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 극장 - 시대를 읽는 정치 철학 드라마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행동을 막는 가장 큰 장애는 무지입니다.” - 책 본문 82, 페리클레스의 연설

 

민주주의 정체는 상시적인 불안을 안고 있는 태생적 불안정성을 그 본질로 하는 정치제도다. 그 이유야말로 지극히 단순하고도 명쾌할 수밖에 없다. 어떤 공동체건 구성원인 인간 각각의 감성과 생각이 동일하지 않으며, 그 인식과 앎의 범위가 천차만별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이 서로 다른 생각들이 반영되어야 하는 정치체로서 민주주의는 그 균형과 조화를 성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지향하고 있지만, 그 실현태(實現態)는 같지 않다. 주권자인 민을 수시로 망각하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키케로가 국가론에서 인민이란 법에 대한 동의와 이익의 공유를 통해 결속한 대중의 집단이며, 공화국(로마)은 인민의 것이다.”라는 말과 달리, 국가는 인민 전체의 것임을 부정하려는 자들이 출현하는 까닭이다. 인민 대중이 모여 자신들을 스스로 다스리는 보편적 규약을 함께 만들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런데 그 대중, 인민의 앎, 인식의 폭과 깊이가 같지 않다. 키케로를 인용한 이유는 오늘날 우리들의 정치적 삶의 형태인 민주공화정의 틀이 그로부터 출발하는 까닭이다.

 

민주주의가 주권자로서 인민의 생각에 기초하므로 그들의 선택 여하에 따라 안정과 불안정 상태를 넘나들게 된다. ()의 선택이 키케로의 공화국에 대한 정의에 근접한 충실한 통치자를 세워 안정을 유지하기도하지만, 자기집단의 이익을 앞세우고 대립과 분란으로 불안정 상태로 내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결국 민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삶의 조건이 좌우되는 불안정성을 걷어내기 위해서, 다시 말해 안정된 정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시민의 정신, 그 앎의 역량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은 시민의 정신적 품성과 역량의 정도라는 말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자질과 역량을 모든 시민이 갖춘 탁월성(arete)에 이르도록 자극하는 지성의 사유라 할 수 있겠다.

 

50꼭지의 담론으로 구성된 책인 만큼, 각 글마다 인용되고 되새겨져 오늘의 정치적 현실의 의미로 해석되는 역사와 철학(정치철학 포함), 문예비평(문학)의 전범(典範)으로서의 사유들이 풍성하다. 그 글들이 응집하는 지점은 인간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윤리적 정치에 대한 앎이다.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키케로 세네카 등 로마의 정치, 토마스 아퀴나스를 필두로 하는 중세교부철학, 데카르트의 근대철학과 니체를 경유하여, 하이데거와 계몽 이성의 비판 철학으로 아도르노, 푸코와 데리다에 이르고, 신화와 비극, 문학과 문예비평, 마키아벨리, 한나 아렌트의 정치학을 아우르는 망라된 이들 인문학이 가리키는 무지(無知)에서 무지의 지()”로 향하는, 즉 인식의 지평, 자신과 세계에 대한 참된 이해를 위한 사유의 글들이다.

 

어떤 정체든 공동선이 흩어지고 사익 추구가 정치의 목적이 되면

그 정체는 파멸을 피할 수 없다.” -122

 

지혜와 해석의 신으로 알려진 헤르메스 신화의 한 장면은 거짓과 진실이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교묘한 기만의 경계에 선 다르지 않은 것임을 보게 한다. 헤르메스는 배다른 형제인 아폴론의 소 50마리를 훔친다. 이를 직감한 아폴론은 소를 훔쳐 몰고 간 게 너 아니냐?”고 따져 묻는다. 이에 헤르메스는 자신은 소를 훔쳐 몰고 간 적이 없다고 맹세한다. 소를 뒷걸음질로 걷게 하였기에 몰고 간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만적인 헛소리를 오늘 우리들은 정치검사들, 법비(法匪)들의 행태로부터 늘 보고 듣는다. 속이고, 감추고 덮어씌우는 어두운 헤르메스의 교활한 행위, 이 왜곡 행위가 해석의 잔꾀로 날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법은 욕구 없는 지성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인간 지성이 모여 찾아낸 가장 좋은 방편으로서 법을 세웠던 것이다. 사적 욕망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욕구가 배제된 이성이 나라를 다스릴 때 참된 법치국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을 다루고 지키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법률의 봉사자라 칭하고, 이들은 사사로움을 누르고 법의 정신을 구현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고 말했다.

 

그런데, ‘욕구없는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고 정신없는 욕구인 법기술자들이 설쳐 날뛰고 있다. 해석의 기술은 이렇게 너무 쉽게 은폐의 기술, 왜곡의 기술로 변질되어 사적 이익을 만들고 방어하는 악의 방편이 되어버린다.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앎의 눈은 단 번에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정신은 이를 분별할 수 있는 탁월함을 갖추어야 하고, 그래야만 법과 민주주의 정체를 훼손하는 이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정치적 문해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분별의 앎은 결코 저절로 획득되지 않으며, 지속적인 공부를 필요로 한다. 무지는 인식의 게으름이고, 이는 곧 악덕이라고까지 말해진다. 무지는 무언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자부하는 오만과 무분별이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바로 이 오만과 오만의 자기증식이 아테네를 멸망시킨 원인임을 알리기 위해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라는 패배의 역사를 써 후대의 지혜가 되기를 기대했다.

 

우리 인간 모두는 자신 안에 악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혹자들은 악을 모조리 외부로 돌리고 자신만은 선 그 자체라고 여기는 유아적 관성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전히 세대를 뛰어넘어 읽히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바로 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선과 악, 이 대극적인 양면을 인식하고 그것을 직시, 통과함으로써 그림자를 넘어서는 무의식의 내면 드라마를 씀으로써, 무지의 오만, 자기 앎의 한계에 대한 성찰을 일깨우고자 했다. 책의 모든 글들은 이처럼 단일 영역으로 향한다. 삶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안목과 그 현실을 내적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무지의 앎으로.

 


수많은 귀한 안목을 길러주고자 하는 저자의 노고의 산물들이지만, 특히 새로운 식견을 지니도록 한 글들 중 하나로 아이러니의 원형 어휘인 아이로네이아(eironeia), 자기 의심을 통해 자기 확신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인간 의 중대한 소양을 말하는 글은 자기중심성에 갇혀 협소한 앎의 동굴을 헤매는 우리들의 정신을 깨워 흔든다. 오이디푸스가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나누는 대화의 장면을 저자는 비극의 아니러니의 맞춤의 예()로 소개하고 있다.

 

그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수치스럽게 어울리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고, 어떤 악에 처해 있는지도 보지 못하고 있소.” 테이레시아스의 이 말에 오이디푸스는 화()의 화신이 되어 눈만 먼 것이 아니라 귀와 혼도 멀었다고 몰아친다. 테이레시아스는 반박한다. 그대는 불쌍하게도 머잖아 이 모든 사람이 그대를 꾸짖을 말로 나를 꾸짖고 있구려.”

 

2500년 전 그리스의 작가가 쓴 이 비극의 한 장면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는 진실을 자신만은 알지 못하는 것, 칼날이 자신의 목에 다다라서야 정작 자신이 악의 주범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서 우리들은 앎의 격차가 얼마나 인간 삶의 선택의 여정에서 중대하고 갈급한 사태인 것인지를 목격하게 된다. 객관적 상황이 주관적 믿음과 모순됨을 뜻하는 아이러니는 우리들의 무지를 폭로하는 긴요한 성찰의 필요임을 알려준다. 소크라테스가 짐짓 모르는 체, 능청을 떨며, 모르는 자의 태도로 다가가 상대방의 무지를 폭로함으로써 깨우침을 주는 것도 바로 어떤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치 현안과 관련된 온라인 의사소통망의 게시 글들이나 댓글에는 언제나 분출하는 열정에 싸인 혐오와 분노의 감정들이 들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자기만이 진실을 알고 정의를 안다고 자부하는 제어되지 않은 감정의 배설들이다. 결국 그네들은 그것에 스스로 얽매여 그 바깥의 세계 현상에는 매우 어둡기 마련이고, 한편으론 대개 인식의 게으름이 뒤따른다. 자기 한계를 모르는 자기믿음의 과신, 타자의 목소리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의 부정적 반응은 앎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결국은 진실의 힘에 의해 부정의한 인간으로 몰락하게 되고 만다.

 

막스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가 부르주아를 대변했던 정치경제학자로서 노동자들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드러내긴 했지만.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만큼은 중립적, 아니 전체를 포괄하는 논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의 윤리정치에 대한 생각은 오늘의 정치적 삶의 세계에 그대로 와 닿는다. 정치 영역이 신념의 윤리만으로는 맹목적이기 십상이며, 따라서 자기 행위의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길 수 없음을 인정하는 책임의 윤리가 서로 보완관계로 동반되지 않으면 안 됨을 역설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구현된 윤리정치를 권력정치, 즉 권력의 획득과 향유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는 정치와 대립하여 그것들의 목적인 화려한 외관을 추구하며 책임을 느끼지 않는 자아도취, 허영에 토대를 둔 권위주의의 권력정치가 공동체를 뿌리까지 썩게 만들게 된다는 지적은 결코 부패하지 않을 진실의 말일 것이다.

 

정치란 모두에서 언급했듯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자유와 평온한 삶을 누리며 창조적 열정을 펼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열망의 제도이고 그 관념의 발현이다. 권력정치와 윤리정치를 선택하는 것은 바로 그 선택의 권리를 지닌 민의 자유이지만, 한 번 알게 된 것을 실천하기 마련일 것이다. 파벌의 이익과 분열과 분란을 일으키는 자를 플라톤은 정치가에서 스타시아스티코스(stasiastikos)’라 부르며, 참됨을 가장한 사이비 정치가라고 비난했다. 권력정치를 희망하는 노예근성에 젖은 무리들이 없지 않지만, 인류 공동체는 늘 윤리정치를 복원해왔던 것이 역사이다.

 

자기 앎의 한계를 자각하고 돌보는 것, 다시 말해 무지의 장벽을 뚫는 것은 결단코 수월한 것이 아니다. 쉬운 말로 인식의 게으름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인간의 평균적 결함으로써 나르시시즘, 자기사랑을 돌파하기란 지난한 어려움이다. 그래서 더더욱 민주주의는 쉽지 않은 길이다. 무지의 앎에 얽매인 존재로서 우리들 인간의 자기중심주의가 얼마나 많은 폐해들을 낳고 있는가. 기후문제로부터, 무역장벽을 세우고 강자의 논리를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행태가 다시금 기승을 부리며 세계의 분열로 인한 긴장이 넘치지 않는가.

 

그런가하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공동선을 무너뜨리고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내란을 획책하던 세력들과 그에 준동하는 무리들의 청산이라는 과제를 앞에 두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이러한 현실에 둘러싸인 우리들 삶의 공통된 희망으로서 정치를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익숙한 지성의 사례들을 통해 앎의 지평을, 앎의 빛으로 혜안을 지닌 탁월한 시민의 정신으로 안내한다.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잡아 채야 하는 순간으로서의 지금 여기이기도 하지만, 앎의 기회란 그 때, 절호의 찰나가 있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이 책은 바로 지금 잡아야 하는 지혜, 인식의 빛이 되어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