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겨우 3주가 지났을 뿐인데.....할 일은 너무 없고 할 일 없이 때우기엔
시간이 너무너무 많아서 인간 감정의 공포스러운 수렁이라 할 수 있는
권태감이 계속해서 백작의 마음의 평화를 위협했다.” - P 90 中에서
볼셰비키 정권에 의해 연금형을 선고받고 32년간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이란 곳에 갇혀 지내야만 했던 구시대 귀족인 ‘알렉산더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란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에이모 토울스’가 창조해 낸 지성, 유머, 매력, 유연한 사유와 성품의 이 인물은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회자될 장엄한 문학적 캐릭터가 될 지도 모르겠다. ‘알렉상드르 뒤마’가 그려낸 ‘에드몽 당테스’와 엘바 섬에 유폐된 ‘나폴레옹’, 그리고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과 같이 불의의 감금상태라는 강제된 환경을 버텨내기 위한 어떤 복수와 환상조차 지니지 않은 운명 통제의 새로운 인간상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317호 스위트룸에서 9제곱미터의 다락방으로 옮겨가는 것, 백작, 각하로 불리는 로스토프의 귀족으로서의 삶과의 이별, 기한 없는 감금, 축소된 세계에서 새로운 자기라는 정체성의 재정립이 시작되어야 한다. 비로소 책을 읽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고독을 제공하는 상황에서 로스토프가 펼쳐든 책이 몽테뉴의 『수상록』이란 것은 다분히 해학적이다. 더구나 자신의 운명이 타인의 처분에 달려있을 때 취해야 할 태도를 제시하는 첫 에세이의 내용은 그가 선택할 삶의 방법을 지혜롭게 암시한다.
소설 제목의 ‘신사(Gentleman)'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신분의 복귀와 같은 기대의식이 없는 로스토프의 성향이며,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인식에 기초한 그의 태도, 언행, 몸가짐의 예측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위협당하는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위해 그가 취하는 일련의 행위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귀족의 권위를 상징하는 그의 코밑수염이 불공평함을 항의하는 고객에 의해 한 쪽이 잘려나가는 호텔 이발소에서 벌어지는 최초의 자기 인식에 관한 에피소드와 뜯어진 바지 솔기를 손수 꿰매기 위해 옷 수선실의 마리나와 친구가 되는 장면은 특권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신세계를 수용하고 마침내 새로운 삶의 형상을 직조해내는 아름답기조차 한 인간의 출발을 알린다.
더 이상 그는 각하로 언급되지 않으며, 고객으로서 한없이 우아한 후원자였을 때와 다름없이 식당의 최고 웨이터가 되며, 9살 소녀 ‘니나’와의 우정, 여배우 ‘안나’와의 로맨스는 마냥 안으로 좁혀들기만 하는 벽의 갑갑함을 밖으로 팽창하는 영역으로, 호텔을 러시아 전체로 인식케 함으로써 새로운 전경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는 환경에 지배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때론 굴복하고 또 때론 단호하고 대범한 태도를 취하며 실질적인 일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결의를 유지해 나간다.
어린 소녀 니나의 인도에 의해 호텔 지하에서 지붕 밑에 이르기까지 밑으로 혹은 뒤로, 여기저기를 다니며 공간을 확대해 나가는 삶의 한 순간, 그리고 좁디좁은 다락방을 그 크기와 상관없이 상상하는만큼 넓게 만들어가는 과정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초월하는 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시연이 되어 가슴 뭉클한 숭고한 감정이 되어 날아든다. 그러나 호텔 밖의 세계는 가히 폭력과 공포, 야만이 널뛰는 격동의 시공이며, 니나라는 새로운 세대의 세계이기도 하다.
여기에 슬픔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불가항력적 세계에 놓인 친구 미치카와의 이야기는 메트로폴과 저편의 세상이 되어 그의 존재를 위협한다. 어린시절 로스토프에게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맨체스터 나방의 운명, 그 생존의 적응과 진화의 얘기, 볼셰비키 비밀경찰의 간부 오시프와 러시아의 야만성과 진보의 이념적 관계를 교환하며 쌓는 우정, 영화 《카사블랑카》의 음모적 장면의 해석, 결코 돌아오지 못한 니나와 그녀의 딸 소피아의 돌봄과 사랑, 보람의 이야기들은 삶을 살아 낼 수 있는 가치에 대해 풍부한 사유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32년간 그가 쌓은 재산으로서의 사람들, 로스토프가 소중하게 쌓은 것들의 면면을 응시하는 것은 이 소설의 중요한 목소리일 것이다. 1922년에서 1954년에 이르는 32년이라는 한 인간에겐 거의 모든 시간이랄 수 있는 장구한 세월을 유폐된 호텔이라는 공간에서 숭고한 인간의 열정을 지펴낸 이 소설의 통찰은 우리들에게 무수한 문제적 대화를 지속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상황이 우리 자신의 꿈을 추구하지 못하게 할 경우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 꿈을 추구하기위한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는 로스토프의 확신에 찬 주장은 인간 정신에 대한 작가 토울스의 경외에 찬 애정의 표현이 아닐까? 에이모 토울스는 유쾌한 담론 예술가로 불린다. 아마 책을 읽고 난 뒤에 엄청난 물음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소피아를 도피케한 후 자신의 고향 니즈니노브로고드로 왜 돌아갔을까? 그를 기다리던 회색빛 머리를 한 여인은 과연 누굴까? 1946년의 장에 등장하는 미시카, 오시프, 리차드가 말하는 혁명 시대의 세 가지 관점에 누구의 의견에 동의 하는지? 인용되는 영화 《카사블랑카》의 칵테일 글라스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소설의 주제에 영향을 미치는 무수한 모티브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두고두고 읽힐 작품이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무진장한 영감을 선사해줄 그런 소설이다.
♣ 참 고 : <에이모 토울스 소설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