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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평점 :
이봐! '느리게 읽기'가 최고의 독서법이라고 말하는건 지나친거 아냐?
대학을 입학하기까지 운동과 놀이를 워낙 좋아하던 탓에 나는 '독서의 즐거움과 이로움'을 알지 못했다. 고교시절까지 내가 들여다 본 책이라고는 교과서와 참고서 그리고 사전이 전부였다. 교과서 속에 들어있는 문학과 인문, 역사 그리고 예술등 그 많은 활자들을 쫓아가기도 바빴던 나에게 교과목 이외의 책을 읽은 것은 열 손가락 안에 들었을 정도였음을 고백한다. 소위 말하는 '지성의 상아탑'이라고 하는 대학을 들어가면서는 '책을 읽지 않은 자신'이 대학에 들어갔다는 자기적 모순에 빠져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안될 당면과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은 박식해 보이는 선배의 손에 항상 들려 있던 F. 엥겔스의 '자본론 보론'을 쫓아서 산 것이 첫 번째 도서구입경험인데, 우리말로 쓰여진 문장임에도 활자를 쫓아 읽어갈 뿐,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 달랑 두 페이지를 읽고는 덮어버렸다.
무엇이든 읽기는 해야겠는데 무엇을 읽어야 할 지 몰라 강박으로까지 다가온 나의 '독서의 충동'이 답을 찾기 시작한 건 전공기초 과목이었던 '국어'교수께 상담하게 되면서부터다. 그 분은 책을 처음 접하는 내게 '칼 구스타프 융'의 '잠재의식'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수준과 종류를 따지지 말고 닥치는대로 읽기를 권했다. 책을 읽은 후 무엇을 읽었는가 되돌리려 하지 말고, 그저 다음 책에 몰두하며 수많은 카테고리가 담겨져 있는 두뇌라는 하드에 양적으로 저장하기를 권했다. 독서결과에 대해 의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하셨다. 두뇌는 그릇과 같아서 내가 배운 지식들이 하나 하나 채워져 가고, 그것들이 숙성이 되면서 느끼게 되고, 쌓이고 느끼는 과정이 반복되면 발효되어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으로 다가온다고 말해주셨다. 그래서 그 작은 깨달음들이 그릇을 차고 넘치게 되는 순간, 나의 일상생활의 곳곳에서 그동안 읽고 배운 것들이 내가 의식하지도 않았음에도 현실에 적용되고 활용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 경험은 무척 놀라운데, 그 맛을 느끼는 순간 '독서의 즐거움'이 시작될 거라고, 그 전까지는 조금은 수고로운 과정일 거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분은 독서생활도 인간의 경험이라 누가 알려주기 보다는 스스로 익혀야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것이어서 처음 책읽기를 시작했으면 추천을 바라지 말고 나의 판단으로 무조건 다독하기를 권했다.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읽고 무조건 수용하라고 말씀하셨다. 읽고 난 정보와 지식이 나의 일상생활과 결합되면서 책에서 이야기했던 것을 분석하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나에게 좋은 책과 나쁜 책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책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그 분이 처음 권해주신 책은 '시드니 셀던의 소설'이었다. 미국 드라마의 미니시리즈나 영화의 원작이 될정도로 재미가 넘쳤던 책들인데, 국내에 나온 그의 소설을 전부 읽으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습관'을 배웠던 것 같다.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진 그 때부터 책에 흥미를 붙이면서 지금까지 책은 둘도 없는 '친구'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고, 시드니 셀던의 소설에서 다른 작가들로, 다른 장르로 범위는 넓어졌고, 책을 읽는 양과 속도도 향상되었다. 물론 지금의 내가 대학새내기 시절보다는 지적으로 더 성숙해 진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좀 더 효울적이고, 알차게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한 갈망은 무슨 책을 읽어야 할 지 알만한 지금이 예전에 '당장 무슨 책부터 시작해야 하는 지 모르는 초짜'때보다 더욱 더 큰 강박으로 다가온다. 나는 아직도 서점을 가서 느끼는 설렘과 두려움은 지식의 보고인 서점을 보물섬이라고 비유한다면 평생을 보고도 다 못볼 만큼의 쌓여있는 책들과 매일 쏟아지는 싱싱한 신간들을 목격하노라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책 [보물섬]에서 파란곡절 끝에 누런 황금이 가득한 보물들이 가득한 곳을 찾아가 눈앞에 둔 보물들을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소년 짐 호킨스의 마음과 다를 바가 아니다. 이 책 <책을 읽는 방법>을 읽고자 함도 바로 그 두려움과 설렘을 진정시키기 위한 순수한 이유에서였다.
책을 읽는 방법: 슬로 리딩의 실천本の讀み方 : スロ-リディングの實踐 라는 원제목을 가진 이 책은 해박한 지식과 화려한 의고체 문체로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라고 파격적인 평을 받은 베스트셀러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 平野啓一郞 가 쓴 책으로, 속독速讀에 대한 철저한 반대입장을 밝히며 슬로 리딩Slow-reading를 권하는 책이다. 그는 독서를 즐기는 비결은 무엇보다도 '속독 콤플렉스'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슬로 리딩이야말로 '차이를 낳는 독서기술'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슬로 리딩은 야마무라 오사무의 반反속독의 의미인 지독遲讀(더디게 읽다)의 발상을 따라했다고 말한다.
'한 권의 책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는 읽는 방법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그는 독서가 단순히 피상적인 지식으로 인간을 꾸며주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그 사람을 바꾸어 사려깊고 현명하게 만들며 인간성에 깊이를 더해주는 것을 뜻한다면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 독서를 하면 즐거워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슬로 리딩은 숙독熟讀과 정독精讀의 개념을 포함하며 이것은 득을 보는 독서이자, 손해보지 않기 위한 독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보의 항상적 과잉공급 사회에서 진정한 독서를 즐기기 위해서는, '양'의 독서에서 '질'의 독서로, 망라형 독서에서 선택적 독서로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 1부에서는 슬로리딩 기초편이라하여 슬로 리딩의 개념과 그 소용을 설명하고, 제 2부에서는 슬로 리딩의 테크닉편이라하여 오독력誤讀力을 설명하면서 지독遲讀은 독자의 오독誤讀으로 인해 지독知讀으로 거듭나는데, 그것이 바로 독서의 즐거움이고 이로움이라고 이야기한다. 제3부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카프카의 [다리], 가네하라 히토미의 [뱀에게 피어싱], 미쉘 푸코의 [성의 역사1 - 앎의 의지]등 동서고금의 텍스트를 저자가 직접 분석하여 솔로 리딩을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데, 이 책이야말로 내게 너무 많은 의혹을 던져줘서 본의아니게 슬로 리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를 이제부터 밝힐까 한다.
우선 저자는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하는 책의 수량과 매일 쏟아지는 신간들의 수를 들으면서 어짜피 속독으로도 그것을 모두 읽을 수 없다고 말하며, '양의 독서에서 질의 독서로' 전환하여 모든 독서법을 슬로리딩으로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책이 귀했던 옛날의 지식인 즉 칸트와 헤겔이 평생 독파한 책의 권수와 지금의 우리가 책을 읽는 숫자를 비교하며 그들보다 지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저자는 옛날 사람들은 모두 슬로리더였다고 말하며 슬로리딩을 합리화시켰다. 하지만 워낙 책이 귀해서 어쩔 수 없이 많은 책을 읽지 못한 중세 지식인들의 독서량과 지금을 비교해서 '지적인 생활'을 운운한다는 것은 억지가 있는 부연이 아닌가 싶다.
또 그는 슬로 리딩이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일/시험/면접등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슬로 리딩 기술은 업무에도 응용할 수 있는데, 슬로 리딩 기술은 속독이 필요한 경우라도 어떤 점을 주의해서 읽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오독을 줄이고 뜻하지 않은 실수를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저자는 문학장르에 대해 언급을 하고 실용서류의 장르에는 그 범위를 넓히지 말아야 했다. 저자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이 자신의 업무와 시험, 면접등의 중요사안에 대해 속독으로 해결하려고는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 펼쳐진 문자군의 전체를 보며 사진을 찍듯 영상화시켜 무의식에 전달하는 속독법을 당치도 않은 이야기라고 말하며 컨트롤 할 수 없는 무의식을 나중에 마음대로 다시 의식해서 내용을 논리적으로 짜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저자의 경우에만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책을 읽는 독자 모두가 책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속독으로 접수한 내용이나 지식을 그대로 내뱉어서 저작활동에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책에서 읽은 정보가 누적된 상태에서 생활에 일어나는 상황들에 걸맞게 나의 생각과 표현으로 재창조하고조 준비하는 것이 일반인의 독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초반에 '작자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읽기 위한 방법이 슬로 리딩이라고 밝혔는데, 중반부에 들어서는 애초부터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자의 의도'야말로 '옳은 해석'이라고 하며 다른 해석을 모두 '틀렸다'고 말할 근거가 없으며, 그것은 부당하게 작품의 가능성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독자의 창조적 독서행위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비평도 유행했었다며 창조적인 오독력誤讀力은 슬로 리딩을 통한 심사숙고한 끝에 '작자의 의도' 이상으로 흥미 깊은 내용을 찾아내는 것은 '풍요로운 오독誤讀'이라고 말을 바꾼다.
그가 말하는 슬로 리딩의 범위는 어디인가?
과연 슬로 리딩의 궁극적인 맛을 내는 오독력을 '일/입시/면접'등의 실용서를 위한 내용을 분석함에도 찾아야 하는 것인가?
또한 일반 독자가 만나는 책마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이상의 자유로운 오독을 즐겨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진정한 독서의 참맛인가?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히 읽어야 하는 최신의 인터넷관련도서와 첨단과학도서 그리고 새로운 마케팅도서도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오독誤讀해가면서 슬로 리딩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독서에 있어 '독자로서 홀로서기'를 고백한 부분이다. 그가 독서에 빠지게 된 계기는 열네 살 때 읽은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그때 그는 그 책을 읽고 '대체 이게 뭐람'하고 싶을 만큼 충격적인 내용이었는데, 그것이 더욱 흥미를 갖게 했다고 말한다. '쇼크'라고 까지 말한 [금각사]를 섭렵하게 되고 팬이 되어버린 그는 [금각사]의 소설에서 언급한 작가들과 그 작품에 대해 추적해서 읽기 시작했고, 미시마가 영향을 받은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은 후 다시 한번 [금각사]를 읽은 후 그 내용을 훨씬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는 동안 [금각사]를 통해 알게된 작가들에 빠져 자신의 독서취향이 한쪽으로 쏠린 사실을 알고, 그것을 교정할 수 있는 책을 고르도록 주의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의 작품에 대해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再來라는 평을 받았다는 점과, 제3부에서 슬로 리딩의 실천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던 지문들이 학생때는 알 수 없었던 교과목의 지문들을 제외하곤 '거의 미시마류'의 것들이었음을 보면 그의 편협된 '오타쿠적 독서 접근법'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극우주의적인 동시에 심미주의적 작가였던 미시마 유키오가 일곱 번을 태어나 천황을 위해 일곱 번을 죽어도 천황의 은혜는 갚을 수 없다는 의미의 글을 머리띠에 두르고 자위대의 주둔지에 찾아가 자위대의 각성과 궐기를 외쳤지만, 수용되지 않자 할복자살을 했던 것처럼 책의 지문에 수록된 피와 죽음의 나열들이 제 2의 미시마 유키오를 보는 것 같아 섬뜩하게 했다. 물론 이 방법은 일종의 '덩굴 더듬기 독서' 즉 '네트워크 독서'라고 볼 수 있는데, 그가 말하는 깊이있는 독서가 극단적으로 이것뿐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저자는 소설가는 책을 느리게 읽는데, 그 이유는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읽기 때문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생각'이라는 행위야말로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로 인한 지독遲讀은 자신의 오독誤讀으로 인해 지독知讀이 되는데, 이것은 머리를 사용하지 않는 독서인 속독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소설가인 그가 슬로 리딩으로 책을 읽는 것은 모방을 통한 새로운 창작에 참여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또한 독자들이 작가의 입장이 되어 작가의 의도를 찾고, 음미하고 깨달아가며 읽는다는 것은 또 다른 독서의 즐거움이 된다는 것도 옳다. 하지만 슬로 리딩이야말로 최고의 독서법이고, 모든 장르를 아우를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무리가 있다. 일본의 지성이자 다독가로 유명한 다치바나 다카시가 [읽기의 힘, 듣기의 힘]에서 그는 즐기려고 책을 읽을 생각이 없으며 따라서 엔터테인먼트류의 책은 기본적으로 읽지 않는데, 그 이유는 얼만 남지 않은 인생을 그런데 쓰기가 아깝기 때문이라고 단언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자신의 속독생활은 '소설을 포함한 엔터네인먼트류'를 제외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다독가이자 속독가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능이며, 인류가 지금까지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인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마음' 때문에 책을 읽는다고 말했다면, 그는 소설가이자, 네트워크 독서가의 입장에서 일부의 장르에 대해 작가와 대화하고, 즐기려는 이유로 슬로리딩이 좋은 독서법이라고 말했어야 그의 주장에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논란의 여지를 생각한 것일까? 저자는 마지막에 "감히 솔직히 말하자면, 책이라는 것은 원래 무엇을 어떻게 읽든 상관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왕 읽는 것이라면 즐겁고 빈틈없는 독서가 좋지 않은가. 나는 한 사람의 작가이기 이전에,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한 사람의 독자였다. 그리고 그 동안 나 나름대로 고민을 하며 생각해내어, 경험상 이것은 유효했다고 생각되는 독서법만을 이 책에서 소개하기로 한 것이다."라고 다시 돌려서 말을 한다. 앞에서 단언하고 주장했던 것과는 또 다른 표현들이다.
자신의 독서법이 모든 장르의 책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이며, 어짜피 다 읽지도 못하고 죽을텐데 정말 좋은 책들을 깊이 있게 읽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주장하는 그의 말에는 젊은 작가의 치기어린 주장으로 여겨질 뿐 동의할 수 없다. 물론 경제 경영서등의 '실용도서'를 즐겨있는 나의 독서취향에 비추어서도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숨쉬고 공유하기 위한 컨템퍼러리 의식Sense of Contemporary을 갖추고자 독서생활을 하는 평범한 일반인 일 뿐 '작가의 의도를 깨우치고, 오히려 그의 의도를 넘어 오독誤讀을 즐기는 수준의 비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