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소설의 경우, 육체에 도달하려는 의도는 성공, 혹은 실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산출되는 성취, 혹은 환멸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중심 플롯이 된다.

이것은 바로 인생의 신비를 꿰뚫어 보려는 욕망의 구체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 피터 브룩스, 육체와 예술(2013, 문학과지성사) 에서

 

 

소설 작품을 읽을 때 표면에 나타난 이야기가 어떤 이면의 이야기, 즉 표면이 품고 있는 진짜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독서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홀로 내밀히 맛보는 즐거움, 뭔가 은밀한 것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달성하려 했던 앎의 욕망의 성취. 그럼에도 이 욕구는 만족할지 모르고 다른 소설 작품으로 향하게 한다. 결코 영원히 알 수 없는 앎의 세계, 좀처럼 멈춰지지 않는 소유에의 충동, 그 본질적으로 만족될 수 없는 파우스트적 시도를 지속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다보면 에로틱(Erotic)'이란 말과 유별나게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육체를 욕망의 주체 및 대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 욕망과 관련하여 의미를 띠게 되는 육체에 대한 고찰, 그 본질인 성적이며 호기심 가득한 지식욕이 얼마나 육체적인 것인지 말이다.

 

롤랑 바르트상징적인 장()은 오직 하나의 물체로 채워져 있다. ....다름아닌 인간의 육체다.”라고 썼다. 또한 테리 이글턴육체는 정신의 전제 조건이며, 형이상학적 탐색이 궁극적으로 회귀하는 실체라고 했으며, ‘피터 브룩스육체는 의미생성의 장소이며, 이야기가 각인되는 장소가 되며,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기표, 서술적 플롯과 의미산출의 일차적 요소라고 하기까지 했다. 즉 육체는 모든 상징의 근원임과 동시에 궁극적인 종착점이란 뜻으로 읽힌다. 결국 인간의 지식애적 욕구란 육체를 알기 위해, 육체를 소유하기 위해 서술되는 이야기들의 알레고리, 바로 그 자체인 것처럼 여겨진다.

 

1. 지식애() = 내밀한 삶으로서의 육체

 

피터 브룩스의 육체와 예술에는 이러한 생각을 확증해 주듯 장 자크 루소고백록에 대한 문학사적 성격의 설명이 있는데 꽤나 흥미롭다. 고백록1권 첫 머리에 소개되는 자기 육체에 대한 고백인데, 열한 살 시절 자신의 교육을 담당하던 랑베르시 양이 벌로써 그의 엉덩이를 때린 사건이다. 그때 루소는 고통 중에, 심지어는 수치감 속에서도 일종의 관능적 쾌락을 느꼈으며 .... 두려움 보다는 차라리 욕망을 느꼈다.”는 고백이다. 이때부터 그의 육체에 에로틱한 기표가 새겨졌다는 것이다.

 

그리곤 이렇게 진술한다. 그 벌이 나의 전 생애에 걸쳐 내 취향과 욕망과 열정, 그리고 나 자신의 정체성까지 결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대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결국 그의 생의 이야기는 초기에 그의 육체에 새겨진 자국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육체에 새겨진 자국이라는 알레고리는 신 엘로이즈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에서 반복되는 알레고리로 꾸준히 등장한다고 한다. 이 자국은 욕망의 자국이 새겨진 육체다. 재현되지 못하던 육체가 자국을 통해서 언어의 영역, 글쓰기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브룩스는 주장한다. “글쓰기는 욕망과 그 대상의 재현 관계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아마 고백록은 인간 삶의 모든 문제는 육체가 자리 잡은 곳과 그 의미로 귀결된다는 점을 간파한, 그래서 자기 자신의 사적 생활 영역에 주목하고, 육체는 육체 이외의 장소에서 생성되지 못하는 의미 생성의 장소로서 파악한 인간 의식의 역사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한 저작임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이처럼 육체에 대한 고려가 이야기의 중심 주제가 되는 서사물들이 육체가 어떻게 의미를 갖게 되는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야릇한 즐거움을 준다. 책을 읽는 것,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은 육체에 대한 욕망과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점이다. 육체는 욕망 충족, 권력, 의미의 열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상징적 체계의 본질에 다다르는 길을 열어주는 여정이 마치 육체에 대한 욕망에 접근하는 것과 동일한 다른 표현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2. 글쓰기 작업: 치명적 죄의 극복

 

육체에 글을 쓰는 문제의 이야기로서 1916년에 발표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유형지에서는 문자 그대로 육체가 글을 새기는 공간이 되는 끔찍한 상황을 묘사한다. 루소의 작품이 가부장적 남성의 시선에 포획된 것이었다면 카프카의 소설은 육체에 메시지를 쓰려는 것에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반()육체적이고, 남성적 시선의 전복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상관에 복종하지 않은 한 군인의 처형에 초대된 탐험가의 이야기다. 아마 이야기의 핵심은 일벌백계의 관습을 항구적으로 존속시키려는 사형 집행기계에 관한 설명일 것이다. 기계가 작동되면 사형수의 몸에 내려진 선고의 문장(“상관들에게 경의를 표하라!”)이 거대하고 날카로운 바늘로 사형수의 몸에 12시간에 걸쳐 새겨지는 것이다. 탐험가는 사형 집행자인 장교에게 묻는다.

 

죄수가 자기 몸에 새겨지는 문장을 압니까?” , 장교의 대답은 그야말로 잔인한 무지로 가득 차 있다. “모릅니다. 죄수에게 말해봐야 소용없을 겁니다. 죄수는 몸으로 그 문장을 배울 겁니다.” 즉 죄수의 몸에 법률을 새기는 벌이 죄수를 내적으로 변화시키리라 기대하는 것으로, 장교는 부언한다. “정확히 여섯 시간 만에 얼마나 조용해졌습니까? 죄수의 눈 주위에서 깨달음이 시작되죠.” 죄수가 몸에 새겨진 상처를 통해 의미를 해독하는 데 여섯 시간이 필요하며, 그때 쯤 죄수는 피와 물이 흥건한 구덩이에 던져진다.

 

과연 죄수는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까에 대해 탐험가가 회의를 보이자, 장교는 직접 시범을 보이기 위해 기계에 정당해라!’라고 선고를 써 넣고 기계위에 서자 그 기계는 저절로 파괴되며 12시간이 아니라 바로 장교의 몸에 바늘이 꿰어지고 장교의 몸은 꼬챙이에 매달려 죽고 만다. 장교가 설명했듯이 새겨진 문자를 깨닫기는커녕 아무런 깨달음도 없이 그저 죽었을 뿐이다. 결코 정당하라!’는 문장은 써지지도 않으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육체가 법과 의미를 회복해주리라는 기대는 믿을 수 없는 잘못된 것이라는 작가의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우화이리라.

 

즉 고통당하는 육체는 고문하는 권력을 만족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이며, 도덕적 타락의 상징일 것이다. 단지 육체를 문화의 산물로 만들려는, 육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에 대한 경고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육체의 의미화에 대한 이런 냉혹하고 부정적인 시선처럼 아무런 깨달음도 주는 것이 없는 것일까?

 

육체에 대한 자국내기의 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일련의 욕망들이다.  그것이 긍정성을 지니든, 부정적이든. 권력이 개인의 육체를 좌우하려 하는 것이든, 연인의 육체에 다가가려는 것이든, 육체를 소유하거나 합일하려는 갈망의 존재라는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즉 타자를 알려는 충동이다. 비록 오늘의 세계가 육체를 진부한 것으로 만들고 신비를 거의 벗겨내기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우리는 육체를 알지 못한다. 어찌 앎이 달성 될 수 있겠는가. 어찌 타자의 육체를 소유 할 수 있겠는가. 육체를 반복적으로 글쓰기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어쩌면 탈육체화가 이루어지는 어느 날 의미를 상실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까지는 육체에 대한 욕망의 이야기는 인간의 앎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지속되지 않을까를 생각게 된다. 소설 읽기를 멈추지 못하는 내 무의식의 유혹은 이렇듯 앎을 향한 쾌락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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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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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허위‘, 이 시선만으로도 작품의 매력이 느껴진다.
실험공동주택, 공동식사, 공동육아, 그리고 여성의 영혼을 갉아먹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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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 - 국부에서 협상가까지, 대한민국 대통령
타임TIME. 찰리 캠벨 외 6인 지음, 배현 옮김 / 유피에이(UPA)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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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시선으로 본 한국 현대사 더하기 국내 언론기사로 본 내부 시선의 비교,
‘협상가‘로서의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성찰의 기회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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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인연 -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원작
오쿠노 슈지 지음, 김보예.박세원 옮김 / 디오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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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목‘ 작가의 에세이집<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법>에서도 마침 소개되었는데요,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감동적이라죠.
원작을 읽게 되어 정말 반갑고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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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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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청소년이....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은 어쩌다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의 첫 장은 위의 단 두 문장으로 구성되어있다. 두 번째 장부터는 에 대한, 즉 물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바짝 긴장해야 무얼 묻고 있는지 알 수 있으리라는 위협 같다. 그리곤 알 수 없는 서술자가 배경 설명은 물론, 장면을 안내하고 하나의 장이 시작 할 때 혹은 끝날 때 여지없이 장을 열거나 마무리하는 설명을 해댄다. 그것은 독백같은 질문이거나, 상황을 명료하게 이해시키려는 듯한 문장들로 이루어져있다. 영화 틈틈이 정황설명을 통해 장면을 보조하여 관객의 이해를 돕거나 호기심을 유발하는 무성영화시대의 변사(辯士)처럼 느껴진다.

 

1. 이야기의 발단과 전개

 

3장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그때는 둘 다 그게 얼마나 맞는 말인지 몰랐다.”이다. 베어타운 아이스하키단 단장 페테르의 아내 미라와 딸 마야 두 모녀의 대화에서 이 마을에서 사는 게 아니야, 마야, 그냥 버티는 거지.”라는 미라의 말이 지닌 후폭풍을 예고하는 서술자의 진술이다. 이것은 독자의 상상력을 빼앗기도 하지만 예고의 내용이 무엇인지 안달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4장의 마지막 문장은 그는 구단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오늘 수네를 내쫓으라는 명령을 하달 받더라도 그럴 것이다.” 이다. 하키단 주전 팀인 A팀 코치를 자진 사퇴시킬 것을 종용하는 구단 이사진들의 요구를 단장인 페테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구단 사장의 생각이지만 이 역시 이후 페테르란 인물이 취할 행위를 예고하는 서술자의 진술로 읽힌다. 이렇게 각 장의 마지막 문장에 관심을 기울이다보면 읽는 재미가 더욱 쏠쏠해진다.

 

아이스하키단은 쇠락하는 소도시 베어타운 공동체의 자존심과 경제적 부와 도시 재건이라는 이익의 지렛대이며, 마을 주민 전체가 도달해야 하는 환상이자 꿈이다. 모든 주민들은 하키단과 연결되어 있다. 실업자일망정 왕년의 베어타운 최고의 하키 선수였으며, 술집 주인인 미망인조차 남편은 골키퍼였으니 말이다. 설혹 하키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남편이, 아빠가, 아들이, 동생이, 제자가 베어타운 하키선수인 마을이다. 그런데 10여년 만에 아이스하키 청소년전국대회 4강전에 진출하게 됨으로써 온 마을은 들썩인다. 마을이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구단의 세월과 함께해온 일흔 살로 보이는 A팀의 코치 수네가 청소년팀 코치 다비드에게 후줄근한 플래카드에 쓰인 구단 모토인 문화, 가치, 공동체를 설명하는 문장은 다분히 암유(暗喩)적이다. 그는 문화를 운운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아마 승리하는 문화 일 것이며, 강박적이고 이기적이며 배려심이 없는 것이고, 공동체를 위해 개인은 희생을 수용하는 것임을 비춘다. 독자는 곧 이 낡아빠진 모토의 정신이 하키 선수들을 지배하며, 또한 마을 주민들, 구단 운영자들의 신념으로서 어떤 사건, 혹은 상황에서 보여 질 모든 행위의 근간을 형성할 것임을 예측하게 된다.

 

한편 마을 주민의 연대를 의미하는 공동체가 위선의 구조 위에 놓여있음을 보게 되는데, 주민들의 거주 지역에 따라 부유층, 중산층, 저소득층의 분명한 경계가 있다는 점이다. 호수를 내려다보는 산비탈에 자리한 고급주택가인 하이츠, 베어타운 중심가에 있는 중산층 거주지역, 그리고 타운의 끝, 숲에 인접한 할로로 불리는 빈곤지역이다. 할로지역의 아이들은 거지타운이라는 조롱과 폭력에 시달리는데, 결코 다른 지역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는 유소년팀의 아맛, 사카리아스, 리파, 세 명의 아이들은 할로 삼인방으로 칭하며 그네들만의 우정으로 차별과 멸시를 버텨나간다.

 

이와는 달리, 하이츠에 사는 케빈은 청소년팀의 최고 선수로 기량을 뽐내고, 아버지의 자살로 누이들과 함께하는 벤이라는 열일곱 소년은 케빈의 기량발휘를 위한 보디가드 역할로서 케빈 부모의 지원을 받는다. 이렇게 하키단의 연대는 위선적 의리의 토대를 딛고 있다. 유소년, 청소년 하키선수들은 각자의 출신 계층마다 최고의 선수가 되어 NHL 프로리그에 진출하여 성공하여야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할로의 아이인 아맛은 허리가 휘어지도록 하키장을 청소하는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고, 하이츠의 케빈은 부유층의 명예라는 오만을 유지하여 마을 유지로서의 지배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같은 위선적 연대인 공동체가 어떤 정의(Justice)를 지킬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소설의 한 축을 이끈다.

 

2. 이야기의 위기와 절정

 

이 소설을 온통 물음으로 가득한 이야기로 내모는 사건이 터진다. 4강전에서 베어타운 청소년팀이 승리함으로써 가장 규모가 큰 청소년 아이스하키대회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덩치는 작지만 빠른 스피드로 청소년팀의 공격수로 선발된 유소년팀의 아맛, 그리고 페테르와 미라 부부의 열다섯 살 딸아이 마야,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 아나는 결승진출을 자축하려는 케빈의 파티에 초대된다. 기절주와 마리화나를 권하고, 마야는 케빈을 따라 그의 방 침대에 눕는다. 청바지를 벗기려하자 그녀가 못하게 한다. 괜히 비싸게 굴지마, 나랑 같이 이층으로 올라왔으면 얘기 끝난 거잖아?” “그만해요, 제발!”, “나를 놓아줘요!!!” 케빈은 마야의 블라우스를 잡아 뜯고, 성폭행에 이른다.

 

그리고 29장의 시작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이받히는 것이야말로 빙판 위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상황이다.” 라며 서술자는 잔뜩 은유를 머금은 문장을 뱉어놓는다. 자신의 상처를 숨기던 마야가 결승전을 위해 수도로 출발하려는 하키구단 단장 아빠 페테르, 그리고 변호사인 엄마 미라에게 성폭행 사실을 고백하고, 케빈을 경찰에 고발한다. 결승경기를 위한 버스에 오른 케빈은 경찰에 붙들려 연행된다. 전국 최고의 주공격수가 빠진 채 경기에 임하여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이어 리더의 자질은 무엇일까?” 라는 서술자의 단 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31장은 진정한 리더상으로 팀원의 의기투합, 연대를 이끌어내어 케빈의 빈자리, 그 무력감을 의연하게 메우는 벤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답은 독자의 몫이다. 서술자는 장면과 행위를 전달해줄 뿐이다.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된 것이다.

    

 

 

마을은 분노하고, 마녀사냥에 나선다. 누가 누구에게 먼저 키스했니? 너도 반응을 보였니?” 성폭행 상황을 우연히 마주했던 아맛에게는 정확히 무슨 소리를 들었느냐, 정확히 어디에서..., 술에 취한 상태였냐고, 그리고 나무라는 눈빛으로...문제의 그 여학생을 좋아했지?”라며, 진실을 거짓과 의혹 그득한 환각으로 몰아댄다. 또한 하키 선수 학부형은 짝사랑에 마음이 상하면 성폭행이다!’라고 외쳐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제가 같은 여자로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이 여학생의 아버지가 이걸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어요.”라며, 사실을 왜곡 재단하기 시작한다.

 

37, 인간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토론을 벌이다보면 거의 항상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논란으로 귀결된다.”그리고 배가 가라앉을 때, 집에 불이 났을 때 누굴 먼저 구하겠는가고 물으며, 가족이다. 우선 가족부터 구할 것이다.”고 이야기를 연다. 그런데 이조차 만만치 않다. 가해자 케빈의 부모와 피해자인 마야의 부모역시 자기 자식들을 구하려 들지 않겠는가? 또한 베어타운과 페테르 가족의 싸움이라는 도덕적 딜레마도 있다. 유명한 마이클 샌델의 정의(正義)를 다시금 소환하게 한다. 공리주의적 입장에 선 마을 주민들은 마야와 페테르를 부도덕하다고 비난한다.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지 않은 이기적 처사라고 하면서. 그러나 한 인간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이 과연 도덕적인가라는 물음을 마주하면 이익우선주의는 멈춰 서게 된다. 그런데 소설은 마냥 이러한 도덕적 정의론 타령을 하게 두지 않는다.

 

3. 이야기의 결말 ; 산다는 것에서 삶을 이해한다는 것으로

 

서술자는 인간존재를 서사의 개념으로 파악한듯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이라며, 우리에게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그리고 사회계약의 결과로도 돌릴 수 없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페테르를 단장직에서 해임하기 위해 모여든 하키단의 후원자인 마을 주민들, 구단 이사진 등 운영위원들은 하키선수인 자식의 미래에, 사업 번영과 이익 증대에, 하키학교의 유치와 도시개발의 가능성에 장애가 되었다는 자기들 삶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여 성폭행 피해자인 마야와 그녀의 아빠인 페테르를 성토한다. 이때, 술집 펠센의 사장, 라모나가 등장하여 똑같은 부류에 둘러싸여 자신들의 세계관을 강화하는 부류하고만 대화하려는 고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 인간들에게 부끄러움을 알라고 일갈한다. 또한 하키단의 폐쇄적인 연대의 압박으로 목격했던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 아맛이 나서 한 가족에게 행하는 집단 린치라 할 수 있는 공개토론장을 향해 진실을 토해낸다. 손바닥에 입이 틀어막힌 채로 지르던 마야의 비명 소리, 멍 자국, 폭행, 이해할 수 없고 추악하며 용서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을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이야기 한다.

 

다수와 한 인간의 싸움,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 두 번 다시 하키를 하지 못할 수 있음에도 할로의 소년이, 능력이 되더라도 결코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리라는 그의 삶의 이야기에 놓인 도덕적 의무가 빛을 발한다. 또 있다. 검은 재킷을 입고 펠센의 술집에 모여 자기들만의 삶을 이야기하던 일군의 사람들, 베어타운 하키단을 해코지하는 어느 누구도 용서치 않았던 그들이 익명의 공개투표에서 페테르 해임의 부결에 의무의 표리인 권리를 행사한다. 도덕적 진리란 어쩌면 이처럼 인간 삶의 이야기에 기반을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소설은 마지막 시선을 벤이와 케빈, 케빈의 범죄에 반대하는 아맛과 케빈을 옹호하는 전체 팀원, 베어타운에서 A팀 코치인 수네와 베어타운 청소년 팀의 주축선수들을 이끌고 케빈의 아버지 에르달의 후원 하에 경쟁지역인 헤드의 A팀 코치로 자리를 옮겨가는 다비드를 통해의리를 묻기 시작한다. 45, 서술자는 설명한다. “‘의리처럼 설명하기 힘든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의리는 항상 좋은 것으로 간주된다.....문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가장 나쁜 짓도 바로 그 의리에서 비롯된다는 거다.”항상 의리를 떠벌리는 예능인이 떠오른다. 그는 빛과 그늘이 공존하는 이 언어의 의미를 정녕 알게 될까?

 

베어타운은 소설에서 단연코 이 세계의 또 다른 표현이며, 하키는 인간들이 몰두하는 삶의 희망, 꿈의 은유다. 소설에는 구체적 이름으로 등장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지닌 인물만 30명이 넘어서고 검은 재킷의 남자들, 구단 이사진들, 시의원 등 익명의 인물군까지 더하면 가히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하키는 복잡한가하면 단순하기 그지없는, 규칙은 이해하기 어렵고, 그 문화와 더불어 지내려면 힘에 부치고...”, 우리네 인생이란 이런 것일 게다. 부의 계층화가 발생시키는 인간 배제와 조롱과 무시, 그리곤 위한답시고 보내는 이기심과 과시를 저변으로 한 값싼 동정, 포식자의 눈을 한 인간들의 무감정과 폭력의 일상화, 거짓말과 공동체라는 연대의 뒤에 웅크리고 행하는 탐욕스러움, 그 추악함의 현상을 묻는다. 또한 가족의 사랑, 우정, 의리, 연대, 정의를 묻는다. 소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렇게 끊임없이 묻는 여정이다. 그 답은 우리들의 몫이다. 마야는 증거불충분으로 케빈에게 죄를 묻지 못한다. 소녀는 무릎 꿇린 케빈의 이마에 엽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 결과의 기대 역시 독자의 몫이다.

 

성공지향이 삶의 가치처럼 승인되는 세상에 우린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하다보니 앞으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삶을 반추하는 인간은 실패자라는 기막힌 주장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관을 점령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로만 이야기를 견인하는 서술자는 아마도 이렇게 답하는 것 같다. 답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 바로 삶의 반추, 그 되돌아 봄(Introspection)에 있다고. 산다는 것과 삶을 이해하는 것의 차이에 놓인 그 엄청난 간극에 대해서. ‘재능이 묻혀진 두뇌쯤 으로 직역되는 프랑스 영화 <La Tête en friche>의 주인공 제르맹이 생각난다. 차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기름만 넣으면 움직이듯이 인생을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질문도 반추도 필요치 않았던 사람이, 삶을 이해하려는 사람으로 거듭 나며 인생의 새로운 이해의 세계로 접어드는 감동적인 드라마다. 어쩌면 베어타운의 수많은 삶의 질문들은 삶의 이해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붉은색 문자 : 소설인용문장

   푸른색 문자 : 강조를 위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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