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 일본의 사례, 1945-2012년 메디치 WEA 총서 1
마고사키 우케루 지음, 양기호 옮김, 문정인 해제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미일 동맹관계를 알수 있어 좋았다.
나름 고생이 많네요.
그러나 미군이 6년 점령한거 가지고 엄살..이런 엄살이 없다.
피해의식, 과도한망상.등등
빨리 읽고 이 책에서 도망가고 싶다.
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 빨리 읽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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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정치인은 미국에 의해 퇴진당한다. 이란의 팔레비 국왕도그됐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냉전이 심각한 때, 미국은 팔레비를중시했다. 그러나 팔레비가 점차 강대국 대통령처럼 행동하자 미국은그를 추방해버린다. 미국이 배후 지원하여 이란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미국이 독재자를 처분할 때는 종종 인권문제나 NGO 활동을 이용한다. 반정부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민중 데모를 선동하여 정권을 전복한다. 2011년 이집트와 튀니지 독재자를 무너뜨린 ‘아랍의 봄‘도그런 경우였다.
- P173

미국,영국,프랑스 등은 식민지에서 철수할 때, 대부분 분쟁의 여지를 남겨두고 물러난다. 식민지가 단결하여 영국의 반대 세력이 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영국은 인도에서 철수할 때 인도-파키스탄 간에 캐시미르 분쟁을남겨두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철수할 때는 부족 갈등을 일으키도록국경을 얼키설키 설정한다.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고 방글라데시까지 만든 것 또한 영국의 전통적인 분할통치 방식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일본에서 철수하면서 주변국과의 해결불가능한 문제들을 남겨두었다. 러시아와는 북방영토 문제, 한국과는독도 문제, 중국과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가 그것이다.
그야말로 감탄할 일이 아닌가?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떤 나라도 국경을 둘러싼 대립이나 분쟁은 있게 마련이지만, 일본만큼 정부의해결 의지가 없는 경우도 찾기 힘들다. 이는 모두 미국의 의도적인 조작 때문이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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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성 하시모토 경비국장은 8월 18일 각 지방 지사에게 점령군을위한 위안부 여성을 모집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당시 대장성 관료이자나중에 수상이 된 이케다 하야토는 "1억 엔으로 일본 여성의 순결을지킬 수 있다면 싼 편이다."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1945년 8월 27일 오모리에서 문을 연 위안부 시설에는 1,360명의 위안부가 모였다.
고 한다. 내무성 경비국장이면 치안 분야의 최고 책임자다. 그런 사람이 점령군 병사를 위하여 매춘의 선두에 나선 것이다.
역사상 패전국은 얼마든지 있다. 점령군을 위한 위안부가 거리에 출몰한 경우도 있고 위안부 시설을 만든 사례도 있다. 그러나 내무성 경비국장이 혹은 나중에 수상까지 된 국가의 핵심 인물이 솔선해서 점령군을 위한 위안 시설을 만든 나라가 과연 있을까?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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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집중도 규격 대량 생산을 위해서였다.
쇼와 10년대의 혁신 관료들이 규격 대량 생산의 완성을 위해 시행한 두번째 중요 사항은 국민학교 제도이다. 학교 교육을 통일함으로써 전 국민을 규격 대량 생산에 적합한 인간으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규격 대량 생산에 적합한 인간이란 첫째 참을성 있고, 둘째 협동심이 강하고, 셋째 공통된 윤리관과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넷째 개성과독창성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쇼와 16년의 ‘국민학교령‘은전국민을 ‘이용하기 쉬운 인간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이것 역시나치스의 폴크스슐레(Volksschule, 독일의 공립 초등학교)를 그대로 흉내낸 제도이다.
- P228

일본식 경영의 세가지 축.
규격 대량 생산을 실현하는 데 ‘일본식 경영‘ 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식 경영은 크게 세 축으로 성립된다. 첫째는 종신고용제와연공임금의 고용 관행, 둘째는 집단적 의사 결정 기구, 그리고 셋째는선행 투자형 재무 체질이다.
- P285

 1985년 9월,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마린된 주요국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달러 약세 · 엔화 강세 유도의 결정이 내려졌다. 이른바 ‘플라자 합의‘ 이다. 그 결과 달러에 대한 엔화 환율은 1985년 9월 1달러에 230 엔에서 1986년 9월에는 1달러에 150엔으로 급등했다. 한 나라의 통화가 국제 기축통화에 대해서 이토록 대폭적이고도 급격하게 상승한 일은 유례가 없을것이다.
당연히 일본 수출 기업들은 위기감을 느꼈으며, 일본 전역에 ‘엔고(엔화 강세) 불황‘ 의 경보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사실은 엔화 강세 불황은커녕 곧바로 ‘기업 이익 사상 최고, 도산 건수 근년 최저‘ 라는 대대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1달러에 수출하면 230엔의 엔화를 벌어들이던 것이 엔화 강세의인해 150엔이 된다. 그 차액 80엔을 수출 기업들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단순화하면 이렇다.
우선 80엔 가운데 20엔(4분의 1) 정도는 수입 원자재의 가격 인하나 금리 인하로 메울 수 있었다. 
다음 20엔 정도는 달러 기준 수출 가격의 인상으로 메웠다. 즉 230엔이었을 때 1달러였던 수출 가격을 1달러 15센트로 인상한 것이다.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은 높기 때문되었다.
새번째 29엔은 기업의 이익을 깍아보았다.
수출은 쉽게 돈 버는 사업에서 스량을 늘려 수입을 확보하는 사업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지막 29엔은 소위 말하는 뼈를 까는 합리화 를 통햐 짜낸다. - P296

1달러에 230엔이던 제품의 국내 판매 가격은 엔화 강세 이후에도230엔 그대로였다. 달러 약세 · 엔화 강세가 진행된 1980년대 후반, 정부는 수입품 포도주나 석유에 대해서는 가격을 내리도록 지도했으나,
사실 국산 자동차나 전기 제품의 가격은 거의 변동이 없었다. 즉 수입원자재 등의 가격 인하에 의한 20엔과 생산 합리화에 의한 20 엔은 국내 판매에서는 기업의 ‘이득‘ 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 유통 비용이나 관리비를 다소 인상하더라도 크게 남는 장사인 셈이다.
그 결과 수출은 1달러 15센트에 180엔, 국내 판매는 230엔이라는내외 격차가 생겼다. 당연히 기업 앞으로 국내 판매에서 생긴 거액의돈이 들어왔다. 이것이 ‘기업 이익 사상 최고‘ 의 내용이다.
이익으로서 기업에 축적된 자금 중의 일부는 해외에 투융자되었지만, 대부분은 국내의 토지나 주식에 투자되었다. 1980년대 말의 거품경기의 시작이다.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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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중공업이나 철도는 습속히 발전하여 19세기 말에는 영국을 윗도는 공럽력을 자랑하기애 이르렀다. 한편 못민관 관청의 활동에 의해 빈곤자대책등의 사회 정책이 도입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실시한 것이다. 독일의의료가 크게 발전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유아 교육과 대중 여행도 장려되었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카르테 (진료 기록 카드), 메스(해부도), 킨더가든(유치원), 반더포겔(주유 여행) 등의 단어에서 독일어를 찾아볼 수 있다.
독일보다 뒤늦게 근대 공업화를 지향한 오스트리아-헝가리나 일본이 독일을 본뜬 관료 주도형 계몽주의를 도입한 것이 결코 어처구니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근대 공업화를 지향하는 국가 중에는 영국을 필두로 하는자유주의 시장경제형의 국가와 독일을 모범으로 하는 관료 주도형 계몽주의 국가들이 생겨나면서 제각기 문화와 이상을 다투게 된다. 20세기 세계의 진영 대립의 한 축인 자유시장이냐 관료 주도이냐의 대립은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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