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85
볼레스와프 프루스 지음, 정병권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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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도입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체에서 세부로 변화 이동하는 훌륭한 사례를 올가 토카르추크가 너무 멋지게 설명해놔서 직접 읽고 느껴보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집어 들었다. 이야기의 전개는 사람의 변덕스레 요동치는 심리처럼 그 오락가락, 변화무쌍으로 인해 한 번 펼쳐 든 책을 내려놓을 수 없을 만큼 빠져들게 된다. ‘폴란드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라는 수사와 같이 소위 오늘날 안방 드라마의 인기몰이 - 대귀족의 사치스러운 삶, 거부(巨富)가 된 자수성가한 사내, 애정의 줄다리기, 귀족의 몰락과 부상하는 부르주아, 격변하는 19세기 유럽사회의 시대성 등 -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다.

 

“1878년 초 세계 정치가 산스테파노 평화조약, 새 교황의 선출 유럽에서의 또 다른 전쟁 발발 가능성 등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바르샤바 크라코프스키에 르세드미에치에 거리의 지식인들과 상인들은 장신구를 취급하는 민첼과 보쿨스키 회사의 앞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 한 고급 음식점에서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속옷 가게 주인들, 포도주 가게 주인들, ,....‘유제프, 여기 맥주 하나 가져와! 그런데 이게 몇 병째지?’“

1병유리를 통해서 본 민챌과 보쿨스키 회사에서.

 

위에 인용한 문장을 보면, 세계의 전체적 시야를 가진 조망이 어느새 축소되어 술집에서 주절거리는 인물에 멈춰 개별 주체들 간에 보쿨스키라는 인물을 화제로 한 시시콜콜한 얘기들로 펼쳐진다. 소설을 시작하는 제 1장의 제목 중 병유리를 통해서 본이라는 표현은 작품이 어떻게 형성 구조화되는지의 중요한 암시다. 맥주병처럼 취한 이들의 설왕설래하는 일반 민중의 의미없어 보이는 관점에서 사회를, 그 통속성을 지배하는 대중적 정서, 상식이라는 볼품없는 이해에서 당대 폴란드인과 그 사회의 정신을 읽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누군가의 관점들이 수없이 포개져 하나의 전체적 조망으로서의 관점으로, 한 특정 사회의 실체적 흐름을 바라볼 수 있게 짜여 있다. 늙은 점원 이그나치 재츠키의 회고, 몰락하는 대귀족 토마쉬 웽츠키, 귀족적 삶의 가치를 신봉하는 상류 사교계의 상징적 인물인 토마쉬의 딸 이자벨라, 백작, 남작, 공작 등 사회를 지배하는 귀족들, 유대인들, 상인들, 그리고 보쿨스키라는 자수성가한 상인과 같이 결코 한 자리에 같이 하지 않을 이들의 시선이 하나의 거대한 조류가 되어 시대의 역사를, 계급사회에서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로의 저항할 수 없이 격변하는 19세기 폴란드를 그려 보인다.

 

핵심 플롯은 계급사회의 오랜 전통, 즉 혈통에 의한 가문 중심의 부와 권력이 세습되는 귀족계급의 지배자로서의 고착된 인식을 지닌 대귀족 여성으로 대변되는 상류사회와 그렇게 격리된 세계관 속의 여성을 사랑하는 상인 계급 남성이 지극히 사적인 개인으로서 사랑의 쟁취와 착취 받는 시민들을 위한 연민과 헌신 사이에서의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사랑이 한 시대에서 어떻게 취급되고 변질되어 가는지, 그것이 곧 시대성의 커다란 흐름에서 어떤 반영인지를 목격케 한다. 한 개인의 삶의 반경이 그 출신에 의해 한계가 지워진 세계에서 그들 각자는 자신들의 인식 바깥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오류와 오해로 인한 인식의 실패를 거듭한다. 그것은 반목과 갈등, 혐오와 증오로 귀결되기 일쑤고, 이것은 가시적, 비가시적 불문의 질시(嫉視)와 투쟁의 흐름이다.

 

민첼과 보쿨스키 회사의 소유주인 보쿨스키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처절한 각고의 노력을 통해 부를 쌓은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부를 쌓으려한 동기가 대귀족인 이자벨라를 멀리서 한 번 보게 된 이후에 그녀에 다가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부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그의 사랑이 얼마나 집요한 동기를 가진 것인가를 말한다. 기회주의적 귀족사회는 막대한 부를 지니게 된 성공한 상인인 그를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탁월한 인물이라 부추기며, 퇴락하는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 한다. 이자벨라의 아버지 토마쉬 남작은 무분별한 재산 탕진으로 귀족사회에서 홀대 받는 처지에 몰리고, 이는 지참금에 대한 의혹으로 이어져 사교계 최고의 지성을 겸비한 신부감이었던 이자벨라는 혼인 시장에서 점차 외면되기에 이른다.


보쿨스키는 몰락해가는 빈털터리 웽츠키 가문의 처지를 이용해, 아니 오직 이자벨라 웽츠키를 위해 그네들의 가계를 음지에서 지원한다. 그것은 그네들이 내놓은 집안의 귀한 물건들이고, 빚더미로 경매에 부쳐진 건물이고. 토마쉬가 남발한 채무더미들이다. 그는 다가가고 싶은, 자기 신분으로는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엄격한 신분질서 속으로 뛰어들고자 자신의 부를 그들을 위해 기꺼이 소비한다. 이것은 보쿨스키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자벨라나 토마쉬는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은 오랜 세월 지배계급으로 행세해 온, 자신들의 손으로 그 무엇도 창조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말과 손짓으로 인간 모두의 행위를 좌우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 온 이들에겐 보쿨스키의 선의는 자신들을 위해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하는, 하인의 충성일 뿐이다.

 

이자벨라는 보쿨스키의 염원과는 달리 그를 단순한 하인, 자신들의 재산관리인 정도로 여긴다. 그를 자신의 미모로 묶어두어 자신들의 귀족적 삶을 항구적으로 영위토록 언제라도 착취할 재원 이상의 존재로 생각지 않는 것이다. 감히 상인 따위가 대귀족의 딸인 자신을 상대 배우자로 접근한다는 것은 모욕이라 여기는 것이다. 결국 보쿨스키의 그네들을 위한 헌신적인 막대한 부의 지출은 공허한 짓거리다. 소설은 보쿨스키라는 인물이 시민대중의 헐벗은 삶에 대한 연민과 실천적 보살핌의 삶과 사적 행복이라는 귀족 이자벨라에 대한 사랑의 희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는 폴란드 사회의 새로운 시대를 짊어질 인물로서의 행보를 이어가게 될지를 쫓아가도록 한다.

 

모두에서 언급했지만 소설의 서술자의 시선은 이렇게 단면적이지 않다. 보쿨스키 상점의 늙은 점장인 재츠키를 통한 그가 살아 온 삶의 배경 속에서 당대 시민계층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늘어 놓는가하면, 당대 유대인들에게 쏟아지던 팽배한 혐오의 시선과, 귀족사회의 사치와 게으름, 부도덕과 특권의식에 대해 냉혹한 시선을 보내는 상인계층의 흠모와 질시의 양가적 시선도 있다. 또한 대외적 신흥 기술이나 산업에 대한 국수적인 배타적 시선에서 풀려나지 못한 비이성적 수구의 시선들, 극변하는 외교적 혼돈에 대한 정치적 분열의 시선들이 소시민들의 목소리로 배경처럼 흐르며, 이러한 조각들이 한 시대 속 사회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게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하늘을 나는 새의 시점이 사랑에 대한 관념적 이해의 변화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가히 독보적 성취를 이뤄내고 있는 듯하다. 돈과 권력의 이전과 상속이라는 거래관계가 지탱하는 귀족사회의 사랑에는 연민, 동정과 같은 타자를 기초로 하여야만 생성되는 사랑의 관념이 아예 존재치 않는다. 보쿨스키란 인물도 이러한 귀족사회에의 편입을 위해 돈의 절대성을 알았듯이 시민대중의 관념과는 아예 다른 차원에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이자벨라를 향한 사랑, 즉 개인의 만족을 위한 욕망이 사회라는 공동체에 대한 평등적 세계로의 희망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인가에 좌절 속에 몸부림친다.

 

이러한 갈등 속에 한 여인을 위한 그칠 줄 모르는 헌신, 그녀를 위한 막대한 부의 지출이 한낱 그네들에게 이용되는 가치이상이 아니라는 모욕에 당면하게 되는 것인데, 이로써 보쿨스키는 프랑스로 떠나게 된다. 그의 시선에 들어 온 대도시 파리는 선진 문물, 노동자와 장인들, 기술자와 학자, 예술인들의 참여가 축조해놓은 인간 평등의 거대한 사회이다. 그는 이자벨라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귀족들이 만들어놓은 계급적 이념에 굴복한 환상일 뿐임을 직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찰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이자벨라를 마음에서 떨어내지 못한다. 계속되는 2(하권)은 아마도 이 상인이 붕괴하는 부패하고 무기력한 귀족사회에서 어떻게 새롭게 다가오는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개인의 사랑을 공동체, 공적 사랑으로 전개하는가의 일견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어떤 서사가 될 것을 기대하게 한다. 문명의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을 쫓기 위해, 그가 꿈꾸는 이상적 사회의 폴란드, 혹은 그의 사랑의 결실은 맺어질 수 있을지, 작가 볼레스와프 프루스는 어떤 서사로 이끌까? 서구인들의 비극적 전통은 이 작품에서도 계속될까. 멜랑콜리가 그네들의 본원적 정서인 것을 이 작품에서 확인하게 될 것 같아 걱정스럽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목소리가 인도한 폴란드문학 읽기의 시작이다. 계속하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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