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생의 허무는 어디에서 오는가 - 도덕을 상실한 시대의 톨스토이 읽기
석영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0월
평점 :
※ 이 리뷰 글은 석영중 교수의 오랜 학문적 연구가 충실하게 녹아있는 책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저술의 내용을 상당 부분 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스포일러 짓거리를 혹여 한 것 아닌가 저어됩니다. 독자들께서는 이점 해량하시어 읽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현자이자 대문호로 알려진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는 『안나 카레니나』를 발표한 뒤, 나이 오십에 이르자 인류를 향해 근본주의적 도덕을 연설하기 시작한다. 소위 시쳇말로 꼰대가 되었다. 이를 문학계에서는 ‘톨스토이의 회심(回心)’이라 하는데,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미 유년시절부터 그 싹이 도처에서 움트고 있었다고, 그의 소설, 에세이, 일기, 전기를 망라해 행적을 탐사한다. 그것은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이 결론을 반박하기 위한 결론을 얻기 위해, 인간이 지속적 삶을 살기위해서 어떤 근본적 가치를 붙잡아야 하는 것인지, 그 지혜를 발견하기 위한 모순으로 점철된 투쟁을 통해 답을 발견하는 것이었다고.
이 책은 이 탐사의 여정을 톨스토이의 대작인 『안나 카레니나』를 중심으로 소설 『전쟁과 평화』, 『크로이체르 소나타』, 『부활』, 『악마』에서부터 『참회록』, 『인생의 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등 교훈 에세이들, 그리고 대문호 부부의 일기를 종횡하며 나쁜 사랑, 아주 나쁜 결혼, 좋은 결혼, 육체와 채식, 죽음을 기억하자 등 7개장에 걸쳐 톨스토이가 지녔던 생각과 신념을 풀어놓는다. 그것은 기괴하고 아주 뒤틀린 한 남자의 비극성을 발견하게 한다. 자기 육체의 쾌락에 몰두하면서 그 쾌락을 혐오하고 저주하는 식의 극단을 하나의 내부에 지닌 인간의 모순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괴한 믿음을 일생 일관되게 밀고나간 인물을 보게 된다.
물론 대문호의 삶을 하나의 시선에 매몰시켜 폄하하거나 훼손하려는 그런 글은 아니지만, 저자의 관점은 결혼이라는 하나의 근본적 사건에 집중된 수많은 파동에 내재된 본질주의적 도덕주의의 무서운 혐오를 읽어내고 있는 것이기에 딱히 격하가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운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아마 이러한 지향성 때문이겠지만 첫 장의 제목도 「나쁜 사랑」이다. 나쁜 사랑의 대표는 단연 불륜이고 이 불행한 “사랑에 목숨을 건 여자가 자기 자신과 사투를 벌이는” 『안나 카레니나』는 제격일 것이다. 이 작품으로부터 저자는 톨스토이의 사랑과 결혼, 섭생, 농촌에서의 삶, 예술 전반에 대한 도덕주의적 신념을 생생하게 발굴해낸다.
톨스토이가 주인공인 안나에 대해 얼마나 혐오와 증오를 가졌는지, 그 의도를 줄줄이 열거하며, 현실 속 톨스토이의 방탕했던 젊은 시절의 삶과 병행하며 그의 연애관을 해독한다. 오빠의 외도로 인해 풍파가 일어난 올케와의 갈등을 중재하러 온 안나가 모스크바에서 무도회에 참석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안나는 어떤 치장도 없는 블랙 드레스를 입고 수많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을 압도한다. 이 단순하고 자연스러움으로 복식을 초월하여 드러나는 생생한 그녀의 활력은 더욱 화려하게 빛난다. 자기 자신 자체를 어필하는 아름다움이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뭔가 잔혹하고 무서운 것이 있었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안나의 검은 옷은 죽음의 예고이며, “이 무도회는 곧 자기 사망증명서에 서명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장례식, 매춘부의 옷이 검은 색의 드레스였음을 상기시킨다. 무도회등 사교모임과 그곳의 여인네들에 대한 톨스토이의 혐오와 증오가 뿌리 깊었음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불륜커플이 최초로 정사를 치루는 장면의 묘사는 정말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는 아주 기분 나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죽인 시체야말로 그들의 사랑이었고, 그들 사랑의 첫 단계였다. 수치심이라는 무서운 대가를 치르고 얻는 것을 회상해보니 거기에는 뭔가 무섭고 더러운 것이 있었다.” 며, 그들의 남녀상열지사에는 그 어떤 쾌락도 환희도 없으며, 오직 공포만이 맴돈다. 톨스토이는 육체의 사랑인 이 불륜커플, 특히 안나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안나의 사랑은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 죽음은 소설 곳곳에 무수한 복선으로 지속적으로 암시하며 급기야 참혹한 죽음으로 귀결시킨다.
이렇게 육체의 사랑에 대한 병적 혐오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그 육체의 욕구에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그 혐오감에 비례해서 성욕도 병적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그의 일기) 그는 대영지의 지주로서 농노의 아낙 악시냐와 3년여에 걸친 정사를 지속했는데, 1858.5.13.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단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이런 사랑은 생전에 처음이다.” 그런데 매우 우습게도 이 지주나리는 악시냐와의 육체관계를 계속하면서도 도덕적 자책감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탐닉하면 할수록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는 것인데, 이는 자기기만이 아니고 뭘까? 육체 욕구에 증오까지 보내면서 그것을 탐닉하는 인간, 아무튼 톨스토이의 젊은 시절, 그가 소피야와 결혼하기 전까지의 방탕함의 일례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1862년 소피야와 결혼하면서 그의 성적 쾌락은 합법적 길이 열렸다. 그런데 또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이 기행(奇行)은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에게서도,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포즈드니셰프에게서도 동일한 행동으로 출현하는데, “과거의 지저분한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올바르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아내에게 그 일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부에게만 순결을 요구하는 당대의 인식은 그랬다고 치자. 그래도 또 하나의 심각한 도덕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데, 과거의 일기를 보여주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합법적 쾌락의 도구로 너를 사용하겠어!’라는 자기 아내의 성적 도구화 선언인 것인데, 이 모욕의 행위(일기를 보여주는 것)에 무슨 가정의 행복이 자리 잡을 공간이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사랑, 결혼관이란 육체의 쾌락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고, 여기에다 온갖 망상들, 영혼의 교감, 일심동체의 의사소통을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를 넘어 이런 부도덕한 몰상식도 없을 것이다.
막심 고리키는 톨스토이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여자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적대적이며, 여자에게 벌주는 것을 즐긴다.”고, 그리고 그것은 “쾌락을 끝까지 다 만끽하지 못한 수컷의 적대감 혹은 육체의 음탕한 충동에 맞선 영혼의 적대감”이었다고 말이다. 톨스토이 자신도 이러한 자신의 욕구를 알았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육체에 대한 혐오감과 도덕적 죄의식에서 사이에서 고뇌했음은 도처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까닭이다. 1890년 전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중편소설 『악마』에서 톨스토이 자신의 분신인 지주 예브게니는 자신과 정사를 즐기는 농부 아낙에 대한 정욕을 가히 악마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곤 스스로 권총 자살하기까지 한다. 이제 톨스토이의 도덕적 인식은 육체의 아름다움은 곧 추잡함과 동일어에 이르는데, 이 때문인지 그의 작품들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하여 『부활』, 『크로이체르 소나타』 『전쟁과 평화』의 인물들에서 성적 매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증오의 대상이 되어 활력이나 육체적 매력을 깨끗하게 지워버린 인물로 변화시키던지, 아니면 모조리 죽여 버린다.
2장 「나쁜 결혼과 아주 나쁜 결혼」 에 이르면 정말 가관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소설을 시작하는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가지각색으로 불행하다.”는 이 유명한 문장은 톨스토이 자신의 불행한 가정의 투사였을 것이다. 결혼 직후부터 피터지게 싸우기 시작한 톨스토이와 소피야의 그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은 아마 인간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최악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스티바의 중단될 수 없는 외도, 그리고 외로움과 무관심의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하는 돌리, 안나와 카레닌, 톨스토이와 소피야,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포즈드니셰프와 그의 아내는 “부부 사이의 갈등이야말로 인류 최악의 고통”임을 독자들에게 확인시켜준다.
톨스토이와 소피야는 그야말로 “싸우면서 늙어갔다”는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말인데,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난 쉰 살 무렵 톨스토이가 소위 ‘중년의 위기’를 겪고 나면서 살아왔던 방식을 바꾸는 회심(回心)을 하면서 인생의 교사로 거듭나는 시점부터 이 대문호부부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자세하게 기록될 결혼 생활”을 남겨 후대에 전해주고 있다. 이 문호는 이때부터 인류를 향해 온갖 종류의 충고를 해대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가정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실 내게도 하나의 사연이 있는데, 바로 그가 쓴 『인생의 길』이라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이 평론가들로부터 “지성의 자살”이라거나, “불쾌한 문학 장르의 가장 불쾌한 견본”이라는 이야기들을 알지 못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삼분의 일쯤 읽다가 냅다 쓰레기통에 팽개쳐 버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역겨움과 편협함과 황당함은 지금도 불쾌한 기분이 느껴질 정도이니 말이다. 잠깐 다른 길로 샜다. 다시 그의 회심의 시점으로 돌아가자.
자신의 오십 평생의 삶은 거짓이며 위선이었다는 것이다. 『참회록』에 이렇게 쓴다. “가장 반성했던 죄악 중 하나는 ‘허접스러운 글’을 써서 그 수익으로 호화롭게 살아온 죄악.”이라고 말이다. 그리곤 자신의 영지인 야스나야 폴라냐와 저택의 소유권을 버리기로 하고, 톨스토이 가문의 주요 수입원인 저작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1883년 『내가 믿는 것』에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거지가 되어야 한다. 안 그러면 행복해질 수 없다.”고 쓴다. 세인(世人)에게 모든 재산을 버리고 가난한 삶을 살아갈 것을 맹세한 대문호에 대한 존경심과 달리 아내 소피야에게는 이런 남편의 행동은 더없이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종들이 음식을 날라 오고, 따뜻한 차를 언제라도 대령케 하며,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아내의 시중과 나이 육십에도 여전히 자신의 육체적 쾌락을 위해 아내에게 잠자리를 요구하는 인간에게 어찌 당혹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연민을 보내고 공감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소피야의 반발에도 일말의 잘못이 있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는데, 아마 남편의 진심을 읽으려 하지 않았던 이유인 것 같지만, 당대를 휩쓴 여자, 아내들에게 씌워져 있던 굴종의 미덕(?)을 돌파하지 못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소피야를 왜곡한 것은 아닐까? 소피야의 일기를 여기 간략하게 소개하련다.
“홀로서기를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속박감은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내가 이런 우울증에 빠진 것은...” - 1875년 11월 12일
“나는 남편의 일기들을 정서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영원히 감정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에 내 안의 모든 에너지와 재능을 소진해버렸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후회막심이다.” - 1890년 12월 31일
이때의 상황이 소설로 둔갑한 작품이 악명 높은 『크로이체르 소나타』다. 마음을 쏟을 대상, 사랑할 사람,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 줄 사람이 소피야는 필요했을 것이다. 그때 남편이 잘 아는 차이코프스키의 제자이며 훗날 라흐마니노프의 스승인 콘서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타네예프를 소개받게 된다. 톨스토이 백작부인은 타네예프의 모스크바 연주회에도 참석하며 젊은 사내를 쫓는다. “동물적 정욕으로 마누라를 괴롭히는 남편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여인이 순결한 플라토닉 러브를 원했던 것, 정신적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 무어 그리 추한 일이겠는가. 톨스토이는 사태의 희극성을 여러 차례 지적한 모양이지만, 소피야는 자신의 순수하고 고결한 열정의 믿음으로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아마 바로 이때의 상황을 소재로 하여 톨스토이는 자신의 결혼관을 압축한 소설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썼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은 살인으로 끝나는 최악의 과격한 결혼 이야기다. 여기서 모든 사랑을 싸잡아 육체적 사랑으로 매도한다. 사랑은 모두 악이라는 것이다. “남녀의 관계는 모두 철두철미하게 육체관계라는 것, 추잡스럽고 낯 뜨거운 것, ‘사랑=성욕=매춘’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톨스토이의 결혼관은 시종 육체의 관계, 쾌락의 합법적 사용관계라는 지극히 편협한 인식으로 채워져 있다. 그렇다고 그의 생각 전체가 이렇게 뒤틀려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는데, 서른 살에 쓴 지주 세르게이와 이웃집 처녀 마샤의 결혼 생활에 대한 담담한 회고 형식을 한 소설 『가정의 행복』은 일견 진부한 소박함을 담아내 긍정적인 결혼 생활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삶, 적절한 노동과 휴식과 감사와 평화가 깃든 소박한 삶이라는 것은 그리 단순하거나 쉬운 삶이 아니다. 실제 이러한 삶은 꿈같은 염원일 것이다. 이보다 조금은 현실적인 좋은 삶이 여전히 가부장적 질서 위에서만 행복한 가정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과 키티 커플이 미약하지만 좋은 결혼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분신격인 레빈에게서 우리는 일심동체와 같은 허망한 소통의 기대나, “육체적 행복, 정서적 행복, 도덕적 평화”를 한꺼번에 보장해주는 유일한 길로서 결혼을 꿈꾼다는 점에서 한낱 미망임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어쨌든 레빈과 키티 부부의 결혼이 톨스토이가 기대하는 결혼생활의 지극히 양보된 균형감각 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근본주의적 도덕군자는 또 무슨 말을 했을까? 1886년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육식과 채식」(4장)을 대립시키며, 어떤 것을 먹느냐에 따라 그 인간의 심성과 인격, 그리고 전 존재를 말해주는 기호라고 해독한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모스크바에 올라 온 레빈과 스티바가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있다. 톨스토이는 여기에도 음흉한 장치를 해놓고 있는데. 먹는 음식과 심성은 동일한 것임을 암시한다. 이 외도의 고수인 스티바는 굴과 로스트비프를 먹기 전 추잡한 프랑스 여자와 시시덕거리는 것인데, 그런 후 굴과 로스트비프와 스테이크, 보드카와 블랑과 샤블리를 먹성 좋게 배속으로 들이미는 것이다. 즉 스티바는 육체의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 사살하는 것이다. 반면 레빈은 “빨리 배를 채우지 않으려고 굴 따위를 먹는 것이 내게는 기괴망측하게 생각된다.”며, 그것에 쾌락의 욕구가 있음을 지적한다.
1886년 톨스토이는 모스크바 빈민굴을 방문하고 돌아 온 후 자신의 사치스러운 식생활을 고발하고는 “타인의 결핍과 빈곤을 조금이라도 배려해주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맛있고 기름지고 비싼 식사를 해서는 안 된다”며, 이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채식성 인간으로 거듭난다. 톨스토이는 이로부터 음식과 정욕의 함수관계를 확고하게 각인했던 모양이다. 이는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다시금 토로되고 있는데, ‘저주의 삼총사’로 불리는 ‘음식, 흡연, 육식’을 빗대어 “오입쟁이란 아편쟁이나 술꾼, 흡연자처럼 하나의 육체적 현상입니다.”라고, 정상인이라 부를 수 없음을, 이것이야말로 ‘타락의 절정’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이러한 음식에 대한 도덕주의적 관점의 투영은 그의 소설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5장 「도시와 시골」에 이르면 도시 생활은 곧 타락과 퇴폐의 동의어가 되고, 이 타락을 지속하기 위한 체면 비용 등 생활비의 급증을 지적한다. 이는 레빈과 키티 부부의 잠시 모스크바의 생활 장면에서 부각되는 데, 톨스토이의 실용성의 도덕을 반영하는 것일 테다. 레빈을 통해 톨스토이는 이 사상을 선언케 하는데, “낡은 생활 부정하기, 무용한 지식 부정하기, 쓸모없는 교양을 부정하기”다. 전형적인 실용성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데, 톨스토이가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로서 발견한 행동(실천) 양식을 이루기 때문이다. 즉 삶의 구성이란 당장 실생활과 연결돼야만 하는 것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던 까닭이다.
6장 「예술을 박멸하자」은 그야말로 당대 문단에서 “톨스토이 옹(翁)이 치매에 걸렸다.”며 그 과격성과 황당함의 지적에 대한 탐사다. 여기서 오늘의 우리들도 일관되게 예술과 예술가를 몰살시키는 악의 가득한 예술 소멸론을 주장하는 톨스토이의 근본주의적 도덕론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예술이란 “가장 선한 감정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감염시킨다는 대단히 거룩한 사명”임을 전제하고는 이 기준에 미흡한 예술은 죄다 ‘나쁜 예술’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인데, 물론 그의 주장에는 일말의 정당한 일리가 있기도 하지만, 저자의 지적처럼 “일리가 있다고 진리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97년에 발표된 『예술이란 무엇인가』의 주장에서 살아남을 예술이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발레는 반라(半裸)의 여자들이 뇌쇄시킬 듯한 동작을 하면서 여러 육감적 기교를 보라는 구경거리에 불과하며, 오페라는 남녀 사이의 추잡한 짓거리를 위한 배경 음악을 제공해줄 따름이며, 음악은 예술적 표현을 통해 영혼을 고양시키기는커녕 “살인을 저지른 것은 베토벤의 소나타 때문”이라는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통해 “우...! 끔찍하다”고 까지 한다. 급기야 음악은 간통의 매개체라는 주장에까지 이르고, 소설과 시는 별의별 형태의 성애가 고정적으로 묘사되어 색광증 환자를 흉내 내고 있다고, “예술은 우리 인류를 학대하는 가장 잔악한 악 중 하나”이기에, “모두 매장해버리는 것이 그리스도 세계를 위해서는 오히려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는 결론을 내린다. 결국 이 대문호에게는 이 세계 모든 것이 성욕의 쾌락을 은폐하는 거짓과 위선의 행위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에, 도시 생활도, 예술도, 음식의 섭생도, 사랑도, 결혼생활도 쾌락의 끝없는 욕구를 절제하는 것이어야만 하는 것으로 통한다. 정말 단순한 극단적 근본주의적 도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거장이 이러한 외곬의 도덕주의를 삶의 목적, 궁극의 삶의 이유로 생각하게 되었는가의 의문에 이르게 된다. 마지막 장인 「죽음을 기억하자」는 이에 대한 답변이 되어도 될 것 같다. 1856년, 1860년에 두 형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었던 젊은 톨스토이는 이 죽음에서 단지 혐오감을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공포만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평생을 시달렸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것, 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래서 삶은 어디로 가야하는가”라는 회의와 의문으로 이어졌을 게다. 그는 이에 대한 규명 이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바로 인생의 허무함이다. 이 허무를 돌파하기 위해, 사상적 혼란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에게 펼쳐진 그 부와 영광을 뒤로하고 거대하면서도 기괴한 도덕가로 거듭나게 되었으리라는 점에 어떤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는 『참회록』에서 사람들을 향해 아주 극단적 종용을 하고 있는데, “살아서 삶의 의의를 깨달을 수 없다면 삶을 끊어버리는 것이 좋다.”라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참되게 살든지, 아니면 죽든지 두 가지 선택 길 외에는 우리에게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을 통해 시사되고 있는데, 레빈이 농부들의 이야기를 듣다 한 노인으로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이냐고 삶의 의미를 묻는 장면이다. 그로부터 레빈은 지극히 단순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순리에 맞게 사는 것, 결국 참되게 사는 것으로서, 자기 욕망을 위해 살지 않으며, 영혼을 위해 사는 것이고,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이며, 선하게 사는 것, 이것이 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발견한 신앙이다. 그래서 항상 죽음을 기억하며 살라는 것은 인간 삶의 본질은 죽음의 자각과 맞물려 참 된 삶을 걷는 길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수시로 혹은 간혹 왜 사는가의 물음에 빠져 인생의 허무함 속을 유영할 때가 있다. 이 위인은 도덕주의의 근간을 실용주의적 삶 속에서 발견하였지만, 우리들 또한 자기 나름의 근원적 가치를 발견하여야 할 것 같다. 살 이유를 가지려면 그 무엇이든 가치를 붙잡아야 할 것이라는 당연한 이 말보다 진실이 어디 있을까?
위대한 대문호의 광활한 작품과 신념의 세계를 저자의 안내로 함께 거닐며, 우리들의 일상이 포획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쾌락의 욕망으로부터 호출되는 허영과 사치, 권태, 그리고 위선과 가끔은 아름답기조차 한 이것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는 것이 그렇게 수월하지만은 않은 것임을 아는 우리들이 바로 그것들로 구성된 삶에서 어떻게 자기만의 가치를 발견하고 붙들어내는 가는 정말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다. 혐오와 경멸로 이것들을 저 극단으로 몰아붙이며 도덕주의자의 길을 걸었지만 끝내 48년에 이르는 아내를 등지고 몰래 집을 떠나 역사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가정의 행복조차 지켜내지 못했던 이 위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무튼 이 책은 그 흥미로움에서 무진장하고, 잊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던 작품 속 은닉된 문장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읽는 즐거움도 만만찮다. 다시금 새롭게 읽어 볼 책들이 늘어났다.
꼬리말: 안나가 기차역에서 자살한 것은 톨스토이가 역사에서 죽은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진실은 톨스토이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