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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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나는 마음의 긴장을 이완시키기가 어지간히도 어려운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지상에서의 하루가 완벽하다고 외치는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꽉 조여진 내 정신에게 잠시나마 여유를 주고 평온의 호사를 가져보려는 안타까운 의도였다 할 수 있다. 대자연의 스스럼없음을 마주할 때 느껴지는 그 안온함, 아마도 아침이 오기전의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와 이리저리 나무사이를 오가는 새들의 지저귐을 오롯이 홀로 느끼는 순간의 청명함 같은 것에 마음을 내려놓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체 갖기 힘든 그런 진짜배기 여가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이 정신 사나운 시간에‘자연(Nature)’타령이나 하고 있겠다는 내 의도가 불순했는지 문장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계속 거부했다. 그래서 책을 덮어놓곤 몇 날이 지났다. 일과 여가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던 시간이 지나고 일이란 것을 비로소 마음에서 내려놓았을 때 흑청(黑淸)의 대비가 뚜렷한 표지의 이 책은 다시금 나를 유혹했다. 결국 시간은 흐르고 그 섭리에 저항하는 것이 왠지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아침에 나는 길을 내려갔다. 나뭇가지에 벌새가 있는지 보려고-없으면, 부재의 핑 하는 작은 울림을 느끼려고.” 존재와 부재 사이에 놓여있는 흐름의 진실을 꿰뚫는 시인의 섬세한 눈길에 공감하면서 나는 그렇게‘메리 올리버’의 문장에 젖어 들어갔다.

 

그리곤 시인‘워즈워스’의 자연의 불가해한 위대성에 대한 깨달음의 일화에서 상쾌함과 공포, 광휘와 심연의 기묘한 조화의 자연, 그 자체가 발산하는 경외의 신비가 문득 가슴에 무언가를 치밀고 들어오는 듯한 충만한 안정감에 온전히 나를 맡긴다. 내 몸이 야생의 자연을 많이도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도시가 제공하는 물질에 종속된 삶을 지탱해야 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게 숲과 야생동물이 어우러지고 바다가 지척에 있는 그런 자연은 언감생심이다. 더구나‘메리 올리버’처럼 썰물 때 미처 나가지 못하고 물웅덩이에 갇힌 물고기를 관찰하고, 눈밭 위에 찍힌 여우의 발자국을 보며 그의 삶을 상상하거나 인간에 길든 개의 야생성에서 자연의 미덕을 깨우칠 수가 없다.

 

왜 모르겠는가? 그녀의 말처럼 여가가 일상인 삶을 지닐 수 있다면 모를까. 이른 아침 “포근한 햇살 속으로 들어간 아주 평범한 순간 발작적인 행복감”에 젖어드는 그 찰라의 무념무상이 무엇인지 내 몸에 새겨진 태곳적 감성은 이해한다. 그래서 “장미꽃잎들 속에 서서 바람이 벌의 날개 아래서 졸면서 내는 소리보다 크지 않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 강력한 확실성에 이른다”는 그 평온하고 평범함에 대한 그리움에 더욱 막막해진다. 그녀가 부럽다. 또한 낯설다. 질투심이 솟는다. 자연 예찬, 삶의 완벽함에 대한 신비로움 그득한 그녀의 때 묻지 않은 음성에 간극을 느낀다.

 

이쯤해서 자연을 물리고나면 ‘랠프 월도 에머슨’과 ‘너새니얼 호손’의 문학세계와 그들의 삶을 현재로 옮겨와 유령처럼 되살려 낸다. 신비주의에 매혹된 시인의 심리가 읽힌다. 특히 호손의 『일곱 박공의 집』과 『낡은 목사관의 이끼』는 그녀의 새로운 시선으로 해석된 서평으로 작품에 대한 흥미를 지펴내기도 한다. 마음과 풍경이 조우하는 삶, 존재자로서의 기쁨을 말하는 시인이 안내하는 세상의 이해가 몇 편의 시와, 산문에 고요하게 펼쳐져 있는 이 책은 결코 내쳐 읽을 책이 아니다. 가끔 존재의 피곤함이 밀려 올 때,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을 때 펼쳐들면 아침 산책길의 그 뿌듯한 실체감이 되어 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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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
구본준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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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물(建造物)들에 어린 사연, 그리고 미학적 감상 약간을 얹어 세상의 모습, 그것이 가능케 한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해보려는 시도 같다. 그래서 내용의 구분도 희(喜), 노(怒), 애(哀), 락(樂) 넷으로 되었을 터이다. 책의 제목이‘집’임에도 불구하고 굳이‘건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집’이 사실 나에게는‘주택’이라는 협의의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책 속의 집들은 도서관, 성당, 박물관, 묘역(墓域), 요새(要塞), 복합상가, 정자, 고택(古宅) 들이어서 그저“지어서 만든 물건”이라는 광의의 표현인 건조물이 납득하기 쉽기 때문이다.

 

지어서 만든 물건이다. ‘짓는다’는 말은 여러 재료를 섞어서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이렇게 섞는 행위는 자연 사람들의 의도가 반영된다. 그것이 곧 마음이려니, 각양각색의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섞어야 하느냐라는 방법론이 나오고 이것에 갑론을박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가장 잘못 섞은 물건들이 성내다, 나무라다라는 의미의 ‘노(怒)’부분에 소개되고 있는데, 건축가 김수근이 남긴 옛 부여박물관이 그 하나이고, 더구나 슬프고, 민망하다라는 뜻을 가진 ‘애(哀)’부분에 악명높은 서울의 추물(醜物)인 세운상가로 김수근은 다시금 등장하기도 한다.

 

이 섞는 방법이 만만찮음이다. 한 번 지어진 물건을 허무는 것이 현대사회, 특히 사적소유가 분명한 자본주의사회에 와서는 더욱 수월한 것이 아니어서 잘못 섞어진 것에 사람들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방해 받을 밖에 없다. 그러나 잘 섞어진 물건은 소박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그 아름다움에 공감케 하며, 위로마저 받을 수 있기도 하다.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나누는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책이 어린이대공원 꿈마루나 대한성공회 서울 대성당에서 부분적으로 공간의 미학적 견해를 피력하고, 세운상가를 통해서는 공간계획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발설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미덕은 이 섞는 방법에 도사린 사람들의 의식, 섞는 방법의 정신적 조건, 그 기초에 대한 것들의 통찰이라 할 것이다.

 

‘희(喜)’편에 소개된 뾰족하게 높이 솟아오른 첨탑을 지니지 않은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한옥의 지붕과 창 등 한국적 이미지들의 융합, 성스러움을 잃지 않는 소박함 속의 경건함과 숭고함에서 뽐내지 않으니 더욱 높아 보이는 것의 진리를 발견케 되고, 순천의 “진짜 상식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어린이 도서관에서 섞는 이의 고결한 정신의 실체를 보게 된다. 도서관의 주체는 누구인가,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은 정말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가, 알지 못하던 이 건조물들이 단지 지어진 물건의 의미를 넘어서는 순간일 것이다.

 

한편, 성산동 좁은 골목 언덕길에 조촐하게 자리 잡은‘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이라는 이름의 일제 종군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을 기리는 기념관의 사연은 박물관의 곳곳에 새겨진 섬세한 공간적 설계와 배려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한다. 독립공원에 천한 위안부의 기념관을 건립할 수 없다는 권력집단의 기막힌 방해에 의해 설립 부지를 잃었다는 것이다. 국가라는 것이 본디 지배권자들을 위한 관리소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국가조차 이러할진대 그러한 국가가 나서서 일본에 진심의 사죄를 요구하는데 미온적인 것은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다.

 

사실 많은 이정표적 건조물들은 그 규모나 자원투입의 측면에서 공공(公共)물이 대부분이라 할 것이다. 또한 옛 건조물들 역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왕이나 귀족, 사대부들, 지배권자들, 종교적 권위의 산물이다. 이러한 물건 중에 고립과 소통의 경험적 진실을 말해주는 스리랑카에 소재한 시기리야 요새는 흥미로운 주제를 던져준다. 영화(榮華)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깎아지른 수백 미터 높이의 고원에 지은 궁전, 그러나 생존하기 위해서는 내려와야만 한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채는 주변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단절은 곧 쇠망이다. 다채로운 소통, 경계 없는 왕래와 통행만이 존속과 영화를 만들어냄을 배울 수 있게 된다. 권력과 가진 자들의 구별 짓기, 경계 쌓기는 근친적 고립과 퇴보, 죽음의 착수일 것이라는 근엄한 역사적 가르침일 것이다. 인도 무굴제국의 혐오와 슬픔을 간직한 채 현대의 관광객들을 모으는 타지마할과 아라포트성의 사연도 시기리야 못지않은 진리를 발산한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인간이 지은 물건들에 어린 역사적이고 체험적이며, 사실적인 진실들의 다양한 이야기의 보고(寶庫)라 할 수도 있겠다. 창덕궁 후원에 그 많은 정자들, 부엌, 방, 마루, 각 한 칸씩 세칸으로 이루어져 양용삼간이라 불리는 충재에서 간결과 절제의 정갈한 미, 아니 삶의 진수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재미이다. 자신의 설익어 어설픈 욕구를, 혹은 권세를 과시하려는, 또는 권력에 아부하고 재화의 축적에 눈 먼 탐욕을 섞어 지은 물건들의 이야기조차 신경이 곤두서는 피곤함을 물리고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넉넉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구태여 안목까지 요구하지 아니하며 건조물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그런 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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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저고리의 욕망 - 숨기기와 드러내기의 문화사 키워드 한국문화 12
이민주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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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세계만큼 의상(衣裳), 즉 패션이 물신(物神)화 된 시대도 없으리라. 그것도 모자라서 명품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이젠 그 신들끼리도 차별화하느라고 난리다. 자본에 최고의 미덕자리를 부여한 사회에서 물질을 통해 나와 타인을 구분하려는 행동은 불가피할 것이다. 서로 이렇게 물화된 현대인의 심성에 편승하려는 패션의 물질지상주의적 욕망들은 또 다른 인간의 욕망인 나르시시즘과 기막히게 맞아떨어지고, 실종된 정신 대신에 자리잡은 물질의 허영, 곧 계급, 신분의 표상으로서의 욕망을 자극하는 최고의 수단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의상과 욕망 결합의 역사는 사실 유서가 깊다. 아마 인류가 자신의 몸에 무엇인가를 걸치기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 할지도.

 

우리의 전통 의상인 ‘치마저고리’에 정신분석적 용어인 ‘욕망(慾望)’이 결합한 이 책의 제목은 그래서 시대에 숨겨진 인간의 은밀한 심리들을 연상케 한다. 20세기 식민지 근대화와 함께 서구의 양장에 일상복의 위치를 넘겨줄 때까지 이 땅의 여성 복식은 큰 범주에서 치마저고리뿐이었을 것이다. 그러하니 이것의 작은 변화들이 곧 시대정신의 반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고, 이러한 변화들 중에서도 16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치마저고리 길이의 급격한 변화는 결코 예사로운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길이이고, 이에 상응하여 길어지고 넓어져서 풍성해진 하의인 치마이다.

 

인상 깊은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다. 내가 까마득히 어린 시절, 외출하기 위해 화사한 한복, 특히 짧디짧은, 그리고 어머니의 몸에 비해 왠지 지나치게 작게만 느껴지던 치마저고리를 입으시던 모습이 다른 어떤 기억보다 선명하다. 가슴도 채 다 가려지지 않을 것 같고 게다가 치마와 저고리 사이의 공극은 괜스레 불안해 보였던 것 같다. 누천 년 간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던 저고리의 길이가 이렇게 짧아지기 시작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일까? 반상의 구별이 뚜렷하고, 여인에 대한 구속이 엄격하던 시절에 어떤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일까?

 

저자는 이 의미와 원인을 억눌렸던 성적 욕망의 발현으로 해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금기가 여전히 작동하던 규방에서가 아니라 많은 허용이 용납된 기생이 그 시작점이었으며, 이것은 사대부의 첩실이라는 신분상승이 최고의 목표일 수밖에 없었던 여인들에게 자신들의 미색(美色)을 차별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리라는 것이다. 짧아진 저고리 아래 살짝 살짝 비치는 여인의 가슴과 속살, 그리곤 이것을 가리기 위해 꽉 조여 맨 옷고름, 드러날지도 모를 속살을 가리기라도 하려는 듯 치마를 가슴께로 치켜올려 잡아든 손은 더욱 여인의 가슴을 주시하게 한다. 드러내기 위해 짧아진 치마저고리와 이로써 드러나게 될 가슴을 감추려는 이 행위에서 절묘한 도발의 심리를 엿보게 된다.

 

기생의 관능적인 복색은 남성을 붙들어두려는 여염집 여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짧아지고 품이 작아진 저고리는 소위 유행의 물결을 타고 확산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유행전파이론 중에서 소위 하부계층에서 상부 계층으로 옮겨진 상향전파의 대표적 예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신분은 낮았지만 기생들은 사대부 남성이라는 ‘상부계층의 문화’에 속한다. 조선시대의 엔터테이너였던 이 여성들을 오늘날의 연예인에 비유한다면 상향전파라고 규정하기에는 석연찮은 판단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어쨌든 여인의 복식에서 차별화는 짧은 치마저고리의 변화로 나타났고, 여기에 여체(女體), 즉 가슴과 허리, 그리고 엉덩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위해 치마 역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부풀어져 풍성한 치마는 여인의 허리를 더욱 잘록하게 보여주어 에로티시즘을 극대화하는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후상박(下厚上薄)이라는 과장된 관능의 패션으로.

 

이렇듯 의상은 유혹, 즉 자기 욕망의 투사라 할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다름과 닮음의 양가적 욕망의 끊임없는 충돌이 있으며, 그것은 곧 차별화, 구별짓기를 통한 과시이고, 타인의 시선에의 풀려나지 못하는 정신적 불구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의복의 형태는 당대 인간들의 욕망의 처소이고, 시대상을 표현하는 가장 전형적인 고고학적 재료라 할 것이다. 속곳, 니의(裏衣), 봉지, 단니, 단속곳이라 불리던 여성의 속옷들은 감춤의 미학이고, 유혹의 또다른 발현일 것이다. 겉치마 속에 여섯 벌이나 되는 속곳을 입어 꼭꼭 숨겨 둔 것의 내밀함, 그리고 부풀려진 하의는 엉덩이로 시선을 모으는데도 일조하였으니 단순하게만 보였던 치마저고리와 하의치마의 혁신적 변화에 담긴 의미는 의상패션의 본성을 거듭 확인케 한다. 이 작은 유혹적인 책자와 함께하는 짧은 시간은 무관심했던 우리 복식의 숨겨진 의미의 해독과 함께 예사로이 보았던 조선조 미인도나 풍속화 속 여인들의 복색으로 절로 눈이 가는 즐거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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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거울 속에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헬렌 맥클로이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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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해독하지 못한다고 모든 것이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해독 불가능한 영역이 인간에게 불안함과 두려움을 던지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70여 년 전에 쓰인 신비와 초자연적 현상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한 인간 이성의 치열한 독해인 이 소설은 바로 경계에 놓인 인간들의 심리적 탐색을 시도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어린 공포의 실체를 과학적 이성만으로 과연 규명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이 해독의 책임자가 정신과 의사인 것은 어쩌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한창 위력을 떨칠 때이니, 작가적 상상력을 그리 탁월한 선상에 놓는 것을 주저하게 하지만, 다양한 소재들을 뒤섞어 발산시키는 이야기의 마력은 가히 이것의 보상을 훌쩍 넘어버린다.

 

배경 또한 한창 감수성 높은 여학교와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중세의 고딕식 음침함이 자리한다. 그리곤 아무런 설명도 없는 일방적 해고를 요구받는 미술 여교사 ‘포스티나’의 당황한 모습이 보이고, 이 의문은 유약한 여성의 심리적 묘사와 그녀에 대해 주위에서 점차 강화되던 경계와 외면의 시선이 더해지면서 불온한 분위기가 지면을 장악한다. 해고 제안에 왠지 항거 하지 못했지만 그 부당성에 좌절하던 여자는 그녀에게서 유일하게 호의를 거두지 않은 동료 여교사인‘기젤라’에게 사연을 하소연 하고, 석연찮은 기운을 감지한 기젤라는 그녀의 연인인 정신과 의사인 ‘배질 윌링’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제 희생자로 보이는 여교사에게 행해진 부당성의 실체를 좇는다. 불안과 분열적 징후를 보이는 포스티나의 대리인을 자청한 정신과의사는 그녀의 승낙을 얻어내고, 그녀를 여학교에서 내 보낼 수밖에 없었던 학교장의 설명을 접하게 된다. 동시에 서로 다른 장소에 존재하는 포스티나를 목격했다는 학생들과 교사들, 하녀들의 두려움에 가득한 증언은 그 설명 할 수 없는 공포로 대체되어 학교의 명망 유지를 위한 불가피성이었다는 항변이다. 그러나 이 유령 현상에 대한 믿음, 심령적 두려움의 근원에 부정한 인간의 의지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과학이요, 합리적 이성이 가지는 판단일 것이다.

 

아마 소설이 단지 이 심령현상의 배후, 그 이면에 은둔하고 있을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에만 몰두하였다면 굳이 더 읽어볼 의욕을 상실해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인간의 정신, ‘거울’로 상징되는 자아의 반영물인 거울 속의 존재, 그 낯선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포스티나라는 여성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나’의 다양한 주체들을 발견하는 즐거움, 그리고 분열된 ‘나’의 집합체를 내 몸속이 아닌 외부에서 마주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혼란과 의심의 경합은 소설적 재미의 격을 올려놓는다.

 

그런데 서로 다른 시공(時空)에 동시에 존재하는 ‘나’를 오늘의 이성은 수용할 것을 거부한다. 누군가의 착시이거나 음험한 수작이 담긴 장난 아니고서는 과학적 논리에서 설명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 허무맹랑해 보이는 유령타령이나 도플갱어의 주장은 교활하고 야비한 인간의 폭력성이나 탐욕을 위장하려는 기만적 술책의 다른 언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배질 월링이 포스티나에게 도플갱어의 혐오스런 망령을 덧씌운 몇 가지 합리적인 증거와 용의자를 발견해내고 궁극에 가장(假裝)과 거울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환영이 정말의 실체로 인지되는 명쾌한 정신분석학적 해부에 이르게 하는 것은 미스터리의 해결과 이성과 심령의 대결이라는 이중적 성공으로 이끈다.

 

한편 스토리를 구성하는 소재나 전개에 있어서도 탁월한 역량을 보이는데, 특히 포스티나의 어머니로 묘사되고 있는 1900년대 고급 화류계 여성과 상류 계급 남성들의 생활양식, 혹은 여학교를 무대로 펼쳐지는 교사들과 학부형들을 통한 여성들의 패션이나 이성관, 문화의식, 그리고 애증과 약자에 대한 혐오가 발산하는 폭력성, 도덕적 문란, 시대를 휩쓴 매춘부와 명문가들의 얽히고설킨 출생 비밀 등 다채로운 일화와 사건들은 소설의 풍미를 한껏 높여준다. 또한 인물, 사건, 심령적 소재의 완벽한 조화와 소설 전체를 감싸고도는 무의식의 어두운 심연같은 음울한 분위기는 알 수 없는 내면의 무엇을 자극하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빠져들게 하고, 사건의 완전한 진상의 수용여부, 즉 과학적 이성과 심령에 대한 믿음의 선택을 독자에게 남겨둔 작가의 중용적 결말도 여타의 미스터리 작품들과 색다른 인상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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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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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성체가 되는 과정에는 탈바꿈이라는 고통의 여정이 있다. 뼈대를 바꾸어 끼고 태를 바꾸어 쓴다는‘탈태(奪胎)’라는 한자어처럼 그야말로 성장이란 잔혹과 공포의 시간이다. 그래서 이성을 가졌다는 인간은 공포와 고통으로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하기위해 무한한 관심과 애정으로 배려한다. 무사히 성장하여 성체의 일원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이들이 마주하게 될 불안과 두려움을 어루만지고 어엿한 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 설 수 있도록.

 

‘수레바퀴’라는 무쇠덩이의 엄청난 무게를 느끼게 하는 이 소설은 바로 이러한 어른들, 사회의 관심 속에 있는 소년, ‘한스 기벤라트’의 삶을 좇는다. 사회에 두각을 나타낸 어떠한 인재도 잉태하지 못한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 탁월한 학습능력을 지닌 소년의 출현은 학교 교장은 물론 마을사람들 전체의 기대를 모은다. 시험과 학교가 요구하는 지식을 위한 그들의 지도와 소년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지역 우등생들의 경쟁에서 당당히 2등으로 상급학교인 신학교에 합격한다. 그러나 소년은 학업에 매몰되어 자유와 기쁨이었던 자연과의 교감, 친구들과의 추억 등과 어느덧 괴리된 현실, 그 상실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든다.

 

탈태의 여정에 있어야 할 두려움과 낯섦에 대한 어루만짐과 관심, 애정의 배려는 자취를 감추고 기성의 권위에 순응하여 규격화된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으로의 변질로 탈바꿈 해버렸다. 인간의 아이라는 자연은 오히려 탈태의 고통이 배가되어 버리는 것이다. 친구는 없고 경쟁자만 있으며, 사유와 지혜는 없고 지식만 넘쳐나고, 삶의 의미는 사라지고 살아가는 기술만이 진실이라고 가르치는 교육으로 대체된 현실은 소년이 겪어내야 할 성장의 두근거림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다. 소년들의 의식을 획일화하고 지배질서에 잘 길들여진 지식기계들의 생산에 열을 올리는 신학교의 생활은 학습에 대한 긴장으로 소년을 만성적 두통에 시달리게 한다.

 

이러한 신학교의 환경으로 인해 점차 고립되고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소년은 동기 집단과 반목하는, 한 자유로운 영혼에 호감을 갖게 된다. 무리와는 떨어져 시를 읊조리고, 신성한 교과서는 그림낙서로 채워져 있으며, 그리스어와 호머와 같은 정규교육에 냉소를 보내는‘하일너’라는 친구를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좇았던 학교지식 밖 세상의 새로운 틈새, 그 자연스러움의 본성을 엿보게 된다.

그러나 학교가 이러한 영혼들에 반감을 갖고 적대시하는 것은 오늘의 우리네 학교현실과 다르지 않다. 기성 권위가 만들어놓은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인간은 바로 그네들의 경계 밖으로 내쳐진다. 이로 인해 한스의 유일한 친구인 하일너는 학교를 떠나고, 두려움과 혼란의 탈태 시간은 소년 홀로 감당해야 할 여정이 된다.

 

신경쇠약 진단이 내려지고, 급기야는 신학교에 다시는 돌아 갈 수 없을 요양휴가로 귀가하는 한스는 고향 집에서 실망하고 있을 아버지의 분노를 예상하며 고통으로 신음하지만, 아이의 좌절보다는 자신의 분노에 타협한 아버지는 신분 상승의 미련을 놓지 못하고 시간의 회복을 기대한다. 소년에서 남성의 문턱에 선 한스는 어린 시절의 충만한 상상력과 즐거움이 사라진 채 불안한 미래, 조급한 시선에서 해방될 수 없는 현실에서 고뇌하던 중 한 처녀의 짓궂은 애정 공세에 마음이 사로잡힌다. 그러나 한낱 성적 대용물이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청년 한스에게 이것은 또 다른 공포와 좌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또 다시 가해지는 삶의 진부함, 아버지의 권유에 의한 기계 견습공으로서의 사회 첫걸음은 결코 도전도, 희망도, 삶의 새로운 의미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선배 기계공들과의 어느 주말의 나들이는 술집과 여자와의 희롱, 수공업자들의 하잘것없는 무용담, 그리고 사라진 꿈에 머물러 있음을 목격하는, 즉 자살이라는 자기 미래에 대한 결심, 삶의 미련이 지워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기성의 권위와 질서의 무게, 사랑이란 감정의 무게, 자기 정체성의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한 미성숙한 삶의 자세가 아니냐고. 그러나 나는 한 아이가 자라고 성년의 인간이 되는 과정을 오직 지식 생산의 터널로 만들어 놓곤 어떠한 삶의 지혜도 가르치지 않는 기성의 무책임함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싶어진다. “저기 걸어가는 신사양반들 ~ 中略 ~ 저 사람들도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이지요”라는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의 발설을 되새겨 보아야 하는 것처럼. 수레바퀴 위에 꿈과 사랑을 싣지 못하고 아이들이 그 무거운 무게 아래에서 신음케 하는 현실의 우리세계를 돌아 볼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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