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dromes of Corruption : Wealth, Power, and Democracy (Paperback)
Michael Johnston / Cambridge Univ Pr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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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 또는 국가의 부패 양상을 비범하게 통찰한 걸작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오랜 부패 양상인 엘리트형 카르텔의 만성적 부패에 대한 참조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왜 『부패 증후군, Syndromes of Corruption』의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지 못하는 지의 한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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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terminate Inflorescence : Notes from a poetry class (Hardcover) - 이성복 시인 <무한화서> 영문판, 2023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번역도서부문 (바리오스상) 후보작 선정
Lee Seong-bok / Penguin Books Ltd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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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쥐어짜낸 말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써진 언어들이고, 마음에 박히는 시론집이다. 이 영국 판본 『무한화서』는 이성복 시인에게 어떤 좋은 일을 내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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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생각이란 것은 자신과의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나르시시즘, 즉 지극한 자기애, 자기만의 동굴을 벗어나지 못한 좁은 시선이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생떼를 쓰고, 그것에 자신의 주변사람들을 굴복시키려 한다. 이것이 성취되지 못하면 그 불쾌감을 사방에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 것인데, 린츠 철학교수인 로버트 팔러는 그의 주저 성인 언어, Erwachsenen sprache에서 이것은 자신인  “‘의 모든 기분과 심적 상태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만 긍정하는 것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부정하는 것으로 표출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한 말, 그것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어느 순간, 이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을 고집하는, 극단적으로 편협한 목소리들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각종 온라인 사회적 연결망에는 이러한 고집불통의, 게다가 감수성을 자극하는 말초적 언어만이 넘실대고 있다. 정치사회는 이보다 더욱 극성을 부리며, 모두 자기 이익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나르시시즘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보편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 부재에 빠져 타인을 기괴한 괴물, 적대적 범죄자화 하여 이 사회에서 그 어떤 공론도 형성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극심한 갈등과 분열, 다시 말해 어떤 연대나 통합도 불가능한 사회로 몰아가고 있다.

 

유발 하라리가 넥서스 Nexus에서 역설하는 주요 내용 중 하나인 정보의 독점을 통해 다수의 대중을 무지로 몰아넣어 세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려는 것, 전체주의 독재에 대한 권력의 욕구 또한 이러한 어린아이 나르시시즘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이런 것일 테다. 카프카의 소설 자칼과 아랍인은 이를 짧은 이야기에 멋지게 담아내고 있다. 고기를 먹기 위해 아랍인에 순응하면서도 아랍인이 휘두르는 채찍은 피하기를 바라는 자칼의 배반적 모습인데, 이는 주어진 조건과 상황을 수용하기는 싫으면서도 그것에 존재하는 과실은 취하기를 바라는 모순적 욕구를 상징한다.

 

어린아이, 혹은 자칼이 이 세계와 주변부를 암흑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 치명적 단점은 다른 사람이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 것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동일한 수준으로 고려할 수 있는 언어의 성숙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랄 수 있다.  ‘욕망과 무의식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라캉을 인용할 필요도 없다. 곧잘 어린아이를 거울 단계의 이미지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는데, 거울에 비친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화함으로써 자아가 형성된다는 것으로, 이때 발생하는 하나의 불완전성이 자기 육체 이미지의 통일성이 파괴되는 분열, 즉 공격성 및 공격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욕망을 규제하는 타자성의 영역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일이 여러 요인으로 무진장 발생한다. (흔한 사례: 거울을 처음 보는 동물들의 반응을 보라. 으르렁대거나 폭력을 행한다.)

 

그 결과, 사실 겉으로는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이지만 속, 내면은 욕망 규제 영역인 대타자의 담론(구조화된 법칙 등)이 들어서지 못한 여전히 어린아이 단계에 멈춰버린 사람들이 군중의 무리 속에서 활보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 사회의 권력을 차지하게 될 때, 세계는 하나로 고정된 의미에 속박되고, 나르시시즘과 차이와 결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그리고 오직 쾌락원리에 종속된 오늘과 같은 끔찍한 세계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지난 23일 이 사회의 선출된 권력자의 대국민 담화의 요지는 이렇다.   좌고우면 하지 않고 일하겠다,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   이 자기 의지의 표명은 국민의 뜻이나 잘못된 국정 운영에 대한 수많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행동을 할 것이라는 말이고, 나아가 누구의 의견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독재 선언이랄 수 있다.

 

민의에 선출된 권력이 선언한, 그 민의를 완전히 무시하는 매우 심각한 발언임에도 이 사회의 정의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책임질 것이라 믿었던 민주주주의 사회의 자정(견제)장치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소리만을 전달할 뿐, 어린아이의 미성숙함, 나르시시즘, 폭력성에 대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이 어린아이의 성장하지 못한 타자에 대한 몰인식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다수를 지배하는 권력이 된 어린아이에 굴복해야지만 사태가 끝날 수 있게 된다. 아이의 욕구에 저해되는 그 어떤 의견이나 행동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바로 독재자가 된 어린아이가 어른들의 사회에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내면적 아이에 성장이 멈춰버린 어른을 어떤 하나의 방법으로 단 번에 성숙시킬 도리는 없다.

 

어쩌면 어른으로의 성장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려면 오랜 학습이 필요하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도구가 독서다. 세계에서 가장 책 안 읽는 나라로 손가락으로 꼽히는 사회에서 노벨 문학상이 나왔다는 사실은 순전히 번역어로서의 국외의 시선이지,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급작스레 인쇄가 몰려들어 책의 매진 사태가 일어나는 것처럼 이 사회의 독서가 타자의 담론 세계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이 취약한 지대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수일 전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사람인지, 무지를 대표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아이의 무례함과 무지한 욕망의 보기일 것이다. 이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이 성숙하지 못한 아이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거대한 표본을 가진 사회적 실험 연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필요한 사회적 연구 과제여야 할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그 어느 때보다 다차원적인 인터넷 공간에서 무수한 타인의 말로 이루어진 정보와 지식을 얻고 있는데, 책 읽기가 무어 그리 대수로운가라고 비아냥댄다. 바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 매리언 울프는 책 읽는 뇌, Proust and the squid에서 정보 문맹을 지적하면서,  '지속적 부분주의 문화', 다시 말해 임시적으로 이것저것 때마다 요구되는 정보를   순간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짜깁기식으로 보는 것은 그 어떤 심층 지식도 형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문해력, 읽고 해독하는 능력의 저하로 이어지는 데, 지적 능력의 편협성을 가져오는 위협 요인이라 지적하고 있다.

 

지금 온라인 의사소통 망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의 언어들은 어린아이의 나르시시즘과 낮은 문해력을 강요하는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이 만들어낸 필연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교사들은  "독서하는 삶과 유년의 교착상태에 머무는 것, 둘 사이의 티핑 포인트가 감정적 연대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력을 요구하는 학습이 능사인 사회에서 특히 수십여 년간 이 땅의 교육 현실은 인간 성장에 중요한 감정을 느끼고 이입하는 것을 학습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결여는 예측, 추론, 공감하는 능력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양산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글이 장황하게 여기까지 치달았는데, 요지는 이렇다. 권력에 대한 불쾌감을 지적하려는 것도 아니고, 어린아이의 미성숙한 나르시시즘을 탓하려는 것도 아니며, 책 읽기를 권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타자의 목소리를 들으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와의 거리를 둔 자아성찰, 여기서 시작되어야 이 세계의 소통과 연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야 사람을 연민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작은 길이 시작될 수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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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믿건 그건 네가 제한된 인식 가능성에 

구속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에마뉴엘 칸트



내 오만한 넋두리는 다시금 몇 권의 책들을 내 앞에 이르게 했다. 아마도 지식의 드넓은 해양으로 인해 안다는 것은 애초에 가당치도 않은 것이기에 무지의 겸손은 불가피한 것일 게다. 그런데 무지가 이 정도의 의미라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무지에는 그 종류가 정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무지를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무지의 개념을 단순히 정의한다면 그저 '지식의 부재 혹은 결핍'이라는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 이겠지만, 무지를 정의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은 무지는 지식의 이면에 상응하는 것만큼 무지의 종류가 존재한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어떤 존재를 모르는 것과 그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는 것은 다른 종류의 무지이듯, 모른다는 것의 본질이 다르다.





권력과 부를 독점한 집단은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집단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체제와 문화를 배우기를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의 현실 조건에 무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소위 '허용된 무지'란 것도 있고, 자신과 다른 사고방식에 대한 인식의 결여를 의미하는 '깊은 무지'라는 것도 있다. 더구나 사람들은 자신의 규범을 비판하는데 한계가 있어 대안적 신념에 접근할 기회가 부족함으로써 야기되는 무지도 있다. 이것으로 그칠 수 있었다면 인간 사회는 그나마 조금은 더 지혜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알기를 원하지 않거나 모르기를 원하는 자발적, 고의적 무지도 있고, 부주의함이나 의도적 목적을 지닌 선택적 무지도 있다. 여기에 요즘 극성을 부리는 혼란이나 의심을 생산하여 타인의 무지를 통해 권력을 지속하려는 사실을 은폐하는 거짓과 허위정보로 대중을 속이려는 능동적 조치로서의 사악한 무지도 있다.

 

나아가 무지는 오류와 불확실성, 부정, 선입견, 기억상실과 같은 인접 개념까지 포괄하면서 무지를 더욱 폭넓고도 깊게 강화하며, 지식으로의 이행을 방해한다. 이달 들어 새롭게 장만한 책들은 이를 위한 작은 시발점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한 마디로 너무 아는 게 없어 읽기로 한 책들이다. 어떤 대단한 계획의 범주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 무지를 강하게 때린 것에 대한 해갈을 위한 조치이다.

 

그것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다가 왜 작가가 이러한 장면들을 장황하게 묘사하고 있는지, 박상륭의 소설 아닌 잡설인 칠조어록의 그 무수한 말()의 우주의 방언들의 한 토대가 된 앎은 어디서 출원한 것인지, 백인들은 알지 못했던, 아니 자신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오랜 폭력의 역사에 은폐된 것은 무엇인지를, AI 만능의 맹목적인 의존적 사고에 깃든 지식을 향한 탐욕스러울 정도의 무지는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를 알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저자가 누구였는지 모르는 심지어 책의 제목조차 숭고에 대하여 Du sublime라 오역(誤譯)'높음에 관하여로 번역될 만한 페리 훕수스 Peri Hupsous의 그 과장의 의지에 숨겨진 진실에 대한 무지의 항변이라 해도 될 것 이다.

 

피터 버크의 무지의 역사는 저자의 말처럼 지식 없음을 말한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기술처럼 여겨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뭔가를 알지 못한다거나 알려하지 않음으로서 모른다는 것의 역사란 대부분 참혹함의 역사를 대동한다. 특히 전제 왕권이나 나치나 스탈린 등 전체주의 독재자들이 야기한 피비린내 나는 인류적 재앙은 지식을 통제하고, 권력집단 외에는 지식에서 차단되어 무지를 강요하는 세계에서 발생했다. 이제 책의 20%가량 읽었음에도 그 모름의 다양성이 빚어낸 인류의 역사에 홀딱 빠져버렸다.

 

피터 버크의 책을 읽으면서 유발 하라리가 넥서스에서 시종 주장하는 정보네트워크의 중앙독점이 야기할 AI의 현실적 가능한 문제의 지적들이 결국 무지의 또 다른 형태의 사태임을 예견케 한다. 사실 하라리의 지적을 인용할 것도 없다, 이미 그가 지적한 내용들이 현실 깊숙이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이끌고 있으니 말이다. 가공의 AI가 뉴스피드와 숏컷을 생성하여 정치적 견해를 마치 사람이 하는 것인 양 이미 게시하고 있으며, 그것은 혐오와 증오의 영상과 글들에 좋아요를 누르는 인간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지식은 사라지고 차단되어 왜곡되고 조작된 지식이 사실로 행세하고 있는 세상이다.

 

또한 주식 시세의 동향과 투자 시점은 물론 수많은 저술들이 AI에 의존하여 생산되어 인간 시장을 휘돌고 있으며, 온통 먹방과 화장술, 낄낄거리는 포르노화된 쾌락에 젖어들고 있다. 정보 네트워크가 무한히 열린 지식에 가 닿게 하리라는 이상은 오히려 무지를 극단적으로 확장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컴퓨터가 지시하는 알고리즘에 갇혀 자기 의사와 취향은 그것이 가리키는 곳을 향한다. 하라리는 정보 접근에 대한 유연성의 문제를 질서와 자유라는 두 대립의 역사로 설득력있게 전개하며, 지식(정보)을 최상위 포식자가 열등한 자들을 속여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사용해왔음을 입증하고 있다. AI는 바로 인간역사의 최상위 포식자를 대체할 것이라 경고한다.

 

AI 혁명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이 지능이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나 인류를 노예와 소멸의 상태로 이행하기 전에 수정, 생명 진화의 희망찬 기회로 변화시킬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지식의 독점과 대다수 인간의 불가피한 무지의 상태는 인간 정치사회 속 독재자들의 자정장치 부재와 마찬가지로 정보 네트워크의 자정장치 결여를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다. AI 네트워크 개발자와 그 자본주체들은 들으려 하지 않으며 낙관론을 펼친다. 선택적 무지요, 허용된 무지의 표상들이다. 그것의 귀결은 폭력의 참상인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실수할 시간이 없는 인류 사회에 권하는 어쩌면 마지막 호소일지도 모르겠다.

 

올랜도 파이지스의 나타샤 댄스18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러시아 문화사다. 이 책은 오로지 톨스토이를 읽다가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한 무지가 불러일으킨 내 무지의 답답함에서 이끌려온 저술이다. 책의 제목인 나타샤 댄스 전쟁과 평화』에서 직접 농사일을 하며 농노들과 함께 사는 삼촌을 방문했을 때, 민중인 농노들과 어울려 그네들의 민속춤을 추게 되는 나타샤에서 연원한다. 귀족 영애인 나타샤는 프랑스식 예절에 익숙하고 궁중에서 추는 유럽 귀족들의 우아하고 격식을 차린 춤에 능숙하다. 그녀는 러시아 민속춤인 민중의 춤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선뜻 어울려 그녀는 자연스레 리듬을 타며 동작을 한다. 마치 그녀의 육신에 러시아적 영감이 각인된 듯이. , 제목은 러시아 민중인 농노와 유럽에 경도된 귀족들의 문화가 어떻게 대립하며 융합하는 지에 대한러시아 근대 문화의 역사를 조명하는 대작이다. 물론 해결하고 싶었던 톨스토이가 그려내고자 하는 시대적 의미를 획득하였다. 푸시킨에서 고골, 톨스토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나보코프에 이르는, 그리고 음악과 미술 작품에 투영된 그네들 역사의 굴곡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조금은 무지에서 해방된 것일 게다.

 

피터 케리의 집으로부터 멀리또한 오늘의 무수한 지식들이 서구 백인 남성들이 생산한 것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그들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더 많은 배제되고 삭제된 지식들이 있는 것이고, 케리의 소설은 바로 이 은폐된 지식, 폭력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수천 년을 자신의 토대로 살아왔던 이들에 대한 잔인한 폭력의 자취들을 백인 남자인 작가가 그 알려지지 않거나 알지 못했던 무지의 지대에서 지식의 세계로 드러내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 세계의 모든 역사는 이처럼 지식과 무지의 투쟁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초반부를 읽다보면 자동차 영업을 하는 백인들의 상스러움이 한동안 흐른다. 작품의 전반부를 이루는 이 허접스러운 일상의 장면들을 인내하면 더 없이 고결하고 강렬한 문제의식을 접할 수 있게 된다. 괜히 걸작인 것은 아닌 모양이다.

 

고대 인도의 종교와 역사와 설화를 망라한 힌두이즘 최고의 경전인 바가바드기타는 내겐 좀처럼 읽게 될 책이 아니었다. 인도의 정신세계를 알아야 할 당면한 욕구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상륭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 무지를 자극하는 어휘들, 그 개념에 대한 미진으로 인해 아쉬움이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차에 읽어내야 할 것 같다는 의욕을 앞세웠다. 일종의 알고 싶지 않은 선택적 무지를 깨부순 것인데, 이 의지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이 책의 많은 개념들이 우리 문화에는 없는 것들이어서 그 의미와 연결될 우리말을 연상하는 것 자체가 힘겨운 두뇌노동이다. 아마 감각과 감정과 사고의 제어, 의식의 확장과 관련한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박상륭의 언어들에 가까이 다가가는 지식의 토대가 되어준다면 하는 바람이다.

 

장 뤽 낭시를 비롯한 7인의 논설로 구성된 숭고에 대하여는 현학적 글들로 채워져 있어, 만만한 읽기는 아닐 것이다. 대체 숭고라 일컫는 것, 이것이 미학의 용어가 되어 철학과 예술의 한 중요 개념으로 작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는 파리 8대학 미셸 드기 교수만큼이나 내게도 어떤 수수께끼이고 신비스러움이다. 롱기누스로 전해지는 저자를 알 수 없는 책에서 시작된 번역어 숭고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인간이 자신의 소멸하는 부분들을 찬미하고 불멸의 증대를 소홀히 여긴다면 (그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여기서 숭고와 맞물려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인간 조건과 파멸의 순간임을 발견하게 된다. 죽음에 대하여 죽음으로부터 낚아 챈 말은 숭고하다고 느끼는 감정 그것을 말하는 것일 게다.

 

사뮈엘 베케트를 읽으면서 생성-소멸사이에서 그 어떤 유령, 빛을 발견하려는 침묵의 목소리를 시종 느껴야 했는데, 아무쪼록 많은 소설, 희곡, 시에서 발견되는 버려짐인 동시에 구원인, 최후에 통과하게 될 말, 그 암호의 도식을 발견하는 여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좋은 책을 이제라도 입수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구입한 책들을 향한 어떤 의지를 적어 놓고 보니 단 몇 권에 불과한 책만으로도 내 무지의 양이 엄청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뭘 안다고 말하는 것의 그 터무니없는 오만을 말해서 무엇 할까. 그저 겸허할 일이다. 아마 책들을 11월 내내 읽으면 겨울의 초입에 들어 설 것 같다. 찬 바람이 숭숭 구멍 뚫린 내 몸을 마구 통과하는 듯하다. 부쩍 몸에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있다. 무엇으로 이 많은 구멍들을 메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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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제안들 4
나탈리 레제 지음, 김예령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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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모호하게 무너져 내리면서 추억의 희미한 빛이 모습을 드러내고 유령들이 가벼운 신호를 보낸다. ‘그림자조차 없는 어둠 속에 이 무슨 빛과 그늘의 환영들인가!’”  -15

 

이 하나의 인용 문장이면 사뮈엘 베케트가 글쓰기로부터 찾으려 했던 모두 것을 말한 것이 되지 않을까? 1946~1947년경 쓴 것으로 추정되는 몰로이속 문장 존재한다는 것의 경악스러움 뒤에 숨은 원인, 침묵을 다시 데려오는 것, 그것이 사물들의 역할이다.”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과 부재 사이에서 글쓰기란 것을 통해 그 알 수 없는 불가능성을 집요하게 돌파하려는 인간을 엿보게 된다.

 

나탈리 레제의 글은 이로써 두 번째가 읽기가 된다. 발표순서는 전후가 바뀌기는 했지만 앞서 읽은 전시 L'Exposition는 1850년대 전후인 프랑스 제정2 기 시대의 최고 미인으로 알려졌던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의 일생에 걸친 사진작업을 통해 어둠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것, ‘부재의 덩어리인 구멍을 보게 하는, 거기에 영원히 고정된 존재의 그림자를 읽으며 고통 받았던 인물의 삶에 대한 애도를 가히 압도적으로 나타낸 강렬한 작품이었다. 이것이 내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는데, 레제의 어떤 대상을 관찰하는 시선이 비가시성(非可視性)에 맞추어져있음에 대한 선행적 이해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사뮈엘 베케트에 대한 이 저술 또한 그의 침묵으로 일관된 작품들의 그 근원적 부재함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가시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에 담겨있는 무엇에 대한 발견 혹은 발굴이라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책은 베케트가 말년의 삶을 지냈던 티에르탕 파리 14, 르미뒤몽셸에 있는 요양원의 공허가 이죽거리는방을 훑는 시선으로 시작된다. 아무 장식없는 침대, 방문객을 위한 소파 하나, 서랍장 하나, 서가 몇 개, 그리고 창가의 책상 하나, 단테의 신곡을 평생 손닿는 데에 두고 읽었던 베케트가 연옥편을 다시 집어 들었을 때를 상상한다. 요양원 창가의 책상에 앉아 산란하는 불빛 아래에서, 출몰과 소멸과 이동하는 몸과 지나가는 목소리들을 위한 이 장소의 수수께끼를 두고, 어쩌면 베케트는 연옥이란 이런 것이리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향수에 잠기라고 처단하는 곳, 어슴푸레한 빛 속에 집요하게 떠오르는 영상들을 찢어내기 위한 말들을 찾아내라고 강요하는바로 이곳임을.

 

지옥과 천국 사이의 유보된 시공, 연옥은 다름아닌 이생임을, 그러니 베케트는 흐릿한 빛 속에서 삶이라는 것, 현전한다는 것의 의미를 집요하게 찾아나서야 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글쓰는 직업을 가진 자에게는 형상을 무너뜨리는 끈기 있는 작업의 요구였으며, 언어라는 목재 안의, 언어라는 목질적인 실체 속의 아이러니컬한 현전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어렵다. 언어라는 목질은 무엇이고 그 실체속의 모순 혹은 부조화한 실존이란 또 뭐라는 말인가? 어쩌면 그가 뒤늦게 알게 되어 낸시 커나드의 디아워즈 출판사가 공모한 영시작품 접수 마감 당일에야 부리나케 쓴 98행의 호로스코프(whoroscope)의 마지막 연()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네, 그것은 움직인다네.”라는 절대적으로 현존하면서 포착 불가능한, 단지 포착 불가능하되 구조와 리듬으로서는 엄연히 현존하는 시간이라는 주제에서 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그것 아니었을까?

 

베케트의 작품들 거의 모두에서 이러한 현전의 아이러니를 우리는 보게 된다. 이 시는 완벽한 타원형 구()라는 모든 생각의 알()에 대한 예찬인데, 어쩌면 이 구는 구속임과 동시에 그것의 시원성과 운명의 수수께끼 일체를 품고 있는 이미지와 유추 가능한 신성의 의미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나탈리 레제는 수많은 베케트의 흔적에 대한 기록들 - 누군가의 회고 발언, 미국 텍사스, 독일 베를린 등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베케트의 수고 노트와 관련자들의 메모, 빛바랜 사진들, 그리고 베케트의 작품들 -을 종횡하며 깊고 세밀한 관찰과 상상의 눈으로 베케트의 말없는 말 속에 있었을 생각들에 접근을 시도한다.

 

에피소드 하나, 제임스 조이스를 스승처럼, 자신이 쓰려는 글쓰기의 모델로 여겼던 베케트는 조이스를 흉내 내어 작은 에나멜 구두를 신고 다녔던 모양이다. 발과 손이 작은 조이스의 구두를 신은 베케트는 그로인해 지독히 고생했는데, 고도를 기다리며의 인상깊은 시작 부분에 에스트라공이 너무 작은 신발 한 짝 때문에 아파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이스를 넘어서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의 표출이거나 아니면 삶이라는 굴레에 대한 염오(厭惡) 아니었을까.

 

에피소드 둘, 19465, 베케트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레탕 모데른계속의 첫 번째 텍스트를 게재하게 된다. 그러나 이 단편의 2부의 게재는 보부아르가 거절하게 되는데, 진정한 완결부를 거부한 것에 베케트는 실의에 빠진다. 보부아르는 글쓰기의 고뇌라는 문제를 받아들일 의향이 없었기에, 그만 문턱에서 멎어버리도록 합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베케트의 작업 안에서나 밖에서나 끝까지 방어해야 할 하나의 불행(아마도 현전이라는 궁극의 불가능한 의미를 찾으려는 집요함 아니었을까?)을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표명하려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베케트가 196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보부아르는 베케트의 이 불가능한 집요함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에피소드 셋, 프랑스를 대표하는 출판사인 미늬가 있다. 1950년 제롬 랭동은 이 출판사를 창업하고 변변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195010월 지하철에서 누군가 두고 내린 원고를 발견한다. 베케트의 대표작중 하나인 몰로이. 이 젊은 출판사 대표는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았고, 이후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등 베케트의 작품들을 독점 출판하게 된다. 유명 언론사 주필로서 문예계의 대부였던 장 폴랑은 제롬 랭동에게 짧은 편지를 쓴다. 몰로이건에 갈채를 보냅니다. (...) 바로 그 책으로 귀사의 위상은 결정된 겁니다.”, 랭동은 베케트를 대신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베케트가 오늘날 미늬 출판사가 존재하게 한 일등 공신이라는 말일 것이다.

 

1950년대 들어 베케트는 일 드 프랑스 지방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인 위시의 마론 강변 언덕배기에 집을 짓는다. 그것은 한 개의 차가운 입방체 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주인과 마찬가지로 회색빛을 띤 벽을 가진 멋없는 덩어리, 더구나 은둔을 지켜내기 위해 빙 둘러 시멘트 블록의 담까지 쌓아 주변의 풍경을 차단하고 지평선을 막아 봉쇄하기까지 한 집이었다고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침묵, , 그 벽 안쪽에서 좀 더 잘 보기 위해 스스로를 눈 먼 상태로 만들어버리려 했음이다. 어머니의 자궁, 또는 무덤, 그는 그 어두운 동굴 속에서 생의 출몰과 소멸의 시간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레제는 이탈리아의 시인 레오파르디의 무한을 인용하고 있는데, 베케트가 좋아했던 시인이고 보니 그 영향을 결코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리라.

 

내겐 늘 정다워라 이 쓸쓸한 산이여 / 둘러친 울타리여, 그 가두리에 / 먼 지평선은 시선에서 거의 지워지고 / 누워 바라보노라 / 울 너머 한없는 공간의 초인간적 침묵이여 / 하마터면 시들고 말았을 내 마음 속에“ - 86, 무한중에서

 

베케트는 자기 입방체, 저 알 속에 들어앉아 말들 사이의 각도를 측정하고 온갖 모음 충돌과 생략과 반복을 조합한다. 지나가는 시간은 다만 이 변함없는 꿈이었을 뿐, 지나가는 덧없는 빛은 오직 시간을 지니지 않은 회색의 공기였을 뿐이라고. 집 안에 틀어박혀 언어에 매달린다. , 정말 지독한 집요함이다. 무한히 주관적이고 은밀하며 집요한 성향. 아마 이것이 베케트라는 인간, 그의 작품들 자체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베케트의 작품이 발하는 그 길고긴 침묵들과 주관성에 곧 질식되곤 하는데, 아마 그것이 바로 작품이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레제의 이 세밀한 관찰과 상상의 사유로 인해 다시금 베케트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아주 시니컬한 미소를 짓게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에피소드 넷, 한 독자가 베케트를 발견하자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일생동안 선생님의 열렬한 찬미자였고, 40년 전부터 죽 선생님의 책을 읽어왔답니다.” 작가는 이렇게 대꾸했다. 참 피곤하시겠습니다.”, 낄낄낄~, 베케트를 끼고 산다는 것은 삶의 관계가 피폐해짐을 각오해야 하는 것 아닐까? 베케트의 말처럼 그건 정말 지독하게 피곤한 일일 게다. 여기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비밀 한 가지 누설! 연극공연의 준비를 하던 연출자 로제 블랑은 베케트에게 작가로서 요구할 요인들을 말해줄 것을 상의한다. 그때 베케트는 단 한 가지, ‘중절모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는 것이다.

 

포조: 저 자에게 자기 모자를 줘.

블라디미르: 자기 모자를?

포조: 그는 모자가 없으면 생각을 할 수가 없거든.

 

중절모자야말로 존재하고자 하는 집요함에 대한 보잘 것 없고 조롱어린, 동시에 비장한 상징이기 때문인데. 이는 불확실하지만 집요하게 더듬는 사유, 비틀거리며 길을 잃는 순간 사유의 기호 그 자체인 까닭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프랑스는 물론 영국 등 당대의 언론 문예비평들은 악평들을 쏟아냈던 모양이다. 이제까지 끔찍함이란 것에 이 정도로 영합하는 극은 없었다. 작가는 지독한 악취 속에 뒹군다. 심장이 조여들고 살갗에 소름이 끼친다.”, “사뮈엘 베케트는 가장 튼튼하다는 위장에도 소화불량을 일으킬 위험성이 있는 썩은 고기 한 조각을 파리 사람들의 머리에 던진다.”

 

움직임 없는 움직임인 모자, 또는 용해에 맞서 집중을, 토로에 맞서 제거를 이야기하는 제거의 소용돌이, 그리고 계속되는 침묵은 시간을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모욕처럼, 아니 추악한 혐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가혹한 비평들이지만. 한 걸음 더 내딛으면 어렴풋이나마 그 집요하게 추구되는 것에 대한 미약한 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멀찍이 물러나서 냉정하게 바라보는 존재를 탐구하는 또 다른 시선은 사실 소름끼치게 서늘한 기분을 갖게 한다. 베케트의 글쓰기는 추억이 입는 영광의 몸이자 어느 날 멈춰버린 것과 머지않아 완결 될 것 사이에 세워진 정경, 유령들을 불러내려는 정신의 성원에 도달하려는 그 이미지의 여정이다. 다른 말로 자궁(womb)과 무덤(tomb)이 베케트적 주제이고, 그래서 침묵은 불가피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어둡고 음침하며 침묵이 에워싼 장소, 그러나 생명과 소멸의 순환하는 그 시원의 시공은 말 할 수 없는 것이었을 테다.

 

 Jerry Bauer, <Portrait of Samuel Beckett in Paris>

 

이제 카메라 앵글의 귀퉁이 처박힌, 글쓰기에나 맞춤이었던 한 인간의 사진을 나는 응시하고 있다. 사진작가 제리 바우어가 찍은 말 없는 그림자를 나타내는 데 안성맞춤의 배치를 이루는 신중히 뒤로 물러난 인간의 초상을, 가장 낮은 곳에 틀어박혀 움직이는 글쓰기의 취약함이자 그 힘 자체인 대상을 바라본다. 시집 , 입이 없는 것들에서 이성복 시인이 말한 연약한 물풀에 몸을 감고 밤새 뒤척이며 날 새기를 기다리는해달의 숙명 같은 것일까? 문학이나 그 후광조차 싹 걷어낸 이 사진을 바라보며, ()형태 속 단호한 형태의 그 침묵의 억척스러움, 생명없는 생명을 읽는다. 아무튼 레제의 글을 읽다보면 안개 자욱한 미지의 장소를 거닐며 뜻하지 않은 보물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충만감을 느끼게 된다. 간결한 문장 속에서 풍요한 사유의 길로 이끄는 레제의 글은 항상 맛있다. 그래 유일하게 풍요로운 탐색이란 땅 파기, 잠수, 정신의 수축, 하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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