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제안들 4
나탈리 레제 지음, 김예령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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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모호하게 무너져 내리면서 추억의 희미한 빛이 모습을 드러내고 유령들이 가벼운 신호를 보낸다. ‘그림자조차 없는 어둠 속에 이 무슨 빛과 그늘의 환영들인가!’”  -15

 

이 하나의 인용 문장이면 사뮈엘 베케트가 글쓰기로부터 찾으려 했던 모두 것을 말한 것이 되지 않을까? 1946~1947년경 쓴 것으로 추정되는 몰로이속 문장 존재한다는 것의 경악스러움 뒤에 숨은 원인, 침묵을 다시 데려오는 것, 그것이 사물들의 역할이다.”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과 부재 사이에서 글쓰기란 것을 통해 그 알 수 없는 불가능성을 집요하게 돌파하려는 인간을 엿보게 된다.

 

나탈리 레제의 글은 이로써 두 번째가 읽기가 된다. 발표순서는 전후가 바뀌기는 했지만 앞서 읽은 전시 L'Exposition는 1850년대 전후인 프랑스 제정2 기 시대의 최고 미인으로 알려졌던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의 일생에 걸친 사진작업을 통해 어둠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것, ‘부재의 덩어리인 구멍을 보게 하는, 거기에 영원히 고정된 존재의 그림자를 읽으며 고통 받았던 인물의 삶에 대한 애도를 가히 압도적으로 나타낸 강렬한 작품이었다. 이것이 내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는데, 레제의 어떤 대상을 관찰하는 시선이 비가시성(非可視性)에 맞추어져있음에 대한 선행적 이해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사뮈엘 베케트에 대한 이 저술 또한 그의 침묵으로 일관된 작품들의 그 근원적 부재함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가시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에 담겨있는 무엇에 대한 발견 혹은 발굴이라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책은 베케트가 말년의 삶을 지냈던 티에르탕 파리 14, 르미뒤몽셸에 있는 요양원의 공허가 이죽거리는방을 훑는 시선으로 시작된다. 아무 장식없는 침대, 방문객을 위한 소파 하나, 서랍장 하나, 서가 몇 개, 그리고 창가의 책상 하나, 단테의 신곡을 평생 손닿는 데에 두고 읽었던 베케트가 연옥편을 다시 집어 들었을 때를 상상한다. 요양원 창가의 책상에 앉아 산란하는 불빛 아래에서, 출몰과 소멸과 이동하는 몸과 지나가는 목소리들을 위한 이 장소의 수수께끼를 두고, 어쩌면 베케트는 연옥이란 이런 것이리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향수에 잠기라고 처단하는 곳, 어슴푸레한 빛 속에 집요하게 떠오르는 영상들을 찢어내기 위한 말들을 찾아내라고 강요하는바로 이곳임을.

 

지옥과 천국 사이의 유보된 시공, 연옥은 다름아닌 이생임을, 그러니 베케트는 흐릿한 빛 속에서 삶이라는 것, 현전한다는 것의 의미를 집요하게 찾아나서야 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글쓰는 직업을 가진 자에게는 형상을 무너뜨리는 끈기 있는 작업의 요구였으며, 언어라는 목재 안의, 언어라는 목질적인 실체 속의 아이러니컬한 현전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어렵다. 언어라는 목질은 무엇이고 그 실체속의 모순 혹은 부조화한 실존이란 또 뭐라는 말인가? 어쩌면 그가 뒤늦게 알게 되어 낸시 커나드의 디아워즈 출판사가 공모한 영시작품 접수 마감 당일에야 부리나케 쓴 98행의 호로스코프(whoroscope)의 마지막 연()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네, 그것은 움직인다네.”라는 절대적으로 현존하면서 포착 불가능한, 단지 포착 불가능하되 구조와 리듬으로서는 엄연히 현존하는 시간이라는 주제에서 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그것 아니었을까?

 

베케트의 작품들 거의 모두에서 이러한 현전의 아이러니를 우리는 보게 된다. 이 시는 완벽한 타원형 구()라는 모든 생각의 알()에 대한 예찬인데, 어쩌면 이 구는 구속임과 동시에 그것의 시원성과 운명의 수수께끼 일체를 품고 있는 이미지와 유추 가능한 신성의 의미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나탈리 레제는 수많은 베케트의 흔적에 대한 기록들 - 누군가의 회고 발언, 미국 텍사스, 독일 베를린 등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베케트의 수고 노트와 관련자들의 메모, 빛바랜 사진들, 그리고 베케트의 작품들 -을 종횡하며 깊고 세밀한 관찰과 상상의 눈으로 베케트의 말없는 말 속에 있었을 생각들에 접근을 시도한다.

 

에피소드 하나, 제임스 조이스를 스승처럼, 자신이 쓰려는 글쓰기의 모델로 여겼던 베케트는 조이스를 흉내 내어 작은 에나멜 구두를 신고 다녔던 모양이다. 발과 손이 작은 조이스의 구두를 신은 베케트는 그로인해 지독히 고생했는데, 고도를 기다리며의 인상깊은 시작 부분에 에스트라공이 너무 작은 신발 한 짝 때문에 아파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이스를 넘어서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의 표출이거나 아니면 삶이라는 굴레에 대한 염오(厭惡) 아니었을까.

 

에피소드 둘, 19465, 베케트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레탕 모데른계속의 첫 번째 텍스트를 게재하게 된다. 그러나 이 단편의 2부의 게재는 보부아르가 거절하게 되는데, 진정한 완결부를 거부한 것에 베케트는 실의에 빠진다. 보부아르는 글쓰기의 고뇌라는 문제를 받아들일 의향이 없었기에, 그만 문턱에서 멎어버리도록 합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베케트의 작업 안에서나 밖에서나 끝까지 방어해야 할 하나의 불행(아마도 현전이라는 궁극의 불가능한 의미를 찾으려는 집요함 아니었을까?)을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표명하려는 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베케트가 196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보부아르는 베케트의 이 불가능한 집요함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에피소드 셋, 프랑스를 대표하는 출판사인 미늬가 있다. 1950년 제롬 랭동은 이 출판사를 창업하고 변변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195010월 지하철에서 누군가 두고 내린 원고를 발견한다. 베케트의 대표작중 하나인 몰로이. 이 젊은 출판사 대표는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았고, 이후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등 베케트의 작품들을 독점 출판하게 된다. 유명 언론사 주필로서 문예계의 대부였던 장 폴랑은 제롬 랭동에게 짧은 편지를 쓴다. 몰로이건에 갈채를 보냅니다. (...) 바로 그 책으로 귀사의 위상은 결정된 겁니다.”, 랭동은 베케트를 대신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베케트가 오늘날 미늬 출판사가 존재하게 한 일등 공신이라는 말일 것이다.

 

1950년대 들어 베케트는 일 드 프랑스 지방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인 위시의 마론 강변 언덕배기에 집을 짓는다. 그것은 한 개의 차가운 입방체 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주인과 마찬가지로 회색빛을 띤 벽을 가진 멋없는 덩어리, 더구나 은둔을 지켜내기 위해 빙 둘러 시멘트 블록의 담까지 쌓아 주변의 풍경을 차단하고 지평선을 막아 봉쇄하기까지 한 집이었다고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침묵, , 그 벽 안쪽에서 좀 더 잘 보기 위해 스스로를 눈 먼 상태로 만들어버리려 했음이다. 어머니의 자궁, 또는 무덤, 그는 그 어두운 동굴 속에서 생의 출몰과 소멸의 시간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레제는 이탈리아의 시인 레오파르디의 무한을 인용하고 있는데, 베케트가 좋아했던 시인이고 보니 그 영향을 결코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리라.

 

내겐 늘 정다워라 이 쓸쓸한 산이여 / 둘러친 울타리여, 그 가두리에 / 먼 지평선은 시선에서 거의 지워지고 / 누워 바라보노라 / 울 너머 한없는 공간의 초인간적 침묵이여 / 하마터면 시들고 말았을 내 마음 속에“ - 86, 무한중에서

 

베케트는 자기 입방체, 저 알 속에 들어앉아 말들 사이의 각도를 측정하고 온갖 모음 충돌과 생략과 반복을 조합한다. 지나가는 시간은 다만 이 변함없는 꿈이었을 뿐, 지나가는 덧없는 빛은 오직 시간을 지니지 않은 회색의 공기였을 뿐이라고. 집 안에 틀어박혀 언어에 매달린다. , 정말 지독한 집요함이다. 무한히 주관적이고 은밀하며 집요한 성향. 아마 이것이 베케트라는 인간, 그의 작품들 자체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베케트의 작품이 발하는 그 길고긴 침묵들과 주관성에 곧 질식되곤 하는데, 아마 그것이 바로 작품이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레제의 이 세밀한 관찰과 상상의 사유로 인해 다시금 베케트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아주 시니컬한 미소를 짓게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에피소드 넷, 한 독자가 베케트를 발견하자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일생동안 선생님의 열렬한 찬미자였고, 40년 전부터 죽 선생님의 책을 읽어왔답니다.” 작가는 이렇게 대꾸했다. 참 피곤하시겠습니다.”, 낄낄낄~, 베케트를 끼고 산다는 것은 삶의 관계가 피폐해짐을 각오해야 하는 것 아닐까? 베케트의 말처럼 그건 정말 지독하게 피곤한 일일 게다. 여기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비밀 한 가지 누설! 연극공연의 준비를 하던 연출자 로제 블랑은 베케트에게 작가로서 요구할 요인들을 말해줄 것을 상의한다. 그때 베케트는 단 한 가지, ‘중절모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는 것이다.

 

포조: 저 자에게 자기 모자를 줘.

블라디미르: 자기 모자를?

포조: 그는 모자가 없으면 생각을 할 수가 없거든.

 

중절모자야말로 존재하고자 하는 집요함에 대한 보잘 것 없고 조롱어린, 동시에 비장한 상징이기 때문인데. 이는 불확실하지만 집요하게 더듬는 사유, 비틀거리며 길을 잃는 순간 사유의 기호 그 자체인 까닭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프랑스는 물론 영국 등 당대의 언론 문예비평들은 악평들을 쏟아냈던 모양이다. 이제까지 끔찍함이란 것에 이 정도로 영합하는 극은 없었다. 작가는 지독한 악취 속에 뒹군다. 심장이 조여들고 살갗에 소름이 끼친다.”, “사뮈엘 베케트는 가장 튼튼하다는 위장에도 소화불량을 일으킬 위험성이 있는 썩은 고기 한 조각을 파리 사람들의 머리에 던진다.”

 

움직임 없는 움직임인 모자, 또는 용해에 맞서 집중을, 토로에 맞서 제거를 이야기하는 제거의 소용돌이, 그리고 계속되는 침묵은 시간을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모욕처럼, 아니 추악한 혐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가혹한 비평들이지만. 한 걸음 더 내딛으면 어렴풋이나마 그 집요하게 추구되는 것에 대한 미약한 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멀찍이 물러나서 냉정하게 바라보는 존재를 탐구하는 또 다른 시선은 사실 소름끼치게 서늘한 기분을 갖게 한다. 베케트의 글쓰기는 추억이 입는 영광의 몸이자 어느 날 멈춰버린 것과 머지않아 완결 될 것 사이에 세워진 정경, 유령들을 불러내려는 정신의 성원에 도달하려는 그 이미지의 여정이다. 다른 말로 자궁(womb)과 무덤(tomb)이 베케트적 주제이고, 그래서 침묵은 불가피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어둡고 음침하며 침묵이 에워싼 장소, 그러나 생명과 소멸의 순환하는 그 시원의 시공은 말 할 수 없는 것이었을 테다.

 

 Jerry Bauer, <Portrait of Samuel Beckett in Paris>

 

이제 카메라 앵글의 귀퉁이 처박힌, 글쓰기에나 맞춤이었던 한 인간의 사진을 나는 응시하고 있다. 사진작가 제리 바우어가 찍은 말 없는 그림자를 나타내는 데 안성맞춤의 배치를 이루는 신중히 뒤로 물러난 인간의 초상을, 가장 낮은 곳에 틀어박혀 움직이는 글쓰기의 취약함이자 그 힘 자체인 대상을 바라본다. 시집 , 입이 없는 것들에서 이성복 시인이 말한 연약한 물풀에 몸을 감고 밤새 뒤척이며 날 새기를 기다리는해달의 숙명 같은 것일까? 문학이나 그 후광조차 싹 걷어낸 이 사진을 바라보며, ()형태 속 단호한 형태의 그 침묵의 억척스러움, 생명없는 생명을 읽는다. 아무튼 레제의 글을 읽다보면 안개 자욱한 미지의 장소를 거닐며 뜻하지 않은 보물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충만감을 느끼게 된다. 간결한 문장 속에서 풍요한 사유의 길로 이끄는 레제의 글은 항상 맛있다. 그래 유일하게 풍요로운 탐색이란 땅 파기, 잠수, 정신의 수축, 하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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