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살인 (리커버 특별판. 페이퍼백) 애거서 크리스티 리커버 컬렉션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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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이국적인 디자인을 한 새로운 표지의 유혹만으로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다시금 손에 들게 할 만큼 매혹적인 추리 문학 작품이다. 시리아의 겨울 아침 5, 알레포역을 출발하는 이스탄불 행 타우루스 특급’, 이 열차 식당칸 아래 작은 불로 잠시 지체되자 더벤 햄이라는 영국 여성의 시간지연을 걱정하는 장면이 예사롭지 않은, 중요한 암시의 하나임을 이젠 알아보게 된다. 이처럼 다시 읽기 여정은 작가가 여기저기에 지뢰처럼 묻어둔 장치들을 발견하며 그 섬세한 호흡에 일체가 되는 또 다른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다.

 

    

 

이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외부의 어떤 조력도 받을 수 없는 철저하게 한정된 장소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을 해결해야하는, 문자 그대로에르퀼 푸아로라는 탐정의 순수한 추리력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스탄불 출발 칼레 행 심플론 오리엔트 특급열차침대칸에 모든 용의자를 몰아넣고, 눈사태로 고립된 열차 내에서 한 남자가 피살된 채 발견되는, 완벽한 밀실 구조의 수수께끼에 던져지는 것이다. 오직 용의자의 진술들과 현장의 단서에만 의존해서 풀어내야 하는 지성의 총체적 대결이 곧 이 작품의 미덕일지도 모르겠다.

 

라쳇이라는 미국인 남성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떨어진 손수건, 성냥, 없어진 담배 파이프, 115분을 가리킨 채 멈춘 시계, 사라진 살해 도구 등등 산만한 단서들, 탐정 푸아로는 침대칸의 승객들을 한 사람씩 불러 진술조사를 시작한다. 침대칸 차장을 비롯한 13명 승객의 아무런 실마리를 제공해주지 않는 듯한 진술로부터 그 위장된 껍질들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쾌감이 책장 넘기는 속도를 재촉하게 한다.

 

한편, 이 소설의 마지막 장에 작품해설을 쓴애거서 크리스티의 손자 매튜 프리처드가 지적하고 있듯이 피살된 인물의 과거 행적으로 드러나는 잔혹한 어린이 유괴 살해자로서 암스트롱가 살인 사건을 이 작품의 거대한 축으로 은밀히 내장시킴으로써 생명의 존귀함, 사회정의의 실현에 대한 작가적 열망의 정도를 가늠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추리문학의 영원한 고전적 지위를 갖도록 하는 요소는 탐정 푸아로가 발휘하는 방법론으로서 추리의 명쾌함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도대체 무엇에 대해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하고요. (....)

 만약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는 이런 이유로 이 거짓말을 한다는 답을 만들어 보는 겁니다.”

그렇지만 당신 추측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완전히 혐의를 벗는 거지요.”       

                                                              (P 310 ~311 에서)

 

소거법이라 할 이 수단의 사용은 사건 해결의 절대적인 결과를 낳는데, 은폐되어있던 용의자들의 정체는 물론 경이로울 만큼 사실을 드러내는 강력한 도구로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아마 즐비하다고 할 정도로 널려 있었던 암시를 확인하는 이 과정은 지적 쾌락 최고의 맛을 느끼는 그런 즐거움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마치 이것은 전희에 불과한 것이야! 라고 말하려는 듯이 놀란 뇌세포의 꿈틀거림을 감각할 만큼의 상식 전복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런 걸 환천희지(歡天喜地), 열광적 즐거움이라 해야 할 것이다. , 범인이 누구라고! 올 여름을 애거서 크리스티가 선사하는 지적오락과 함께하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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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 대미지의 일기
벨린다 스탈링 지음, 한은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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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는 온갖 금기와 금지가 덧씌워져 있던, 오직 굴종과 대상화된 존재로서의 의미만을 지닌 세계에서 그 세계의 경계에 매달려 힘을 다해 버티는, 마침내 19세기 영국 사회를 지배하는 질서의 위선과 실체의 허상을 드러냄으로써 자기욕구의 온전한 자각과 공정한 성(fair sex) 질서를 복원해내는 한 여인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는 불구의 남편이 있으며, 간질발작을 일으키는 어린 딸이 있고, 생업을 위해 남성이 축조한 세계에 발을 내딛어야 하는 여인이 감당해야 할 권력으로서의 귀족사회와 백인남성, 제국주의가 있다. 그리고 인종주의적 인류학과 골상학 등 합리주의를 자칭하는 의사(擬似)과학과 이들 지성의 외피를 쓴 추한 욕망, 외설(猥褻)의 세계가 있다.

 

이렇게 적대적인 환경에 에워싸인 세상에 진입하여야만 하는 불가피성의 상황, ‘대미지 제본소의 주인 피터 대미지의 아내인 도라는 세계의 영역, 즉 지배질서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더 이상 손의 사용과 거동이 불가능해진 남편, 일감의 부족과 사채의 압박에 굴복한 터전 상실의 위협은 그녀를 밖의 세계로 밀어낸다. 여성에게 금지되어 있어 남편의 이름으로 작은 일감을 얻어내고 도라는 자신만의 감각으로 주어진 제본을 납품하지만, 제본협회의 중심인물이자 중개자인 디포로스에 의해 여성인 도라가 제본 작업의 실체임을 들키고 만다. 금지의 도전은 곧 권력으로부터의 위협이 되어 그녀를 향하고 이것은 여성의 실존을 한없이 취약하게 만든다. 약점을 확보한 권력은 결코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다.

 

불구의 남편,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어린 딸을 가진 여성, 남성의 영역에 은밀하게 들어 선 여성은 강고한 믿음과 신중함을 요구하는 일감을 받게 된다.

 

원초적인 반응, 다시 말해서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는 유해한 내용의 글에 족쇄를 채워서 보호함으로써 아무나 우연히

책장에 꽂힌 책을 꺼내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제본사로서 부인의 책임은 (....) 적절하고 유쾌한 덮개를 입히는 것입니다.

부인이 나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P 158)

 

데카메론을 시작으로 도라가 받게 되는 책은 관능적이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되, 그 안에 담긴 놀라운 내용에 운만 띄워야하는 이중성을 요구하는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외설물로서의 금서, 소유조차 금기시되는 책의 은밀한 제본, 절대적 비밀을 요구하는 것, 자기 삶을 지켜내기 위한 도라의 버텨내기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아슬아슬한 지대로 내몰리는 것이다. 지성의 위선 속에 숨은 귀족들의 내밀한 욕망충족의 하수인이 되는 것이다. 여성 제본업자에 대한 호기심은 해부학의 권위자인 의사이자 귀족인조슬린 나이틀리경과의 대면으로 이어지는데, 조슬린이 도라의 외모를 묘사하는 장면은 당대를 휩쓸던 골상학이라는 과학적 지성의 왜곡된 단면을 상기시킨다.

 

부인의 세련된 코를 보고 알았소. (....) 부인의 코에는 분별력과 사업에 대한 적성이 있어요.

경쾌한 턱을 보니 부인이 빨리 배우고 창의적이고 적극적이면서도 신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겠소.“

                                                                                            (P 149)

 

그녀가 제본하는 책들 -욕정의 투르크인, 혹은 동방군주의 하렘, 사티리콘과 남근 숭배의 글,프리아포스 숭배와 고대의 신비 신학의 관계에 대한 담화- 은 갈랑트리(galanterie)계열의 외설물로 점차 그 강도와 폭력의 세기는 강화된다. 윤리와 종교, 과학이라는 지성의 외피를 쓴 추악한 욕망의 세계를 상징하는 이러한 책들은 당대 지배권력 위선의 일면이 될 것이다.

    

 

도라는 또한 조슬린 경의 아내인 레이디 나이틀리의 초대를 받게 되며, 미국에서 탈출한 흑인노예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서 그녀가 보호하는 흑인 남성을 대미지 제본소 도제로서 고용할 것을 부탁받게 된다. 이 국면은 남성대 여성의 불평등에서 식민지와 인종적 편견이라는 또 다른 불평등의 세계로 시선을 확장시키며, 인종주의에 도사린 곡해와 경계, 호기심이라는 양가적 감정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소설적 장치가 된다. 남편 피터의 도덕적 무장상태가 완전히 허물어지는 죽음과 흑인 의 등장은 도라에게 새로운 세계의 이해, 자기 욕망을 비로소 들여다 볼 수 있는 자기응시, 온전한 인격의 주체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여성 귀족사회의 흑인 남성에 대한 타락한 욕망의 세계 드러내기이고, 인종주의에 씌워진 불의한 논리 이면에 감추어진 백인 남성 중심체제의 불온성을 해체하는 여정이 된다.

 

은밀함이 위협되는 요인의 발생, 낯선 흑인 남성의 고용은 일감 중개자인 디프로스로부터의 믿음에 대한 증거의 요청과 딸 아이 루신다의 간질병 제거를 위한 음핵제거술의 실험대상화라는 폭력적 위기를 낳는다. 이것은 점차 자신이 죄악의 어두운 동굴로 끌려가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인피(人皮)제본이라는 사건적 상황은 평등과 자유라는 존재적 저항의 세계로 도라를 이끈다. 백인 평민 여성인 도라와 흑인 남성 딘과의 사랑, 여기에 조슬린으로부터 혼혈아로 의심되는 아이를 낳았다고 쫓겨난 레이디 나이틀리(실비아)의 의탁은 당대를 지배하는 질서의 조악함과 위선의 까발림을 동시에 이야기 한다.

 

결국 이 저항은 금지위반의 여성이 삶을 버텨내기 위해 권력에 굴복, ‘먹잇감으로서 여성이 되어 손쉬운 욕망의 대상화와 도구로 이용되지만자기 직시를 통해 지배 권력에의 저항을 위한약자 연대를 하며죽음의 쟁투를 겪어내고 마침내 그 금지된 경계를 허물고, 권력을 해체함으로써 자유, 평등, 온전한 존재자로서 성립하게 된다는 치밀하게 구성된 페미니즘의 도식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이 도식적 구조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말하려는 주제가 더욱 강렬하고 힘차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것, 낯선 것에 대한 멸시와 경계, 그리고 호기심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한 배제를 유예하지만 그것이 저항하는 순간 배제의 원칙은 공고하게 그 힘을 행사한다.

 

내겐 도라와 딘의 열정적인 정사장면을 비롯해 인상 깊은 몇몇의 장면이 있는데, 도라의 피부에 문신을 강제로 새겨 넣는, 즉 권력이 배제의 힘을 행사하는 장면은 단연 최고로 꼽고 싶다.

디프로스는 백인 귀족 남성사회로 대변되는 지배 권력의 사신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도라가 가장 우려하는 루신다에 대한 폭력적 수술이 아니라 그녀의 피부에 문신을 새겨 넣는 것이다. 인체의 피부에 문자, 그림, 기호를 새기는 이 행위는 소위 완전한 소유에 대한 갈망이라 할 것이다. 권력에 도전하는 신체에 문자를 씀으로써 그 존재의 주체성을 무화시켜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것, 그런데 디프로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조슬린 경에 대한 그의 과잉 충성은 새겨 넣은 피부만을 원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녀를 살해하는 것이 최종 도착지가 된다. 도라는 자신이 책의 표지가 될 운명을 감지하지만 그 결과는 디포로스의 죽음, 다분히 상징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도라가 거둔 이 싸움에서의 승리에는 실비아(레이디 나이틀리)가 보낸 딘, 그리고 조슬린 경의 가장된 의료행위가 있다. 여기에는 쫓겨난 귀족 여성, 흑인 남성 이라는 약자들의 연대와 자신의 실존적 안위를 지켜내기 위해 친자를 외면해야 했던 귀족 남성의 이면에 놓인 진실이라는 배후가 있다. 작가의 용의주도한 서사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데, 도라와 실비아의 흐릿한 동거적 삶의 형상으로 굴종으로부터의 해방, 완전한 자유를 쟁취한 고고한 여성을 마침내 세워내는 것이다. 외설 서적 제본이라는 독특한 소재는 물론, 짧은 호흡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는 서사, 멜로 드라마적 사랑의 열기까지 더해 성()과 계급, 인종에 대한 인문학적 성취까지 이뤄낸 페미니즘 문학의 정수라 하여야 할 것이다. 어쩌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더욱 독자들의 반응이 깊어질 작품이라 해도 한 치의 과장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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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8, 맨부커상 재단은

맨부커상 50주년을 기념하는 '황금 맨부커상(The Golden Man Booker Prize)' 수상자를 발표했다

 50년간 수상작 중 최고의 작품을 선정하는 공개 투표 결과 발표로

영국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에서 페스티발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후보작은 조지 손더스의 Lincoln in the Bardo와 힐러리 맨틀의 Wolf Hall,

V. S. 나이폴의 In a Free State, 페넬로페 라이블리의 Moon Tiger,

마이클 온다체의 The English Patient이었으며,

1992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온다체의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미 불멸의 현대고전이라는 수식어를 얻은 이 작품이 

다시금 국내 독자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아름다운 문장, 詩的이며 哲學的 성취를 지닌

  소설이라 칭한 재단의 선정 수사 또한 작품의 위대성을 빛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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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09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에 영화를 보고 나서
올해인가 새로 나온 책으로 만나 봤었는데
역시 책이 더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다시
돌려보기로 본 것 같습니다.

줄리엣 비노쉬 정말 대단하더군요.

비의식 2018-07-09 09:36   좋아요 0 | URL
왜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거듭 지목되는지 그 문장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형상화한 이미지가 발산하는 철학적 감각, 서사시라 불리울만큼
향수어린 이야기들은 그 이유를 확인하게 해주죠.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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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3주가 지났을 뿐인데.....할 일은 너무 없고 할 일 없이 때우기엔

시간이 너무너무 많아서 인간 감정의 공포스러운 수렁이라 할 수 있는

권태감이 계속해서 백작의 마음의 평화를 위협했다.” - P 90 에서

 

    

 

볼셰비키 정권에 의해 연금형을 선고받고 32년간 모스크바의 메트로폴호텔이란 곳에 갇혀 지내야만 했던 구시대 귀족인 알렉산더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란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에이모 토울스가 창조해 낸 지성, 유머, 매력, 유연한 사유와 성품의 이 인물은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회자될 장엄한 문학적 캐릭터가 될 지도 모르겠다. ‘알렉상드르 뒤마가 그려낸 에드몽 당테스와 엘바 섬에 유폐된 나폴레옹’, 그리고 빅토르 위고장발장과 같이 불의의 감금상태라는 강제된 환경을 버텨내기 위한 어떤 복수와 환상조차 지니지 않은 운명 통제의 새로운 인간상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317호 스위트룸에서 9제곱미터의 다락방으로 옮겨가는 것, 백작, 각하로 불리는 로스토프의 귀족으로서의 삶과의 이별, 기한 없는 감금, 축소된 세계에서 새로운 자기라는 정체성의 재정립이 시작되어야 한다. 비로소 책을 읽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고독을 제공하는 상황에서 로스토프가 펼쳐든 책이 몽테뉴의 수상록이란 것은 다분히 해학적이다. 더구나 자신의 운명이 타인의 처분에 달려있을 때 취해야 할 태도를 제시하는 첫 에세이의 내용은 그가 선택할 삶의 방법을 지혜롭게 암시한다.

 

소설 제목의 신사(Gentleman)'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신분의 복귀와 같은 기대의식이 없는 로스토프의 성향이며,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인식에 기초한 그의 태도, 언행, 몸가짐의 예측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위협당하는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위해 그가 취하는 일련의 행위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귀족의 권위를 상징하는 그의 코밑수염이 불공평함을 항의하는 고객에 의해 한 쪽이 잘려나가는 호텔 이발소에서 벌어지는 최초의 자기 인식에 관한 에피소드와 뜯어진 바지 솔기를 손수 꿰매기 위해 옷 수선실의 마리나와 친구가 되는 장면은 특권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신세계를 수용하고 마침내 새로운 삶의 형상을 직조해내는 아름답기조차 한 인간의 출발을 알린다.

 

더 이상 그는 각하로 언급되지 않으며, 고객으로서 한없이 우아한 후원자였을 때와 다름없이 식당의 최고 웨이터가 되며, 9살 소녀 니나와의 우정, 여배우 안나와의 로맨스는 마냥 안으로 좁혀들기만 하는 벽의 갑갑함을 밖으로 팽창하는 영역으로, 호텔을 러시아 전체로 인식케 함으로써 새로운 전경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는 환경에 지배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때론 굴복하고 또 때론 단호하고 대범한 태도를 취하며 실질적인 일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결의를 유지해 나간다.

 

어린 소녀 니나의 인도에 의해 호텔 지하에서 지붕 밑에 이르기까지 밑으로 혹은 뒤로, 여기저기를 다니며 공간을 확대해 나가는 삶의 한 순간, 그리고 좁디좁은 다락방을 그 크기와 상관없이 상상하는만큼 넓게 만들어가는 과정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초월하는 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시연이 되어 가슴 뭉클한 숭고한 감정이 되어 날아든다. 그러나 호텔 밖의 세계는 가히 폭력과 공포, 야만이 널뛰는 격동의 시공이며, 니나라는 새로운 세대의 세계이기도 하다.

 

여기에 슬픔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불가항력적 세계에 놓인 친구 미치카와의 이야기는 메트로폴과 저편의 세상이 되어 그의 존재를 위협한다. 어린시절 로스토프에게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맨체스터 나방의 운명, 그 생존의 적응과 진화의 얘기, 볼셰비키 비밀경찰의 간부 오시프와 러시아의 야만성과 진보의 이념적 관계를 교환하며 쌓는 우정, 영화 카사블랑카의 음모적 장면의 해석, 결코 돌아오지 못한 니나와 그녀의 딸 소피아의 돌봄과 사랑, 보람의 이야기들은 삶을 살아 낼 수 있는 가치에 대해 풍부한 사유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32년간 그가 쌓은 재산으로서의 사람들, 로스토프가 소중하게 쌓은 것들의 면면을 응시하는 것은 이 소설의 중요한 목소리일 것이다. 1922년에서 1954년에 이르는 32년이라는 한 인간에겐 거의 모든 시간이랄 수 있는 장구한 세월을 유폐된 호텔이라는 공간에서 숭고한 인간의 열정을 지펴낸 이 소설의 통찰은 우리들에게 무수한 문제적 대화를 지속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상황이 우리 자신의 꿈을 추구하지 못하게 할 경우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 꿈을 추구하기위한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는 로스토프의 확신에 찬 주장은 인간 정신에 대한 작가 토울스의 경외에 찬 애정의 표현이 아닐까? 에이모 토울스는 유쾌한 담론 예술가로 불린다. 아마 책을 읽고 난 뒤에 엄청난 물음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소피아를 도피케한 후 자신의 고향 니즈니노브로고드로 왜 돌아갔을까? 그를 기다리던 회색빛 머리를 한 여인은 과연 누굴까? 1946년의 장에 등장하는 미시카, 오시프, 리차드가 말하는 혁명 시대의 세 가지 관점에 누구의 의견에 동의 하는지? 인용되는 영화 카사블랑카의 칵테일 글라스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소설의 주제에 영향을 미치는 무수한 모티브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두고두고 읽힐 작품이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무진장한 영감을 선사해줄 그런 소설이다.

 

참 고 : <에이모 토울스 소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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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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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이상 유자녀 부부로서 10년 내 자녀를 최소 셋 이상 갖도록 노력한다는 조건에 입주자격이 주어진 실험공동주택이라는 작위적 공동체가 배경인 소설이다. 이 축약된 공동체를 통해서 현실적 상황과 괴리된 출산정책, 성추행의 본질적 경계성, 자기이익 최우선의 개인주의, 여성주의의 환기 등 공동이라는 연대의 선의(善意) 뒤에 숨은 위선과 그 환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출산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생계벌이의 전선에서 퇴장하여야한다. 이를 위해서 생활경제의 안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외벌이 가족만이 입주가 가능하기에 네 이웃의 부부 중 한 사람은 각기 직업을 가지고 있으나 그 역시 시원찮다. 급여가 제 때 지급되지 못하는 불안한 직장, 혹은 친척 약국의 사무보조라는 임시직처럼 안정적 경제가 담보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가계의 지속성을 유지해야 하는 부담은 여성에게 부과되어 아동도서 그림을 그리는 프리랜서가 되어 납기에 시달리거나 중고의류와 염가 사이트를 헤맨다. 자기 아이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정도이니 쓰레기 분리수거 등 소소한 공동체의 부담에 참여하는 것이 관심대상이기에는 벅찬 것일 뿐이다. 그러니 애초 이들이 아이 셋을 갖는다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망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도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교외의 12 세대짜리 공동주택의 입주조건과 실험이라는 국가 정책에 내재된 비현실성, 현재적 삶에 대한 몰이해의 그 허구성의 신랄한 비판으로 읽히는 이유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 자녀에 대한 각종 정부 지원금과 지원 정책의 허구성, 기득권을 지닌 부유층 이외에 대부분 서민계층의 복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정책의 환기이다. 현실의 경제 환경 하에서 세 자녀씩이나 낳는다는 것은 요원한 사치이자 공허한 망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설 속 입주자들은 이미 국가가 내건 입주 조건을 지키겠다는 내심의 기약이 없다는 점에서 그 정책적 비현실성은 더욱 고착된다.

 

그리 믿음직스럽지 않은 국가에서 처음 시작하는 사업인 만큼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뒤따를 테고

관리 집행이 잘 안되거나 정권이 교체되면 사업자체가 흐지부지될 수도 있었다.”   - P 43

 

  

대중의 현실적 삶과 국가 정책 사이에는 커다란 불신의 심연이 놓여있다. 기득권은 쉽사리 놓아지지 않는다. 기득권의 또 다른 측면에서 남성중심의 사회체제와 그들 언어에 내재된 휘발성과 은밀성에 깃든 위선의 양식에 대한 비판은 소설의 한 축을 차지한다.

여섯 살 딸아이의 엄마인 요진은 약국 사무보조원으로 무기력한 남편 은오에게 가사를 맡기고 불안정한 삶을 지탱하고 있다. 입주자인 신재오의 차량 수리로 인하여 출근 방향이 같은 요진은 내키지 않는 동행을 감수한다. 이웃집 남자 재오는 동행하는 차내에서 “....하도 조용히 살아 그런가, 요진 씨 소리 지르면 어떻게 되나 들어 보고 싶네요.” 라고 요진에게 모호한 말을 건넨다.

 

발화 당사자의 미묘한 제스처나 그 자리의 공기, 청자의 심리가 지워진다는 점이, 언어 자체가 지닌 약점이었다.”  

                                                                                                                                                            - P 120

 

소리 지르는 거 듣고 싶다는 말, 그리곤 강압성이 친절함과 친근함의 외피를 뜯고 새어 나오는비밀스럽고 은밀함 못지않은 추진력을 지닌 둘만의 저녁 식사를 제안한다. 점점 집요해지는 이웃집 남자의 치근거림, 요진은 남편 은오에게 이같은 사실을 말하고 해결키 위해 직장을 조퇴하고 집에 달려가지만 그녀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남편과 이웃집 여자 교원과의 친밀한 대화의 모습이며, 방치된 딸아이의 고통을 목격하는 것이다.

 

실망한 요진의 시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은오의 내심의 목소리는 아주 흥미로운 남성의 모순된 심리를 엿보게 해준다. 불규칙적이며 턱없는 생계비로 인해 절약과 수치심조차 모르고 살아가야하는 이웃집 여자 교원에 대한 측은지심이다.

 

강교원은 누군가에게서 베풂을 받는 감각, 순전히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쓰는 기쁨이나 온전히 자신에게만

제공되는 물건이 일상에서 어떤 활력과 변이를 가져오는지 좀 더 자주 경험할 필요가 있었다.” -  P 148

 

그래서 공동체의 아이들을 데리고 교원과 나들이를 하며 소비한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여야겠다는 내심의 다짐을 하는 것이다. 아내 요원 또한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하는 전형적인 남성적 무지의 시선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시선은 오랜 관습적 비합리성과 도덕적 불균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의 고발이라 할 것이다. 요원은 딸 시율만을 안고 떠나버리는데 남편 은오는 이 행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지닌 기득권의 본질을 깨닫는 것, 그 껍질을 벗어던지는 것은 결코 자발적 수행이 되지 못하는 것일 게다. 아마 끊임없이 상처를 내고 자극의 강도를 높이며 상실의 고통을 겪게 하여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진이 실험공동주택을 등지고 떠나는 택시 안에서 그녀의 코를 찌르는 축사의 악취를 차단하기 위해 차창을 닫으려하는 장면의 묘사는 불온한 현실을 막아내려는 강고한 몸짓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소설은 공공선이라 가장된 공동체 명의의 행위 이면에 놓인 개인의 삶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의 토대에 세워진 환상의 신랄한 발가벗김, 바로 그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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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03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구 문제와 거주 이슈까지 두루 다룬 작품이라는
생각에 읽어 보고 싶어졌습니다.

분량도 부담이 없어 보이니 도전!

비의식 2018-07-03 21:46   좋아요 0 | URL
네, 최근 많이 팔리는 일종의 추세화된 소설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