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 맑스 박사 학위 논문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2
칼 마르크스 지음, 고병권 옮김 / 그린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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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쓰여진 에피쿠로스(B.C.342~B.C.270)’의 자연철학에 대한 이 글은 그의 말처럼 이들에 대한 조금의 선행적 연구도 없었을(저자서문)”만큼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비롯한 우연성의 철학은 주류의 관심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더구나 “‘키케로플루타르크’,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와 같은 일부 인간들이 재잘거린 것을 반복, 변주한 것들만이 있을 뿐이다. 청년 마르크스가 주변의 경계로 내몰려 소외된 사상에 숨을 불어넣은 것은 그의 성품에서 나온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학위 논문, 해당 논문의 주석, 논문에 인용한 저술들의 내용과 그 비판으로 구성되어, 남아있는 저술이 거의 없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면모를 거의 샅샅이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문헌적 가치까지 지니고 있다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이 논문에 대한 갈증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에 대한 보다 진실한 앎을 비롯해서 알튀세르와 강신주가 지적한 마르크스의 마주침의 유물론, 그 본질을 이해하고자 함이었다. 한편 이를 곡해한 뿌리 깊은 몰이해와 악의의 그릇됨을 드러내고 싶은 증오 또한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다.

 

아카데미학파인 키케로(B.C.106~B.C.43)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멸시, 폄훼하였으며, 이후 주류 학계는 이를 그대로 베끼는 것을 자신들의 학문적 소양으로 삼았으니, 이러한 무지가 인류의 지성을 얼마나 퇴행시켰는지는 정말 신만이 알 일이다.

 

그가 가장 뽐내는 자연학에서 완전한 문외한이었다. 그가 세운 자연학은 대부분 데모크리토스의 것들이다. (...) 더 나쁘게 되었고 망쳐졌을 뿐이다.”

에피쿠로스는 거짓말을 했다. 그는 원자가 아주 작은 이탈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했는데, 물론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다.”

-출처: 키케로, 신의 본성에 관하여I.6 and I.26

 

이에 대해 스피노자 무지는 어떤 논증도 아니(에티카1,명제36)”라고 말했다. 무지가 증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뿐이라는 얘기이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면 불가능이니, 망쳤다느니, 거짓말이라며 지워버리려 한다면 아마 오늘 인류의 지식은 백지상태이기 십상일 것이다. 이 곡해된 해석들을 벗어나 에피쿠로스가 데모크리토스를 흉내 낸 엉터리 철학이었는지, 아닌지를 마르크스의 걸음을 따라가 규명해 본다.

 

학위 논문의 핵심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가 무엇이며, 그 차이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한편 학위 논문의 부록으로 첨언된 에피쿠로스의 신학에 대한 플루타르코스 논쟁의 비판을 비롯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루크레티우스’, ‘키케로등 일곱 편의 에피쿠로스 관련 저술들에 대한 비평적 해석은 빛나는 지성의 전시장이라 해도 될 것이다.

 

1. 일반적 차이

 

마르크스는 두 철학자의 차이를 일반적 차이에서 세부적 차이로 그 궁극적 다름을 파헤쳐 들어간다. 그는 학위 논문의 1(이하 1,2부 구분 없이 모두 논문이라 표기함)를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자연학의 동일성은 원자와 허공이라는 원리의 논의 언어만 동일할 뿐, 진리성과 확실성 및 그 적용, 사상과 현실과의 관계 모두에서 대립적 관계(36)”라며 바로 이를 입증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그 첫째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이며, 둘째는 세계 창조에 대한 필연성과 우연성만큼이나 양극단의 대립성을 지닌 차이이다.

 

데모크리토스는 현상은 참된(실재) 것이며, 변동하는 불안전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실재와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 감각적 현실을 주관적 가상으로 만든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감각적 지각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감각의 세계를 객관적 현상으로 파악한다. 결국 에피쿠로스는 진리의 기준은 감각적 지각이고, 이것에 객관적 현상이 조응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차이는 두 사람의 철학하는 방법에서도 커다란 차이로 발생한다.

 

데모크리토스에게 세계는 주관적 가상이기에 실재로 가득한 세계는 별개의 독립적 현실로 존재하게 된다. 데모크리토스가 경험적 관찰, 즉 실증적 지식의 세계를 찾아 당대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진리를 구하러 다닌 이유이다. 이러한 방랑적 여정이 물론 탐구의 열정이긴 하지만 제아무리 멀리 여행을 다녀본들 결코 진리와 그 내용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철학 안에서 만족과 지복을 누렸다.”, 그는 지혜의 완성을 위해서 자신의 정원을 거니는 것으로 족했다.

 

이것은 존재와 존재 상호관계의 반성형식의 차이로 드러난다. 데모크리토스는 필연성이 세계창조자이며 운명이자 법이라 여겼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만물의 지배자로 받아들이는 필연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학자들의 에이마르메네(heimarmene;숙명적인 것)에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신들에 관한 신화를 따르는 것이 낫다.”고 하기까지 했다.


 



2. 세부적 차이

 

두 철학자의 근본적 차이는 에피쿠로스 원자의 우연적 마주침에 대한 비난으로서 데모크리토스를 변호한 키케로의 글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에피쿠로스는 만약 원자들이 (...) 그 운동은 확정적이며

필연적으로 될 것이므로 어떤 것도 우리의 지배 아래 있지 않게 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창안했는데,

이것은 데모크리토스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출처: 키케로 신의 본성에 관하여』 I.26

 

 

키케로의 이러한 몰인식에서 비판한 원자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이란, 원자들의 직선 낙하에서 미세하게 발생한 편위라 말한 에피쿠로스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이 모두 직선으로 아래를 향해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면 원자들의 만남을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들의 만남에 대한 설명 불가능성과 함께 세계 창조 설명의 불가능성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편위를 추정한 것이다. 이 위대한 우연성에 대한 발상이 2000년을 뛰어넘어 청년 마르크스의 비결정론적 유물론의 과학적 토대가 되었다.

 

편위하는 원자에 대한 발상은 원자의 순수한 규정 형식에 있어 아주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정말 너무도 중대한 대목이어서 주의력을 집중하고 사고해야 한다. 낙하하는 모든 물체는 단지 움직이는 점일 뿐이다. 이것들은 아무런 자율성도 지니고 있지 못한 현존재일 뿐이다. 즉 이 현존재 안에서 점은 개별성을 잃는다. 직선으로 낙하하는 원자는 그 직선상에 사실 실존하지 않으며, 고체성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허공이 공간적으로 비어버린 것이게 된다. 여기서 천재성이 빛을 발한다.

 

공간의 상호 외재성(外在性)에 맞서 자신을 주장하는 고체성, 내포성은 마치 현실적인 자연 속에서 시간이 그런 것처럼 그 전 영역에 걸쳐서 공간을 부정하는 원리에서만 원자에 부가 될 수 있다.” - 본문 75

 

이 말은 원자와 대립하는 상대적 실존, 다시 말해서 그것이 부정해야만 하는 현존재는 직선이다. 이 운동의 직접적 부정은 하나의 다른 운동. 바로 공간적으로 자신을 표상하는 직선으로부터의 편위라는 것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원자의 편위는 결정론적, 필연적, 숙명론적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것은 에피쿠로스의 자연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사유이다. 이제 스토아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에피쿠로스를 맹렬하게 왜곡하고 비난한 직접적 이유를 알게 된다.

 

원자와 허공이라는 총체성 안에서 자율과 자유를 지닌 개별성의 현존재가 출현한다는 우연성의 철학은 곧 신은 세계로부터 벗어나 관여치 않는 것이며, 설사 신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신은 세계의 바깥에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데모크리토스를 맹목적으로 베낀 거짓의 엉터리 철학으로 매도한 키케로를 비롯한 무수한 스토아주의자들은 사실 무지하기도 했지만, 혹여 어렴풋이 알았더라도 이 사상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란 단지 현상계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적 규정에 불과하지만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세계 원리 자체의 결과들을 사유할 수 있는 데까지 나간 철학이다.

 

에피쿠로스는 그의 자연학에서 현상의 절대적 형식으로서 시간을 설명했으며, 천체들에 대한 종교적 태도를 주장하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의견을 반박하였다. 마르크스의 학위 논문 중 이 두 챕터에 대해서는 후일 소회를 기술하게되는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철학의 차이에 대한 마르크스 관점에 대한 소감은 여기서 맺기로 한다.

 

3. 결어: 마주침의 유물론

 

마르크스의 사후에 그의 사상, 즉 변증법적 법칙에 따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가 정치나 법률 등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옛 소련의 철학자 플레하노프가 만든 신조어이다. 이를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철학을 부여하려는 시도로서 마르크스의 사상인 것처럼 굳어져왔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철학을 변증법적 유물론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으며, 더구나 마르크스는 물질적 조건이나 환경이 압도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헤쳐 나갈 능동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대상적 활동이라(출처: 강신주 , 철학VS실천, 561)”고 부르기까지 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결정론적 사유이다. 비결정론적 유물론자인 마르크스에게 멍청한 (1)엥겔스가 한 대표적인 무지의 소치 중 하나이다. 다시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돌아가면 에피쿠로스의 기본적인 테제가 명료하게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우연성, 즉 비선재성(非先在性)의 사유와 평행 낙하하는 원자의 극히 미세한 빗나감, 클리나멘(clinamen;편위)의 철학적 중대성을 재발견하게 된다.

 

세계의 기원인 마주침의 유물론’, 편위가 없었더라면 밀도도 실존도 없던 추상적 요소에 불과했을 원자들의 현실성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루이 알튀세르 ”, 철학과 맑스주의, 39)“이라는 점이다. 원자들의 마주침은 오늘 인간을 비롯한 자연과 세계, 우주의 실존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 우발성의 철학이야말로 돈 많은 사람과 벌거벗은 노동력의 마주침을 고착화하려는 자본주의 응고(凝固)의 결의란 허위에 불과한 것임을 밝혀준다. 원자화된 개인들은 스스로 자유를 쟁취한 개인들이고, 이런 자유로운 개인들에게만 새로운 클리나멘과 새로운 마주침을 희망할 수(강신주 , 철학VS실천,577)”있는 이유 있음의 근거이다.

 

에피쿠로스 원자의 편위는 이 세계를 이해하고 인간 개체가 자본주의라는 거시 세계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전 시킬 수 있다는 해체와 새로운 응고의 기회라는 실현의 여지를 꿈꾸게 해준다. 이 세계에는 무수한 가짜들이 무진장 설쳐댄다. 진리의 추구는 외면하고 권력과 영예의 차지를 위해 왜곡과 거짓, 위선을 밥 처먹듯 해대는 인간들 무리 말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새로운 클리나멘으로 인한 마주침을 생성하며 불의한 귄위에 마주서는 원자들, 개인들이 작은 촛불을 들어 올리고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그 마주침에 응원을 보내며 감상을 맺는다.

 


(1) : 엥겔스는 마르크스 사후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을 출간하면서 이 책에서 유물론적 변증법을 마르크스 철학이라 규정한다. 영원한 2인자였던 엥겔스의 자기 권위 확보라는 명예를 위한 그야말로 멍청한 행위의 소산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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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 쓰는 법 - 이야기에 강력한 긴장감을 불어넣는 스토리 창작법 예비 작가를 전업 작가로 만드는 작법서 시리즈 1
조단 E. 로젠펠드 지음, 정미화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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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나면, 아니 읽어나가면서 이 책이 항상 곁에 머무는 이야기 창작의 안내서로 책장의 눈에 잘 띄는 고정된 장소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대감으로 독자를 매혹시키는 이야기 만들기에 머무는 기교적 방법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체에서부터 장면 구성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하물며 이야기에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는 중요한 사건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플롯 포인트의 구체적 설정까지 저자의 세심함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을 정도이다.

 

시중에 널린 또 하나의 흔한 글쓰기 책이 아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야기 창작의 모든 요소를 알려주려는, 그래서 진정 완성도 높은 작품을 쓸 수 있도록 100 여 작품이 넘는 인용을 통해 해당 설명이 어떻게 실제 쓰여 졌는지를 확인케 하고 그것이 어떤 정서적 효과와 의미를 지니는지 까지 알려준다.

 

41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야말로 글쓰기의 비기(秘記)들을 무한 방출한다. 어떻게 독자에게 작품에 흥미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책장을 넘기게 할 수 있는지, 이야기 속 인물들의 성격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지, 이야기의 장면들, 여정을 구성하는 플롯의 설정과 그 전환 지점들을 어떻게 흡입력 있게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그리고 문장의 표현 방법들의 다양성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저자가 기술한 글쓰기 정보들을 섭렵할 수만 있다면 멋진 이야기 한 편을 창작해낼 수 있을 정도라 할 수 있다.

 

혹여 소홀히 할 만 한 부분까지 지적하면서 진정성 있는 글쓰기를 놓치지 않도록 가르쳐 준다. 사실 순간순간 염두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너무 많은 정보로 쌓여 체화(體化)되기에 벅찰 정도이다. 때문에 이야기 구성 단계마다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하여 두기도 한다. 일례로 작품의 어떤 한 장면도 주인공의 목표와 의도를 지니고 있어야(321)” 한다는 조언과 함께 어떻게 생동감 있게 쓰고 있는지를 행동, 갈등의 기미, 감정적 혼란, 긴장감의 축적 등에 해당하는 기성 작가의 글을 인용하여 그 이해를 세밀하게 집어주는 식이다.


 



국내 독자에게도 잘 알려진 리안 모리아티정말 지독한 오후의 한 장면은 주인공의 행동이 어떻게 즉각 생동감을 조성하고 독자를 끌어들이는지를 보여준다.

 

“‘놀라서 죽을 뻔 했어클레멘타인이 가슴에 손을 대며 말했다.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그녀는 자신의 말이 비난처럼 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321

 

이 같은 세밀한 글쓰기 정보를 접하고 있다 보면, 문득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 작품들에서 작가가 왜 그 장면을 넣었는지, 소설의 시작 문장들이 무엇을 암시하고자 했던 것인지, 전체적인 구조와 함께 주인공의 심적 변화와 지향하고자 하는 목적의 접근을 위해 어떻게 점진적으로 표현되었는지를 떠올려보게 된다. 이야기 만들기의 세밀한 조언이기도 하지만 이렇듯 작품을 대하는 독자로서 작가가 마련한 장치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만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 삶의 지리멸렬한 이야기라면 대체 누가 관심을 가지고 읽거나 들으려 할까? 저자는 이야기 창작, 즉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극적 상황을 흥미롭게 간추리고 날카롭고 강렬하게 정미한 버전의 현실이라 하고 있다. 그렇다면 평범한 이야기가 비범한 이야기가 되도록 하는 절대적 요소는 무엇일까?

 

위험은 긴장감을 조성하는 최상의 도구다.” -15

 

아무리 잘 꿰어진 흥미진진한 플롯으로 구성된 이야기라도 긴장감이라는 정서적 중추가 없다면 김빠진 맥주처럼 밋밋해져 이내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누군가의 주목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이야기란 이 긴장감을 인물, 장면, 대사, 하다못해 지문이나 보완적 설명인 뒷이야기에 조차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긴장감이란 스릴러와 같은 장르 소설뿐 아니라 순수문학까지 포함하는 모든 스토리텔링의 절대적 요소라는 점이다. 그것은 위험, 갈등, 불확실성, 그리고 지연(보류)과 같은 형태로 부여되는데, 책은 바로 이러한 형태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것은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에 신체 감각과 은유를 이용해 감정을 전달하는 글쓰기, 주인공을 압박하는 외부의 힘, 통제력을 빼앗긴 무기력해진 주인공을 표현하는 것들로 구체화된다.

 

모든 대화에는 다 이유가 있다.” - 216

 

이처럼 하나의 필요 요소를 실현하기 위해 그 하위 요소들과 실제적 표현 방법에 이르는 예화까지 알려주는 책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야기 속에 어떤 대화의 장면이 있어야 할 경우 인물에 대한 정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너절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고 알려주듯이 대화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글쓰기의 내용들로부터 플롯의 핵심 요소인 전환점의 네 가지 핵심 단계의 구체화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전() 단계에서 긴장의 실타래를 놓치지 않는 글쓰기 방식을 터득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있다.

 

이 책은 정말 이야기 창작의 야전(野戰)지침서이다. 인물의 내적 갈등 조성, 배경의 형상화, 문장의 근육이자 에너지인 문체의 능동적 생동감 만들기까지 이 한 권의 책은 창작을 준비하는 이들이나 작품을 더욱 알차게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무한한 영감과 앎을 가져다 줄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기대치 못한 알짜배기 책을 읽게 된 우연의 선택에 감사하게 되는 몇 안 되는 스토리텔링 작법의 수작이라 하고 싶다. 인용된 수많은 작품들의 유혹을 견뎌내는 것은 이 책이 야기한 쉽지 않은 고난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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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이야기 3 : 건국의 진통 1780~1789 -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 미국인 이야기 3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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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미국인 이야기 1~3권 통합 리뷰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기간(1775~1783)을 전후한 13개 식민지민의 정체성 형성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세 권의 역사서의 마지막 권이다. 남부지역 공략으로 전장을 옮긴 영국군과 아메리카 민병대- 대륙군과의 주요 전투의 전황들, 그리고 영국군의 식민지 아메리카에서의 철수를 야기한 아메리카-프랑스 연합군의 승리에 이르는 전쟁사와 연방정부의 구상 및 연방 헌법의 제정에 얽힌 13개 식민지 대표들의 신념을 구성하는 이해관계, 이념의 이상(理想)을 통해 아메리카 식민지민의 영광스러운 대의(大義)’의 실체를 추적한다.

 

1. 아메리카 독립혁명의 이질성

 

우선 영국령으로 존속하고 있던 13개 식민지의 독립 전쟁이 여느 역사적 전쟁과 차별되는 점을 눈 여겨 보아야 할 것 같다. 아메리카 식민지민은 소수의 이민족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영국인이었다는 점이며, 국가라고 부를만한 이렇다 할 통합된 중앙 조직이 없었으며, 또한 영국과 이질적인 문화적 기반을 지니고 있는 곳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라가 국가적 정체성을 지닌 이민족의 국가인 조선을 침입하여 종속시켜 이의 부당한 노예화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것과는 아주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적, 민족적 동일성을 지닌 인민들이 모국으로부터 분리하여 별개의 독립된 국가를 새로이 수립하겠다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다만 17세기부터 시작된 신대륙으로 이주 정착한 청교도 세대의 종교적 정신과 시간적 결과가 만들어낸 문화적 이질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던 과정에 발생한 사건이라 이해된다.

 

이것의 발단은 수입 물품 과세라는 모국 의회의 정책에 대한 반발이라 하겠지만 이 반발은 다분히 대농장, 거대 상업(무역)상으로 대표되는 당시 지배계층 이해관계의 갈등에서 연원한 것이다. 여기에 제퍼슨이나 페인과 같은 정치 이론가들의 노예화, 독립, 자유 등을 화두로 하는 담론이 이러한 갈등에 이념적 권위를 부여했으며, 이러한 권위적 이념이 기독교 개신교 세계인 식민지민에게 독립의 당위성으로 인식, 확산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존재하지도 않는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강요하며, 전쟁 반대자에 대한 가혹한 처형과 재산 몰수 행위 등은 이들이 대의라고 불렀던 자유, 평등의 가치와는 동떨어진 모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들이 자명한 천부적 권리란 부른 재산의 자유는 그래서 이들이 외쳤던 자유의 본질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자유는 인간 평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전쟁 기간 중에도 대토지주의 소작농 착취는 지속되었으며, 노예무역과 인신 매매행위가 성행하였음은 결코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투표권 역시 토지 등 일정한 재산을 소유한 백인 남성에게만 부여되었다는 점은 엘리트 지배계층의 평등에 대한 이념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전쟁은 누가했나? 인민 대중의 大義라는 것은 정말 실재한 것일까?

 

2권에는 아메리카 민중은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분열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립 전쟁에 반대했다.(2-196)”1775년의 아메리카 인민들의 독립전쟁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를 전하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인들은 왜 영국군과 싸웠을까? 목숨을 잃게 될 수 있는 전장에 참여하여 눈앞의 공포에 맞서게 한 원천은 무엇이었을까는 미국인의 정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전쟁기간 동원된 아메리카군 식민지 민병대 및 대륙군의 누적 병력 수는 대략 2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들 중 정규군이라 할 수 있는 대륙군의 경우 대다수는 돈을 내고 군복무를 면제받은 상류층을 대신해 입대한 사람들이었(3-97)”으며, 민병대원은 3개월의 짧은 복무기간이었다고 한다. 전쟁 중 민병대 조직을 관리하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의 탄식이나 혐오가 수시로 등장하듯이 아메리카인들의 개인적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믿음은 군대라는 지배집단과 태생적 적대관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인민 대중의 자유와 지배계층의 자유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인민 대중의 자유는 인신의 자유를 포함하는 광의의 자유이지만 지배 계층의 자유는 재산의 자유에 중점을 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인민 대중을 향해 식민지의 노예화라는 모국의 음모로부터 해방이라는 폭넓은 자유를 말하지만 이것은 단지 인민의 심리적 봉기를 선동하는 언어로 활용될 뿐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를 위해 모국 영국과 싸우는 병사가 되는 것은 이와는 결이 다른 문제이다.

 

자신의 생명을 요구하는 전쟁에 참여한다는 공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과 개인의 자유라는 사적 욕구의 충돌, 나아가 자신의 목숨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결코 수월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상류층을 대신해 입대보상금 10달러와 독립을 성취했을 경우 미개척지 토지 분배의 약속을 믿고 입대한 사람들이 어떤 계층이었는지를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어쨌든 식민지 군 병력은 사회 하층 계급 및 지극히 평범한 일반 인민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 독립의 필연성을 주장했던 토머스 페인조차도 전투는 병사들의 성품과 영혼을 시험(2-103)”하는 도덕적 미덕의 실천장() 이었다고 했듯이 군 입대는 인민들에게 아메리카인이 된다는 것의 잔인한 고통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지역의 징병관들이 할당된 병력을 전부 대체자로 채우기도(3-106)” 했을 정도로 복무자들은 가난한자, 재산이 없는 자들로 구성하였음은 주목할 지점이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전쟁을 선언, 독려했던 당시 식민지 연합 의회의 성격을 지녔던 대륙회의 대표자들이나 주 의회 대표라는 상류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이익, 즉 영국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한 독립적 이익의 추구라는 재산의 자유를 위해 이해관계 없는 인민들을 도구로 이용했다는 의미를 부정할 수 없다.

 

자유와 평등, 어떠한 속박의 강제가 없는 독립이라는 대의가 인민의 참전 의지라 설명하고 있으나, 이 영광스럽다는 독립 전쟁의 대의가 인민 대중의 의지였다고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다만 전투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쌓아올려진 전우애와 청교도, 즉 성령에 대한 믿음 등이 전장에서 병사들의 열정과 광기의 저변이었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해가 될 것 같다. 사실 독립혁명전쟁을 이끌었던 지배 계층이 내건 영광스러운 대의는 그 귀결이 승리가 되었기에 가능한 언어이지 이것이 인민 대중의 그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반()역사적 관점인 것만 같다. 영국의 일방적인 과세 부과 등 식민지민에 대한 과도한 복종의 요구가 저항의 요인이었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전쟁을 결정하고 전개했던 지배계급의 실체와 인민대중의 인식과의 괴리, 그리고 이러한 양상을 낳는 당대 식민지의 사회 계급의 모순을 얘기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위대하다고 믿었기에 영광스러운이라는 수사가 가능했으며, 그럼으로써 공동의 대의였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아메리카 백인 총인구의 19퍼센트 정도가 국왕파로 공동의 대의에 반대했으니 절대 다수의 인민이 대의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으로의 이분법은 진실을 호도하기 쉽다. 어떤 다양한 이념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언어에 가두어 단일성으로 범주화하면 왜곡이 발생한다. 국왕파가 아니거나 이러한 파당에 대한 관념이 없는 많은 사람들의 진의는 사라지고 만다. 실제로 전쟁 중 대지주의 악착스런 착취에 소작농들의 저항, 반란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으며, 이를 제압하는 것이 민병대(3-193)”의 일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소작농의 자유에 반대하면서 독립전쟁은 찬성하는 올버니 카운티의 대지주 리빙스턴가문처럼 식민지 지배계급의 평등과 자유는 그 언어의 표면과 실체적 내용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해도 결코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소위 게릴라식 치고 빠지는 도망치기 전술과 같은 적군에 대한 피로감의 누적을 도모했던 소수의 식민지군 리더들의 용병술과 살기 힘들어 군에 입대한 인민들의 전쟁 자체에 대한 반감의 확산이 오히려 대중적 인식이었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기술이지 않을까?

 

실제 전투 병력의 동원, 식품 및 군복을 비롯한 군수 물자의 지원, 군 의료시설의 확립 등에서 각 식민지 정부나 대륙회의는 이해의 상충을 비롯해 부패와 부실이 만연했으며, 실제 제대로 된 병참의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맨발로 전장을 걸어 다녀야 하는 병사들로부터 흐른 피로 그들이 걸은 길에는 피로 적셔져 있었다는 묘사처럼 하류 계층인 병사들에 대한 지배계급인 정부의 지원은 인색한 모습을 보인다. 아마 자신들의 자식이 전장에 참여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병참상의 난맥상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애국자로 낙인찍어 대역죄로 처벌하며 대중의 이익에 반하는 말이나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반역 은닉죄를 씌워 내부 적들을 색출, 처형 및 재산 몰수를 자행했던 것 역시 독립전쟁은 대의라는 등식을 만들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이러한 아메리카 식민지의 전쟁 이면의 속사정에도 불구하고 1781년 요크타운의 대규모 전투에서 아메리카-프랑스 연합군은 영국군에게 승리함으로써 독립전쟁의 전황은 서서히 영국군의 철수로 이어진다. 8년이나 계속되었던 규율과 격리의 피로감 및 전쟁에 대한 불분명한 목적의식으로 동족과 싸워야 하는 영국군 지휘부의 감정적 이완, 전쟁 내내 지속된 영국 의회와 내각의 산만하고 무능한 전략이 결합한 식민지 반란군 진압이라는 안일한 출병은 영국의 실패로 마무리된다.

 

사실 식민지 아메리카의 승리라기보다는 영국의 자멸에 가까운 전쟁이었다고 정의하는 것이 옳은 진술이랄 수 있겠다. 영국과 아메리카가 178393일 최종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길고 지루했던 전쟁을 막을 내린다. 그러나 저마다의 정부조직과 의회를 가진 13개 식민지라는 이합집산의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를 하나의 국가적 기관으로 정립하는 문제는 다시금 이들을 시험 무대로 올린다.

 

3. 자유와 평등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

 

1783년 초에는 대륙군 장교들의 쿠데타 모의 움직임이 발생한다. 몇 달째 봉급 지급도 하지 않으며 전쟁 참여에 대한 약속된 보상은 물론 대륙회의가 연금 지급 반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쿠데타로 정의하는 것에서 어떤 악의를 느끼게 된다. 이들은 권력을 지향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합당한 돈을 원했으니 이를테면 계약 이행을 요구하는 연대를 구성하는 모임에 불과했다고 여겨진다. 결국 이들에게 위협을 느낀 지역 정부의 요청으로 워싱턴의 조국에 대한 순수한 의도의 신뢰, 신성한 영예(3-262)에 대한 호소로 일단락되었으나, 각 주 정부 권력의 의혹어린 시선이 확대되는 듯 여겨지자 워싱턴은 17831219일 임시정부인 대륙회의가 있는 메릴랜드 아나폴리스에서 군사권을 대륙회의에 무조건 이양하는 상징적 행사를 한다.

 

제게 부여된 일을 끝마친 지금, 저는 위대한 작전의 무대에서 내려오고자 합니다. ....

이 장엄한 기관에 애정을 담아 작별을 고합니다. 여기서 저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모든 공직에서 떠나고자 합니다,” - 워싱턴의 사직 연설 중에서, 3-263

 

 

저자는 기술한다. 독립전쟁 기간 동안 대륙회의는 군대를 전적으로 신뢰한 적은 거의 없었다.(3-264)” 워싱턴의 군대 해산에도 불구하고 대륙회의는 참전 용사들이 천하고 인색한 자들에 지니지 않는다.”며 의심스러운 조직이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막상 인민들의 참담한 희생을 요구했던 전쟁이 승리로 귀결되자 지배계급은 안색을 바꾸기 시작한다.

 

참전 장교들에 대한 연금 지급은 사리분별 없는 낭비 되었으며, 약속되었던 토지는 지급되지 않았다. 소위 대의가 달성되자 자신들의 이익 추구라는 혁명전쟁 이전의 이기심으로 선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대륙회의가 안은 국가 부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각 주 정부들은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륙회의라는 임시 정부는 부채를 갚기 위해서 수입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시도하지만 13개 식민지 정부는 대륙회의 과세권 없음을 이유로 거부한다.

 

한편 미국과 영국의 평화조약을 비롯한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던 스페인은 미시시피강 동쪽 영토와 강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통상조약을 요구하고, 이와 관련된 주정부들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조약 체결 의도는 무위로 돌아간다. 저마다의 지역적 이해관계가 다른 주들의 이기심만으로는 재정, 상업, 각종 공공정책의 수립과 실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셰이즈 반란이라 불리는 농민 무장 봉기가 발생하기 까지 한다. 즉 사익추구에 매몰된 지배계층인 주 정부 대표들의 위기의식은 통합된 중앙 기구의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1788년에 최소 7개주가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했으며, 자체 헌법을 제정하고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주 정부들은 자신들의 채무를 중앙 정부에 떠넘기거나, 노예무역의 지속, 농민의 착취 등을 지속하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통합 조직의 필요가 절실해진 것이다.

 

잠시 각 주의 통치 현상을 들여다보자. 다음은 고유의 주권과 자유, 독립, 권력, 사법권을 가진 각 주의 통치 계급의 전형적 면모라 할 것이다. 13개 식민지 중 가장 큰 주인 버지니아의 경우 해당 지역 인구의 5퍼센트도 되지 않는 약 40개의 주요 가문이 법원, 의회, 정부의 주요 자리를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나 자신과 같은 지위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3-303)” 고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통치 계급은 인민대중에 결코 개방적인 곳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주의 자유에 대한 일면을 보면 구역질나게 역설적인 실상을 접하게 된다.


 



4. 제정 헌법의 구성과 인민에 대한 이해 - 미국인의 정체성이란?

 

전쟁 후에는 더욱 극렬하게 노예무역을 하고, 노예제를 영속화하는 정책을 확립하곤 노예에 대한 잔혹성과 참상의 현시(現示)로 백인 인민 대중이 상대적 자유에 감사케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들이 이룬 독립의 현실이다. 독립 전쟁의 도발은 어쩌면 실패하면 그만이고, 성공하면 자신들 몫의 증가라는 탐욕이 아니었을까 라는 의심을 저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에 대한 정신, 인권의 존중이란 개념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천부적 인권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생각하는 인민과 재산권의 자유, 그들만의 자유를 생각하는 엘리트 지배계급의 자유의 개념에 대한 괴리는 연방 헌법 제정을 위한 논쟁에서 다시금 뚜렷한 갈등의 양상으로 표면화된다. 노예제는 재산의 중요성에 지배계급이 얼마나 집착하였는지에 대한 반증이자 자유의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한 입증이기도 하다. 즉 노예제는 재산 있는 백인의 평등, 자유민의 조건이었음을 의미한다.

 

버지니아 제헌의회의 권리장전을 보면 그들의 자유와 평등의 의미가 더욱 명료해진다. 재산을 획득하고 소유하며 행복과 안전을 추구해 획득하는 삶과 자유를 누리는 것(3-306)” 이는 주권이 제아무리 인민에게 있고, 천부적으로 동등하다고 할지언정, 재산의 획득과 소유를 하지 못한 인간은 동등할 수도 없으며, 자유도 없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권리장전과 헌법에 대한 비준이나 거부의 기회가 인민에게 주어지지도 않았으며, 자신들끼리 결정하고, 그들만의 리그인 의회에서 그들끼리 주지사를 선출했다.

 

 

1787년 이러한 사람들이 각 주의 대표로 514일 필라델피아에 모이기로 하였으나, 버지니아 대표인 제임스 매디슨을 비롯한 5개 주의 대표만이 도착했을 뿐이었다. 즉 중앙정부 구성과 연방 헌법 제정에 많은 주가 회의적이었다는 의미이다. 매디슨이란 인물은 다수의 폭정 우려라는 이유로 인민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의 입헌 민주주의를 당연한 듯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인민을 배제한 헌법을 상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버지니아 대표들의 면모를 보면, 판사 존 블레어, 의사 존 매클러그, 두 사람 모두 엄청난 규모의 농지를 소유한 농장주였다.((3-336)” 펜실베니아 대표인 제임스 윌슨의 면모를 볼까. 그 역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금전적 수입에 욕심(3-338)”이 많았던 사람이다.

 

물론 이러한 재산가들만 헌법 제정을 위한 대표 모임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다시 말해 중앙 정부의 권한 부여정도, 헌법의 조항 정리에 자신들에게 불이익한 내용이 끼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중앙정부를 강력하게 하는 것이 내게 유익한가, 아니면 약한 것이 유리한가, 연방의회의 하원 선출에 있어 인구 비례로 하는 것이 유익한가, 주의 크기와 상관없이 동등하게 배분하는 것이 유익한가, 노예무역의 합법성을 적시케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노예를 투표인구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그렇다면 노예 몇 명이 백인 한 명과 같은 것이어야 하는가, 투표권은 누구에게 부여해야 하는가, 상원은 누가 선출해야 하는가, 인민이 직접 선출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원이 선출할 것인가, 상원의 권리는 어디까지여야 하나, 행정부 수반은 1인이어야 하나 다수여야 하나, 수반의 권한은 무엇이어야 하나, 의회의 권리는 어디까지여야 하나 등등 모든 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전의 양상을 띤다.

 

인구비례와 대표성으로 압축되는 논의의 쟁점은 쉽사리 합의를 이뤄내지 못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앙정부도 없는 무정부 상태의 미국이란 이합집산의 식민지가 몰락하겠다는 위기를 감지했던 모양이다. 재정적 부담이나 선거인을 결정할 때 인구 다섯 명의 노예를 세 명의 자유인으로 본다는 각 주 평등성에 대한 논의의 예는 이들이 인민을 재산적 가치와 그 등가물로 여기고 있음을 증명하는 전형적인 일례라 할 것이다.

 

평등의 정신에 대한 메사추세츠 주의 대표인 엘브리지 게이먼의 주장을 살펴보자.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폐해는 민주주의 과도함에서 나온다.(3-349)” 이처럼 평등을 매도하는 주장이 그대로 제정 헌법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민에 대한 강한 반감은 코네티컷, 뉴욕 주등 여러 대표들의 입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발설되었다. 로져 셔먼은 보통 선거에 반대(3-348)”하면서, “그들에게는 정부에 관해 알아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들은 정보를 원하지만 지속적으로 현혹된다.(3-349)”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물며 연방 하원 의원도 인민이 아닌 주 의회에서 선출해야 한다고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표인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는 주장했다.

 

미국의 제정 헌법이란 그들의 정체성, 이른바 그들이 얻고, 되고 싶은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추하기 이를 데 없었다. 5월에 시작된 이들 대표들의 헌법 제정 논의는 4개월여의 논쟁 끝에 98일 종료된다. 거창한 대의를 말하며, 자유와 평등, 위대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이들이 입안한 헌법 초안을 보며 불편함과 죄책감을 느낀 이들이 물론 있었다. 이와 달리 노예 무역 보호 조항이 누락되면 헌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사우스캐롤라이이나와 조지아 대표같은 남부 지역 주들도 있었다.

 

이러한 헌법에 대해 혐오감을 강력하게 드러낸 대표의 발언은 당시 헌법 제정 위원회 대표들이 어떤 이들의 이익을 위해 굴러가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농장주의 비위를 맞추는 일....그런 부류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부당하며, 노예 소유주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큰 죄악(3-369)”이라며, “소유주를 비열한 폭군이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표들 거의 대부분이 노예 소유주였으니 그네들이 말하는 대의를 꺾기에는 너무 미약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대표들은 917일 모두 서명을 완료하고 비준을 행위에 들어갔다.

 

1787년 이 헌법에 대한 비판은 그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독립혁명의 원칙에 헌신하지 않았다는 회의 대표자들에 대한 비난에서부터, 공공안보를 장악한 인물들에 의한 음모의 산물, 자신이 속한 계층의 주머니를 채우는데 열중한 결과물 등등 이었다. 저자 로버트 미들코프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 반역사적인 편협한 시각이라고 주장한다. 현재의 기준에 놓고 맞지 않는 역사적 실재를 논의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것이다. 독립을 성취하고 평화가 성립되면 독립과 연관된 문제들도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혁명전쟁 시에 중요했던 것이 평화시에는 결코 중요한 맥락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자유나 평등의 이념이 전쟁 기간과 평화의 기간에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정말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독립전쟁을 왜 해야 했나? 그리고 인민 대중이 왜 이 전쟁의 중요 병력으로 참전해야 했나?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인민 대중은 문자 그대로 지배계급이 이끄는 사회를 위해 그저 소용된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들 대중은 지배계급, 엘리트 담론가들이 주창했던 자유, 평등,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한 전쟁에 참여한 것이기에 평화 시에 이 시초의 목적은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욕망, 위대한 미국이라는 대의에 끼워 맞추려는 비열한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 헌법을 거부했던 사람들의 주장에 오히려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양원제 연방의회에 대한 지적인 듯한 헌법 뒤에 숨은 전제적인 귀족정 또는 가면을 쓴 귀족정이라거나, 권위주의적인 목표를 은폐하려는 열망에서 나온 산물(3-386)”에 가깝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석연찮은 제정 헌법은 어떻게 비준되었을까? 주 의회에서 자기들끼리 비준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민 대중은 자신들의 권리 행사를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야만적인 귀족 정치가 민주주의 외피를 뒤집어 쓴 것이 미국의 제정 헌법, 그네들의 정체성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인민대중의 직접 선거가 아닌 선거인단 선출 투표가 되어 인민의 직접적인 대표자 선출을 막았던 것 역시 이 제정헌법의 소산이다.

 

선거인단은 일반 인민보다 지적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인식이다. 이것을 화려한 수사로 최선보다 차선을 선택한 미국인의 슬기로움이라고 자찬한다. 오늘의 미국인, 그들의 정체성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개인주의는 사유 재산 보호의 자유와 맞물려 있으며, 인종 차별의 현재 진행형은 뿌리 깊은 백인 중심주의의 그네들의 헌법적 정신이다. 또한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독립적으로 각 주가 소유하고 있는 지역 분리적 정신은 중앙 정부인 연방과의 이해관계라는 애초의 손익판단에 의거한 당대 타협의 산물이다. 이렇듯 정치 기구의 조직 구성에 있어서 조차 그들의 실용주의는 아주 깊게 스며있다. 조지 부시, 도널드 트럼프 같은 막대한 부를 소유한 가문의 자식들이 행정권의 수반이 될 수 있는 정체성의 토대를 수긍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무분별하게 미국의 정치 제도에 대한 무조건적 숭배와 도입이 지닌 결함들의 이해는 물론 오늘의 미국이라는 국가를 이해하는 귀중한 참조 문헌이라 하는데 주저치 않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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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전, 10권 131



에피쿠로스 철학에 대해 전해져오는 문헌이 워낙 적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그의 철학을 접할 수 있는 우리 말 번역 자료도 극히 미미하다보니 일반적 곡해가 진실로 둔갑해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는 형편이다. 왜 그의 사상에 성적 문란과 방탕함이란 꼬리표가 붙었는지, 육체적 쾌락을 좇는 음울한 변경 조직의 쓰레기 사상이 되었는지를 확인하고픈 충동을 물리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썼다고 전해오는 세 편의 편지 내용과 함께 당대 에피쿠로스를 음해, 매도하던 스토아주의자들의 거짓 소문의 진상을 말하고 있는 2세기 말 3세기 초에 써진 것으로 추정되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철학자전혹은 그리스 철학자 열전이란 이름으로 옮겨지고 있는 책이 부분적으로 이 충동을 해소해주고 있다.

 

중세 유력 사본(寫本)중 하나는 철학자들의 생애와 학설의 집성 10으로 책이름을 가지고 있고, 책의 수록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저명한 사람들의 생애와 의견 및 각 학파 학설의 요약적 집성이란 표제를 붙이고 있기도 하다고 한다. 국내 한글 번역본 또한 이들의 제목을 각기 따르고 있는데, 나남 출판에서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제목으로 2권으로 출간한 것이 있으며, 동서문화사에서는 영문번역 대본의 제목을 따라 그리스 철학자 열전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다.

 

이 책은 철학 학파별로 구분하여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원전 3세기 전후에 활동한 에피쿠로스는 마지막 권을 차지하고 있다. 책의 저자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피쿠로스에 대해 악의를 품고 있던 스토아파 인물들의 저열한 비난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1. 누가 에피쿠로스를 왜곡했나? - 스토아파의 비난

 

103절에서 8절까지 소개되고 있는 스토아파의 비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합창가무단 무용수 출신의 냉소주의의 회의파 철학자로 불리는 티몬이란 자의 사악한 주장으로 시작된다. 이 자는 에피쿠로스를 자연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뒤처지고 창피함도 모르는 개 같은 사내(10-3)”라며 가장 환경이 나쁜 자라고 폄훼한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명문 필라이다이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실제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한 그 어떤 자연 철학자들보다 뛰어나며 독창적인 학문을 열었음이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악의는 스토아파들에 의해 무수한 거짓말로 왜곡되어 매도된다. 마치 한국의 추한 공작 정치배들과 빼닮은 모습이다. 스토아파의 디오티모스란 자는 자신의 동료인 크리시포스(스토아파)’의 편지를 에피쿠로스의 것으로 편집(*무려 50통을 위조하였단다)하여 기만적 비난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창녀 레온티온에게 나의 구세주이고 주인인 분이여, (...) 나의 사랑스런 티온이여라고 편지를 썼다든가, 유부녀인 테미스타에게 만일 당신이 나에게 와주시지 않는다면 나 자신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으므로 (...) 어디라도 달려 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10-5)”라며 외설스런 사내라고 조작하여 매도하는 식이다. 이에 가세하여 포세이도이오스, 니콜라오스, 소티온, 테오도로스 등 스토아파 인물들은 에피쿠로스의 쾌락과 원자(아톰)에 대한 사상은 남의 것을 훔쳐 쓴 것에 불과한 아무런 사상도 없는 것이라 비난하곤 매춘부 뚜쟁이란 낙인까지 찍어댔다고 한다. 또한 에피쿠로스의 철학 정원에는 역겨운 비밀 의식(秘儀)을 행하는 곳이라는 누명까지 씌워댔다는 것이다.

 

이 책이 써진 연대를 서기 2세기 말에서 3세기 중엽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는 기독교가 스토아 철학과 융합하여 자신들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하던 시기이다. 원자론을 말하는 자연철학인 에피쿠로스에 대한 탄압이 극에 이를 때였다는 점에서 스토아파 인물들의 왜곡된 비난이 얼마나 억척스럽게 가해졌는지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저자 디오게네스는 이들의 비난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에피쿠로스를 비방하고 있는 사람들은 상도(常道)를 벗어나고(10-9)”있으며, 그 어느 누구도 미치지 못할 친절과 고귀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인물이었음을 당대의 증거들을 통해 반박 지적하고 있다. 그를 찬양하여 아테네에 세워진 동상, 다른 모든 학파의 학통이 끊어졌으나 여전히 많은 제자들에 의해 이어지는 학통과 헤아릴 수 없는 학두(學頭)의 배출을 사실로 들고 있다.

 

남 몰래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이 1 만 번이나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앞으로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발견 되지 않고 있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삶을 마칠 때까지 모르기 때문이다.” (10-35)

 

특히 에피쿠로스의 편지글은 시작될 때 사용하는 인사말의 특이성을 예로 들며, 스토아파들을 비롯한 에피쿠로스 철학의 적대자들이 저지른 위선을 비판한다. 이러한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고 말 것이라는 에피쿠로스의 문장만이 한 위대한 철학자의 고귀한 정신을 드러낼 뿐이다. 부정과 기만을 밥 처먹듯 하는 오늘 한국 사회의 수구 정치배들에게 들려주고픈 대목이다.

 

 

2. 에피쿠로스가 직접 쓴 쾌락의 의미

 

에피쿠로스가 남긴 편지는 감각과 선취관념이 진리기준임을 설명하는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자연의 탐구에 대해 말하는 피토클레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윤리학을 말하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세 통이 전부이다. 이 중에서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편지가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삶의 목적으로서 평정심(아타락시아), 즉 쾌락에 대한 에피쿠로스 사상의 정수(精髓)를 이해토록 돕는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첫째의 선()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사람은 쾌락을 출발점으로 해서 모든 선택과 기피를 행하기 때문(10-129)”이라고 주장한다. 이 쾌락은 J.S.밀의 공리주의자들의 쾌락과 흡사하다. 쾌락이라고 무조건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며 불유쾌를 초래할 쾌락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회피한다고 한다. 또한 고통(괴로움)의 인내도 보다 큰 쾌락을 얻을 수 있다면 감수한다는 것이다. 결국 쾌락과 괴로움을 상호 비교 측정하여 판단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자신의 쾌락에 대한 개념은 방탕자들이나 성적 향락 속의 쾌락이 아니라 몸의 고통과 정신()의 동요가 없는 건강과 평정임을 거듭 역설한다. 이 말은 공복 일 때 빵 한 덩이가 최고의 쾌락이듯 불유쾌, 고통을 벗어나는 검소와 절제로서의 자연스러운 필요로서의 즐거움, 행복이다.

 

나아가 그는 덕을 선택하는 것도 건강을 위해 의술을 택하듯 쾌락 때문이지 결코 덕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편 정신은 삶에 관한 두려움을 몰아낼 때 완전한 삶으로 이행될 수 있으므로 정신적 동요를 가져오는 대상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며, 이는 그의 자연 철학으로 이어진다. 자연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욕망을 투여한 신에 대한 자의적 믿음이 아니라 관찰과 경험을 통한 자연의 이치를 밝힘으로서 이를 극복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3. 에피쿠로스의 자연 탐구

 

에피쿠로스의 자연 탐구는 사람의 정신을 동요시키는 왜곡된 신의 상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는 신이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며,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들을 부인하는 불경신(不敬神)인 사람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고(思考)를 신에게 밀어 붙이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불경신의 사람인 것(10-123)”이라고 힐난한다. 그러면서 신의 불멸성과 지복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그의 사상에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이란 이미지를 뒤집어씌운 이유도 바로 이러한 주장의 곡해일 것이다.

 

아마 그의 자연 철학의 중심이 되는 원자(Atom), 즉 유물론적 사상의 기독교 교리와의 상충을 합리화하기 위한 스토아파들의 의도적 왜곡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다음의 문장은 기독교를 자극하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에서는 아무것도 출현하지 않는다.(10-38)”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든 어디서나 생기고 사물이 생기기 위한 원인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만유는 언제나 지금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물체와 공허로 이루어져 있다.(10-39)”고 주장했다. 특히 물체와 공허 외에는 완전한 실재로서 파악되는 것이고, 이것의 우유성(偶有性)이나 속성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닌 것은 상상에 의해서건, 상상되는 것과의 비교에 의해서건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유의 구성인 물체의 근본이라 한 원자가 출현한다. 물체의 시원(始原)은 불가분한 본성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므로 공허가 장소를 양보한 영원히 운동하는 불가분으로 충실한 것으로서 원자를 말한다. 원자의 운동에 관한 두 가지 형태로서 상호 일정한 거리를 둔 운동과 진동을 계속하는 운동으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현대 물리학에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지만 2,300년 전의 고대 학자의 사유로는 가히 빼어난 지적 사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사람이 인식하는 사물의 표상을 사물 자체의 일종의 모방이 우리에게 와서 제각기 상응한 크기에 따라 시각이나 정신에 잠입하는 것이라는 이해는 쇼펜하우어나 칸트 철학에서 말하는 물자체인 실재와 표상의 인식과 한참이나 거리가 먼 저급한 수준의 성찰이라 할 수 있지만, 인식론이라 할 수 있는 사유를 시도했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빼어난 인식을 발견 할 수도 있는데, 원자의 어떤 합성물인 집합체 가운데서 끊임없이 상호 충돌하는 아톰 운동의 연속성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라든가, 소리의 지각 성립에서도 소리를 구성하는 입자인 유체의 운반에 따른 것과 같은 사유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이고,

죽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산 자나 죽어버린 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10-125)

 

이것(원자 이론)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정신의 동요가 빚어내는 사람의 고통이 근원 없는 것이라는 데로 이어진다. 사람의 육체라는 물체란 원자의 우연한 결합이라는 점이다. 또한 선이나 악은 감각에 속하는 것이고 죽음이란 이 감각을 잃는 것, 결합 원자의 해체일 뿐이라는 인식이다. 감각의 부재는 곧 두려움의 부재이기도 하다. 죽음의 본질인 이 감각 부재를 이해한다면 삶에서 두려움, 정신의 동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원자론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함께 별도의 감상으로 미루어두어야 할 것 같다.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즉 고통을 벗어나 평정심이라는 행복의 영속을 위한 방법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은 자연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통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치유(治癒)적 사유이다.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유물론적 사유가 싹 텄으며, 후일 그의 사상이 마르크스라는 인간을 통해 비결정론적 원자론, 마주침의 유물론의 토대가 되었음을 안다면 꽤나 기뻐하지 않았을까?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한 저작으로나마 고귀한 사유의 모퉁이를 읽을 수 있도록 한 인류의 지성들에게 보내는 경외는 항상 미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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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나룻배 2022-03-18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연히 본 리뷰글을 감명깊게읽었습니다!

필리아 2022-03-18 18:1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꿈꾸는나룻배‘님~,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우주의 시원성에 대한 사유, 특히 ‘클리나멘‘이 오늘의 사람들에게 주는 영감이 무엇보다 소중하죠. 원자들의 미세한 빗겨남으로 마주치는 그 우발성의 결합, 이것은 정말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이라 할 수 있답니다. 지금 우발적 마주침의 유물론을 성찰한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고 있어요. 즐겁고 평안한 시간 되십시요 :)
 
아킬레우스의 노래 (리커버 특별판)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1년 7월
평점 :
품절


 

분노보다 더 강한 것이 그에 대한 그리움이다.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이야기,

신이 아닌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싶다.” -425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되어 폭력적 힘의 충동들이 넘실대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戰場)의 묘사로 가득하다. 파멸적 죽음들, 무참한 살해의 힘만이 위세를 지닌, 그 어느 곳에서도 생명의 미덕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아 있다.

 

작가 매들린 밀러는 이처럼 눈먼 힘의 영광에 도취된 전쟁의 신() 아킬레우스에게 인간 냄새 물씬한 생명의 에너지를 불어넣음으로써 분노와 증오 대신에 관용과 사랑의 미덕을 지닌 인간적 존재로 복원해 내고 있다. 아마도 다음의 문장은 서사시 일리아스의 유일하다싶은 애절한 장면일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비다 헥토르에게 살해당한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아킬레우스의 슬픔이 그것이다.

 

다른 어떤 벗보다 소중히 여기고 제 몸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던 친구를 죽게 한....”

- 일리아스18아킬레우스의 슬픔에서

 

이 인용 문장은 아킬레우스가 어머니인 여신 테티스에게 자신의 슬픔을 하소연하는 구절이다. 매들린의 소설은 이 장면이야말로 힘과 사물화라는 전장의 단조로운 서사시에 사랑과 관용이라는 숨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단서라 여겼을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라고도 할 수 있는 일리아스 비에 젖은 흙냄새처럼 피어오르는 추억(425)”의 노래, 샘물처럼 솟아나는 사랑의 노래가 되어 힘에 대한 욕망과 타자의 물질화라는 죽음의 세계로부터 인간 영혼의 미덕들을 풍부하게 되살려 놓는다.

 

일리아스에는 파트로클로스아킬레우스가 자신의 몸과 마찬가지로 소중히 생각할 수 있는 존재, 어느 벗보다 더 귀한 존재라고 여기게 된 단서가 존재하지 않지만, 소설은 두 사람의 관계가 형성되는 어린 시절의 일화로 시작하여 자괴감으로 위축되고 작은 분노로 주변 인간들을 경계하는 파트로클로스에게 프티아의 왕자이자 여신 테티스의 아들인 아킬레우스가 손을 내밀고, 우정과 믿음의 관계를 키워나가는 연인으로 그려낸다.

 

특히 소설은 파트로클로스에게 화자(話者)의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아킬레우스를 체온이 있는 인간적 존재로 친밀하게 다가오게 한다. 이 작품의 흥미로움은 아리스토스 아카이오이, 무적의 전쟁 신, 그리스 최고의 위대한 전사(戰士)로서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기 전의 아킬레우스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아손등 무수한 영웅을 가르친 켄타우로스(半人半馬)케이론으로부터 관용의 미덕을, 여신 테티스의 파트로크로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아들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어머니로서의 이기심을, 더구나 신들의 예언된 죽음으로부터 아들을 구하기 위해 여장을 시켜 피신시키는 행위나, 후일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를 살해하여 전쟁을 종식시키는 아킬레우스의 아들 피로스의 출생 비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테티스의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부정은 트로이 전쟁의 참여가 곧 아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까닭에 그와 아들의 친밀감과 유대감 강화는 그녀를 괴롭히는 관계였을 것이다. 아마 이 작품 중 가장 시선을 끈 인물 중의 하나라면 단연 브리세이스를 꼽을 수 있다. 트로이 제후국 기습 전쟁의 전리품 분배에서 아킬레우스가 선택한 여인이다. 브리세이스는 그리스 연합군의 분열을 초래하는, 바로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야기케 하는 발단이다.


 



포획된 여인들이 아가멤논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의 처참한 처우를 사전에 차단하여 그녀들에게 사람으로서의 삶의 영위라는 안위를 제공하기 위한 파트로클로스의 부탁이기에 아킬레우스가 기꺼이 선택한, 즉 아리스토스 아카이오로서 아킬레우스가 우선 선택권을 주장해서 취한 여인이다.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건 전리품의 성격을 지닌 여인이란 의미이다.

 

후일 아가멤논은 아폴론의 사제 여식을 취함으로 빚어진 신들의 징벌을 피하기 위해 사제의 여식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아킬레우스의 주장에 보복하기 위해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그를 모욕하는 사건이 된다. 트로이 전쟁의 명분이 헬레네였다면, 브리세이스는 그리스 연합군의 패배까지 몰고 올 분열의 이유라 할 수 있다. 브리세이스의 파트로클로스를 향한 사랑은 아킬레우스를 향한 파트로클로스의 사랑과 대비되어 생명과 불모의 기묘한 해결책을 넌지시 암시한다. 이를 동성애에 대한 작가의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대안이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아이도 낳고 싶지 않아요? (...) 나는 그녀의 본심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나의 무심함에 당황스러워 얼굴이 화끈 거렸다.” -311

 

이 소설이 독자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우리들의 메마른 욕망이 상실한 것을 일깨우는 사자(死者)인 파트로클로스의 영혼이 여신 테티스에게 들려주는 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의 냉정함이 아들을 망쳐 놓았음을, 아킬레우스의 죽음이 진정 무엇을 남겨 놓았는지 제대로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헥토르를 죽이고 트로이를 멸망시키는 것이 잔인함과 죽음의 자취 말고 무엇이 있는가하고. 남의 목숨을 빼앗는 절제되지 않는 힘의 충동이 과연 영광이고 명예인가라는 물음이다.

 

파트로클로스의 영혼은 말한다. 아킬레우스가 프리아모스에게 그의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관대하게 넘겨주었음을 테티스에게 지적하면서, 삶의 열망을 지워버림으로써 죽음을 무릅쓴 전사의 명예를 초월했었음을.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의 존중을 그 무엇으로 부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타인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야만적 폭력성, 그 힘의 찬양이 어느 따사로운 햇빛 아래 리라를 켜는 소년의 사랑스런 몸짓의 추억보다 영원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모욕의 분노로 몸서리치는 아킬레우스를 대신하여 그의 명예를 위해, 연인으로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사랑을 위해, 기꺼이 출전하는 파트로클로스의 노래가 아름다운 추억의 노래가 되어 들려진다. 일리아스의 21세기 버전인 이 작품은 우리들이 잊고 있는 것들의 가치가 무엇인지, 갖추어야 할 미덕이란 무엇인지를 나지막하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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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3-15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일리아스 다시 읽기 하는데 메들린 밀러 작가가 묘사한 아킬레우스가 궁금해집니다~~

필리아 2024-09-05 10:09   좋아요 1 | URL
예고된 죽음은 타자의 생명에 대해 무심하게 하죠, 분노와 예정된 죽음은 자신을 돌아보는 역량을 손상시킬거예요, 이를 기억시키려는 이가 파트로클로스랍니다, 사랑의 힘으로서..., 아름다운 연가이자 슬픈 추억의 노래이기도 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