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믿건 그건 네가 제한된 인식 가능성에
구속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에마뉴엘 칸트
내 오만한 넋두리는 다시금 몇 권의 책들을 내 앞에 이르게 했다. 아마도 지식의 드넓은 해양으로 인해 안다는 것은 애초에 가당치도 않은 것이기에 무지의 겸손은 불가피한 것일 게다. 그런데 무지가 이 정도의 의미라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무지에는 그 종류가 정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무지를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무지의 개념을 단순히 정의한다면 그저 '지식의 부재 혹은 결핍'이라는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 이겠지만, 무지를 정의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은 무지는 지식의 이면에 상응하는 것만큼 무지의 종류가 존재한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어떤 존재를 모르는 것과 그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는 것은 다른 종류의 무지이듯, 모른다는 것의 본질이 다르다.
권력과 부를 독점한 집단은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집단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체제와 문화를 배우기를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의 현실 조건에 무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소위 '허용된 무지'란 것도 있고, 자신과 다른 사고방식에 대한 인식의 결여를 의미하는 '깊은 무지'라는 것도 있다. 더구나 사람들은 자신의 규범을 비판하는데 한계가 있어 대안적 신념에 접근할 기회가 부족함으로써 야기되는 무지도 있다. 이것으로 그칠 수 있었다면 인간 사회는 그나마 조금은 더 지혜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알기를 원하지 않거나 모르기를 원하는 ‘자발적, 고의적 무지’도 있고, 부주의함이나 의도적 목적을 지닌 ‘선택적 무지’도 있다. 여기에 요즘 극성을 부리는 혼란이나 의심을 생산하여 타인의 무지를 통해 권력을 지속하려는 사실을 은폐하는 거짓과 허위정보로 대중을 속이려는 ‘능동적 조치로서의 사악한 무지’도 있다.
나아가 무지는 오류와 불확실성, 부정, 선입견, 기억상실과 같은 인접 개념까지 포괄하면서 무지를 더욱 폭넓고도 깊게 강화하며, 지식으로의 이행을 방해한다. 이달 들어 새롭게 장만한 책들은 이를 위한 작은 시발점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한 마디로 너무 아는 게 없어 읽기로 한 책들이다. 어떤 대단한 계획의 범주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 무지를 강하게 때린 것에 대한 해갈을 위한 조치이다.
그것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다가 왜 작가가 이러한 장면들을 장황하게 묘사하고 있는지, 박상륭의 소설 아닌 잡설인 『칠조어록』의 그 무수한 말(言)의 우주의 방언들의 한 토대가 된 앎은 어디서 출원한 것인지, 백인들은 알지 못했던, 아니 자신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오랜 폭력의 역사에 은폐된 것은 무엇인지를, AI 만능의 맹목적인 의존적 사고에 깃든 지식을 향한 탐욕스러울 정도의 무지는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를 알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저자가 누구였는지 모르는 심지어 책의 제목조차 『숭고에 대하여 Du sublime』라 오역(誤譯)된 '높음에 관하여‘로 번역될 만한 『페리 훕수스 Peri Hupsous』의 그 과장의 의지에 숨겨진 진실에 대한 무지의 항변이라 해도 될 것 이다.
피터 버크의 『무지의 역사』는 저자의 말처럼 ‘지식 없음’을 말한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기술처럼 여겨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뭔가를 알지 못한다거나 알려하지 않음으로서 모른다는 것의 역사란 대부분 참혹함의 역사를 대동한다. 특히 전제 왕권이나 나치나 스탈린 등 전체주의 독재자들이 야기한 피비린내 나는 인류적 재앙은 지식을 통제하고, 권력집단 외에는 지식에서 차단되어 무지를 강요하는 세계에서 발생했다. 이제 책의 20%가량 읽었음에도 그 모름의 다양성이 빚어낸 인류의 역사에 홀딱 빠져버렸다.
피터 버크의 책을 읽으면서 유발 하라리가 『넥서스』에서 시종 주장하는 정보네트워크의 중앙독점이 야기할 AI의 현실적 가능한 문제의 지적들이 결국 무지의 또 다른 형태의 사태임을 예견케 한다. 사실 하라리의 지적을 인용할 것도 없다, 이미 그가 지적한 내용들이 현실 깊숙이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이끌고 있으니 말이다. 가공의 AI가 뉴스피드와 숏컷을 생성하여 정치적 견해를 마치 사람이 하는 것인 양 이미 게시하고 있으며, 그것은 혐오와 증오의 영상과 글들에 좋아요를 누르는 인간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지식은 사라지고 차단되어 왜곡되고 조작된 지식이 사실로 행세하고 있는 세상이다.
또한 주식 시세의 동향과 투자 시점은 물론 수많은 저술들이 AI에 의존하여 생산되어 인간 시장을 휘돌고 있으며, 온통 먹방과 화장술, 낄낄거리는 포르노화된 쾌락에 젖어들고 있다. 정보 네트워크가 무한히 열린 지식에 가 닿게 하리라는 이상은 오히려 무지를 극단적으로 확장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컴퓨터가 지시하는 알고리즘에 갇혀 자기 의사와 취향은 그것이 가리키는 곳을 향한다. 하라리는 정보 접근에 대한 유연성의 문제를 질서와 자유라는 두 대립의 역사로 설득력있게 전개하며, 지식(정보)을 최상위 포식자가 열등한 자들을 속여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사용해왔음을 입증하고 있다. AI는 바로 인간역사의 최상위 포식자를 대체할 것이라 경고한다.
AI 혁명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이 지능이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나 인류를 노예와 소멸의 상태로 이행하기 전에 수정, 생명 진화의 희망찬 기회로 변화시킬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지식의 독점과 대다수 인간의 불가피한 무지의 상태는 인간 정치사회 속 독재자들의 자정장치 부재와 마찬가지로 정보 네트워크의 자정장치 결여를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다. AI 네트워크 개발자와 그 자본주체들은 들으려 하지 않으며 낙관론을 펼친다. 선택적 무지요, 허용된 무지의 표상들이다. 그것의 귀결은 폭력의 참상인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실수할 시간이 없는 인류 사회에 권하는 어쩌면 마지막 호소일지도 모르겠다.
올랜도 파이지스의 『나타샤 댄스』는 18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러시아 문화사다. 이 책은 오로지 톨스토이를 읽다가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한 무지가 불러일으킨 내 무지의 답답함에서 이끌려온 저술이다. 책의 제목인 ‘나타샤 댄스’는 『전쟁과 평화』에서 직접 농사일을 하며 농노들과 함께 사는 삼촌을 방문했을 때, 민중인 농노들과 어울려 그네들의 민속춤을 추게 되는 나타샤에서 연원한다. 귀족 영애인 나타샤는 프랑스식 예절에 익숙하고 궁중에서 추는 유럽 귀족들의 우아하고 격식을 차린 춤에 능숙하다. 그녀는 러시아 민속춤인 민중의 춤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선뜻 어울려 그녀는 자연스레 리듬을 타며 동작을 한다. 마치 그녀의 육신에 러시아적 영감이 각인된 듯이. 즉, 제목은 러시아 민중인 농노와 유럽에 경도된 귀족들의 문화가 어떻게 대립하며 융합하는 지에 대한러시아 근대 문화의 역사를 조명하는 대작이다. 물론 해결하고 싶었던 톨스토이가 그려내고자 하는 시대적 의미를 획득하였다. 푸시킨에서 고골, 톨스토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나보코프에 이르는, 그리고 음악과 미술 작품에 투영된 그네들 역사의 굴곡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조금은 무지에서 해방된 것일 게다.
피터 케리의 『집으로부터 멀리』 또한 오늘의 무수한 지식들이 서구 백인 남성들이 생산한 것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그들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더 많은 배제되고 삭제된 지식들이 있는 것이고, 케리의 소설은 바로 이 은폐된 지식, 폭력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수천 년을 자신의 토대로 살아왔던 이들에 대한 잔인한 폭력의 자취들을 백인 남자인 작가가 그 알려지지 않거나 알지 못했던 무지의 지대에서 지식의 세계로 드러내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 세계의 모든 역사는 이처럼 지식과 무지의 투쟁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초반부를 읽다보면 자동차 영업을 하는 백인들의 상스러움이 한동안 흐른다. 작품의 전반부를 이루는 이 허접스러운 일상의 장면들을 인내하면 더 없이 고결하고 강렬한 문제의식을 접할 수 있게 된다. 괜히 걸작인 것은 아닌 모양이다.
고대 인도의 종교와 역사와 설화를 망라한 힌두이즘 최고의 경전인 『바가바드기타』는 내겐 좀처럼 읽게 될 책이 아니었다. 인도의 정신세계를 알아야 할 당면한 욕구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상륭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 무지를 자극하는 어휘들, 그 개념에 대한 미진으로 인해 아쉬움이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차에 읽어내야 할 것 같다는 의욕을 앞세웠다. 일종의 알고 싶지 않은 선택적 무지를 깨부순 것인데, 이 의지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이 책의 많은 개념들이 우리 문화에는 없는 것들이어서 그 의미와 연결될 우리말을 연상하는 것 자체가 힘겨운 두뇌노동이다. 아마 감각과 감정과 사고의 제어, 의식의 확장과 관련한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박상륭의 언어들에 가까이 다가가는 지식의 토대가 되어준다면 하는 바람이다.
장 뤽 낭시를 비롯한 7인의 논설로 구성된 『숭고에 대하여』는 현학적 글들로 채워져 있어, 만만한 읽기는 아닐 것이다. 대체 ‘숭고’라 일컫는 것, 이것이 미학의 용어가 되어 철학과 예술의 한 중요 개념으로 작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는 파리 8대학 미셸 드기 교수만큼이나 내게도 어떤 수수께끼이고 신비스러움이다. 롱기누스로 전해지는 저자를 알 수 없는 책에서 시작된 번역어 ‘숭고’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인간이 자신의 소멸하는 부분들을 찬미하고 불멸의 증대를 소홀히 여긴다면 (그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여기서 숭고와 맞물려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인간 조건과 파멸의 순간임을 발견하게 된다. 죽음에 대하여 죽음으로부터 낚아 챈 말은 숭고하다고 느끼는 감정 그것을 말하는 것일 게다.
사뮈엘 베케트를 읽으면서 ‘생성-소멸’ 사이에서 그 어떤 유령, 빛을 발견하려는 침묵의 목소리를 시종 느껴야 했는데, 아무쪼록 많은 소설, 희곡, 시에서 발견되는 버려짐인 동시에 구원인, 최후에 통과하게 될 말, 그 암호의 도식을 발견하는 여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좋은 책을 이제라도 입수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구입한 책들을 향한 어떤 의지를 적어 놓고 보니 단 몇 권에 불과한 책만으로도 내 무지의 양이 엄청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뭘 안다고 말하는 것의 그 터무니없는 오만을 말해서 무엇 할까. 그저 겸허할 일이다. 아마 책들을 11월 내내 읽으면 겨울의 초입에 들어 설 것 같다. 찬 바람이 숭숭 구멍 뚫린 내 몸을 마구 통과하는 듯하다. 부쩍 몸에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있다. 무엇으로 이 많은 구멍들을 메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