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무릇 성체가 되는 과정에는 탈바꿈이라는 고통의 여정이 있다. 뼈대를 바꾸어 끼고 태를 바꾸어 쓴다는‘탈태(奪胎)’라는 한자어처럼 그야말로 성장이란 잔혹과 공포의 시간이다. 그래서 이성을 가졌다는 인간은 공포와 고통으로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하기위해 무한한 관심과 애정으로 배려한다. 무사히 성장하여 성체의 일원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이들이 마주하게 될 불안과 두려움을 어루만지고 어엿한 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 설 수 있도록.

 

‘수레바퀴’라는 무쇠덩이의 엄청난 무게를 느끼게 하는 이 소설은 바로 이러한 어른들, 사회의 관심 속에 있는 소년, ‘한스 기벤라트’의 삶을 좇는다. 사회에 두각을 나타낸 어떠한 인재도 잉태하지 못한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 탁월한 학습능력을 지닌 소년의 출현은 학교 교장은 물론 마을사람들 전체의 기대를 모은다. 시험과 학교가 요구하는 지식을 위한 그들의 지도와 소년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지역 우등생들의 경쟁에서 당당히 2등으로 상급학교인 신학교에 합격한다. 그러나 소년은 학업에 매몰되어 자유와 기쁨이었던 자연과의 교감, 친구들과의 추억 등과 어느덧 괴리된 현실, 그 상실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든다.

 

탈태의 여정에 있어야 할 두려움과 낯섦에 대한 어루만짐과 관심, 애정의 배려는 자취를 감추고 기성의 권위에 순응하여 규격화된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으로의 변질로 탈바꿈 해버렸다. 인간의 아이라는 자연은 오히려 탈태의 고통이 배가되어 버리는 것이다. 친구는 없고 경쟁자만 있으며, 사유와 지혜는 없고 지식만 넘쳐나고, 삶의 의미는 사라지고 살아가는 기술만이 진실이라고 가르치는 교육으로 대체된 현실은 소년이 겪어내야 할 성장의 두근거림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다. 소년들의 의식을 획일화하고 지배질서에 잘 길들여진 지식기계들의 생산에 열을 올리는 신학교의 생활은 학습에 대한 긴장으로 소년을 만성적 두통에 시달리게 한다.

 

이러한 신학교의 환경으로 인해 점차 고립되고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소년은 동기 집단과 반목하는, 한 자유로운 영혼에 호감을 갖게 된다. 무리와는 떨어져 시를 읊조리고, 신성한 교과서는 그림낙서로 채워져 있으며, 그리스어와 호머와 같은 정규교육에 냉소를 보내는‘하일너’라는 친구를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좇았던 학교지식 밖 세상의 새로운 틈새, 그 자연스러움의 본성을 엿보게 된다.

그러나 학교가 이러한 영혼들에 반감을 갖고 적대시하는 것은 오늘의 우리네 학교현실과 다르지 않다. 기성 권위가 만들어놓은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인간은 바로 그네들의 경계 밖으로 내쳐진다. 이로 인해 한스의 유일한 친구인 하일너는 학교를 떠나고, 두려움과 혼란의 탈태 시간은 소년 홀로 감당해야 할 여정이 된다.

 

신경쇠약 진단이 내려지고, 급기야는 신학교에 다시는 돌아 갈 수 없을 요양휴가로 귀가하는 한스는 고향 집에서 실망하고 있을 아버지의 분노를 예상하며 고통으로 신음하지만, 아이의 좌절보다는 자신의 분노에 타협한 아버지는 신분 상승의 미련을 놓지 못하고 시간의 회복을 기대한다. 소년에서 남성의 문턱에 선 한스는 어린 시절의 충만한 상상력과 즐거움이 사라진 채 불안한 미래, 조급한 시선에서 해방될 수 없는 현실에서 고뇌하던 중 한 처녀의 짓궂은 애정 공세에 마음이 사로잡힌다. 그러나 한낱 성적 대용물이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청년 한스에게 이것은 또 다른 공포와 좌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또 다시 가해지는 삶의 진부함, 아버지의 권유에 의한 기계 견습공으로서의 사회 첫걸음은 결코 도전도, 희망도, 삶의 새로운 의미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선배 기계공들과의 어느 주말의 나들이는 술집과 여자와의 희롱, 수공업자들의 하잘것없는 무용담, 그리고 사라진 꿈에 머물러 있음을 목격하는, 즉 자살이라는 자기 미래에 대한 결심, 삶의 미련이 지워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기성의 권위와 질서의 무게, 사랑이란 감정의 무게, 자기 정체성의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한 미성숙한 삶의 자세가 아니냐고. 그러나 나는 한 아이가 자라고 성년의 인간이 되는 과정을 오직 지식 생산의 터널로 만들어 놓곤 어떠한 삶의 지혜도 가르치지 않는 기성의 무책임함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싶어진다. “저기 걸어가는 신사양반들 ~ 中略 ~ 저 사람들도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이지요”라는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의 발설을 되새겨 보아야 하는 것처럼. 수레바퀴 위에 꿈과 사랑을 싣지 못하고 아이들이 그 무거운 무게 아래에서 신음케 하는 현실의 우리세계를 돌아 볼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