 삶의 본질을 인식하면 죽음의 순간에 자신감과 평화, 심지어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바르게 사는 삶을 통해 죽음을 이해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

톨스토이는 인위적/본질적 이분법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재를 내면과 외면, 영혼과 육체적 삶 사이의 갈등으로 묘사한다. 9장에 이르기까지 이반은 순전히 육체적인 존재일 뿐 영적인 삶의 흔적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기 육체의 안위를 위해 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촉진하는 선에서만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육체적 삶을 진정한 영적 삶으로 착각한다. 자기 존재를 올바른 것으로 믿으며 삶의 오류를 외면한다. 영적인 것을 부정한 나머지 이반은 육체를 초월할 수 없게 되며 극심한 고통과 압도적 불행, 절대적 공포를 경험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이반은 자신의 고독과 마주하게 되고, 점차 영적인 삶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해를 향해 성장하고 육체를 영적인 것으로 대체하면서 그는 고통을 넘어 죽음을 정복하고 극도의 기쁨을 경험한다. 톨스토이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각 개인이 할 일은 자아의 이중성을 인식하고 덜 중요한 육체적 삶이 더 중요한 영적 삶에 부합하도록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반전

톨스토이는 소설의 구조에 몇 가지 반전 패턴을 통합한다. 이야기의 연대기적 결말인 이반 일리치의 실제 죽음은 첫 번째 장에서 일어난다. 소설의 나머지 부분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반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삶을 다루고 있다.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을 뒤집는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힘과 자유, 지위가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약함과 속박, 고립으로 치닫는 시기이다. 7장 이후 이반이 서재에 갇혀 육체적 퇴화와 소외를 겪을 때, 그는 실제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몇 가지 언어적 형식을 통해 이 점을 강조한다. 이반은 자신의 영적 각성을 마치 자신이 위로 올라가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아래로 내려가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는 삶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갑작스러운 통찰을 기차 안에서 진정한 여행 방향이 예상 방향과 반대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감각에 비유한다.

 

소외

순수한 육체적 삶을 비롯한 인위적 삶의 특징은 소외를 향한 관점이다. 이반은 자신의 즐거운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나 관계를 마주할 때마다 그로부터 거리를 두며 이러한 반응은 내적 삶 대 외적 삶이라는 더 큰 주제와 연결된다. 이반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다른 사람을 온전한 개인으로 볼 줄 모른다. 그는 오직 자신을 위한 선을 얻기 위해 행동하며, 자신의 쾌락을 침해하는 대상에게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다. 따라서 이기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반은 개인을 차단하며, 결국 이렇게 함으로써 타인으로부터 자신 역시 차단한다. 톨스토이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폐쇄와 고립에 대한 여러 이미지를 활용한다. 검은 테두리로 둘러싸인 장례식 통지서부터 벽에 기대어 있는 관 뚜껑까지, 톨스토이는 이반이 자발적으로 분리되었음을 암시한다.

 

유쾌한 것, 적절한 것, 그리고 장식

소설 전체에서 톨스토이는 유쾌/적절/장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사회생활에서 받아들여지는 규범을 언급하는데, 이는 올바른 삶이라는 주제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반이 예의, 예절, 행동 규범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는 것은 그가 진정한 삶이 아닌 인위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내면의 실체보다는 외적인 모습에, 실제 진실보다는 진실의 모습에 더 관심이 있다. 상류 사회의 의견에 신경 쓰지 않고 참된 것을 위해 유쾌/적절/장식을 무시하는 사람이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이다.

 

시간과 공간의 수축

소설에서 쉽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모티브는 시간과 공간의 수축이다. 이 수축은 영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삶이 탄생과 죽음 사이의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개념을 강화하기 때문에 내적 삶과 외적 삶이라는 주제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톨스토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효과를 달성한다. 소설의 첫 네 장은 40년 이상, 두 번째 네 장은 몇 달, 마지막 네 장은 4주가 조금 넘는 기간에 걸쳐 펼쳐진다. 톨스토이는 시간적 틀을 축소하는 것 외에도 공간적 차원을 축소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어린 시절 이반은 이 마을 저 마을로 이사 다니다 중년이 되어서는 아파트를 얻어 한 도시에 정착한다. 발병 직후 그는 서재에 갇히게 되고 소설이 끝날 무렵에는 소파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소설의 각 장은 대부분 이전 장보다 점차 짧아진다. 시간과 공간은 이반이 죽는 순간, 즉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단 한 순간을 경험하는 0점에 도달할 때까지 축소된다. 이반의 영혼이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 경계를 초월하는 이 순간은 죽음의 종말을 의미하며 영적인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부르주아 사회

소설 전체에서 톨스토이는 귀족 사회를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얄팍한 개인들의 집합체로 묘사한다. 귀족 사회의 구성원들은 진정한 인간관계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들은 지위와 쾌락을 원하며 소위 친구를 희생해서라도 목표를 달성하려고 드는데, 이런 묘사는 올바른 삶이라는 주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반이 속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인위적인 존재를 이끌고 있으며, 이는 물질주의와 사회적 지위 상승이 올바른 삶에 장애물임을 암시한다.

 

외국어 인용

소설 본문 곳곳에 여러 외국어 인용이 등장한다. 각 문구는 이반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전달함으로써 작품의 주요 주제를 알리는 데 도움을 준다. 이반을 가족의 정점 le phenix de la famille‘ 이라 칭하며 그가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은 가족 구성원이라 비유한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이반의 영적 부활, 즉 인위적인 삶으로 인한 불타는 죽음 이후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서는 신화 속 불사조를 떠올리게 하며, 이반이 결국 영적인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이라는 주제를 강조함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그의 메달에 새겨진 좌우명 끝까지 보라 respice finem‘는 미래의 법조인이 될 결과에 집중하라는 조언이자 인위적인 삶을 사는 한 남자에게 죽음을 준비하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검은 자루의 상징성

9장에서 이반은 처음 검은 자루 꿈을 꾸고, 자루로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드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는 자루 속으로 떨어지고 싶은 한편 동시에 자루를 두려워한다. 가방을 죽음의 상징으로 이해하면 이반의 양면성이 명확해진다. 그는 죽음의 유예를 갈망하면서도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두려워한다. 이반이 가방을 뚫고 나옴으로써 죽음의 힘에서 벗어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가방은 죽음뿐 아니라 생명의 근원인 자궁을 상징하는 기능도 한다. 이반이 가방을 통과해 빛으로 들어가면서 겪는 고통과 아픔은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트라우마를 의미한다. 이 상징의 이중성은 이야기의 핵심을 담고 있다. 이반의 삶에서 육체적 죽음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영적 재탄생이며, 그의 옛 삶은 영적 죽음의 원인이었다.

 

맺는말

세 이야기 모두 죽음이란 삶과 연결된 동전의 양면과도 같으며 모든 살아있는 인간이면 거쳐야 할 자연스러운 통과의례를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언젠가 죽는 무상한 존재이므로 세속적 쾌락을 추구하기보다 도덕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202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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