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림책 b판고전 7
야콥 폰 윅스퀼 지음, 정지은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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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은, 어떤 낯선 사유를 접하게 될 때면, 그 사유의 기원이나 연관을 상상해보고, 찾아보는 여정에 나서게 된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쓴 천개의 고원은 자연 전체의 정동(affect,情動)을 포괄하는 내재성의 평면을 그리고자 시도하는, ‘존재의 일의성을 말하는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렇게 간략하게 압축된 문장으로 한 권의 책을 정의한다는 것이 말도 되지 않을뿐더러, 존재, 일의성, 내재성, 정동과 같은 개념어들은 철학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난관일 것이다. 천개의 고원은 동물행동학에 사유의 기원을 둔 새로운 윤리학이기도 하다.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라는 책의 감상이 아닌 들뢰즈의 책을 앞서 말하는 것은 이 책으로 이끈 계기가 곧 이 책에 대한 감응, 또는 정동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각 개체는 자신의 고유한 환경 세계 속에서 형성되는 정동(情動)의 목록을 소유한다또는 각 개체는 그 목록 자체이다.” - 들뢰즈, 과타리, 천개의 고원에서

 

윅스퀼(Jakob von Uexküll, 1864~1944)은 생태학적 생물학자로서 현대 생태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독일의 생태철학자라 하여도 될 인물이다. 들뢰즈는 윅스퀼을 가리켜 동물행동학의 대가로 평하며, 윅스퀼의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말하는 환경 세계모든 개체의 신체는 개체의 고유한 환경세계 속 대상들의 의미의 담지자로서 관계 맺는정동과 같은 강렬한 영향에 토대를 둔 것임을 천개의 고원그 자체로 드러냈다. 사실 정동이라는 좀처럼 압축된 의미로 정리되지 않는 이 개념어도 윅스퀼의 이 저작을 읽으며, 각 개체가 의미의 담지자로서 수용하는 감관적 지각의 특징을 자신의 철학적 음색으로 변용한 말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윅스퀼의 이 책을 읽으면 들뢰즈 철학을 이루는 상당부분 낯선 개념들의 입구를 여는 엄청난 단서와 암시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 감상글을 이어가기에 앞서 여기에서는 정동(情動)의 의미를 정동은 생성이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에 근거하여, 어떤 개체의 실재적인 변화, 생성을 일으키는 에너지 또는 생성 그 자체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기로 한다. 순서가 밀렸지만 이 책은 1934년과 1940년에 각각 발표된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그리고 의미의 이론으로 구성된 현대 생태학의 문을 연 걸출한 두 논문의 합본이다. 전자(前者)는 모든 동물 개체 각각은 그가 지각하는 모든 것이 그의 지각 세계가 되고, 행하는 모든 것은 그의 행동세계가 되기에 행동의 세계와 지각의 세계는 함께 닫힌 총체성을, 즉 고유의 체험된 개체만의 환경세계를 형성함을 구체적 실험과 관찰의 사례들을 통해 인간이 고집하는 하나로 수렴되는 세계가 아닌 다양한 환경세계가 있음을 열어 보여준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의 이론적 접근으로서 생명활동의 기계론적 설명의 비판, 객관적으로 결정된 환경으로서의 숲은 존재하지 않는다.” 는 말처럼 인간중심의 목적론적 세계이해의 비판, 그리고 개체의 지각적 반응을 의미()’라는 급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생태학적 접근의 논문이다. 들뢰즈가 윅스퀼의 개체와 세계 이해에 경탄했기 때문이 아니라, 책을 열면 마주하게 괴는 진드기 삶의 묘사부터 앎의 전복성이 일어남으로써 그 신선한 사유의 시선에 매료된다. 전환적 시선을 요구함에도 거북하지 않은 친근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내 신체 고유의 리듬이, 묘사되는 모든 개체들의 정동과 다르지 않기 때문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서 인용한 천개의 고원을 대표하는 문장의 기원을 이 책에서 속속들이 발견하게 되고, 그 발견은 너무도 친숙한 어휘로 설명되고 있어, 마치 들뢰즈 사유의 구체적 증거들의 풀이를 접하고 있다고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만큼 이 책이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 전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 복잡하고 다층적 의미를 지닌 정동의 개념은 지렁이, 나방, 성게, 진드기, 갈가마귀 등등의 지각과 행동의 기능적 원환(圓環,고리)을 보면서 절로 체득되고, ‘존재의 일의성과 같은 추상적 어구의 의미가 무수히 다양한 신체가 단일한 구성임을 발견케 하는, 즉 각 개체의 환경세계들이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장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에 휘감김으로써 구체화된 이미지로 체화된다. 특히 들뢰즈가 사용하는 환경세계는 윅스퀼의 어휘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음으로써 그 의미 전반이 책의 기조인 만큼 쉽사리 이해 가능한 언어로 와 닿는다. 나는 이 책을 들뢰즈 사유의 일정부분을 이해하는 원천적 사유로 읽었다.

 

이를테면 들뢰즈가 말하는 신체의 상형문자-되기’, 주체의 이집트학자-되기와 같은 ‘~되기의 생성 개념은 이 책의 두 번째 논문 의미의 이론, 특히 의미의 담지자들이라는 개체가 자신들 고유의 환경 세계 속에서 관계의 정동을 통해 제법 명쾌하게 수용되기도 한다. 들뢰즈의 이해라는 측면에서만 이 책이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편협성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목적론적, 기계론적 이해에 기초한 인간중심 관점의 대변환을 느낄 수 있다.

 

진드기가 체험하는 일생의 시공간과 환경세계가 인간과 얼마나 다른 것임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들 인식속의 세계는 무한히 포용적인 세계로 확장되고, ‘라고 여기는 오만한 주체는 사라지게 된다. 윅스퀼이 서문에서 비판적으로 외치듯 이 책은 미지의 세계들로의 산책에 대한 묘사이고, 인간의 에고를 주장하는 주류 생리학에 대한 감력한 거부로서, 그네들이 부인하는 세계 존재에 관한 새로운 과학을 위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진드기는 포유동물인 인간과 함께 산다. 그렇다고 진드기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와 같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모든 동물들은 각자 자신의 공간의 한계를 표시하는 원형집으로 둘러싸여 있다.

(...) 주체와 무관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48

 

진드기는 단 세 가지의 지각신호를 받고 기능적 원환운동을 하는 개체다. 이 개체는 오직 포유동물의 피부에서 발하는 낙산에 대한 후각 지각에 의해 그 지각을 발산케 한 것으로 떨어진다. 그리곤 충돌과 함께 촉 지각이 따뜻한 피부로 이동케 하고, 열의 지각으로 침을 찔러 넣어 액()을 빨아먹고 산란한다. 진드기는 이 세 지각적 특징에 의해 아주 분명하고 강력하게 규정되어 행동한다. 그에게는 하늘도 대지도 물도 빛도 어둠도 없다. 또한 낙산이 그의 후각을 자극하는 시간이 18년이 결려도 견딜 수 있도록 형성되어 있다. 결국 진드기에겐 낙산신호가 새로운 활동을 불러일으킬 때 실질적 시간이 된다. 인간의 시간은 순간들의 연속으로 매우 짧은 시간 간격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 인간에게 18년이라는 오로지 견뎌야하는 멈춘 시간이란 참을 수 없는 것일 게다. 진드기의 환경세계(Umwelt)란 이처럼 빈약하지만 이 빈약한 환경 세계가 그의 행동의 확실성의 조건이 된다. 환경의 풍부함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에게 확실성은 풍부함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드기의 세 가지 지각활동이 행동 활동으로 이어지는 기능적 원환관계를 알게 되고, 세 가지 지각특징을 촉발하는 의미의 담지자로 구성되는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8년 동안이나 변하지 않는 환경세계를 견딜 수 있는 진드기의 능력이 가능성의 영역 너머에 있음을 발견하게도 한다. 그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며, 세계 공간의 영역도 다르다. 이제 이것으로부터 동물들 모두에게 타당한 환경세계들의 구조의 근본적 특징들을 우리는 그려볼 수 있게 된다.

 

지각적 시간을 생각해보자. 독일의 발생학자 카를 에른스트 폰 베어(Karl Ernst von Baer,1792~1876)시간은 주체의 생산물이다.” 라고 말했다. 인간에게 순간의 지속은 1/18초다. 따라서 18번의 진동은 그것들 개별로 식별되지 않지만 하나의 음처럼 지각된다. 초당 18번의 피부의 타격도 하나의 균등한 압력으로 지각한다. 그런데 물고기는 초당 18회만으로는 이미지를 인지하지 못한다. 초당 30회 이상이 되어야만 인지한다. 인간의 리듬으로 지나치게 빠른 곤충이나 새의 날개짓을 우리는 구분하지 못한다. 슬로우비디오로 긴 시간 간격으로 전개시켜야만 식별할 수 있다. 달팽이의 환경에서 초당 4회로 막대기로 두들기면 그는 막대기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지각한다. 결국 우리의 환경세계에서보다 달팽이의 환경세계 속에서 시간은 더 빠르게 흘러가고, 물고기의 세계 속에서는 더 느리게 흘러간다. 모든 개체들 각각의 세계는 이처럼 시간도, 공간도, 의미의 담지자로서 맺는 관계 대상의 양도 다르다. 그렇게 다른 개체들만의 세계를 환경세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목적성에 기반한 모든 잘못된 생각들로부터

환경세계들에 대한 검토를 구제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69

 

우리는 성게가 움직일 때 성게라는 동물개체가 움직인다고 말하는 데 익숙하다. 개가 달릴 때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개라는 동물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성게의 다리들은 각각의 기관인 다리가 오직 각각의 다리 자신을 위한 개별반사를 소유한다. 따라서 성게는 개가 걷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 ‘성게의 다리들 각자가 걷는다.’가 진실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개별 반사라는 완전한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마치 시민적 평화가 지배하는 공화국적 반사 행동을 할까. 성게에게는 인간처럼 상위의 중추기관이란 것이 없어 그 어떤 지휘도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떻게 조화로운 일체된 행동이 발현되는 것일까? 인간적 관점이란 이렇게 자신의 이해에서 풀려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의외의 단순성에 있다. 어둠에 반응하는 표피의 광감각적 지각의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더 자세한 상술은 피하겠다. 인간적 실존의 일상적 염려들을 자연의 개체들에게 투자하는 이런 오류의 예는 차고 넘친다. 우리는 진드기가 먹잇감을 노린다.’고 표현한다. 다분히 목적성을 기반으로 한 말이다. 그러나 모든 동물들의 행동들은 목적론적이지 않다. 진드기 단지 낙산에 반응한 것이고, 그것은 그의 정동의 발현이다. 낙산 반응이라는 후각적 지각의 특징은 포유동물의 피부에 떨어짐으로써 촉지각적 지각으로 바뀌고 후각지각은 사라진다. 진드기의 행동은 낙산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일련의 지각적 기능 원환의 전개는 다음 단계의 행동을 사전에 계획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능적 원환운동은 어떤 지각적 특징에 의해 활성화될 뿐인 것이다.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관(부분신체)’의 단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 인간은 어떤 목표에서 다른 목표로 삶을 힘겹게 끌고 가는데 익숙하다. 때문에 동물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 외의 자연에 대한 근본적 오류다. 하나의 예만 소개한다면 어미 닭의 행동에 관한 관찰이다. 줄에 묶여 병아리가 삐약 대면 어미 닭은 달려와 가상의 적을 향해 부리를 쪼아댄다. 그런데 유리컵 속 다리 묶인 병아리를 어미 닭이 보았을 때, 어미닭은 아무런 동요도 행동도 하지 않는다. 어미 닭에게는 삐약 소리라는 지각적 특징이 부리로 쪼아대기라는 작동적 특징을 발현할 뿐이다. 병아리가 아무리 발버둥 처도 삐약 소리가 나지 않으면 어미닭에게는 아무런 작동적 행동이 발현되지 않는 것이다. 즉 기능적 원환운동을 촉발하는 지각적 특징이 없다면 아무런 행동도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미 닭에게는 목적론적 지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의미의 이야기로 옮겨가보자. 다시 진드기를 떠올려보면 그에게는 세 가지 자극물에 따른 작동적 행동인 떨어지다’, ‘탐사하다’, ‘찌르다라는 각 지각에 대응하는 활동이 있으며, 그것을 우리들은 활동의 내포적 의미라고 지칭할 수 있다. 나뭇가지를 향해 날아가는 잠자리는 그의 환경세계 속에 나뭇가지는 앉다라는 내포적 의미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지각적 특성이 일으킨 작동적 행동일 것이다. 바로 이 내포적 의미가 나뭇가지를 구별짓고 다른 모든 것들 가운데 그것을 선택하게 만든다.

 

인간의 환경세계 속에서 대상들의 활동적 내포 의미는 의자는 앉기, 탁자는 식사하기, 잔과 접시들은 마시기와 먹기, 마루판은 걷기, 책장은 독서와 같이 열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동일 대상에 대해 개의 환경세계 속에서는 앉기, 식사하기, 걷기에 한정된다. 따라서 탁자, 책장 등은 그에게 장애물의 내포적 의미에 불과할 것이다. 파리의 환경세계 속에서는 자극물이 되는 열기 말고는 모든 대상물이 그저 도정(道程)의 내포적 의미만을 소유한다. 환경세계는 외부 자극물이 촉발한 지각신호들의 산물이다. 모든 개체들은 그들만의 자극이 다르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저마다의 강력한 효력이 드러나는 환경세계, 개체 자신만이 유일하게 지각할 수 있는 환경세계들을 우리는 관찰하고 통찰 할 수 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일 주체는 그 자신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여러 다양한 환경세계들 속에서, 대상으로서의 자신을 어떻게 현시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가질 때, 우리들은 전체의 시각에 이를 수 있음을 알게 된다고 말이다. 떡갈나무는 노력한 벌목꾼에게는 일정량의 목재로서 나무둥치들의 크기로 선별되는 것일 게다. 여우에게는 나무와 뿌리사이에 자신의 소굴을 만들어 가족을 보호하는 거주지로, 다람쥐에겐 기어오르다 라는 내포적 의미일 것이고, 어린 아이에게는 나무껍질의 주름이 만들어내는 마녀의 얼굴이 주는 공포심이 내포적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떡갈나무의 세계에 있는 거주자들의 지각 이미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구조화되고 그들 활동의 다양한 내포적 의미들과 일치할 것이다. 중립적 대상으로서의 떡갈나무는 주체와 관계하자마자 의미의 담지자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대상이 주체에 의해 부여된 담지자로 변하는 것은 오로기 관계를 통과하면서 발생하는 사건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동일한 꽃의 줄기도 환경세계에 따라 장식적 역할(인간), 도로의 역할(개미), 펌프의 역할(매미 애벌레), 영양물의 역할(암소)을 한다. 꽃의 줄기가 이처럼 의미의 담지자 역할을 수행하는 순간 주체의 신체 안에서도 의미의 이용자와 관련한 무엇인가와 연결된다. 개체의 각 행동은 그 지각적 구성성분과 작동적 구성성분을 가지고 대상에 대해 의미를 각인하고, 각각의 환경세계에서 그 대상을 주체와 밀착된 의미의 담지자로 만든다. 각각의 의미담지자는 자신의 기능적 원환에 자리 잡으면서 다른 개체의 보체(補體, complement)가 된다.

 

모든 개체의 기관들은 모두 외부에서 오는 의미의 요소들의 이용자들인 한에서 어떤 권위를 입게 되고, 이 권위에 따라 기관들의 형태나 물질의 분배가 일어난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에게서 의미에 관한 물음은 최초의 중요성을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개별 세포들의 운명은 오로지 그 세포들이 구성하는 중인 형태 안에서

각 세포가 차지하는 자리에 달려있다.” -160

 

동식물의 생식세포는 산딸기 형태에서 극점이 오목하게 함입된 구체로 변화하고, 이 구체는 단번에 세 개의 배엽으로 나누어진다. 이렇게 낭배(囊胚,gastrula)를 형성하며, 이것은 대부분의 동물들의 시원적 형태, 즉 모든 고동동물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개시하는 것은 이러한 단선적 멜로디다. 인간이라고 뭐 그렇게 대단하거나 다른 발생학적 기원을 갖는 위계질서의 상위를 차지할 그 무엇도 아니다. 이렇게 낭배, 낭포라는 기본적 초기 형태로 완성된 생애를 가지는 동물들도 아주 많다. 해파리, 말미잘, 변형균류 등등은 그것들 나름의 의미관계를 구성하기 위한 형태잡기로 충분하다는 인상을 준다. 독일의 배아생물학자 스페만(hans Spemann, 1894~1941)의 배아조직 이식의 사례를 거론할 것도 없이 이식 세포가 다른 의미의 질서를 수용하게 될 장소에 놓이게 될 때, 숙주의 의미의 질서에 따른다. 그런 다음 이식된 세포는 자신의 고유한 형태화의 멜로디에 복종한다. 이 실험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질서는 언제나 동일하다. 그러나 형태를 획득하는 질서는 전적으로 다양하다.”는 사실만을 확인하도록 하자.

 

스페만의 실험은 생명체의 기관들이 기계의 부분들과는 정반대로 본래적인 의미의 음색을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원심적 방식이 아닌 다른 식으로는 그 형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의 개념에 입각해서 세워진 자연에 대한 포괄적 개념화를 이룬 놀라운 업적임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 될 것이다. 거미는 실제의 파리를 만나기도 전에 거미줄을 짠다, 그 결과 거미줄이 물리적인 파리의 복제물일 수는 없지만 물리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파리의 원형을 재현한다. 생물학적 통찰이 갑자기 형이상학으로 이전된 된 듯한 곤혹감이 들기도 하지만, 모든 동물 개체에서 지각적 특징으로 이루어진 환경세계를 인식한 사람에겐 오로지 대상들의 상호관계, 즉 자연의 사건에 대한 주체의 영향력을 알지 못하는 기계론적 유물론자들의 물질적 실체에 대한 다분히 상상적인 형이상학에 비하면 윅스퀼의 주장은 오히려 더욱 과학적이다. 책의 설명으로 흘러가다보니 너무도 장황한 글이 되어버렸다.

 

아마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 주장으로 읽혔을 법한데, ‘발달과 형태발생의 모티프에 이르면 의미의 담지자와 대위점이라는 두 개념에 의해 대위법의 점은 언제나 대상의 실존을 결정하는 모티프라고 주장하는 데서 정점에 이른다. 그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꽃이 꿀벌에 대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꿀벌이 꽃에 대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결코 저들은 화합하지 못할 것이다.“ -219

 

이를 다른 말로 해석하면 이렇게 옮길 수 있겠다. 손잡이가 달린 거피잔은 인간의 손과 갖는 대위법적 관계다. 커피잔을 제작할 때 작용하는 모티프들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결국 이 말은 일상적 대상의 의미는 그 대상이 완수하는 기능에 놓여있으며 그러한 기능은 언제나 대상과 환경세계 사이에 놓인 어떤 대위법의 점으로 보내져 실존을 결정하는 모티프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윅스퀼은 결론에 이르러 각 개체의 신체는 의미의 담지자의 발달 멜로디를 자신의 고유한 구조 속의 모티프처럼 사용한다는 주장에 이르고, 위대한 문장을 남긴다.

 

나는 자연 전체가 나의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인격 형성에 모티프로서

참여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자연을 인식하기 위한

기관들을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233

 

결국 모든 개체가 지니는 지각적 특징, 들뢰즈의 용어로 정동은 존재 개체를 형성하며 존재는 정동 그 자체다. 라는 말로 이해해도 될 듯하다. 우리들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개체들은 자연이 자신의 구성들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를 들어오게 했던 한에서만 우리들은 자연에 참여한다고 말 할 수 있게 된다. 모든 환경세계가 오로지 이러한 의미의 상징들만을 포함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의미의 상징이 개체의 형태 발생과 발달에서의 의미의 모티프임을 직시하게 되면, 이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장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다. 구성의 단일성을 주창하는 이 외침은 들뢰즈의 존재의 일의성이 되어, “정동은 생성이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놀라운 테제가 의미하는 것, 다시 말해 개체 각자에 주어지는 미지의 자연에 대한 믿을 수 없는 느낌, 정동으로서 고무되고 동요되어 개체의 역량이 실현되는 환경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출 수 있게 된다. 생성은 결코 단독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언제나 환경세계 속에서, 사이에서 일어난다.

 

생성(~되기)은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새로운 정동을 획득하는 것이다. 자연이 정동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개체들이 생성과 의미의 존재임을 깨우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유의 전환을 설득해낸다. ~되기란 정말 힘겨운 일이다. 말이 쉽지 자기 고유의 지각적 특징을 변환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인식에 마음을 열고 감응을 위한 노력을 한다면 어쩌면 우리의 신체에 새로운 정동이 내려앉아 어떤 창발적 행동을 낳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이 반()목론적, ()유물론적 생물학 저작은 아마도 다채로운 영감을 독자들에게 선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더구나 들뢰즈에 호감과 그 지향하는 사유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는 원천적 지식의 선물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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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타데우시
아담 미츠키에비츠 지음, 정병권 외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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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폴란드 문학이란 인식조차 지니지 않고 읽었던 비톨드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 (Ferdydurke), 스타니스와프 렘, 쉼보르스카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먼 이방의 문학토양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것인데, 그것은 올가 토카르추크가 보여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다. 그녀가 말하는 다정한 서술자’, 우주 만물 궁극의 근원인 태초, 그 일원성(一元性)의 파편들인 우리들 개개 존재의 공통 감각에 대한 날카로운 각성 같은 것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로부터 시작된 폴란드 문학에 대한 거슬러 읽기를 시작하게 된 것인데, 그 첫 번째 작품은 폴란드 국민이 가장 사랑한다는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소설 인형이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소설을 인과관계 없는 조각조각들, 개별 관점의 이야기들이 모여 독자에게 하나의 전체적 조망으로서 관점을 갖게 하는 폴란드의 문학적 전통 예로써 소개했다.

 

그런데 어디 문학 작품을 읽는 이의 인식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서의 형식에만 머물겠는가. 소설 인형의 시대배경은 19세기 폴란드라는 유럽 강국들의 야심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탐욕의 희생 영역이었다. 타민족들의 이익에 따라 분할 지배되던 폴란드인들의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어쩌면 20세기 초 한반도의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막연하게 닿아있는 이러한 시원적 정조(情調)가 나를 이끈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그네들 문학적 전통의 면면한 흐름의 발견이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인형의 주인공은 시련을 딛고 상인으로 성공한 보쿨스키라는 인물의 비극적 사랑의 서사를 배경으로 당대 몰락하는 폴란드 귀족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아낸 작품이다. 보쿨스키는 내면의 갈등이 솟구칠 때면 미츠키에비츠의 시집을 읽는다. 그가 읽는 시집이 아마 바로 이 책 판 타데우시였을 것으로 나는 짐작한다. 조국에 대한 향수, 자신들의 나라를 복원하려는 실천적 수행과 여인에 대한 사랑을 모두 성취하는 인물을 시적 운율로 그려낸 일종의 극시(劇詩)이다.

 

판 타데우시(Pan Tadeusz)의 판(Pan)은 폴란드 귀족 앞에 붙이는, 영국식으로 표현하자면 Sir()와 같은 의미이며, 타데우시는 이름이다. 작품 판 타데우시1810년대 리투아니아 지방의 소()귀족 소플리차 가문과 대()귀족 호레스코 가문의 해결되지 못한 원한으로 벌어지는 귀족간의 묶은 감정의 대립을 중심 서사로 하여 당대 시골 귀족들의 의식, 사냥, 사교, 식사, 복식 등 일상사와 농촌의 풍경, 조국을 잃은 사람들의 시대 인식이 어우러져 폴란드인들의 애국적 정취를 자극하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이 작품이 시적 음률과 시어로 써진 까닭은 폴란드인 고유의 정서를 보다 낭만적으로 그려내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번역된 언어로 그 정조에 감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따라서 운율법칙과 시어가 지녔을 문장의 고유한 맛을 기대 할 수 없다는 것은 항상 겪는 아쉬움이다. 결국 시를 산문으로 읽게 되었다는 것이니, 다만 문장이 품고 있는 시적 은유를 상상하는 기쁨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아담 미츠키에비츠는 오늘날 폴란드 민족시인으로 그들의 정신에 깊게 뿌리내린 하나의 정신이니, 폴란드 문학들의 저변에 흐르는 정조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임은 분명하다.

 

작품은 총 12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책에는 별도의 제목이 붙어있다. 1농장이란 제목 아래 도시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인 리투아니아 지방 소플리차 가문의 저택으로 막 귀환한 타데우시가 잃어버린 조국의 자유를 슬퍼하며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분할 지배되고 있는 현실의 극복에 대한 염원이 조상들의 얼과 현실의 목가적 정취와 함께 민족적 정서의 고취를 넌지시 자극하며 작품을 열도록 한다. 각 책의 제목들, ()이나, 구애, 정치적 선동과 사냥, 자야즈드, 1812처럼 서사적 줄거리를 상징적으로 암시하여, 이 작품이 종국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전개되고 있다.

 

1 농장의 한 문장을 좀 장황하게 인용해보면,

그 귀족은 예고하기까지 했답니다. 우리사회가 개혁되고 새로운 문명과 제도가 도입될 것이라고, (...)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는군. (...) 그 귀족은 평등을 말하면서도 마르퀴즈 귀족 칭호를 택했답니다. (...) 세월 따라 유행이 변하자, 그 마르퀴즈 귀족은 민주주의자 칭호를 가졌지요. (...) 파리에서 온 그 민주주의자는 남작이 되었더군요.” - 20, 1농장에서

 

귀족들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오고가는 대화 속의 한 구절인데, 당대 귀족들의 사회개혁으로서의 인간평등, 귀족이라는 계급의 의미변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등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함축되어 있다. 즉 시대 변화에 대한 인식의 대중적 이해였을 것이다. 이 작품이 의지하는 것을 이렇게 책 1에 묘사함으로써 이어지는 장면들인 사랑과 원한, 사냥꾼들의 대립, 귀족간의 즈야즈드와 전쟁을 하나의 거대한 은유로 읽게 된다. 사건의 촉발은 수십 년 전의 한 사건인 호레스코 가문의 성주인 스톨르닉이 소플리차 가문의 야첵에게 살해되고, 이후 러시아의 침공으로 성()의 소유주가 사라지게 됨으로써, 양 가문이 성을 두고 다투는 것이 주된 서사의 제재(題材).

 


볼레스와프 프루스의 인형이 미츠키에비츠의 이 시를 잇는 계보로서의 소설로 이해되는 것은 이 살해사건의 동기에 터 잡은 것일 테다. 야첵 소플리차는 스톨르닉의 절대적 충신이자 부상하는 신흥 귀족을 대표하는 청년으로 스톨르닉의 딸 에바와 사랑하는 연인이다. 그러나 대귀족인 스톨르닉은 신분상 지위가 낮은 야첵이 원하는 자기 딸과의 결합의 기대를 마치 생각조차 못할 일이라는 듯 모르는 척으로 일관함으로써 청년에게 좌절의 분노를 키워내고 만다. 인형의 주인공 보쿨스키가 몰락하는 대귀족의 딸 이자벨라와의 결합의 기대가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은 바로 야첵의 일생을 장악했던 이 기원적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러한 계보 기반을 지니고 있었음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이렇게 맛보게 된다.

 

시의 서사적 줄기는 당대 귀족들 간의 사랑의 감정적 거래의 관계와 두 가문간의 대립하는 적의의 은유로서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사냥의 에피소드. 이렇게 두 축()이다. 사냥이라는 쫓고 쫓기는 싸움의 의식은 사랑을 놓고 벌어지는 시기와 경쟁과 얽히면서 더욱 극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야첵은 스톨르닉을 살해하고는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참회로 이름을 로박(폴란드어 벌레를 뜻함)으로 바꾸고 신부가 되어 조국 독립에 헌신하며 속죄의 삶을 살아간다. 그 사이 에마는 원하지 않는 결혼과 소생으로 조시아라는 딸을 출산하고는 야첵에게 자신의 딸을 거두어 양육해줄 것을 부탁하고는 운명한다. 조시아는 소플리차 가문의 먼 친척인 귀족여성 텔리메나라는 여인에 맡겨져 양육되고, 신부 로박은 자신의 정체인 야첵을 숨긴 채 가문의 동생인 판사를 재정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수행한다.

 

3 구애에 이르면, 당대 귀족여성들의 결혼관, 즉 혼인의 표면적 거래 관계 아래에 흐르는 정신을 엿보게 되는데, 텔리메나라는 여성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쩌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성을 저울질하는 심리는 오늘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텔리메나는 적막한 저택의 심처에서 사냥을 시작한다.(...)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으나, 머리 속으로는 두 마리의 짐승을 쫓고 있었다. 어떻게 그 둘을 한꺼번에 포위하여 잡을 것인지 궁리하고 있다. 백작과 타데우시를...” -152, 5 분쟁에서

 

이 영리하고 경험 많은 텔리메나라는 여인은 타데우시의 삼촌인 판사의 여동생으로, 즉 타데우시의 고모로서 대우받는 여성임에도 조카벌인 스무 살 남짓인 타데우시와 호레스코 가문의 젊은 백작을 자신의 치마폭에 감쌀 궁리를 하는 장면이다. 이 여인이 두 젊은 남성을 유혹하고, 교태를 부리는 은근한 장면들은 이 작품의 분명한 볼거리다. 자신이 양육하는 대귀족 호레스코가문의 혈통을 가진 조시아와 타데우시의 결혼 성사를 손에 쥔 여인이 자기 욕망의 상대자인 타데우시와의 사이에서 어떻게 그 삶의 여정이 변화하는 가를 쫓는 것도 이 작품의 하나의 읽기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작품의 두 줄기 중 단연 그 비중이 압도적인 사냥 장면은 두 가문의 가솔들이 총 출동하여 사냥감을 놓고 경쟁하는 간접적 격전지다. 토끼를 놓고 사냥하며 두 적대집단으로 나뉘어 다투던 사냥은 원시림 숲속에서 튀어나온 곰의 출몰이라는 다분히 은유적 장면으로 전환되어 갈등의 정점으로 치닫는다.

 

미련한 곰이여! 네가 만약 그 밀실에 앉아 있었다면, 너에 대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을. 그러나 너는 벌통의 향기로운 냄새에 유혹 당했는가, 아니면 무르익은 귀리 이삭을 탐하였느냐. 너는 나무들이 드문 숲의 가장자리로 나왔다. 그러자 곧 산림지기가 그곳에서 너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 134, 4 정치적 선동과 사냥에서

 

양 집단은 곰 사냥에서 상대 가문을 누르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과정에서 곰이 타데우시와 백작, 두 사람의 앞으로 돌진하고 둘은 총을 동시에 쏘지만 빗나간다. 급기야 다가온 곰에 의해 희생될 찰나에 어디선가 나타난 신부 로박의 총격에 의해 곰은 쓰러진다. 곰 사냥 사건의 각 과정의 장면들마다 사냥꾼들, 두 젊은 청년 귀족에게 지니는 의미는 엄청난 파괴적 위력으로 나타난다. 흥미로운 것은 곰 사냥 후 옛 호레스코 가문의 성에서 판사, 즉 소플리차 가문의 중심인물이 만찬을 마련하고 주인으로서 식사를 주관하는 가운데, 여인들과 두 집단의 남성들과의 은밀한 희롱들이 곰사냥 결과의 후과(後果)와 섞여 만들어내는 긴장이 드디어 봉합할 수 없는 양 가문의 극한적 싸움의 기폭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타데우스와 백작, 이 둘의 대립은 민족적 자긍심과 외세, 외부 선진문명의 도입으로 상징되는 대결로서 한 점의 그림을 둔 비평적 논쟁을 통해 암시되기도 한다. 백작이시여, 그림을 사랑하시면서, 왜 당신이 앉아있는 주위에 있는 우리나라 나무들은 그리지 않는가? (...) 기름진 들판에 살면서, 알 수 없는 바위와 황야만 그리고 있다 고 타데우시는 비난한다. 이에 백작은 자연은 형태, 배경, 재료이고, 영혼은 영감입니다. 영감이 상상의 날개를 타고, 예술적 규칙의 바탕 위에서, 안목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오. 자연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열정만으로도 부족하다오. 예술가는 이상의 차원으로 날아 가야한다오!” 이 둘의 조화로운 균형의 필요를 작가는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었을 테다.

 

소플리차 가문이 이끄는 식사자리를 싸움터로 변질시킨 백작은 소플리차 가문 측에 선 심판소장을 향해 성을 두고 벌어지는 소유권 소송의 비난은 물론 그의 권위를 깡그리 무시하는 전례 없는 무례를 행하며,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잃어버린 대귀족의 권위를 되찾을 것을 예고한다. 법 초월적 권위라는 오래 전에 사라진 권력에의 향수, 예술적 이상으로서의 진보적 성향과 모순되는 당대 귀족계급 의식이 혼란 속에 흔들리고 있음의 상징적 장면일 것이다.

 

대귀족, 즉 구()귀족의 상징으로서 호레스코 가문과 소플리차라는 신흥귀족으로 성장하는 소귀족 소플리차에 대한 시기와 질투어린 시선들의 반감으로 뭉친 잔반세력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소플리차 가문을 대표하는 판사의 저택으로 총칼로 무장하여 기습하기에 이르고, 판사 저택의 기물들에서부터 가금류, 농장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한다. 그리고는 소플리차 사람들을 지하 창고에 가두어 놓는다. 아마 이 지역은 러시아군이 관할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러시아군이 들이닥침으로써 소플리차 가문의 사람들은 풀려나고, 백작 등 호레스코 가문을 비롯한 구귀족들은 포박되기에 이른다. 구귀족들의 어리석은 소플리차를 향한 폭력의 행사를 반대했던 일부 귀족들과 신부 로박은 뒤늦게 도착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하지만 러시아군 지휘관과의 갈등이 촉발되고 이윽고 두 귀족세력간의 싸움은 폴란드인과 러시아군의 전투로 변질되기에 이른다. 반목하던 두 세력은 폴란드라는 조국애로 결집하여 러시아군과 싸우게 됨으로써 승리한다.

 

이러한 서사적 결말은 오늘날 문학 작품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개연성이라는 측면에서 미숙함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극시의 결말은 죽음에 임박한 야첵이 자신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속죄와 참회, 그리고 그의 조국 독립을 위한 운동의 명예가 승인됨으로써 양가의 화해와 조국애로의 승화, 자신의 아들 타데우시와 스톨르닉의 외손녀 조시아의 가약으로 사랑의 결합이 완성된다. 인형의 보쿨스키는 이 결말이 보여주는 가능성, 사랑의 쟁취와 조국애의 실천을 자신이 병행 성취할 수 있는 존재되기의 모델로 삼았을 법하다.

 

그러나 이 작품을 모두 읽고 난 후에, 읽은 이의 정서에 남겨진 것은 어쩌면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의 배경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몰려온다. 그것은 이 작품 전면(全面)에 배경처럼 흐르는 리투아니아 한 농촌지역 서산에 걸려있는 태양이고, 농사일 마치고 귀가하는 건강한 농부의 붉은 얼굴과 어슴푸레 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저녁 빛과 수레단에 실을 호밀단 작업이 남아있음에도 농부들을 들판에서 물러나 작업을 종료케 하는 다정한 귀족의 지시처럼 자유로운 평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짙은 향수이다. 섬세한 레이스 커튼처럼 걸려 있는 서쪽 하늘의 구름, 구름을 에워싸고 타오르는 서편의 햇살, 모두의 손길과 눈길이 즐겁게 향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윤무, 고요한 저녁 같은 세계의 기운이 가득한 경건한 추억의 복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폴란드 근대 문학전통을 맛보는 더없는 작품을 경험했다. 당분간 폴란드문학을 읽는 여정을 계속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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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 극장 - 시대를 읽는 정치 철학 드라마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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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을 막는 가장 큰 장애는 무지입니다.” - 책 본문 82, 페리클레스의 연설

 

민주주의 정체는 상시적인 불안을 안고 있는 태생적 불안정성을 그 본질로 하는 정치제도다. 그 이유야말로 지극히 단순하고도 명쾌할 수밖에 없다. 어떤 공동체건 구성원인 인간 각각의 감성과 생각이 동일하지 않으며, 그 인식과 앎의 범위가 천차만별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이 서로 다른 생각들이 반영되어야 하는 정치체로서 민주주의는 그 균형과 조화를 성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지향하고 있지만, 그 실현태(實現態)는 같지 않다. 주권자인 민을 수시로 망각하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키케로가 국가론에서 인민이란 법에 대한 동의와 이익의 공유를 통해 결속한 대중의 집단이며, 공화국(로마)은 인민의 것이다.”라는 말과 달리, 국가는 인민 전체의 것임을 부정하려는 자들이 출현하는 까닭이다. 인민 대중이 모여 자신들을 스스로 다스리는 보편적 규약을 함께 만들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런데 그 대중, 인민의 앎, 인식의 폭과 깊이가 같지 않다. 키케로를 인용한 이유는 오늘날 우리들의 정치적 삶의 형태인 민주공화정의 틀이 그로부터 출발하는 까닭이다.

 

민주주의가 주권자로서 인민의 생각에 기초하므로 그들의 선택 여하에 따라 안정과 불안정 상태를 넘나들게 된다. ()의 선택이 키케로의 공화국에 대한 정의에 근접한 충실한 통치자를 세워 안정을 유지하기도하지만, 자기집단의 이익을 앞세우고 대립과 분란으로 불안정 상태로 내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결국 민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삶의 조건이 좌우되는 불안정성을 걷어내기 위해서, 다시 말해 안정된 정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시민의 정신, 그 앎의 역량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은 시민의 정신적 품성과 역량의 정도라는 말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자질과 역량을 모든 시민이 갖춘 탁월성(arete)에 이르도록 자극하는 지성의 사유라 할 수 있겠다.

 

50꼭지의 담론으로 구성된 책인 만큼, 각 글마다 인용되고 되새겨져 오늘의 정치적 현실의 의미로 해석되는 역사와 철학(정치철학 포함), 문예비평(문학)의 전범(典範)으로서의 사유들이 풍성하다. 그 글들이 응집하는 지점은 인간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윤리적 정치에 대한 앎이다.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키케로 세네카 등 로마의 정치, 토마스 아퀴나스를 필두로 하는 중세교부철학, 데카르트의 근대철학과 니체를 경유하여, 하이데거와 계몽 이성의 비판 철학으로 아도르노, 푸코와 데리다에 이르고, 신화와 비극, 문학과 문예비평, 마키아벨리, 한나 아렌트의 정치학을 아우르는 망라된 이들 인문학이 가리키는 무지(無知)에서 무지의 지()”로 향하는, 즉 인식의 지평, 자신과 세계에 대한 참된 이해를 위한 사유의 글들이다.

 

어떤 정체든 공동선이 흩어지고 사익 추구가 정치의 목적이 되면

그 정체는 파멸을 피할 수 없다.” -122

 

지혜와 해석의 신으로 알려진 헤르메스 신화의 한 장면은 거짓과 진실이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교묘한 기만의 경계에 선 다르지 않은 것임을 보게 한다. 헤르메스는 배다른 형제인 아폴론의 소 50마리를 훔친다. 이를 직감한 아폴론은 소를 훔쳐 몰고 간 게 너 아니냐?”고 따져 묻는다. 이에 헤르메스는 자신은 소를 훔쳐 몰고 간 적이 없다고 맹세한다. 소를 뒷걸음질로 걷게 하였기에 몰고 간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만적인 헛소리를 오늘 우리들은 정치검사들, 법비(法匪)들의 행태로부터 늘 보고 듣는다. 속이고, 감추고 덮어씌우는 어두운 헤르메스의 교활한 행위, 이 왜곡 행위가 해석의 잔꾀로 날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법은 욕구 없는 지성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인간 지성이 모여 찾아낸 가장 좋은 방편으로서 법을 세웠던 것이다. 사적 욕망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욕구가 배제된 이성이 나라를 다스릴 때 참된 법치국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을 다루고 지키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법률의 봉사자라 칭하고, 이들은 사사로움을 누르고 법의 정신을 구현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고 말했다.

 

그런데, ‘욕구없는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고 정신없는 욕구인 법기술자들이 설쳐 날뛰고 있다. 해석의 기술은 이렇게 너무 쉽게 은폐의 기술, 왜곡의 기술로 변질되어 사적 이익을 만들고 방어하는 악의 방편이 되어버린다.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앎의 눈은 단 번에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정신은 이를 분별할 수 있는 탁월함을 갖추어야 하고, 그래야만 법과 민주주의 정체를 훼손하는 이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정치적 문해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분별의 앎은 결코 저절로 획득되지 않으며, 지속적인 공부를 필요로 한다. 무지는 인식의 게으름이고, 이는 곧 악덕이라고까지 말해진다. 무지는 무언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자부하는 오만과 무분별이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바로 이 오만과 오만의 자기증식이 아테네를 멸망시킨 원인임을 알리기 위해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라는 패배의 역사를 써 후대의 지혜가 되기를 기대했다.

 

우리 인간 모두는 자신 안에 악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혹자들은 악을 모조리 외부로 돌리고 자신만은 선 그 자체라고 여기는 유아적 관성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전히 세대를 뛰어넘어 읽히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바로 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선과 악, 이 대극적인 양면을 인식하고 그것을 직시, 통과함으로써 그림자를 넘어서는 무의식의 내면 드라마를 씀으로써, 무지의 오만, 자기 앎의 한계에 대한 성찰을 일깨우고자 했다. 책의 모든 글들은 이처럼 단일 영역으로 향한다. 삶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안목과 그 현실을 내적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무지의 앎으로.

 


수많은 귀한 안목을 길러주고자 하는 저자의 노고의 산물들이지만, 특히 새로운 식견을 지니도록 한 글들 중 하나로 아이러니의 원형 어휘인 아이로네이아(eironeia), 자기 의심을 통해 자기 확신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인간 의 중대한 소양을 말하는 글은 자기중심성에 갇혀 협소한 앎의 동굴을 헤매는 우리들의 정신을 깨워 흔든다. 오이디푸스가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나누는 대화의 장면을 저자는 비극의 아니러니의 맞춤의 예()로 소개하고 있다.

 

그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수치스럽게 어울리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고, 어떤 악에 처해 있는지도 보지 못하고 있소.” 테이레시아스의 이 말에 오이디푸스는 화()의 화신이 되어 눈만 먼 것이 아니라 귀와 혼도 멀었다고 몰아친다. 테이레시아스는 반박한다. 그대는 불쌍하게도 머잖아 이 모든 사람이 그대를 꾸짖을 말로 나를 꾸짖고 있구려.”

 

2500년 전 그리스의 작가가 쓴 이 비극의 한 장면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는 진실을 자신만은 알지 못하는 것, 칼날이 자신의 목에 다다라서야 정작 자신이 악의 주범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서 우리들은 앎의 격차가 얼마나 인간 삶의 선택의 여정에서 중대하고 갈급한 사태인 것인지를 목격하게 된다. 객관적 상황이 주관적 믿음과 모순됨을 뜻하는 아이러니는 우리들의 무지를 폭로하는 긴요한 성찰의 필요임을 알려준다. 소크라테스가 짐짓 모르는 체, 능청을 떨며, 모르는 자의 태도로 다가가 상대방의 무지를 폭로함으로써 깨우침을 주는 것도 바로 어떤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치 현안과 관련된 온라인 의사소통망의 게시 글들이나 댓글에는 언제나 분출하는 열정에 싸인 혐오와 분노의 감정들이 들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자기만이 진실을 알고 정의를 안다고 자부하는 제어되지 않은 감정의 배설들이다. 결국 그네들은 그것에 스스로 얽매여 그 바깥의 세계 현상에는 매우 어둡기 마련이고, 한편으론 대개 인식의 게으름이 뒤따른다. 자기 한계를 모르는 자기믿음의 과신, 타자의 목소리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의 부정적 반응은 앎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결국은 진실의 힘에 의해 부정의한 인간으로 몰락하게 되고 만다.

 

막스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가 부르주아를 대변했던 정치경제학자로서 노동자들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드러내긴 했지만.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만큼은 중립적, 아니 전체를 포괄하는 논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의 윤리정치에 대한 생각은 오늘의 정치적 삶의 세계에 그대로 와 닿는다. 정치 영역이 신념의 윤리만으로는 맹목적이기 십상이며, 따라서 자기 행위의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길 수 없음을 인정하는 책임의 윤리가 서로 보완관계로 동반되지 않으면 안 됨을 역설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구현된 윤리정치를 권력정치, 즉 권력의 획득과 향유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는 정치와 대립하여 그것들의 목적인 화려한 외관을 추구하며 책임을 느끼지 않는 자아도취, 허영에 토대를 둔 권위주의의 권력정치가 공동체를 뿌리까지 썩게 만들게 된다는 지적은 결코 부패하지 않을 진실의 말일 것이다.

 

정치란 모두에서 언급했듯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자유와 평온한 삶을 누리며 창조적 열정을 펼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열망의 제도이고 그 관념의 발현이다. 권력정치와 윤리정치를 선택하는 것은 바로 그 선택의 권리를 지닌 민의 자유이지만, 한 번 알게 된 것을 실천하기 마련일 것이다. 파벌의 이익과 분열과 분란을 일으키는 자를 플라톤은 정치가에서 스타시아스티코스(stasiastikos)’라 부르며, 참됨을 가장한 사이비 정치가라고 비난했다. 권력정치를 희망하는 노예근성에 젖은 무리들이 없지 않지만, 인류 공동체는 늘 윤리정치를 복원해왔던 것이 역사이다.

 

자기 앎의 한계를 자각하고 돌보는 것, 다시 말해 무지의 장벽을 뚫는 것은 결단코 수월한 것이 아니다. 쉬운 말로 인식의 게으름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인간의 평균적 결함으로써 나르시시즘, 자기사랑을 돌파하기란 지난한 어려움이다. 그래서 더더욱 민주주의는 쉽지 않은 길이다. 무지의 앎에 얽매인 존재로서 우리들 인간의 자기중심주의가 얼마나 많은 폐해들을 낳고 있는가. 기후문제로부터, 무역장벽을 세우고 강자의 논리를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행태가 다시금 기승을 부리며 세계의 분열로 인한 긴장이 넘치지 않는가.

 

그런가하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공동선을 무너뜨리고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내란을 획책하던 세력들과 그에 준동하는 무리들의 청산이라는 과제를 앞에 두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이러한 현실에 둘러싸인 우리들 삶의 공통된 희망으로서 정치를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익숙한 지성의 사례들을 통해 앎의 지평을, 앎의 빛으로 혜안을 지닌 탁월한 시민의 정신으로 안내한다.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잡아 채야 하는 순간으로서의 지금 여기이기도 하지만, 앎의 기회란 그 때, 절호의 찰나가 있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이 책은 바로 지금 잡아야 하는 지혜, 인식의 빛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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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85
볼레스와프 프루스 지음, 정병권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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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도입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체에서 세부로 변화 이동하는 훌륭한 사례를 올가 토카르추크가 너무 멋지게 설명해놔서 직접 읽고 느껴보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집어 들었다. 이야기의 전개는 사람의 변덕스레 요동치는 심리처럼 그 오락가락, 변화무쌍으로 인해 한 번 펼쳐 든 책을 내려놓을 수 없을 만큼 빠져들게 된다. ‘폴란드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라는 수사와 같이 소위 오늘날 안방 드라마의 인기몰이 - 대귀족의 사치스러운 삶, 거부(巨富)가 된 자수성가한 사내, 애정의 줄다리기, 귀족의 몰락과 부상하는 부르주아, 격변하는 19세기 유럽사회의 시대성 등 -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다.

 

“1878년 초 세계 정치가 산스테파노 평화조약, 새 교황의 선출 유럽에서의 또 다른 전쟁 발발 가능성 등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바르샤바 크라코프스키에 르세드미에치에 거리의 지식인들과 상인들은 장신구를 취급하는 민첼과 보쿨스키 회사의 앞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 한 고급 음식점에서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속옷 가게 주인들, 포도주 가게 주인들, ,....‘유제프, 여기 맥주 하나 가져와! 그런데 이게 몇 병째지?’“

1병유리를 통해서 본 민챌과 보쿨스키 회사에서.

 

위에 인용한 문장을 보면, 세계의 전체적 시야를 가진 조망이 어느새 축소되어 술집에서 주절거리는 인물에 멈춰 개별 주체들 간에 보쿨스키라는 인물을 화제로 한 시시콜콜한 얘기들로 펼쳐진다. 소설을 시작하는 제 1장의 제목 중 병유리를 통해서 본이라는 표현은 작품이 어떻게 형성 구조화되는지의 중요한 암시다. 맥주병처럼 취한 이들의 설왕설래하는 일반 민중의 의미없어 보이는 관점에서 사회를, 그 통속성을 지배하는 대중적 정서, 상식이라는 볼품없는 이해에서 당대 폴란드인과 그 사회의 정신을 읽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누군가의 관점들이 수없이 포개져 하나의 전체적 조망으로서의 관점으로, 한 특정 사회의 실체적 흐름을 바라볼 수 있게 짜여 있다. 늙은 점원 이그나치 재츠키의 회고, 몰락하는 대귀족 토마쉬 웽츠키, 귀족적 삶의 가치를 신봉하는 상류 사교계의 상징적 인물인 토마쉬의 딸 이자벨라, 백작, 남작, 공작 등 사회를 지배하는 귀족들, 유대인들, 상인들, 그리고 보쿨스키라는 자수성가한 상인과 같이 결코 한 자리에 같이 하지 않을 이들의 시선이 하나의 거대한 조류가 되어 시대의 역사를, 계급사회에서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로의 저항할 수 없이 격변하는 19세기 폴란드를 그려 보인다.

 

핵심 플롯은 계급사회의 오랜 전통, 즉 혈통에 의한 가문 중심의 부와 권력이 세습되는 귀족계급의 지배자로서의 고착된 인식을 지닌 대귀족 여성으로 대변되는 상류사회와 그렇게 격리된 세계관 속의 여성을 사랑하는 상인 계급 남성이 지극히 사적인 개인으로서 사랑의 쟁취와 착취 받는 시민들을 위한 연민과 헌신 사이에서의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사랑이 한 시대에서 어떻게 취급되고 변질되어 가는지, 그것이 곧 시대성의 커다란 흐름에서 어떤 반영인지를 목격케 한다. 한 개인의 삶의 반경이 그 출신에 의해 한계가 지워진 세계에서 그들 각자는 자신들의 인식 바깥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오류와 오해로 인한 인식의 실패를 거듭한다. 그것은 반목과 갈등, 혐오와 증오로 귀결되기 일쑤고, 이것은 가시적, 비가시적 불문의 질시(嫉視)와 투쟁의 흐름이다.

 

민첼과 보쿨스키 회사의 소유주인 보쿨스키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처절한 각고의 노력을 통해 부를 쌓은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부를 쌓으려한 동기가 대귀족인 이자벨라를 멀리서 한 번 보게 된 이후에 그녀에 다가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부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그의 사랑이 얼마나 집요한 동기를 가진 것인가를 말한다. 기회주의적 귀족사회는 막대한 부를 지니게 된 성공한 상인인 그를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탁월한 인물이라 부추기며, 퇴락하는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 한다. 이자벨라의 아버지 토마쉬 남작은 무분별한 재산 탕진으로 귀족사회에서 홀대 받는 처지에 몰리고, 이는 지참금에 대한 의혹으로 이어져 사교계 최고의 지성을 겸비한 신부감이었던 이자벨라는 혼인 시장에서 점차 외면되기에 이른다.


보쿨스키는 몰락해가는 빈털터리 웽츠키 가문의 처지를 이용해, 아니 오직 이자벨라 웽츠키를 위해 그네들의 가계를 음지에서 지원한다. 그것은 그네들이 내놓은 집안의 귀한 물건들이고, 빚더미로 경매에 부쳐진 건물이고. 토마쉬가 남발한 채무더미들이다. 그는 다가가고 싶은, 자기 신분으로는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엄격한 신분질서 속으로 뛰어들고자 자신의 부를 그들을 위해 기꺼이 소비한다. 이것은 보쿨스키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자벨라나 토마쉬는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은 오랜 세월 지배계급으로 행세해 온, 자신들의 손으로 그 무엇도 창조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말과 손짓으로 인간 모두의 행위를 좌우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 온 이들에겐 보쿨스키의 선의는 자신들을 위해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하는, 하인의 충성일 뿐이다.

 

이자벨라는 보쿨스키의 염원과는 달리 그를 단순한 하인, 자신들의 재산관리인 정도로 여긴다. 그를 자신의 미모로 묶어두어 자신들의 귀족적 삶을 항구적으로 영위토록 언제라도 착취할 재원 이상의 존재로 생각지 않는 것이다. 감히 상인 따위가 대귀족의 딸인 자신을 상대 배우자로 접근한다는 것은 모욕이라 여기는 것이다. 결국 보쿨스키의 그네들을 위한 헌신적인 막대한 부의 지출은 공허한 짓거리다. 소설은 보쿨스키라는 인물이 시민대중의 헐벗은 삶에 대한 연민과 실천적 보살핌의 삶과 사적 행복이라는 귀족 이자벨라에 대한 사랑의 희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는 폴란드 사회의 새로운 시대를 짊어질 인물로서의 행보를 이어가게 될지를 쫓아가도록 한다.

 

모두에서 언급했지만 소설의 서술자의 시선은 이렇게 단면적이지 않다. 보쿨스키 상점의 늙은 점장인 재츠키를 통한 그가 살아 온 삶의 배경 속에서 당대 시민계층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늘어 놓는가하면, 당대 유대인들에게 쏟아지던 팽배한 혐오의 시선과, 귀족사회의 사치와 게으름, 부도덕과 특권의식에 대해 냉혹한 시선을 보내는 상인계층의 흠모와 질시의 양가적 시선도 있다. 또한 대외적 신흥 기술이나 산업에 대한 국수적인 배타적 시선에서 풀려나지 못한 비이성적 수구의 시선들, 극변하는 외교적 혼돈에 대한 정치적 분열의 시선들이 소시민들의 목소리로 배경처럼 흐르며, 이러한 조각들이 한 시대 속 사회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게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하늘을 나는 새의 시점이 사랑에 대한 관념적 이해의 변화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가히 독보적 성취를 이뤄내고 있는 듯하다. 돈과 권력의 이전과 상속이라는 거래관계가 지탱하는 귀족사회의 사랑에는 연민, 동정과 같은 타자를 기초로 하여야만 생성되는 사랑의 관념이 아예 존재치 않는다. 보쿨스키란 인물도 이러한 귀족사회에의 편입을 위해 돈의 절대성을 알았듯이 시민대중의 관념과는 아예 다른 차원에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이자벨라를 향한 사랑, 즉 개인의 만족을 위한 욕망이 사회라는 공동체에 대한 평등적 세계로의 희망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인가에 좌절 속에 몸부림친다.

 

이러한 갈등 속에 한 여인을 위한 그칠 줄 모르는 헌신, 그녀를 위한 막대한 부의 지출이 한낱 그네들에게 이용되는 가치이상이 아니라는 모욕에 당면하게 되는 것인데, 이로써 보쿨스키는 프랑스로 떠나게 된다. 그의 시선에 들어 온 대도시 파리는 선진 문물, 노동자와 장인들, 기술자와 학자, 예술인들의 참여가 축조해놓은 인간 평등의 거대한 사회이다. 그는 이자벨라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귀족들이 만들어놓은 계급적 이념에 굴복한 환상일 뿐임을 직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찰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이자벨라를 마음에서 떨어내지 못한다. 계속되는 2(하권)은 아마도 이 상인이 붕괴하는 부패하고 무기력한 귀족사회에서 어떻게 새롭게 다가오는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개인의 사랑을 공동체, 공적 사랑으로 전개하는가의 일견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어떤 서사가 될 것을 기대하게 한다. 문명의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을 쫓기 위해, 그가 꿈꾸는 이상적 사회의 폴란드, 혹은 그의 사랑의 결실은 맺어질 수 있을지, 작가 볼레스와프 프루스는 어떤 서사로 이끌까? 서구인들의 비극적 전통은 이 작품에서도 계속될까. 멜랑콜리가 그네들의 본원적 정서인 것을 이 작품에서 확인하게 될 것 같아 걱정스럽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목소리가 인도한 폴란드문학 읽기의 시작이다. 계속하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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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철학자 김동규의 저술 서양 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멜랑콜리아를 바탕으로 하였음을 밝힙니다. 그 동기는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소설 저항의 멜랑콜리에서 시종일관 필자를 괴롭혔던 석연치 않음의 원인을 찾아보려는 소박한 이유에서 출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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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melancholia), 우리는 멜랑콜리(melancholy)라는 표기를 대개 일상 언어로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의심스럽기만 하다. 서양인들에게 깊숙이 체화된 정조(情調)이기에 이와 무관한 동양인의 화법에서는 낯선 감성이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지역 공동체에 익숙하게 교육이나 학습으로 형성된 가치나 믿음, 정신이 내면화되어 일상성을 띤 감성을 에토스(ethos)라 하지만, 멜랑콜리아는 오래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적 감성, 즉 길들여진 감성인 에토스와 달리 그것에 저항하는 일시적, ()반복적 감성이기에 파토스(pathos)의 범주에 속하는 정념(情念)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대표작에 저항의 멜랑콜리(이하 멜랑콜리로 표기)라는 소설이 있다. 멜랑콜리에 저항, 거부의 의미가 있는데, 이중(二重)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읽히기에 저항의라는 수식어는 아마 저항으로서의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문구로 보인다. 그의 소설에 대한 감상의 제목으로 실존적 불안이라고 달았던 사탄탱고가 꼬리를 물고 윤회하는 듯한 닫힌 구조의 이야기로서 영원한 몰락의 상태를 반복하는 분노와 증오의 눈길로서 읽혔듯, 멜랑콜리는 이러한 감성에 직관적으로 닮은 이미지를 갖게 한다.(2018년 필자 본인의 리뷰 글을 참조 인용했음)


소설 멜랑콜리의 에스테르란 인물은 음악학교 학장을 은퇴하고 세상과 격리된 채 거짓된 음조에 휩쓸려 음악에 바쳤던 자신에게 자기-체벌로서 진실한 음의 조율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불협화음의 적응에 매진하는 자다. 이 인물이야말로 멜랑콜리한 서구의 인간 그 자체다. 나는 라슬로의 소설들 전반에 흐르는 이러한 정조가 왠지 거북하기만 했는데, 그네들의 멜랑콜리에 내재된 정신의 한계를 어느 만큼은 이해하여야 할 요구가 증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이 꺼림칙한 반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철학자 김동규는 서양문화는 멜랑콜리라는 정조에 물들어있으며, 이 정조의 바탕 위에서 수천 년의 문화를 일구어냈다.”고 이해하고 있다. 문화라는 것은 구성 개체들의 일상적 삶의 성장조건이자 한계조건이고, 따라서 특정 문화가 제공하는 삶의 토양은 그 내장된 자기 폐쇄성으로 동일성을 유지하려한다. 다시 말해 멜랑콜리는 서양인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불가피한 폐쇄성 속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소속 문화의 보편성을 강변하고 정당화하는 그 한계를 모르는 감성이다. 그런데 왜 멜랑콜리한 인간들, 즉 이미 기성의 규칙과 제도, 관습에 대한 은연한 반감의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그 폐쇄성을 탈출하지 않는 것일까? 정신의학자 피터 크레이머가 수천 년의 적응 끝에 멜랑콜리는 그렇게 우리에게 어울리게 되었다.”고 기술했듯, 이 황량하고, 우수에 젖은 감각적 정서를 개체가 풍요롭고 안락하게 느끼는 본원의 감성이 되었기에 탈출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감옥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김동규는 중요한 역사적 이해에 기초한 해석을 말하는데, 서양사회는 근본적 단절없이 연속성을 유지했다는 사실, 서양 정신이 한 번도 타자의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멜랑콜리라는 자신들의 감성이 지닌 한계에 대한 자기성찰이 필요치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서구의 정신은 멜랑콜리한 인간을 위대한 비극의 광기 표상으로서 천재예술가의 내면의 상징으로 여기는 오랜 문학적, 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정조로서 일탈과 과잉의 슬픔을 하나의 영감에 찬 기질로 이해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울을 향해 기울어가는 멜랑콜리한 감성이란 이성이 수반되지 않을 때 광신으로, 밀교적 열광으로 바뀌기도 하여 망상에 휩싸여 질병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균형과 조화를 이뤄 건강한 이성에 토대를 둔 독창적이고 진리를 드러내는 원동력, 숭고한 존엄성의 감성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멜랑콜리는 두 얼굴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멜랑콜리를 화두로 삼은 이유는 이것의 정의를 풀어놓자는 것이 아니라, 내게 석연치 않은 감정을 가지게 한 멜랑콜리의 내재된 본질에 조금이라도 근접해보려는 것이다.

 

라슬로의 작품, ‘멜랑콜리는 한 도시의 붕괴의 전조들, 그 가운데 등장하는 다분히 멜랑콜리한 인물들이 벌이는 혼돈의 상황이 마치 역사의 진실이란 돌고 도는 순환적 반복, 조금 인심을 써서 말하자면 모순을 살짝 덮어버리기 위한 변증법적 순환 고리를 맴도는 서사로 다가온다. 이 소설이 시적 감상을 자아내며, 걸출한 이야기의 맛을 선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몰입하게 하는 힘에 사로잡혔던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그런데 결국 제자리라니, 역사의 시간이 돌면서 서로 자리바꿈을 할 뿐 원의 전체 질서를 따라 단지 원주를 도는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소설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멜랑콜리를 구성하는 세 축을 김동규는 자의식 집중과 동일화, 나르시시즘이라고 정리한다. 첫째, 자기의식이 강해 자기에게 강하게 집중하는 까닭에 어떤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을 경우 그 고통은 매우 크다. 라슬로의 작품 속 에스테르나 그의 부인 모두 이러한 자기애가 놀라울 정도로 큰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말이다. 둘째, 타자를 자기와 쉽게 동일화함으로써 모순과 차이를 극도로 인정하기 어려워하며, 따라서 다름을 철저히 배제한다. 에스테르 부부가 서로 극한적으로 반목하고 혐오하는 것과 상통한다. 셋째, 타자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때부터 이미 자기와 닮은 자기의 분신을 선택한다. 이러하기에 멜랑콜리한 사람은 대상을 자신으로부터 떠나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에스테르가 또다른 형태의 멜랑콜리커인 몽상의 열정을 지닌 벌루시커의 행방을 애타게 찾는 것도 아마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멜랑콜리가 서양문화의 근본 정조, 즉 서양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심 줄기라한다면, 이것의 속성을 조금은 더 파고들어가 보아야 멜랑콜리가 왜 쳇바퀴 돌 듯 한계에 갇힌 답답함, 그로인한 거부감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김동규는 자기에 집착하는 서양의 언어에 우리의 언어에는 없는 재귀용법에 주목한다. 재귀(再歸; reflexive)한다는 것은 자기를 떠나서 다시 자기 스스로에게 돌아온다는 자기 복귀를 함축하는 낱말이다. 이 언어적 특성으로 인해 그들에게 자기(self, selbst)’는 엄청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인가를 자기 자신으로 이끈다는 의미의 절대자가 출현하고, 서양인들의 절대적으로(absolutely)라는 말은 그 자신에 따라서라는, 다시 말해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따르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멜랑콜리는 상대인 타자를 허락하지 않은 절대이며, 이 절대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수렴시키는 정념이다. 여기서 이질적인 것은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다.

 

동일성의 논리는 이로부터 자연히 따라 나온다. 자기가 아닌 -자기들 혹은 자기와 모순되는 것 전부를 배제하는 원리이다. 멜랑콜리라는 정조는 아무튼 독특한 배타성을 지닌 정념이다. 동어반복적 자기 동일성의 확립이 서양 인식론의 존재론적 근거라는 말이다. 그들이 애매함을 그토록 혐오하는 것이 바로 이 정신이다. 선택지를 벗어난 어떤 바깥도 부정되는 것은 바로 이 서양인의 자기동일화에 바탕을 둔 인식 때문이다. 서양 인식론을 모순배제와 동일률이 지배하는 것도 결국은 멜랑콜리한 서구 특유의 정조에 연원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이 동일성의 논리에 따라 치밀하게 전개된 결과물이다. 타자가 아닌 자기 분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이 지독한 정념은 불완전한 자기를 충만하게 완성함으로써 죽음을 정복하려는, 불멸의 구원에 대한 욕망이다.

 

이 어둡고 음울하고 슬픈 정조인 멜랑콜리는 이러한 자기 한계를 지닌 한편으론 기형적 감성으로 여겨진다. 이제 라슬로의 소설 저항의 멜랑콜리가 거부하는 마음으로 독자를 괴롭힌 이유가 어느 정도 해명된다. 서구인들은 그런 문화 속에 삶이 형성되고 있기에 자신들의 한계를 성찰하지 못한다. 물론 샤르트르라는 걸출한 인물이 원제목을 맬랑콜리로 하였던 소설 구토가 이러한 정조, 있음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허상에 빠져있으며, 나아가 그 허상에 빠져있음 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시대를 성찰하긴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결코 바깥 세계, 세계 전체를 조망하는 차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샤르트르는 앙투안 로캉탱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실존적 위치를 본의 아니게 진술하기는 했지만, 하이데거의 말처럼 자기존재가 거주하는 시대의 껍데기에 사로잡혀있음을 자각하지 못했기에 자기 정조의 한계를 보지 못했다.

 

사실 서양인들이 내세우는 고전적 지위를 차지한 문학작품들은 예외없이 이러한 멜랑콜리 정조에 깊게 물들어 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라고 한다는 부패와 불의와 부정한 세계 인식과 질서에 저항하지만 그것은 그들 내부에서의 성찰에 그치고 만다. 게오르크 뷔히너는 당통의 죽음에서 프랑스 혁명을 성공시킨 주역임에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던 당통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실 난 인류 역사 전체를 비웃지 않을 수 없어 , 세상이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어,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먼 훗날에도 모든 게 오늘과 같을 거 같아. 공연히 소란피우는 거야.”, 자신이 주도한 혁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을 통해 역사의 쓰나미에 휩쓸려버리는 부유물, 단지 저항하는 멜랑콜리커의 권태로운 삶으로 전락해버린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저항의 멜랑콜리의 전체 줄거리에 맞춤인 문장이라 해도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절망은 희망의 산물이니 희망은 실천적 목표에 대한 갈망이고, 그 목표에 안착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기에, 그 비극성을 성찰하고 또다른 희망의 목표를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게 해주지 않냐고. 아마 크러스너호르커이도 라슬로 분명 이러한 심정에서 썼을 것이다. 추악하게 권력을 차지하고 주변을, 타자를 철저히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에스테르 부인의 여정을 보여주면서 그 비극적인 세계의 일면을 통해 성찰할 수 있는 관점을 주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런데, 필자를 불편하게 했던 문제는 본질적인 것, 바로 그네들을 사로잡고 있는 멜랑콜리라는 그 정조가 지닌 한계를 왜 보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서구인의 배타적 관점, 자기애와 동일화의 관념을 독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대중에게 널리 회자된 불세출의 소설인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또한 멜랑콜리에 짙게 물들어 있는 작품이다. 20세기 물질만능의 휘황찬란한 금빛 세계에 21세기 청춘들이 환호하고 있지만, 과연 보편적 정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정신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이다. 개츠비는 자신의 이름 제임스 개츠를 개명한 이름이다. 철학자 김동규도 지적하듯 개츠비는 개츠의 이상화된 자기형상화로 이미 자기도취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나르시시즘이다. 자기의 이상적 이미지인 돈과 권력의 화신을 사랑하고 있음의 반증이다. 그래서 개츠비는 처절한 멜랑콜리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는 인물이 된다.

 

이것은 소설의 서사적 논리 형식에서 연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선택한 서양인의 오래된 정조의 발현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뼛속까지 속물인 데이지라는 인물은 돈이라는 죽은 사물과 같다. 개츠비가 꿈꾸는 진솔한 사랑은 애초에 성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같은 물신숭배는 서구인의 정조에 감염된 동양을 비롯한 세계 모든 지역에 확산된 기분 나쁜 정조에서 출현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노벨문학상이라는 인류 세계에 지니는 권위와 영향력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가 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수상자의 작품들이 세계 모든 지역의 인간들에게 동일하고 보편적인 감응을 주는 것은 아닐 게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인물들은 도처에 경계 지대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의 접점이 없이 배격하고 분리되어 있다. 건강한 삶이란 헤아릴 수 없는 관계들 마디의 접경에서 일어난다, 타자성과의 만남에서 비로소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열릴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소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도 미약하게 벌루시커와 에스테르의 일방적인 오해로 가득한 가느다란 접점이 있지만 그것마저도 타자에 의해 단절된다. 멜랑콜리는 자기상실을 참지 못하는 정조이다.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마디가 새롭게 맺어지는 것인데 말이다. 라슬로는 멜랑콜리의 정조를 소설의 주요 제재로 삼아 서사를 전개하지만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형식적 구조, 커다란 틀, 세계의 폐쇄적 순환구조의 틀로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멜랑콜리의 긍정적 특성인 저항의 실천, 열정적인 창조로서의 영감과 같은, 천재 시인 횔덜린의 예술적 광기와는 사뭇 거리가 멀어진다. 오직 질병적, 체념적, 분열적 우수만 넘실댄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의 멜랑콜리아처럼 서구 문학인들의 정조는 어두운 우수의 정조를 강렬한 문학적 서사에 담아 생의 무한한 감각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들의 제목이 지닌 정조의 한계가 우리에게 무엇을 지향 또는 시사하고 있는지 조금은 냉철한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만 같다. 소설 읽기에 냉철함을 제안하는 것이 뒤틀린 이해라는 지적이 있겠지만, 그것이 자기 폐쇄적, 배타적 정신의 산물이 아닌지, 그 어떤 변화도 기대치 않는 순응이거나 체념의 서사는 아닌지, 그래서 우리네 삶의 그 어떤 긍정적 희망의 씨앗도 남겨주지 않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물론 멜랑콜리라는 정조는 인간 보편의 경험인 탄생, 사랑, 죽음이라는 인생의 세 마디만큼 공유하는 보편적 정서에서 연원하는 그것들에 대한 시원적 슬픔과 우수의 감성이다. 이는 이성적 분류 체계나 논리적 접근으로 결코 잡히지 않지만 인간의 사회문화에 어떤 규정력을 발휘하는 감성으로서 현실 전복적이고 비판적 시선의 정조일 수 있다. 그래서 서양 문화의 정수인 예술이 멜랑콜리에 흠씬 젖어있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지만 그 정조가 지닌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동일성을 반복하는 것은 배타성을, 즉 타자의 배제로 인한 창조의 불능, 정신적 불임의 사태로 여겨진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분히 은유로 기술된 시체(屍體)의 화학적 변화를 장황하게 기술한 페이지들은 제아무리 반동이 승리한듯해도 자연의 순리는 그에 저항하는 단계를 돌려 줄 것이라는 뻔한 순환구조의 답습에 다름 아니다. 소설의 문학적 맛을 극대화하는 기술(technic)로서 멜랑콜리가 사용된, 동어반복의 대표적 예로 여겨진다. 미학적 성취는 있었으나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인생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다. 시끄럽고 정신없으나 아무 뜻도 없다.”를 다시금 반복하는 사태인 것만 같다.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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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23 0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룸을 감상할 수 있었어 좋았습니다.

비의식 2025-11-23 08:0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
‘저항의 멜랑콜리‘는 ‘사탄탱고‘만큼 흥미롭지는 않지만, 한 세계의 몰락에 대한 전조로 그려지는 적대적 시선의 느낌, 사방에 넘쳐나는 쓰레기가 추위에 얼어붙은 전경, 고래 전시와 군중들의 기묘한 열정 등의 서사 진행이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응하는 어처구니없는 인간들의 이합집산의 행동들, 권력의 이동이 더없이 천박하게 그려지고 있지요. 이야기 자체로는 분명 매혹적인 작품인데요, 제겐 계속 석연치않은 거부감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에 이런 감상으로 이어졌네요. ^^

페넬로페 2025-11-23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침 <당통의 죽음>을 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1월엔 <사탄탱고>를 읽을 예정이고요. <저항의 멜랑콜리>도 읽어봐야겠어요. 이 리뷰 도움 많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의식 2025-11-23 10:27   좋아요 1 | URL
오, 페넬로페님~ ‘사탄탱고‘는 제게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제법 지나면서 제 관점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저항의 멜랑콜리‘에 이르러 의심스러움이 생겼네요. 아무튼 우리들의 감성을 휘젓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즐거운 독서가 되시기를요.

잉크냄새 2025-11-23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담입니다만 멜랑꼴리는 예전 처음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좀 있어 보이려 쓰던 기억이 나네요. ˝오늘 좀 멜랑꼴리해˝라고 말이죠. 깊은 의미도 잘 모르면서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를 들먹이던 시절처럼 말이죠. ㅎㅎ

비의식 2025-11-23 10:23   좋아요 0 | URL
서구 정신이 우리들에게 어느 새 깊게 잠식해 들어온 것이겠지요. 회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저 수용하기에는 무언가 꺼림칙한 요소들이 있어요. 김동규의 저술은 서양의 주변부에 있는 자로써 미래 철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동환, 김상봉 등이 있지요. 참고할만한 분들입니다. 고맙습니다, 잉크냄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