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 타데우시
아담 미츠키에비츠 지음, 정병권 외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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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폴란드 문학이란 인식조차 지니지 않고 읽었던 비톨드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 (Ferdydurke), 스타니스와프 렘, 쉼보르스카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먼 이방의 문학토양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것인데, 그것은 올가 토카르추크가 보여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다. 그녀가 말하는 다정한 서술자’, 우주 만물 궁극의 근원인 태초, 그 일원성(一元性)의 파편들인 우리들 개개 존재의 공통 감각에 대한 날카로운 각성 같은 것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로부터 시작된 폴란드 문학에 대한 거슬러 읽기를 시작하게 된 것인데, 그 첫 번째 작품은 폴란드 국민이 가장 사랑한다는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소설 인형이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소설을 인과관계 없는 조각조각들, 개별 관점의 이야기들이 모여 독자에게 하나의 전체적 조망으로서 관점을 갖게 하는 폴란드의 문학적 전통 예로써 소개했다.

 

그런데 어디 문학 작품을 읽는 이의 인식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서의 형식에만 머물겠는가. 소설 인형의 시대배경은 19세기 폴란드라는 유럽 강국들의 야심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탐욕의 희생 영역이었다. 타민족들의 이익에 따라 분할 지배되던 폴란드인들의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어쩌면 20세기 초 한반도의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막연하게 닿아있는 이러한 시원적 정조(情調)가 나를 이끈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그네들 문학적 전통의 면면한 흐름의 발견이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인형의 주인공은 시련을 딛고 상인으로 성공한 보쿨스키라는 인물의 비극적 사랑의 서사를 배경으로 당대 몰락하는 폴란드 귀족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아낸 작품이다. 보쿨스키는 내면의 갈등이 솟구칠 때면 미츠키에비츠의 시집을 읽는다. 그가 읽는 시집이 아마 바로 이 책 판 타데우시였을 것으로 나는 짐작한다. 조국에 대한 향수, 자신들의 나라를 복원하려는 실천적 수행과 여인에 대한 사랑을 모두 성취하는 인물을 시적 운율로 그려낸 일종의 극시(劇詩)이다.

 

판 타데우시(Pan Tadeusz)의 판(Pan)은 폴란드 귀족 앞에 붙이는, 영국식으로 표현하자면 Sir()와 같은 의미이며, 타데우시는 이름이다. 작품 판 타데우시1810년대 리투아니아 지방의 소()귀족 소플리차 가문과 대()귀족 호레스코 가문의 해결되지 못한 원한으로 벌어지는 귀족간의 묶은 감정의 대립을 중심 서사로 하여 당대 시골 귀족들의 의식, 사냥, 사교, 식사, 복식 등 일상사와 농촌의 풍경, 조국을 잃은 사람들의 시대 인식이 어우러져 폴란드인들의 애국적 정취를 자극하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이 작품이 시적 음률과 시어로 써진 까닭은 폴란드인 고유의 정서를 보다 낭만적으로 그려내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번역된 언어로 그 정조에 감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따라서 운율법칙과 시어가 지녔을 문장의 고유한 맛을 기대 할 수 없다는 것은 항상 겪는 아쉬움이다. 결국 시를 산문으로 읽게 되었다는 것이니, 다만 문장이 품고 있는 시적 은유를 상상하는 기쁨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아담 미츠키에비츠는 오늘날 폴란드 민족시인으로 그들의 정신에 깊게 뿌리내린 하나의 정신이니, 폴란드 문학들의 저변에 흐르는 정조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임은 분명하다.

 

작품은 총 12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책에는 별도의 제목이 붙어있다. 1농장이란 제목 아래 도시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인 리투아니아 지방 소플리차 가문의 저택으로 막 귀환한 타데우시가 잃어버린 조국의 자유를 슬퍼하며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분할 지배되고 있는 현실의 극복에 대한 염원이 조상들의 얼과 현실의 목가적 정취와 함께 민족적 정서의 고취를 넌지시 자극하며 작품을 열도록 한다. 각 책의 제목들, ()이나, 구애, 정치적 선동과 사냥, 자야즈드, 1812처럼 서사적 줄거리를 상징적으로 암시하여, 이 작품이 종국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전개되고 있다.

 

1 농장의 한 문장을 좀 장황하게 인용해보면,

그 귀족은 예고하기까지 했답니다. 우리사회가 개혁되고 새로운 문명과 제도가 도입될 것이라고, (...)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는군. (...) 그 귀족은 평등을 말하면서도 마르퀴즈 귀족 칭호를 택했답니다. (...) 세월 따라 유행이 변하자, 그 마르퀴즈 귀족은 민주주의자 칭호를 가졌지요. (...) 파리에서 온 그 민주주의자는 남작이 되었더군요.” - 20, 1농장에서

 

귀족들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오고가는 대화 속의 한 구절인데, 당대 귀족들의 사회개혁으로서의 인간평등, 귀족이라는 계급의 의미변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등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함축되어 있다. 즉 시대 변화에 대한 인식의 대중적 이해였을 것이다. 이 작품이 의지하는 것을 이렇게 책 1에 묘사함으로써 이어지는 장면들인 사랑과 원한, 사냥꾼들의 대립, 귀족간의 즈야즈드와 전쟁을 하나의 거대한 은유로 읽게 된다. 사건의 촉발은 수십 년 전의 한 사건인 호레스코 가문의 성주인 스톨르닉이 소플리차 가문의 야첵에게 살해되고, 이후 러시아의 침공으로 성()의 소유주가 사라지게 됨으로써, 양 가문이 성을 두고 다투는 것이 주된 서사의 제재(題材).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인형이 미츠키에비츠의 이 시를 잇는 계보로서의 소설로 이해되는 것은 이 살해사건의 동기에 터 잡은 것일 테다. 야첵 소플리차는 스톨르닉의 절대적 충신이자 부상하는 신흥 귀족을 대표하는 청년으로 스톨르닉의 딸 에바와 사랑하는 연인이다. 그러나 대귀족인 스톨르닉은 신분상 지위가 낮은 야첵이 원하는 자기 딸과의 결합의 기대를 마치 생각조차 못할 일이라는 듯 모르는 척으로 일관함으로써 청년에게 좌절의 분노를 키워내고 만다. 인형의 주인공 보쿨스키가 몰락하는 대귀족의 딸 이자벨라와의 결합의 기대가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은 바로 야첵의 일생을 장악했던 이 기원적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러한 계보 기반을 지니고 있었음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이렇게 맛보게 된다.

 

시의 서사적 줄기는 당대 귀족들 간의 사랑의 감정적 거래의 관계와 두 가문간의 대립하는 적의의 은유로서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사냥의 에피소드. 이렇게 두 축()이다. 사냥이라는 쫓고 쫓기는 싸움의 의식은 사랑을 놓고 벌어지는 시기와 경쟁과 얽히면서 더욱 극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야첵은 스톨르닉을 살해하고는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참회로 이름을 로박(폴란드어 벌레를 뜻함)으로 바꾸고 신부가 되어 조국 독립에 헌신하며 속죄의 삶을 살아간다. 그 사이 에마는 원하지 않는 결혼과 소생으로 조시아라는 딸을 출산하고는 야첵에게 자신의 딸을 거두어 양육해줄 것을 부탁하고는 운명한다. 조시아는 소플리차 가문의 먼 친척인 귀족여성 텔리메나라는 여인에 맡겨져 양육되고, 신부 로박은 자신의 정체인 야첵을 숨긴 채 가문의 동생인 판사를 재정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수행한다.

 

3 구애에 이르면, 당대 귀족여성들의 결혼관, 즉 혼인의 표면적 거래 관계 아래에 흐르는 정신을 엿보게 되는데, 텔리메나라는 여성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쩌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성을 저울질하는 심리는 오늘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텔리메나는 적막한 저택의 심처에서 사냥을 시작한다.(...)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으나, 머리 속으로는 두 마리의 짐승을 쫓고 있었다. 어떻게 그 둘을 한꺼번에 포위하여 잡을 것인지 궁리하고 있다. 백작과 타데우시를...” -152, 5 분쟁에서

 

이 영리하고 경험 많은 텔리메나라는 여인은 타데우시의 삼촌인 판사의 여동생으로, 즉 타데우시의 고모로서 대우받는 여성임에도 조카벌인 스무 살 남짓인 타데우시와 호레스코 가문의 젊은 백작을 자신의 치마폭에 감쌀 궁리를 하는 장면이다. 이 여인이 두 젊은 남성을 유혹하고, 교태를 부리는 은근한 장면들은 이 작품의 분명한 볼거리다. 자신이 양육하는 대귀족 호레스코가문의 혈통을 가진 조시아와 타데우시의 결혼 성사를 손에 쥔 여인이 자기 욕망의 상대자인 타데우시와의 사이에서 어떻게 그 삶의 여정이 변화하는 가를 쫓는 것도 이 작품의 하나의 읽기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작품의 두 줄기 중 단연 그 비중이 압도적인 사냥 장면은 두 가문의 가솔들이 총 출동하여 사냥감을 놓고 경쟁하는 간접적 격전지다. 토끼를 놓고 사냥하며 두 적대집단으로 나뉘어 다투던 사냥은 원시림 숲속에서 튀어나온 곰의 출몰이라는 다분히 은유적 장면으로 전환되어 갈등의 정점으로 치닫는다.

 

미련한 곰이여! 네가 만약 그 밀실에 앉아 있었다면, 너에 대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을. 그러나 너는 벌통의 향기로운 냄새에 유혹 당했는가, 아니면 무르익은 귀리 이삭을 탐하였느냐. 너는 나무들이 드문 숲의 가장자리로 나왔다. 그러자 곧 산림지기가 그곳에서 너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 134, 4 정치적 선동과 사냥에서

 

양 집단은 곰 사냥에서 상대 가문을 누르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과정에서 곰이 타데우시와 백작, 두 사람의 앞으로 돌진하고 둘은 총을 동시에 쏘지만 빗나간다. 급기야 다가온 곰에 의해 희생될 찰나에 어디선가 나타난 신부 로박의 총격에 의해 곰은 쓰러진다. 곰 사냥 사건의 각 과정의 장면들마다 사냥꾼들, 두 젊은 청년 귀족에게 지니는 의미는 엄청난 파괴적 위력으로 나타난다. 흥미로운 것은 곰 사냥 후 옛 호레스코 가문의 성에서 판사, 즉 소플리차 가문의 중심인물이 만찬을 마련하고 주인으로서 식사를 주관하는 가운데, 여인들과 두 집단의 남성들과의 은밀한 희롱들이 곰사냥 결과의 후과(後果)와 섞여 만들어내는 긴장이 드디어 봉합할 수 없는 양 가문의 극한적 싸움의 기폭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타데우스와 백작, 이 둘의 대립은 민족적 자긍심과 외세, 외부 선진문명의 도입으로 상징되는 대결로서 한 점의 그림을 둔 비평적 논쟁을 통해 암시되기도 한다. 백작이시여, 그림을 사랑하시면서, 왜 당신이 앉아있는 주위에 있는 우리나라 나무들은 그리지 않는가? (...) 기름진 들판에 살면서, 알 수 없는 바위와 황야만 그리고 있다 고 타데우시는 비난한다. 이에 백작은 자연은 형태, 배경, 재료이고, 영혼은 영감입니다. 영감이 상상의 날개를 타고, 예술적 규칙의 바탕 위에서, 안목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오. 자연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열정만으로도 부족하다오. 예술가는 이상의 차원으로 날아 가야한다오!” 이 둘의 조화로운 균형의 필요를 작가는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었을 테다.

 

소플리차 가문이 이끄는 식사자리를 싸움터로 변질시킨 백작은 소플리차 가문 측에 선 심판소장을 향해 성을 두고 벌어지는 소유권 소송의 비난은 물론 그의 권위를 깡그리 무시하는 전례 없는 무례를 행하며,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잃어버린 대귀족의 권위를 되찾을 것을 예고한다. 법 초월적 권위라는 오래 전에 사라진 권력에의 향수, 예술적 이상으로서의 진보적 성향과 모순되는 당대 귀족계급 의식이 혼란 속에 흔들리고 있음의 상징적 장면일 것이다.

 

대귀족, 즉 구()귀족의 상징으로서 호레스코 가문과 소플리차라는 신흥귀족으로 성장하는 소귀족 소플리차에 대한 시기와 질투어린 시선들의 반감으로 뭉친 잔반세력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소플리차 가문을 대표하는 판사의 저택으로 총칼로 무장하여 기습하기에 이르고, 판사 저택의 기물들에서부터 가금류, 농장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한다. 그리고는 소플리차 사람들을 지하 창고에 가두어 놓는다. 아마 이 지역은 러시아군이 관할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러시아군이 들이닥침으로써 소플리차 가문의 사람들은 풀려나고, 백작 등 호레스코 가문을 비롯한 구귀족들은 포박되기에 이른다. 구귀족들의 어리석은 소플리차를 향한 폭력의 행사를 반대했던 일부 귀족들과 신부 로박은 뒤늦게 도착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하지만 러시아군 지휘관과의 갈등이 촉발되고 이윽고 두 귀족세력간의 싸움은 폴란드인과 러시아군의 전투로 변질되기에 이른다. 반목하던 두 세력은 폴란드라는 조국애로 결집하여 러시아군과 싸우게 됨으로써 승리한다.

 

이러한 서사적 결말은 오늘날 문학 작품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개연성이라는 측면에서 미숙함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극시의 결말은 죽음에 임박한 야첵이 자신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속죄와 참회, 그리고 그의 조국 독립을 위한 운동의 명예가 승인됨으로써 양가의 화해와 조국애로의 승화, 자신의 아들 타데우시와 스톨르닉의 외손녀 조시아의 가약으로 사랑의 결합이 완성된다. 인형의 보쿨스키는 이 결말이 보여주는 가능성, 사랑의 쟁취와 조국애의 실천을 자신이 병행 성취할 수 있는 존재되기의 모델로 삼았을 법하다.

 

그러나 이 작품을 모두 읽고 난 후에, 읽은 이의 정서에 남겨진 것은 어쩌면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의 배경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몰려온다. 그것은 이 작품 전면(全面)에 배경처럼 흐르는 리투아니아 한 농촌지역 서산에 걸려있는 태양이고, 농사일 마치고 귀가하는 건강한 농부의 붉은 얼굴과 어슴푸레 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저녁 빛과 수레단에 실을 호밀단 작업이 남아있음에도 농부들을 들판에서 물러나 작업을 종료케 하는 다정한 귀족의 지시처럼 자유로운 평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짙은 향수이다. 섬세한 레이스 커튼처럼 걸려 있는 서쪽 하늘의 구름, 구름을 에워싸고 타오르는 서편의 햇살, 모두의 손길과 눈길이 즐겁게 향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윤무, 고요한 저녁 같은 세계의 기운이 가득한 경건한 추억의 복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폴란드 근대 문학전통을 맛보는 더없는 작품을 경험했다. 당분간 폴란드문학을 읽는 여정을 계속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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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 극장 - 시대를 읽는 정치 철학 드라마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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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을 막는 가장 큰 장애는 무지입니다.” - 책 본문 82, 페리클레스의 연설

 

민주주의 정체는 상시적인 불안을 안고 있는 태생적 불안정성을 그 본질로 하는 정치제도다. 그 이유야말로 지극히 단순하고도 명쾌할 수밖에 없다. 어떤 공동체건 구성원인 인간 각각의 감성과 생각이 동일하지 않으며, 그 인식과 앎의 범위가 천차만별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이 서로 다른 생각들이 반영되어야 하는 정치체로서 민주주의는 그 균형과 조화를 성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지향하고 있지만, 그 실현태(實現態)는 같지 않다. 주권자인 민을 수시로 망각하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키케로가 국가론에서 인민이란 법에 대한 동의와 이익의 공유를 통해 결속한 대중의 집단이며, 공화국(로마)은 인민의 것이다.”라는 말과 달리, 국가는 인민 전체의 것임을 부정하려는 자들이 출현하는 까닭이다. 인민 대중이 모여 자신들을 스스로 다스리는 보편적 규약을 함께 만들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런데 그 대중, 인민의 앎, 인식의 폭과 깊이가 같지 않다. 키케로를 인용한 이유는 오늘날 우리들의 정치적 삶의 형태인 민주공화정의 틀이 그로부터 출발하는 까닭이다.

 

민주주의가 주권자로서 인민의 생각에 기초하므로 그들의 선택 여하에 따라 안정과 불안정 상태를 넘나들게 된다. ()의 선택이 키케로의 공화국에 대한 정의에 근접한 충실한 통치자를 세워 안정을 유지하기도하지만, 자기집단의 이익을 앞세우고 대립과 분란으로 불안정 상태로 내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결국 민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삶의 조건이 좌우되는 불안정성을 걷어내기 위해서, 다시 말해 안정된 정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시민의 정신, 그 앎의 역량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은 시민의 정신적 품성과 역량의 정도라는 말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자질과 역량을 모든 시민이 갖춘 탁월성(arete)에 이르도록 자극하는 지성의 사유라 할 수 있겠다.

 

50꼭지의 담론으로 구성된 책인 만큼, 각 글마다 인용되고 되새겨져 오늘의 정치적 현실의 의미로 해석되는 역사와 철학(정치철학 포함), 문예비평(문학)의 전범(典範)으로서의 사유들이 풍성하다. 그 글들이 응집하는 지점은 인간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윤리적 정치에 대한 앎이다.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키케로 세네카 등 로마의 정치, 토마스 아퀴나스를 필두로 하는 중세교부철학, 데카르트의 근대철학과 니체를 경유하여, 하이데거와 계몽 이성의 비판 철학으로 아도르노, 푸코와 데리다에 이르고, 신화와 비극, 문학과 문예비평, 마키아벨리, 한나 아렌트의 정치학을 아우르는 망라된 이들 인문학이 가리키는 무지(無知)에서 무지의 지()”로 향하는, 즉 인식의 지평, 자신과 세계에 대한 참된 이해를 위한 사유의 글들이다.

 

어떤 정체든 공동선이 흩어지고 사익 추구가 정치의 목적이 되면

그 정체는 파멸을 피할 수 없다.” -122

 

지혜와 해석의 신으로 알려진 헤르메스 신화의 한 장면은 거짓과 진실이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교묘한 기만의 경계에 선 다르지 않은 것임을 보게 한다. 헤르메스는 배다른 형제인 아폴론의 소 50마리를 훔친다. 이를 직감한 아폴론은 소를 훔쳐 몰고 간 게 너 아니냐?”고 따져 묻는다. 이에 헤르메스는 자신은 소를 훔쳐 몰고 간 적이 없다고 맹세한다. 소를 뒷걸음질로 걷게 하였기에 몰고 간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만적인 헛소리를 오늘 우리들은 정치검사들, 법비(法匪)들의 행태로부터 늘 보고 듣는다. 속이고, 감추고 덮어씌우는 어두운 헤르메스의 교활한 행위, 이 왜곡 행위가 해석의 잔꾀로 날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법은 욕구 없는 지성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인간 지성이 모여 찾아낸 가장 좋은 방편으로서 법을 세웠던 것이다. 사적 욕망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욕구가 배제된 이성이 나라를 다스릴 때 참된 법치국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을 다루고 지키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법률의 봉사자라 칭하고, 이들은 사사로움을 누르고 법의 정신을 구현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고 말했다.

 

그런데, ‘욕구없는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고 정신없는 욕구인 법기술자들이 설쳐 날뛰고 있다. 해석의 기술은 이렇게 너무 쉽게 은폐의 기술, 왜곡의 기술로 변질되어 사적 이익을 만들고 방어하는 악의 방편이 되어버린다.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앎의 눈은 단 번에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정신은 이를 분별할 수 있는 탁월함을 갖추어야 하고, 그래야만 법과 민주주의 정체를 훼손하는 이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정치적 문해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분별의 앎은 결코 저절로 획득되지 않으며, 지속적인 공부를 필요로 한다. 무지는 인식의 게으름이고, 이는 곧 악덕이라고까지 말해진다. 무지는 무언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자부하는 오만과 무분별이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바로 이 오만과 오만의 자기증식이 아테네를 멸망시킨 원인임을 알리기 위해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라는 패배의 역사를 써 후대의 지혜가 되기를 기대했다.

 

우리 인간 모두는 자신 안에 악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혹자들은 악을 모조리 외부로 돌리고 자신만은 선 그 자체라고 여기는 유아적 관성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전히 세대를 뛰어넘어 읽히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바로 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선과 악, 이 대극적인 양면을 인식하고 그것을 직시, 통과함으로써 그림자를 넘어서는 무의식의 내면 드라마를 씀으로써, 무지의 오만, 자기 앎의 한계에 대한 성찰을 일깨우고자 했다. 책의 모든 글들은 이처럼 단일 영역으로 향한다. 삶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안목과 그 현실을 내적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무지의 앎으로.

 


수많은 귀한 안목을 길러주고자 하는 저자의 노고의 산물들이지만, 특히 새로운 식견을 지니도록 한 글들 중 하나로 아이러니의 원형 어휘인 아이로네이아(eironeia), 자기 의심을 통해 자기 확신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인간 의 중대한 소양을 말하는 글은 자기중심성에 갇혀 협소한 앎의 동굴을 헤매는 우리들의 정신을 깨워 흔든다. 오이디푸스가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나누는 대화의 장면을 저자는 비극의 아니러니의 맞춤의 예()로 소개하고 있다.

 

그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수치스럽게 어울리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고, 어떤 악에 처해 있는지도 보지 못하고 있소.” 테이레시아스의 이 말에 오이디푸스는 화()의 화신이 되어 눈만 먼 것이 아니라 귀와 혼도 멀었다고 몰아친다. 테이레시아스는 반박한다. 그대는 불쌍하게도 머잖아 이 모든 사람이 그대를 꾸짖을 말로 나를 꾸짖고 있구려.”

 

2500년 전 그리스의 작가가 쓴 이 비극의 한 장면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는 진실을 자신만은 알지 못하는 것, 칼날이 자신의 목에 다다라서야 정작 자신이 악의 주범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서 우리들은 앎의 격차가 얼마나 인간 삶의 선택의 여정에서 중대하고 갈급한 사태인 것인지를 목격하게 된다. 객관적 상황이 주관적 믿음과 모순됨을 뜻하는 아이러니는 우리들의 무지를 폭로하는 긴요한 성찰의 필요임을 알려준다. 소크라테스가 짐짓 모르는 체, 능청을 떨며, 모르는 자의 태도로 다가가 상대방의 무지를 폭로함으로써 깨우침을 주는 것도 바로 어떤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치 현안과 관련된 온라인 의사소통망의 게시 글들이나 댓글에는 언제나 분출하는 열정에 싸인 혐오와 분노의 감정들이 들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자기만이 진실을 알고 정의를 안다고 자부하는 제어되지 않은 감정의 배설들이다. 결국 그네들은 그것에 스스로 얽매여 그 바깥의 세계 현상에는 매우 어둡기 마련이고, 한편으론 대개 인식의 게으름이 뒤따른다. 자기 한계를 모르는 자기믿음의 과신, 타자의 목소리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의 부정적 반응은 앎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결국은 진실의 힘에 의해 부정의한 인간으로 몰락하게 되고 만다.

 

막스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가 부르주아를 대변했던 정치경제학자로서 노동자들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드러내긴 했지만.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만큼은 중립적, 아니 전체를 포괄하는 논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의 윤리정치에 대한 생각은 오늘의 정치적 삶의 세계에 그대로 와 닿는다. 정치 영역이 신념의 윤리만으로는 맹목적이기 십상이며, 따라서 자기 행위의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길 수 없음을 인정하는 책임의 윤리가 서로 보완관계로 동반되지 않으면 안 됨을 역설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구현된 윤리정치를 권력정치, 즉 권력의 획득과 향유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는 정치와 대립하여 그것들의 목적인 화려한 외관을 추구하며 책임을 느끼지 않는 자아도취, 허영에 토대를 둔 권위주의의 권력정치가 공동체를 뿌리까지 썩게 만들게 된다는 지적은 결코 부패하지 않을 진실의 말일 것이다.

 

정치란 모두에서 언급했듯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자유와 평온한 삶을 누리며 창조적 열정을 펼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열망의 제도이고 그 관념의 발현이다. 권력정치와 윤리정치를 선택하는 것은 바로 그 선택의 권리를 지닌 민의 자유이지만, 한 번 알게 된 것을 실천하기 마련일 것이다. 파벌의 이익과 분열과 분란을 일으키는 자를 플라톤은 정치가에서 스타시아스티코스(stasiastikos)’라 부르며, 참됨을 가장한 사이비 정치가라고 비난했다. 권력정치를 희망하는 노예근성에 젖은 무리들이 없지 않지만, 인류 공동체는 늘 윤리정치를 복원해왔던 것이 역사이다.

 

자기 앎의 한계를 자각하고 돌보는 것, 다시 말해 무지의 장벽을 뚫는 것은 결단코 수월한 것이 아니다. 쉬운 말로 인식의 게으름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인간의 평균적 결함으로써 나르시시즘, 자기사랑을 돌파하기란 지난한 어려움이다. 그래서 더더욱 민주주의는 쉽지 않은 길이다. 무지의 앎에 얽매인 존재로서 우리들 인간의 자기중심주의가 얼마나 많은 폐해들을 낳고 있는가. 기후문제로부터, 무역장벽을 세우고 강자의 논리를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행태가 다시금 기승을 부리며 세계의 분열로 인한 긴장이 넘치지 않는가.

 

그런가하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공동선을 무너뜨리고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내란을 획책하던 세력들과 그에 준동하는 무리들의 청산이라는 과제를 앞에 두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이러한 현실에 둘러싸인 우리들 삶의 공통된 희망으로서 정치를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익숙한 지성의 사례들을 통해 앎의 지평을, 앎의 빛으로 혜안을 지닌 탁월한 시민의 정신으로 안내한다.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잡아 채야 하는 순간으로서의 지금 여기이기도 하지만, 앎의 기회란 그 때, 절호의 찰나가 있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이 책은 바로 지금 잡아야 하는 지혜, 인식의 빛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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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85
볼레스와프 프루스 지음, 정병권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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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도입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체에서 세부로 변화 이동하는 훌륭한 사례를 올가 토카르추크가 너무 멋지게 설명해놔서 직접 읽고 느껴보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집어 들었다. 이야기의 전개는 사람의 변덕스레 요동치는 심리처럼 그 오락가락, 변화무쌍으로 인해 한 번 펼쳐 든 책을 내려놓을 수 없을 만큼 빠져들게 된다. ‘폴란드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라는 수사와 같이 소위 오늘날 안방 드라마의 인기몰이 - 대귀족의 사치스러운 삶, 거부(巨富)가 된 자수성가한 사내, 애정의 줄다리기, 귀족의 몰락과 부상하는 부르주아, 격변하는 19세기 유럽사회의 시대성 등 -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다.

 

“1878년 초 세계 정치가 산스테파노 평화조약, 새 교황의 선출 유럽에서의 또 다른 전쟁 발발 가능성 등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바르샤바 크라코프스키에 르세드미에치에 거리의 지식인들과 상인들은 장신구를 취급하는 민첼과 보쿨스키 회사의 앞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 한 고급 음식점에서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속옷 가게 주인들, 포도주 가게 주인들, ,....‘유제프, 여기 맥주 하나 가져와! 그런데 이게 몇 병째지?’“

1병유리를 통해서 본 민챌과 보쿨스키 회사에서.

 

위에 인용한 문장을 보면, 세계의 전체적 시야를 가진 조망이 어느새 축소되어 술집에서 주절거리는 인물에 멈춰 개별 주체들 간에 보쿨스키라는 인물을 화제로 한 시시콜콜한 얘기들로 펼쳐진다. 소설을 시작하는 제 1장의 제목 중 병유리를 통해서 본이라는 표현은 작품이 어떻게 형성 구조화되는지의 중요한 암시다. 맥주병처럼 취한 이들의 설왕설래하는 일반 민중의 의미없어 보이는 관점에서 사회를, 그 통속성을 지배하는 대중적 정서, 상식이라는 볼품없는 이해에서 당대 폴란드인과 그 사회의 정신을 읽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누군가의 관점들이 수없이 포개져 하나의 전체적 조망으로서의 관점으로, 한 특정 사회의 실체적 흐름을 바라볼 수 있게 짜여 있다. 늙은 점원 이그나치 재츠키의 회고, 몰락하는 대귀족 토마쉬 웽츠키, 귀족적 삶의 가치를 신봉하는 상류 사교계의 상징적 인물인 토마쉬의 딸 이자벨라, 백작, 남작, 공작 등 사회를 지배하는 귀족들, 유대인들, 상인들, 그리고 보쿨스키라는 자수성가한 상인과 같이 결코 한 자리에 같이 하지 않을 이들의 시선이 하나의 거대한 조류가 되어 시대의 역사를, 계급사회에서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로의 저항할 수 없이 격변하는 19세기 폴란드를 그려 보인다.

 

핵심 플롯은 계급사회의 오랜 전통, 즉 혈통에 의한 가문 중심의 부와 권력이 세습되는 귀족계급의 지배자로서의 고착된 인식을 지닌 대귀족 여성으로 대변되는 상류사회와 그렇게 격리된 세계관 속의 여성을 사랑하는 상인 계급 남성이 지극히 사적인 개인으로서 사랑의 쟁취와 착취 받는 시민들을 위한 연민과 헌신 사이에서의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사랑이 한 시대에서 어떻게 취급되고 변질되어 가는지, 그것이 곧 시대성의 커다란 흐름에서 어떤 반영인지를 목격케 한다. 한 개인의 삶의 반경이 그 출신에 의해 한계가 지워진 세계에서 그들 각자는 자신들의 인식 바깥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오류와 오해로 인한 인식의 실패를 거듭한다. 그것은 반목과 갈등, 혐오와 증오로 귀결되기 일쑤고, 이것은 가시적, 비가시적 불문의 질시(嫉視)와 투쟁의 흐름이다.

 

민첼과 보쿨스키 회사의 소유주인 보쿨스키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처절한 각고의 노력을 통해 부를 쌓은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부를 쌓으려한 동기가 대귀족인 이자벨라를 멀리서 한 번 보게 된 이후에 그녀에 다가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부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그의 사랑이 얼마나 집요한 동기를 가진 것인가를 말한다. 기회주의적 귀족사회는 막대한 부를 지니게 된 성공한 상인인 그를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탁월한 인물이라 부추기며, 퇴락하는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 한다. 이자벨라의 아버지 토마쉬 남작은 무분별한 재산 탕진으로 귀족사회에서 홀대 받는 처지에 몰리고, 이는 지참금에 대한 의혹으로 이어져 사교계 최고의 지성을 겸비한 신부감이었던 이자벨라는 혼인 시장에서 점차 외면되기에 이른다.


보쿨스키는 몰락해가는 빈털터리 웽츠키 가문의 처지를 이용해, 아니 오직 이자벨라 웽츠키를 위해 그네들의 가계를 음지에서 지원한다. 그것은 그네들이 내놓은 집안의 귀한 물건들이고, 빚더미로 경매에 부쳐진 건물이고. 토마쉬가 남발한 채무더미들이다. 그는 다가가고 싶은, 자기 신분으로는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엄격한 신분질서 속으로 뛰어들고자 자신의 부를 그들을 위해 기꺼이 소비한다. 이것은 보쿨스키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자벨라나 토마쉬는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은 오랜 세월 지배계급으로 행세해 온, 자신들의 손으로 그 무엇도 창조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말과 손짓으로 인간 모두의 행위를 좌우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 온 이들에겐 보쿨스키의 선의는 자신들을 위해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하는, 하인의 충성일 뿐이다.

 

이자벨라는 보쿨스키의 염원과는 달리 그를 단순한 하인, 자신들의 재산관리인 정도로 여긴다. 그를 자신의 미모로 묶어두어 자신들의 귀족적 삶을 항구적으로 영위토록 언제라도 착취할 재원 이상의 존재로 생각지 않는 것이다. 감히 상인 따위가 대귀족의 딸인 자신을 상대 배우자로 접근한다는 것은 모욕이라 여기는 것이다. 결국 보쿨스키의 그네들을 위한 헌신적인 막대한 부의 지출은 공허한 짓거리다. 소설은 보쿨스키라는 인물이 시민대중의 헐벗은 삶에 대한 연민과 실천적 보살핌의 삶과 사적 행복이라는 귀족 이자벨라에 대한 사랑의 희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는 폴란드 사회의 새로운 시대를 짊어질 인물로서의 행보를 이어가게 될지를 쫓아가도록 한다.

 

모두에서 언급했지만 소설의 서술자의 시선은 이렇게 단면적이지 않다. 보쿨스키 상점의 늙은 점장인 재츠키를 통한 그가 살아 온 삶의 배경 속에서 당대 시민계층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늘어 놓는가하면, 당대 유대인들에게 쏟아지던 팽배한 혐오의 시선과, 귀족사회의 사치와 게으름, 부도덕과 특권의식에 대해 냉혹한 시선을 보내는 상인계층의 흠모와 질시의 양가적 시선도 있다. 또한 대외적 신흥 기술이나 산업에 대한 국수적인 배타적 시선에서 풀려나지 못한 비이성적 수구의 시선들, 극변하는 외교적 혼돈에 대한 정치적 분열의 시선들이 소시민들의 목소리로 배경처럼 흐르며, 이러한 조각들이 한 시대 속 사회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게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하늘을 나는 새의 시점이 사랑에 대한 관념적 이해의 변화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가히 독보적 성취를 이뤄내고 있는 듯하다. 돈과 권력의 이전과 상속이라는 거래관계가 지탱하는 귀족사회의 사랑에는 연민, 동정과 같은 타자를 기초로 하여야만 생성되는 사랑의 관념이 아예 존재치 않는다. 보쿨스키란 인물도 이러한 귀족사회에의 편입을 위해 돈의 절대성을 알았듯이 시민대중의 관념과는 아예 다른 차원에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이자벨라를 향한 사랑, 즉 개인의 만족을 위한 욕망이 사회라는 공동체에 대한 평등적 세계로의 희망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인가에 좌절 속에 몸부림친다.

 

이러한 갈등 속에 한 여인을 위한 그칠 줄 모르는 헌신, 그녀를 위한 막대한 부의 지출이 한낱 그네들에게 이용되는 가치이상이 아니라는 모욕에 당면하게 되는 것인데, 이로써 보쿨스키는 프랑스로 떠나게 된다. 그의 시선에 들어 온 대도시 파리는 선진 문물, 노동자와 장인들, 기술자와 학자, 예술인들의 참여가 축조해놓은 인간 평등의 거대한 사회이다. 그는 이자벨라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귀족들이 만들어놓은 계급적 이념에 굴복한 환상일 뿐임을 직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찰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이자벨라를 마음에서 떨어내지 못한다. 계속되는 2(하권)은 아마도 이 상인이 붕괴하는 부패하고 무기력한 귀족사회에서 어떻게 새롭게 다가오는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개인의 사랑을 공동체, 공적 사랑으로 전개하는가의 일견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어떤 서사가 될 것을 기대하게 한다. 문명의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을 쫓기 위해, 그가 꿈꾸는 이상적 사회의 폴란드, 혹은 그의 사랑의 결실은 맺어질 수 있을지, 작가 볼레스와프 프루스는 어떤 서사로 이끌까? 서구인들의 비극적 전통은 이 작품에서도 계속될까. 멜랑콜리가 그네들의 본원적 정서인 것을 이 작품에서 확인하게 될 것 같아 걱정스럽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목소리가 인도한 폴란드문학 읽기의 시작이다. 계속하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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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철학자 김동규의 저술 서양 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멜랑콜리아를 바탕으로 하였음을 밝힙니다. 그 동기는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소설 저항의 멜랑콜리에서 시종일관 필자를 괴롭혔던 석연치 않음의 원인을 찾아보려는 소박한 이유에서 출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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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melancholia), 우리는 멜랑콜리(melancholy)라는 표기를 대개 일상 언어로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의심스럽기만 하다. 서양인들에게 깊숙이 체화된 정조(情調)이기에 이와 무관한 동양인의 화법에서는 낯선 감성이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지역 공동체에 익숙하게 교육이나 학습으로 형성된 가치나 믿음, 정신이 내면화되어 일상성을 띤 감성을 에토스(ethos)라 하지만, 멜랑콜리아는 오래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적 감성, 즉 길들여진 감성인 에토스와 달리 그것에 저항하는 일시적, ()반복적 감성이기에 파토스(pathos)의 범주에 속하는 정념(情念)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대표작에 저항의 멜랑콜리(이하 멜랑콜리로 표기)라는 소설이 있다. 멜랑콜리에 저항, 거부의 의미가 있는데, 이중(二重)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읽히기에 저항의라는 수식어는 아마 저항으로서의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문구로 보인다. 그의 소설에 대한 감상의 제목으로 실존적 불안이라고 달았던 사탄탱고가 꼬리를 물고 윤회하는 듯한 닫힌 구조의 이야기로서 영원한 몰락의 상태를 반복하는 분노와 증오의 눈길로서 읽혔듯, 멜랑콜리는 이러한 감성에 직관적으로 닮은 이미지를 갖게 한다.(2018년 필자 본인의 리뷰 글을 참조 인용했음)


소설 멜랑콜리의 에스테르란 인물은 음악학교 학장을 은퇴하고 세상과 격리된 채 거짓된 음조에 휩쓸려 음악에 바쳤던 자신에게 자기-체벌로서 진실한 음의 조율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불협화음의 적응에 매진하는 자다. 이 인물이야말로 멜랑콜리한 서구의 인간 그 자체다. 나는 라슬로의 소설들 전반에 흐르는 이러한 정조가 왠지 거북하기만 했는데, 그네들의 멜랑콜리에 내재된 정신의 한계를 어느 만큼은 이해하여야 할 요구가 증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이 꺼림칙한 반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철학자 김동규는 서양문화는 멜랑콜리라는 정조에 물들어있으며, 이 정조의 바탕 위에서 수천 년의 문화를 일구어냈다.”고 이해하고 있다. 문화라는 것은 구성 개체들의 일상적 삶의 성장조건이자 한계조건이고, 따라서 특정 문화가 제공하는 삶의 토양은 그 내장된 자기 폐쇄성으로 동일성을 유지하려한다. 다시 말해 멜랑콜리는 서양인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불가피한 폐쇄성 속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소속 문화의 보편성을 강변하고 정당화하는 그 한계를 모르는 감성이다. 그런데 왜 멜랑콜리한 인간들, 즉 이미 기성의 규칙과 제도, 관습에 대한 은연한 반감의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그 폐쇄성을 탈출하지 않는 것일까? 정신의학자 피터 크레이머가 수천 년의 적응 끝에 멜랑콜리는 그렇게 우리에게 어울리게 되었다.”고 기술했듯, 이 황량하고, 우수에 젖은 감각적 정서를 개체가 풍요롭고 안락하게 느끼는 본원의 감성이 되었기에 탈출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감옥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김동규는 중요한 역사적 이해에 기초한 해석을 말하는데, 서양사회는 근본적 단절없이 연속성을 유지했다는 사실, 서양 정신이 한 번도 타자의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멜랑콜리라는 자신들의 감성이 지닌 한계에 대한 자기성찰이 필요치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서구의 정신은 멜랑콜리한 인간을 위대한 비극의 광기 표상으로서 천재예술가의 내면의 상징으로 여기는 오랜 문학적, 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정조로서 일탈과 과잉의 슬픔을 하나의 영감에 찬 기질로 이해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울을 향해 기울어가는 멜랑콜리한 감성이란 이성이 수반되지 않을 때 광신으로, 밀교적 열광으로 바뀌기도 하여 망상에 휩싸여 질병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균형과 조화를 이뤄 건강한 이성에 토대를 둔 독창적이고 진리를 드러내는 원동력, 숭고한 존엄성의 감성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멜랑콜리는 두 얼굴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멜랑콜리를 화두로 삼은 이유는 이것의 정의를 풀어놓자는 것이 아니라, 내게 석연치 않은 감정을 가지게 한 멜랑콜리의 내재된 본질에 조금이라도 근접해보려는 것이다.

 

라슬로의 작품, ‘멜랑콜리는 한 도시의 붕괴의 전조들, 그 가운데 등장하는 다분히 멜랑콜리한 인물들이 벌이는 혼돈의 상황이 마치 역사의 진실이란 돌고 도는 순환적 반복, 조금 인심을 써서 말하자면 모순을 살짝 덮어버리기 위한 변증법적 순환 고리를 맴도는 서사로 다가온다. 이 소설이 시적 감상을 자아내며, 걸출한 이야기의 맛을 선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몰입하게 하는 힘에 사로잡혔던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그런데 결국 제자리라니, 역사의 시간이 돌면서 서로 자리바꿈을 할 뿐 원의 전체 질서를 따라 단지 원주를 도는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소설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멜랑콜리를 구성하는 세 축을 김동규는 자의식 집중과 동일화, 나르시시즘이라고 정리한다. 첫째, 자기의식이 강해 자기에게 강하게 집중하는 까닭에 어떤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을 경우 그 고통은 매우 크다. 라슬로의 작품 속 에스테르나 그의 부인 모두 이러한 자기애가 놀라울 정도로 큰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말이다. 둘째, 타자를 자기와 쉽게 동일화함으로써 모순과 차이를 극도로 인정하기 어려워하며, 따라서 다름을 철저히 배제한다. 에스테르 부부가 서로 극한적으로 반목하고 혐오하는 것과 상통한다. 셋째, 타자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때부터 이미 자기와 닮은 자기의 분신을 선택한다. 이러하기에 멜랑콜리한 사람은 대상을 자신으로부터 떠나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에스테르가 또다른 형태의 멜랑콜리커인 몽상의 열정을 지닌 벌루시커의 행방을 애타게 찾는 것도 아마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멜랑콜리가 서양문화의 근본 정조, 즉 서양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심 줄기라한다면, 이것의 속성을 조금은 더 파고들어가 보아야 멜랑콜리가 왜 쳇바퀴 돌 듯 한계에 갇힌 답답함, 그로인한 거부감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김동규는 자기에 집착하는 서양의 언어에 우리의 언어에는 없는 재귀용법에 주목한다. 재귀(再歸; reflexive)한다는 것은 자기를 떠나서 다시 자기 스스로에게 돌아온다는 자기 복귀를 함축하는 낱말이다. 이 언어적 특성으로 인해 그들에게 자기(self, selbst)’는 엄청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인가를 자기 자신으로 이끈다는 의미의 절대자가 출현하고, 서양인들의 절대적으로(absolutely)라는 말은 그 자신에 따라서라는, 다시 말해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따르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멜랑콜리는 상대인 타자를 허락하지 않은 절대이며, 이 절대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수렴시키는 정념이다. 여기서 이질적인 것은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다.

 

동일성의 논리는 이로부터 자연히 따라 나온다. 자기가 아닌 -자기들 혹은 자기와 모순되는 것 전부를 배제하는 원리이다. 멜랑콜리라는 정조는 아무튼 독특한 배타성을 지닌 정념이다. 동어반복적 자기 동일성의 확립이 서양 인식론의 존재론적 근거라는 말이다. 그들이 애매함을 그토록 혐오하는 것이 바로 이 정신이다. 선택지를 벗어난 어떤 바깥도 부정되는 것은 바로 이 서양인의 자기동일화에 바탕을 둔 인식 때문이다. 서양 인식론을 모순배제와 동일률이 지배하는 것도 결국은 멜랑콜리한 서구 특유의 정조에 연원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이 동일성의 논리에 따라 치밀하게 전개된 결과물이다. 타자가 아닌 자기 분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이 지독한 정념은 불완전한 자기를 충만하게 완성함으로써 죽음을 정복하려는, 불멸의 구원에 대한 욕망이다.

 

이 어둡고 음울하고 슬픈 정조인 멜랑콜리는 이러한 자기 한계를 지닌 한편으론 기형적 감성으로 여겨진다. 이제 라슬로의 소설 저항의 멜랑콜리가 거부하는 마음으로 독자를 괴롭힌 이유가 어느 정도 해명된다. 서구인들은 그런 문화 속에 삶이 형성되고 있기에 자신들의 한계를 성찰하지 못한다. 물론 샤르트르라는 걸출한 인물이 원제목을 맬랑콜리로 하였던 소설 구토가 이러한 정조, 있음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허상에 빠져있으며, 나아가 그 허상에 빠져있음 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시대를 성찰하긴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결코 바깥 세계, 세계 전체를 조망하는 차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샤르트르는 앙투안 로캉탱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실존적 위치를 본의 아니게 진술하기는 했지만, 하이데거의 말처럼 자기존재가 거주하는 시대의 껍데기에 사로잡혀있음을 자각하지 못했기에 자기 정조의 한계를 보지 못했다.

 

사실 서양인들이 내세우는 고전적 지위를 차지한 문학작품들은 예외없이 이러한 멜랑콜리 정조에 깊게 물들어 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라고 한다는 부패와 불의와 부정한 세계 인식과 질서에 저항하지만 그것은 그들 내부에서의 성찰에 그치고 만다. 게오르크 뷔히너는 당통의 죽음에서 프랑스 혁명을 성공시킨 주역임에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던 당통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실 난 인류 역사 전체를 비웃지 않을 수 없어 , 세상이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어,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먼 훗날에도 모든 게 오늘과 같을 거 같아. 공연히 소란피우는 거야.”, 자신이 주도한 혁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을 통해 역사의 쓰나미에 휩쓸려버리는 부유물, 단지 저항하는 멜랑콜리커의 권태로운 삶으로 전락해버린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저항의 멜랑콜리의 전체 줄거리에 맞춤인 문장이라 해도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절망은 희망의 산물이니 희망은 실천적 목표에 대한 갈망이고, 그 목표에 안착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기에, 그 비극성을 성찰하고 또다른 희망의 목표를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게 해주지 않냐고. 아마 크러스너호르커이도 라슬로 분명 이러한 심정에서 썼을 것이다. 추악하게 권력을 차지하고 주변을, 타자를 철저히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에스테르 부인의 여정을 보여주면서 그 비극적인 세계의 일면을 통해 성찰할 수 있는 관점을 주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런데, 필자를 불편하게 했던 문제는 본질적인 것, 바로 그네들을 사로잡고 있는 멜랑콜리라는 그 정조가 지닌 한계를 왜 보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서구인의 배타적 관점, 자기애와 동일화의 관념을 독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대중에게 널리 회자된 불세출의 소설인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또한 멜랑콜리에 짙게 물들어 있는 작품이다. 20세기 물질만능의 휘황찬란한 금빛 세계에 21세기 청춘들이 환호하고 있지만, 과연 보편적 정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정신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이다. 개츠비는 자신의 이름 제임스 개츠를 개명한 이름이다. 철학자 김동규도 지적하듯 개츠비는 개츠의 이상화된 자기형상화로 이미 자기도취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나르시시즘이다. 자기의 이상적 이미지인 돈과 권력의 화신을 사랑하고 있음의 반증이다. 그래서 개츠비는 처절한 멜랑콜리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는 인물이 된다.

 

이것은 소설의 서사적 논리 형식에서 연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선택한 서양인의 오래된 정조의 발현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뼛속까지 속물인 데이지라는 인물은 돈이라는 죽은 사물과 같다. 개츠비가 꿈꾸는 진솔한 사랑은 애초에 성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같은 물신숭배는 서구인의 정조에 감염된 동양을 비롯한 세계 모든 지역에 확산된 기분 나쁜 정조에서 출현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노벨문학상이라는 인류 세계에 지니는 권위와 영향력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가 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수상자의 작품들이 세계 모든 지역의 인간들에게 동일하고 보편적인 감응을 주는 것은 아닐 게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인물들은 도처에 경계 지대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의 접점이 없이 배격하고 분리되어 있다. 건강한 삶이란 헤아릴 수 없는 관계들 마디의 접경에서 일어난다, 타자성과의 만남에서 비로소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열릴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소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도 미약하게 벌루시커와 에스테르의 일방적인 오해로 가득한 가느다란 접점이 있지만 그것마저도 타자에 의해 단절된다. 멜랑콜리는 자기상실을 참지 못하는 정조이다.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마디가 새롭게 맺어지는 것인데 말이다. 라슬로는 멜랑콜리의 정조를 소설의 주요 제재로 삼아 서사를 전개하지만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형식적 구조, 커다란 틀, 세계의 폐쇄적 순환구조의 틀로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멜랑콜리의 긍정적 특성인 저항의 실천, 열정적인 창조로서의 영감과 같은, 천재 시인 횔덜린의 예술적 광기와는 사뭇 거리가 멀어진다. 오직 질병적, 체념적, 분열적 우수만 넘실댄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의 멜랑콜리아처럼 서구 문학인들의 정조는 어두운 우수의 정조를 강렬한 문학적 서사에 담아 생의 무한한 감각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들의 제목이 지닌 정조의 한계가 우리에게 무엇을 지향 또는 시사하고 있는지 조금은 냉철한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만 같다. 소설 읽기에 냉철함을 제안하는 것이 뒤틀린 이해라는 지적이 있겠지만, 그것이 자기 폐쇄적, 배타적 정신의 산물이 아닌지, 그 어떤 변화도 기대치 않는 순응이거나 체념의 서사는 아닌지, 그래서 우리네 삶의 그 어떤 긍정적 희망의 씨앗도 남겨주지 않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물론 멜랑콜리라는 정조는 인간 보편의 경험인 탄생, 사랑, 죽음이라는 인생의 세 마디만큼 공유하는 보편적 정서에서 연원하는 그것들에 대한 시원적 슬픔과 우수의 감성이다. 이는 이성적 분류 체계나 논리적 접근으로 결코 잡히지 않지만 인간의 사회문화에 어떤 규정력을 발휘하는 감성으로서 현실 전복적이고 비판적 시선의 정조일 수 있다. 그래서 서양 문화의 정수인 예술이 멜랑콜리에 흠씬 젖어있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지만 그 정조가 지닌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동일성을 반복하는 것은 배타성을, 즉 타자의 배제로 인한 창조의 불능, 정신적 불임의 사태로 여겨진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분히 은유로 기술된 시체(屍體)의 화학적 변화를 장황하게 기술한 페이지들은 제아무리 반동이 승리한듯해도 자연의 순리는 그에 저항하는 단계를 돌려 줄 것이라는 뻔한 순환구조의 답습에 다름 아니다. 소설의 문학적 맛을 극대화하는 기술(technic)로서 멜랑콜리가 사용된, 동어반복의 대표적 예로 여겨진다. 미학적 성취는 있었으나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인생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다. 시끄럽고 정신없으나 아무 뜻도 없다.”를 다시금 반복하는 사태인 것만 같다.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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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23 0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룸을 감상할 수 있었어 좋았습니다.

비의식 2025-11-23 08:0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
‘저항의 멜랑콜리‘는 ‘사탄탱고‘만큼 흥미롭지는 않지만, 한 세계의 몰락에 대한 전조로 그려지는 적대적 시선의 느낌, 사방에 넘쳐나는 쓰레기가 추위에 얼어붙은 전경, 고래 전시와 군중들의 기묘한 열정 등의 서사 진행이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응하는 어처구니없는 인간들의 이합집산의 행동들, 권력의 이동이 더없이 천박하게 그려지고 있지요. 이야기 자체로는 분명 매혹적인 작품인데요, 제겐 계속 석연치않은 거부감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에 이런 감상으로 이어졌네요. ^^

페넬로페 2025-11-23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침 <당통의 죽음>을 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1월엔 <사탄탱고>를 읽을 예정이고요. <저항의 멜랑콜리>도 읽어봐야겠어요. 이 리뷰 도움 많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의식 2025-11-23 10:27   좋아요 1 | URL
오, 페넬로페님~ ‘사탄탱고‘는 제게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제법 지나면서 제 관점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저항의 멜랑콜리‘에 이르러 의심스러움이 생겼네요. 아무튼 우리들의 감성을 휘젓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즐거운 독서가 되시기를요.

잉크냄새 2025-11-23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담입니다만 멜랑꼴리는 예전 처음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좀 있어 보이려 쓰던 기억이 나네요. ˝오늘 좀 멜랑꼴리해˝라고 말이죠. 깊은 의미도 잘 모르면서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를 들먹이던 시절처럼 말이죠. ㅎㅎ

비의식 2025-11-23 10:23   좋아요 0 | URL
서구 정신이 우리들에게 어느 새 깊게 잠식해 들어온 것이겠지요. 회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저 수용하기에는 무언가 꺼림칙한 요소들이 있어요. 김동규의 저술은 서양의 주변부에 있는 자로써 미래 철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동환, 김상봉 등이 있지요. 참고할만한 분들입니다. 고맙습니다, 잉크냄새님.
 
방랑자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9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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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고 책장을 덮을 때 내 표정은 어땠을까를 상상해본다. 마침 그때 거울로 내 모습을 볼 수 없었으니 기억이 조작해 낸 이미지를 떠올려보려 애쓰지만 딱히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그 초라한 존재에 대한 각성의 충격으로 조금은 더 겸손한 표정이었을지 모른다. 지금 지나 온 생에서 내게 붙은 많은 것들을 비워내긴 했지만, 여전히 털어내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 것만 같다. 더 가벼워져야 하는데, 그래서 자유롭게 새로운 생태적 지위를 확보한 저 플라스틱 봉투의 존재방식, 오늘의 진화가 요구하는 어디에나 현존할 수 있는 편재성을 얻어야 하는데 말이다. 인간의 교만이 만들어 낸 예기치 않은 진화적 유리함을 확보하여 그 인간 중심의 관점을 전환해야 함을 역설하는 그 존재처럼 인간의 오랜 관습을 깨뜨리면서 존재방식의 새로운 장을 여는 존재자가 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위대한 변화가 되겠는가.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이다.” - 37, 191, 402, 481, 593

 

책 속의 많은 인물들은 어디론가 이동하고, 여행하며, 순례길을 떠난다. 아니 그저 이동해야만 하는 것이 삶의 행로임을 보여준다. 뭐 거룩하고 위대한, 혹은 숨겨진 진리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무수한 형태와 상황을 지닌 모습들이고, 서로 어떤 인과관계나 관련성이 없는 에피소드들, 즉 조각난 파편들의 이미지들이다. 벌집의 칸이나 창자의 뒤틀린 배열을 한 하렘의 미로에서 벌어졌던, 자신의 첫 번째 방이었던 어머니의 배를 칼로 단번에 찌르는 샤프란 왕국 황제의 정말 예기치 못한 에피소드이고. 모든 주민이 알고 지내는 작은 섬에서 사라진 아내와 아이의 실종을 수색하는 쿠니츠키란 인물의 경계와 단절의 혼돈 속을 헤매는 포착되지 않는 미지의 대상에 대한 추적의 실패 이야기이고, 이 세상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 모든 것, 프레임, 규범, 박제된 모든 것으로부터, 그 숨결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한 한 여인의 방랑의 여정이며, 낯섦, 이질성, 기이함 속에서 존재의 참모습, 본성이 발견되리라는 고통스러운 믿음에 기초한 끈질긴 발걸음의 여정들이다.

 

또한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인류가 저질러 온 범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게 될 알렉산드라라는 여성의 인류의 고해성사가 될” ‘거대한 악행의 기록이며, 동등한 여러 상황 속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고자하는 여행 심리학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집중을 통해 전체’, 즉 저 멀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의 시선을 지니기 위한 집요한 탐구이다. 그래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기를 요구하는, 아니 넌지시 제안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 새로운 관점이란 호기심의 방으로 대변되는 분더카머(Wunderkammer), 기이하거나 괴이한, 자연에서든 예술에서든 기존 규범이나 관습에서 벗어난 물건들이 수집 전시된 것들의 순례를 반복 기술하는 것으로 획득되는 낯선 존재의 수용일 것이다.

 

오늘의 사람들은 수식, 기호, 도표 등을 통해 세상의 지배법칙이나 그 자체의 묘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설명할 수 없거나 외면한 것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방어기제라는 자기 합리화, 속임수 따위를 허용하는 보호막으로 단단한 요새를 쌓아놓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부정이고, 기만임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물론 그것들과 직면하면 인간들은 무너지고 말 것임을 아는 까닭일 것이다.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마치 명석한 질문이 제공되면 알아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단정 지으며, 이 세계의 모든 현상들이 예측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왜 인류세라는 위기에 직면한 듯한 종말적 낱말이 출현했을까? 인간중심의 관점, 자아 중심의 세계관이 빚어낸 자연의 반란 아닌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바로 이러한 당연함의 인간관점을 모호함으로 만들고, 반박할 수 없는 논거에 끊임없이 의심을 제기함으로써 세계를 개체적 시야에서 전체의 시야로 확장하여 보도록 견인한다.

 


물론 올가 토카르추크만의 고유한 형이상학적 신비주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감성을 폄하하고 혐오하는 이성주의자들의 관점을 벗어나면 대체 우리가 알 수도 없고, 표현 불가능한 존재의 시원, 존재의 의미를 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세상의 숨겨진 질서, 자연의 꽃잎이 여자들의 몸에도 그 징표를 만들어 놓았듯, 그 넌지시 남겨진 암시를 무엇이라 말 할 수 있겠는가. 아킬레스 코드를 발견하고 명명했던 네덜란드 해부학자 필립 페르헤이언이 자신의 잘린 다리를 유리병에 보존하고, 인생을 그 절단된 다리로 향하는 여행에 바친 삶의 형태가 말해주는 것처럼 가장 미세한 파편조차 커다란 총제에 귀속되어있음의 직관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를 아프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육체와 영혼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과 같은 것일 게다. 핍립 페르헤이언은 말한다. 부적절한 지성이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포장된 외적 증거들이란 인간의 정신을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어떤 질서의 형태가 주는 안락함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것들이 세계를 경계와 범주로 구분하고, 타자 인간과, 비인간을 배제 단절시킴으로서 세계에 대한 전체의 시야를 잃은 것이 아니겠는가.

 

울가 토카르추크는 간과하고 넘겨버릴 수 있는 인류의 중대한 관점의 전환을 시사했던 두 역사적 인물이 발표한 두 권의 책,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장과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가 완성된 1542년을 인류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해로 쓰고 있다. 고대 그리스 이래 서구의 오랜 세계 관점을 그야말로 허물어뜨리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혁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 목격한 질서는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기 마련이고, 그 정신에 지울 수 없는 중요하고 근본적인 선과 면을 새겨놓는다.” -282

 

그래, 오랜 인간의 자기중심적 관점이 파괴되어야 하는 것임을 목도한 이가 어찌 그것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개구리의 관점과 공중을 나는 새의 관점 중에서 하늘을 나는 존재로써 세계를 인식하여야 함을 알았던 것일 게다. 그것은 끊임없는 이동으로서의 현실의 직시이고 이 책은 바로 그 실천이다. 책의 원제목 폴란드어 비에구니(Bieguni)’'달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만이 악을 피하는 비법이라 믿는 커다란 은유일 것이다. 물리적 공간의 이동을 포함한 정체된 영혼(정신)으로서가 아닌 지속되는 사유작용 혹은 알 수 없는 무한한 원소들의 활동으로서 순례의 목적인 늘 다른 순례자인 보존 처리된 해부된 인체와 그 조각들을 비롯한 여행, 방랑, 유목으로 표현되는 이동성과 조응하며, 전체인 시원(始原)의 관점에서 존재를 생각토록 하는 것이다.

 

카이로스(Kairos), 순환하는 시간 속에 장소와 시간이 교차하는 다시 오지 않을 유일하고 적절한 가능성의 아주 짧게 열리는 찰나(刹那)의 순간, 어쩌면 우주의 헤아릴 수 없는 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 유일한 기회의 포착물일 것이다. 그래서 무()에서 무로 달려가는 것은 아무런 원인도, 이유도 없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 테다. 별다른 의미 없는 무엇인가의 순간적 마주침의 지점에 정말 우연히도 인간들 자신의 말로 거대한 공동체 조직의 한 구성 존재임을 문득 자각하게 된 것이리라. 하지만 이것이 실수였던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지금 인류에게 뒷머리 없는 앞머리만 더부룩하게 자란 쏜살같이 지나쳐가는 기회의 신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움켜쥐어야만 하는 그런 순간의 시간에 오늘의 인류가 있음에 대한 긍정의 신호이기도 할 것이다.

 

호기심의 방에 진열된 창조의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와 실책을 추적하면서 기이한 것들을 찾아 천천히 그리고 끈질기게 발걸음을 옮기며, 어떤 전체의 무한성의 이미지를 향해 계속해서 돌아가려는 강박적 추구를 하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의식의 작용. 그것이 설혹 질병적 징후의 이름인 재발성 해독 증후군으로 불릴지언정 나는 그녀의 감성과 지성의 요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가 다정한 서술자에서 언급했듯, 잃어버린 세상의 모든 작은 조각과 파편들에 다시금 존재 가치를 부여하고, 그들의 감정을 공유하며 끊임없이 와 닮은 점을 찾아 낼 줄 아는 능력을 복원하기 위한 기술(技術)에 대한 감각과 생각이야 말로 바로 다정한 서술자일 것이다. 관점의 혁명을 내재한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을 체험과 생각, 그에따른 감정을 그대로 기술할 수 있는 충실한 대변자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런 연유일 것이다. 세상을 무한성, 저 높은 곳으로부터의 전체적 조망의 시각, 관점을 지니도록 해주는, 어쩌면 시초의 이야기라 해도 될지 모르겠다. 타자의 운명을 체감토록 하는 다정한 서술자의 음성, 그 지난한 노력의 한 결실일 것이다.

 

노발리스는 그의 소설에서 철학이란 본디 향수(鄕愁), 어디에서나 고향을 만들려는 하나의 충동이다.”라고 썼다. 이 감성적 언어에 극단적 이성론자인 하이데거는 비록 혐오와 멸시의 시선을 보냈지만, 그 의미만은 물리치지 않았다. 우리 인간 존재들은 전체로서의 세계 내 한 개체로서 그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다. 방랑자들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관계들이 맺고 있는 그 어떤 것들에 목소리를 투여하고 존재하고 표현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선사하는 것이다. 아마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렇게 계속해서 직조되어 인간과 사물, 자연 상호간의 영향과 연결이라는 통합적 관점으로 조망하는 에너지를 우리들에게 불어넣어 줄 것 같다. 우리가 알던 그 편협한 영역을 뛰어넘기를 주저하지 않을 방랑자로서의 용기가 내게 스며들기를. 뒤늦게 올가 토카르추크의 글쓰기에 내 감성이 흠뻑 젖었다. 아마 그녀의 작품들을 당분간 계속해서 읽게 될 것 같다. 모든 물성과 인과관계를 초월하여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그래서 그것을 다정하게 들려주는 목소리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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