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서설 (1), 의심과 명증성의 철학, 데카르트의 사유 방법
6부로 구성된 『방법서설』 중, 제 1철학 원리가 등장하기까지 사유방법을 설명하는 제1~3부까지와 4~6부로 나누어 2회에 걸쳐 정리와 다를 바 없는 소회를 남긴다. 이 글은 그 첫 번째인 3부까지에 대한 잡기록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사유하는 나 (Cogito)’라는 인식주관이나 인격주체를 의미하는 명사화된 대중적 언어가 되어 회자되고 있음에도 정작 이 명제를 도출하는 방법론에 대한 검토는 발견하기 힘든 것 같다. 이 유명한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프랑스어; Je Pense, done je suos/라틴어; cogito, ergo sum)’는 총 6부로 구성된 방법서설의 제4부 초반에 등장한다. 즉 최초의 사색으로 도달한 진리인 데카르트 철학 제 1원리 명제에 이르기 까지 그가 인식 방법으로 채택한 사유 방법들을 설명하는 제1부에서 제3부까지의 자기 이성을 이끌었던 노력들의 결과가 4부에서 비로소 설명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그의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논증의 과실을 위해서 채택한 ‘방법’은 뒷전이 되고, 또한 제 5부와 6부에 걸친 자연학 - 『굴절 광학』, 『기상학』, 『기하학』 - 과 이성 전반에 대한 논증 방법이나 원리 획득 방식은 마치 존재치도 않는 듯 대중 독자들의 시선에서 소외된 것만 같다. 물론 책의 모든 내용이 현실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진리를 찾아내기 위한 데카르트 특유의 규칙이나 격률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의심과 오류를 제거하고 앎의 진실에 이르는 유효한 사유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 1부
“개체의 형상(forms), 즉 본성 사이에는 이성의 다소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 1부는 이성(理性)은 인간 개체 모두가 차별없이 지니고 있는 것이며, 인간을 다른 여타 대상물과 구분해주는, 즉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며, 진리 발견의 유일한 도구임을 명시한다. 만일 이성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직 온갖 우유성(accidents; 비본질적이며 없어도 존재의 본질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성질) 사이에서나 발생할 뿐이지 절대적 다소란 있지 않다는 말이다. 결국 진리를 발견하는 도구로서 자기의 이성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 그리고 책 ‘방법서설’을 왜 집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서술이다. 데카르트는 인식 도구로서 정념이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이성이라는 의지적 주체가 정념을 통제 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는 인식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서 ‘의심과 수학적 추리의 확실성과 명증성(明證性)’을 채택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경험적 이유가 놓여있는데, “자기 자신에 관한 사항에 있어서 우리들은 참으로 잘못되기 쉽다는 것, 또한 타인의 판단이 자신에게 형편이 좋은 것일 경우, 그것은 참으로 의심되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음에 기초한다. 즉 기존의 사상과 학문에 많은 의심과 잘못으로 시달렸고, 이들 지식을 얻고자 힘쓰면서 오히려 더욱더 무지(無知)를 발견했을 뿐 아무것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는 정보들의 공허함에서 더욱 용이하게 드러난다. 사실 진실한 앎을 발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많은 세대의 가장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들에 연구되었음에도 논쟁의 여지없는,
의문의 여지없는 사항이 철학에는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 문장에는 동일한 문제에는 진실한 의견이란 단 하나밖에 없다는 당연한 믿음이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기존의 사상들 일체를 견고성 없는 거짓으로 간주하고 폐기하여, 완전히 새롭고 자신 속에서만 발견되는 학문에서 진리를 구하기로 하는 것이라 하겠다. 오늘의 우리들은 다양한 의견들 각각에 일부라도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 속에서 독단론을 경계한다. 그는 선례(先例)와 습관에 의해서 믿어버렸던 사항들에서 믿음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는 자기 이성의 정신에만 온 힘을 기울여 진실을 거짓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법에 대한 극도의 열의를 보인다.
제 2부
“많은 사람에 의해 조립된 학문은 단순한 추리만큼도 진리에 접근하지 못한다.”
위의 인용 문장처럼 2부는 1부에서 주장했던 독단론적 사유 방식을 부언 정당화하며, 바탕으로 삼은 자기 이성의 논리 규칙 네 가지를 설명한다. 그는 건축과 도시 형성의 비유를 예시하며, 많은 장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보다는 한 명의 건축가가 설계하고 완성한 건물이 훨씬 질서가 뛰어나며, 계획도시가 우연의 산물인 자연 형성 도시보다 높은 조화와 질서를 가졌듯이 한 사람의 탁월한 이성이 진리 접근을 위한 좋은 방법임을 강조한다. 획일성, 질서정연함, 법칙성, 규준성이라는 전체주의적 사고와 흡사하기까지 하다. 이는 스파르타 독재군주인 ‘리쿠르고스’의 단독 입법이 동일한 목적을 지향할 수 있었기에 번영했다고 부연하는 데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독단적 진리 접근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하는 논리 채택의 규칙은 진실된 앎에 접근하는 사유방식으로 유용한 참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요약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의심하는 어떤 이유도 갖지 않을 만큼 명백한 정신에 나타나는 것만 판단에 받아들인다. 즉 명증적으로 진실인 것만 인정한다.
2. 음미하는 문제는 잘 풀기 위해 필요한 만큼 적은 부분으로 나눈다.
3. 사상의 사유 순서는 가장 단순하고 인식하기 쉬운 것부터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간다.
4. 완전한 매거(枚擧: 하나하나 들어서 살핌)와 전체에 걸친 통람(銅藍)을 온갖 경우에 행한다.
이 논리 채택 규칙에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요소들로 득시글거린다. 세포 하나를 안다고 해서 인간의 총제적 시스템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부분의 합과 전체는 결코 같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일반화를 벗어나는지 판단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특수한 것들을 검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며, 더구나 명증적으로 진실인 것을 아는 것도 자의적이다. 데카르트는 이를 신의 존재 증명을 통해 인간 정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부분에 대한 진리성으로 의존한다. 비록 그가 계시를 진리 추구에서 배제하고 있으나 여전히 17세기라는 시대적 한계를 돌파하지 못한다. 어쨌든 그의 인식 논리 방법은 이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제 3부
데카르트가 의존했던 진리 추구 방법론과 관련해서는 가장 중요한 챕터일 것 같다. 이성이 어떤 판단을 내리는 데서 미결정 상태에 놓여있을 경우 그는 잠정적으로 세 가지 도덕 격률을 설정하고 이를 철저하게 실행한다. 제 1격률은 사고활동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일을 믿을 때와 믿고 있음을 알 때의 사고활동의 차이에 대한 지식, 극단적인 것에 대한 거부와 온건한 것의 선택이 갖는 인식적 유익성을 말한다.
제 2격률은 우유부단과 동요, 후회로부터 탈각(脫却)되기 위해 행동과 태도의 단호함과 방향의 항상성에 대한 규칙이다. 숲 속에 길 잃은 자의 행동처럼 같은 방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적어도 마지막에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예처럼 여러 방향을 갈팡질팡하다 숲 한 가운데 놓이는 것보다 분명 좋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제 3격률은 세계 질서보다 자기 욕망을 바꾸는 일에 힘쓰는 것이 오성이 제시하는 의지를 벗어나 지배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하고 스스로의 사상에 절대적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성이라는 도구로서만 진리의 인식으로 전진한다는 것이며, 오직 단일한 유일성의 진리만을 인정한다. 이들 격률을 데카르트는 진리 추구의 신념으로 삼았음을 설명한다. 결국 알지 못하는 것, 의심스러운 것, 오류에 빠뜨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배제하고 오로지 명석하고 확실한 추리에 의해 확신하는 것만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2부와 3부는 데카르트의 사유 방법, 다시 말해 진리 발견의 방법론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절대 그른 것으로 내다버리고,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논증, 어떤 회의론자의 상정에도 흔들리지 않을만큼 견고한 진리를 찾아냈다고 자부하는 지식의 접근법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에서 지워버릴 때, 그는 이러한 사유를 하는 ‘나’의 필연적 존재를 깨닫는다. 이것이 최초의 사색이다. 사실 이것은 순환논리를 닮았다. 존재자인 나의 인식이 바로 그 존재자가 하는 의심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사유하는 나’라는 인식주체의 최초 발설로 후대 사상의 주요 논제가 되었지만, 내게는 결코 명증하지도 판명가능하지도 않은 공허한 명제로만 여겨진다. 소박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이 세계에 대해 확고하고 참된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신(神)에서 인간 주체의 사유로 옮겨왔다는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인류의 사상적 개가(凱歌)일 것이다.
▶방법서설(2)에서 제4~6부 정리 감상 계속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