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어 - 개정판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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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은 점점 사유를 잃어가고 감각적 에고와 타자에 대한 연민을 상실해가고만 있는 듯하다. 세 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집에서 역시 왠지 모를 황폐함과 애초 진실이란 존재치 않는 피폐화 된 쓸쓸한 세상을 느낀다.

어린 딸아이를 가진 전직 술집여종업원 ‘마미’, 의붓아비가 데려왔던 옛 형제 ‘미쓰오’는 ‘다이스케’와 어떠한 혈연관계도 형성하고 있지 못하지만 한 집에 동거하는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외삼촌의 공사업체에서 건설노동으로 생활하는 ‘다이스케’는 이들의 가장으로 친절과 관심을 보내지만 호응을 얻어내거나 공감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자기 감정에만 철저한 둔감함, 무지와 무감각이 만들어내는 소통의 어긋남이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의 그 무신경에도 불구하고 쓸쓸하고 외로움에 눌린 그의 뒷모습이 작품 내내 측은하게 비쳐진다.

15세의 소녀를 성적으로 탐하고서도 죄의식이나 수치감이 없는 녀석, 오히려 이결과로 허드레 공사일로 쫒겨난 조치를 부당하게 생각하는 양태나, 자기감정 표현에 여과란 없는 무분별함, 탁아소 인질사건을 바라보는 표피적 인식능력 등은 선과 악이 쳇바퀴처럼 연속되는 세계, ‘아쿠다가와’의 소설 ‘라쇼몽(羅生門)’의 노파와 하인으로 오버랩되어 기묘한 여운을 던져준다.

한편, 장기입원중인 할아버지의 병원에 병원비를 납부하기위해서만 병원을 방문할 뿐, 할아버지의 입원실을 찾지 않는 ‘나’(소스케)란 인물은 어떤 도덕적 친밀감이나 정감을 발견 할 수없는 인간망종이다. 단지 감각만이 지배하는, 자기 욕구의 충족이란 단선적인 의식 이외에는 별다른 양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 친구의 애인과 비교되는 자신의 여자 친구 ‘지사토’에게 완두콩통조림을 던져대는 폭력의 모습에서 그악스런 탐욕을 본다. 그리곤 자신의 여자 친구와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친구의 ‘정직한’ 고백, 친구의 애인에 대한 노골적이고 집요한 섹스의 요구는 성이란 더 이상 이 세계에선 사랑과는 무관한 어떤 내재적 가치도 없는 듯하다. 그럼에도 여자 친구에 대한 ‘용서’의 갈등은 아주 위선과 모순, 아니 아주 낯설게만 보인다.

또 한편의 주인공 ‘닛타’ 는 자기감정의 유희(遊戱)만을 즐기는 이기적 인간의 전형이다. 여름휴가기간 찾은 해변가 민박집에 아르바이트를 얻는다. 미모의 민박집 안주인의 머릿결을 쓰다듬고, 자신의 벗은 가슴에 여인의 손을 완력으로 갖다 대는 성적유혹을 장난으로 치부한다. 그녀의 성적 긴장을 즐기는 몰염치와 사악함.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감정으로 여인을 꾀어내곤 도쿄시내의 중심가에 버리듯 내려놓고 진심 없는 약속을 외친다. 직장에선 실수한 동료의 업무를 차지하곤 경쟁시장에서의 비열한 승리에 평화를 느낀다. 타인과 세상의 온갖 대상에게는 아무런 동정심도 책임감도 연민도 없다. 메마른 근대의 이원적이고 침탈적인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팽배함을 목격케 된다.

이렇듯 세 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다이스케, 나(소스케), 닛타와 같은 오늘의 세대가 보여주는 모습은 자기본위(自己本位)적이며, 감각적 욕망을 쫒고, 표피적 인식에 머무는, 그래서 타인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갖지 못하고 소통이 좌절되는 인간들이다. 자신만은 상처받지 않으려는 자기애의 다른 표현인 친절함, 성적배반에 분노를 보이거나, 삼주일이 지나 약속장소를 지나치며 하는 연상도 자기연민이듯이,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포함하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의 결핍은 궁극적으로 개인들을 더욱 외롭게 한다.

<사요나라 사요나라(原題:さよなら溪谷)>, <사랑을 말해줘(原題:靜かな爆彈)>, <악인(惡人)>등 그 플롯은 비록 달리하지만 외로움, 공허함, 그리고 사랑에의 희망, 다양한 소통의 형태에 대한 ‘요시다 슈이치’만의 고유한 추구가 인간의 또 다른 특질로 그려진 감각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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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금서
김진명 지음 / 새움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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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학계와 주류를 자처하는 사학자들, 무비판적인 대중들을 향한 각성의 촉구라 할까? 소설은 긴장감과 속도감을 두루 장착하고 우리의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추적의 발길을 내 닫는다. 미모의 한 여교수의 미스터리(mistery)한 죽음은 이내 자살로 수사가 종결되지만, 그 주검의 모습은 왠지 석연찮은 의구심을 남긴다. 사서삼경에 노끈을 묶어 앉은 채 죽어있는 시체는 상처하나 없이 너무도 고요하게 죽어있다.

종결된 사건을 홀로 수사하던 반장은 죽은 여교수의 오랜 지기인 물리학자 이정서로부터 타살의 증거를 확인한다. 죽은 자의 컴퓨터에 남아있는 이메일에서 사학자인 동료 한은원 교수와의 별자리에 대한 서신을 발견하게 되지만, 공교롭게도 중국에 갔다는 한은원 교수의 행방까지 묘연하고, 사건은 종 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무대는 중국으로 이어지고, 추리의 형식을 갖춘 이 작품은 독자들을 어느덧 주연배우로 부상한 이정서의 두뇌와 함께하게 한다.

은원의 행방을 쫒으면서 이내 그녀가 우리의 사라진 역사 3,000년을 찾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대한민국이 왜 대한민국인지, 한국인이 왜 한국인인지, 한반도가 왜 한반도인지, 도대체 그 한(韓)이라는 글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는 우리의 역사인식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진다. 중국 사학계의‘하상주 공정’(이속에는 동북공정을 포함하고 있음)의 역사왜곡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나아가 한국의 상고사에 대한 흔적을 말살하려는 악의가 숨겨져 있음을 고발한다. 일본인들이 축소시켜놓고 고조선을 신화로 둔갑시켜버린 역사를 답습하는 안일한 우리의 사학계에 대한 자성의 일침이랄 수 있다.

소설은 더욱 박진감을 더하여 쫒고 쫒기는 스피디한 전개를 갖는다. 은원이 남긴 짧은 메모를 따라 그녀의 자취를 찾는 정서는 고조선 이전 동북지역의 문명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황하문명과 동시에‘요하문명’이라는 중국의 문명과는 다른 문명이 한반도에서 발아하였음을 들려준다. 소설이라는 허구의 형식을 띠고는 있으나 작가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미 이 소설은 서지학(書誌學, bibliography)적 근거는 물론 고등과학원의 천문학의 실험까지 포함하는“확고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사실성이라는 매혹적 재미를 더한다.

은원이 규명하려는 우리의 상고사에 대한 추적이, 고조선 이전에 이미 동국(東國)에는 오성취루(五星聚婁)라는 천체물리에 대한 관측의 결과를 남길 정도의 문명국인 한(韓)나라가 있었음을 언급한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학자‘왕부(王符)’의 저술에 있었음을 알아낸다. 이를 방해하는 중국 당국과 정서, 은원의 숨 막히는 대결은 역사라는 진중한 소명의식과 병행하여 작품을 풍성하게 하여준다.
아마 시경(詩經)을 읽다보면 한혁(韓奕)편에 언급되는 한후(韓候)에 대해 한번쯤은 혹 우리나라의 전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있을 터이다. 또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단군세기>에 대한 진위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도 작가는 우리들의 사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깨우고 있다.
플롯구성이나 확고한 주제의식에 더해 서사의 재미까지 놓치지 않는 이 작품은 우리들이 놓치고 있는 천년의 금서(禁書)에 대한 역사적 재인식을 멋지고 슬기롭게 녹여내고 있다. 5천년 역사에서 신화로 치부되거나 부정된 대한민국의 잃어버린 역사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재미있다! 그리고 지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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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컬처의 모든 것 - 생각을 지배하는 눈의 진실과 환상
니콜라스 미르조에프 지음, 임산 옮김 / 홍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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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무엇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가? 그 매개 창들이 보여주는 것은 과연 진실인가? 그 시각화 되어 보여지는 것들 - 그림, 사진, 영화 , 텔레비전, 인터넷 등 - 과 대중의 인식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여 왔나? 바로 이러한 이미지들, 영상문화란 무엇이고 그 이해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이 저술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오늘날 영상문화가 서양에 관한 서양의 담론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시간은 항상 보는 것을 둘러싼 권력의 문제”였으며, 인종화되고 계급화 된 이 유산을 피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한편으론 탈문화로서 상호 간섭하고 지속적으로 변모하는 '횡단문화(Trans Culture)'에 대한 추적이라 할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 자체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표상체임이 분명하다.”라고 시작되는 시각성에 대한 고찰은‘원근법’이론을 통한‘유사(類似)’의 개념적 설명과 르네상스 시대의 절대군주와 이상적 관찰자의 등가로서 해석된다. 이러한 사례로서 당시대의 회화가 이미 권력의 반영으로 왜곡된 표상이며, 공간구성의 표준화를 위한 한정된 이미지의 전달 일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미 시각성에 대한 많은 저술들에서 자주 인용되는‘제레미 벤담’의‘파놉티콘(Panopticon;원형감옥)'을 통해 시각성이 훈육체계의 수단으로 작동되었음과, 나아가 원근법을 보완한 색채(Color)의 등장은 그림의 사실성에 대한 절대적 공감을 일으켰고, 이는 19세기 서구유럽의 식민지 정책과 제국주의적 성질과 부합하여 “인종, 젠더, 식민주의 정치학 사이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수반”하였음을 설명한다. 즉, 대리석의 하얀 아름다움이 제국주의적 성질의 논의에 참여하여 인간 인종 그 자체에 응용되는 것 과 같이 모든 유색인종을 지배하는 백인의 이상적 지배를 제공하는 색채로서 인종차별주의적 이슈가 되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한편, 사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대두가 그림에 비해 외적 실재의 완벽한 반영 혹은 유사를 주장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 서구 백인종의 환호는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리고 사진이 지니는 시각성에 대한 성찰로서 현재의 근접한 시간의 순간 포착성, 엿보는 자의 역할에서 목격자로의 역할 변화가 가져온 본질적 의미, 기억의 기제로서의 인식이나 죽음에 대한 방어, 기억상실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의미해석 등을 담고 있다. 그리곤 1980년대 컴퓨터 이미지 안에서 사진이 나름 죽음의 시간을 맞았음을 본다. 이제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현실과 가상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고 있으며, “동시대의 문화적 실천이 행해지는 글로벌(全地球的)과 로컬(地域的)사이에 복잡한 상호작용의 영역은 현실적이면서도 가상적”이라는 것이다. 이렇듯‘1부, 시각성’에서는 그림에서 사진, 영화, 텔레비전, 컴퓨터에 이르는 시각성의 개별적 의미의 자취와 그 문화적 해석을 탐색하고 규명한다.

그리고 이 저술의 또 하나의 핵심주제인 시각의 횡단문화(橫斷文化)적 고찰이 흥미로운 설명으로 구성된다.
아프리카‘콩고’를 통한 문화의 시각적 투영이라는 낯선 예이긴 하지만, 시각의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이용과 같은 시각의 권력화에 대한 선명한 이해를 지원한다. 서구 백인의 탐욕과 인종주의적 우월성을 고착화시키는 수단으로서 그림과 사진이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콰드론(백인과 흑인 피가 4:1로 희석된)’과 ‘옥토룬’을 사진의 앞 열에 내세워 백인의 우월성과 유색, 흑색의 열등성을 구분 짓거나, 아프리카 여성들과 관계를 맺어 태어난 아이들을 일종의 물건이나 비생산적인 것으로 치부함으로서, 서구와 백색을 경외하는 여성들의 이미지를 창출하기도 함을 목격케 한다.

이처럼 식민지 지배자의 눈, 남성 중심의 시각으로 묘사된 그림과 사진이 오늘날 우리에게 아프리카에 대해 어떠한 이미지, 인식을 고착화시켰는지 생각하면 그 시각의 권력화가 가지는 왜곡의 힘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시대정신은 본질적으로 진보적이지도 않고 반동적이지도 않으며, 단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당시 콩고의 ‘민키시’조각상이 토착민들의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저항물이지만 이미 서구유럽인의 모습이 내재한 문화 횡단성의 증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 횡단문화론은 ‘다이애나’영국 황태자비의 죽음이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는 지역, 국가들을 포함한 전 지구촌에 영상미디어를 통해 전달되고 공감되는 현상에서 영상문화의 새로운 표현형식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이밖에도 영화와 텔레비전에 스며든 서구 백인의 가치와 정치적 우월함을 재생산하기 위한 활용이나, 인종적 차별의 고착화나, 여성성, 동양성에 대한 비하, 식민주의적 정치색 등이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에 대해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 <스타트렉> 등의 내러티브를 통한 구체적 예시와 설명은 시각이 어떻게 시각을 도구화 하는지, 어떤 정치학적 수사가 개입하는지 이해케 한다.
시각성, 그리고 시각화 도구에 대한 권력화의 다양한 모습, 그리고 문화로서 대중에의 침투가 낳은 현상의 성찰을 통해 시각(영상)문화의 본질과 현실,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영상문화 입문서로서 그 책임을 다하는 저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시각성에 대한 중요한 저술로서의 가치를 상실시킬 정도로 조악한 번역은 저술의 본질을 상당히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일례로서 “섹슈얼리티는 외투를 벗기는 하나의 느슨한 맺음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도저히 우리말이 아닌듯하다. 수식어인 ‘외투를 벗기는’을 제외하고 읽어보자, 주어인 ‘섹슈얼리티’는 ‘하나의 느슨한 맺음’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러한 엉터리 번역이 이 저술의 상당부를 이루고 있어 제대로 된 번역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 할 것이라는 제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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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된 낙원
로베르 바르보 지음, 강현주 옮김 / 글로세움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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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표 이기적 유전자를 배경으로 종의 다양성을 기초로 하는 생태계의 보존과 복원에 대한 경고와 대안의 메시지이다. 이를 위해 자연선택, 공진화, 적응방산 등 진화생물학과 행동생태학의 이론을 중심으로‘종(種)’의 생존과 진화의 지식을 설명하고, 인간이 자연에 개입함으로써 발생한 자연과 생태계의 혼란이 종 다양성의 파괴로 이어지는 현상의 폐해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생물 개체군의 멸종이 궁극으로 지구에서의 모든 생물군의 6차 멸종위기로 치닫고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경계의 메시지로서만이 아니라 생태경제학이라는 생태서비스와 사회이익의 조화를 고려한 균형 잡힌 실질적 생태계의 보존과 복원행위의 자세로서, 자연주의자나 자연보호론자 들의 전투적 행동의 비 실효성을 지적하고, 생태계에 대한 전향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1부의 진화생물학을 중심으로 하는 종과 개체의 생존과 진화전략은‘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만큼이나 흥미롭다. 무성생식에서 왜 번거로워만 보이는 유성생식으로 진화했는지, 대양에 왜 큰 어류종이 줄어들고 개체들의 크기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는지, 암사자가 임신 할 가능성이 낮은 시기에도 짝짓기를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 이들 개체들이 선택에 숨겨진 진실은 유전자의 다양성을 통한 적응의 제고를 비롯한 생존과 종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임을 보여준다.
한편, 갈라파고스 섬의 핀치 새가 13종에 달하는 다양한 분화 배경으로 식량자원과 서식지를 차지하기 위한 개체들 간의 경쟁이라는 주요한 선택압력 작용이나, “한 종이 저항력을 갖추거나 더욱 효율적으로 식량을 탐색함으로써 생긴 지체를 메우기 위해서는 상대가 되는 종 역시 또다시 진화해야만 하는 공진화(共進化)나, 무수한 적응방산(適應放散)의 설명은 이후 종의 다양성이 생태계에 갖는 그 엄중한 의미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바탕이 된다.

2부에서는 개체들 간의 협력과 공존이 지니는 생태계의 의미를 주목한다. 즉 상리공생(相利共生)이 종의 다양성이란 생존의 원칙에서 표현되고 있는 현실을 통찰하고 있다. 특히, 인류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상징적 진화의 진정한 모델로서 개미, 버섯, 박테리아로 이루어진 특별한 집합체의 공생관계의 사례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러나 인류의 자연에 대한 지배력은 “자연선택이 아닌 시장선택에 의해”생물 종을 축출하거나 소멸시키고, 더구나 자신들의 시장이익을 위해 새로운 재배품종의 생산성을 완전히 발현하는데 필요한 화학비료나 제초제의 과도한 사용으로 수많은 야생 종(種;부모)을 가차 없이 제거하고 있다. 결국 종의 다양성을 해치는 인간의 무분별성은 “유전적 단일성으로 인한 질병 노출로 자연 적응의 실패와 같은 위험성만을 증대시켜 놓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류 자신의 발달에 의해 몇몇 종을 퇴화시키거나 번식시키는 등 수 많은 종의 생존 환경을 급격히 변화시켜왔다. 이는 생태계가 요구하는 균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즉, 공생의 이익이나 다양성을 통한 생존의 가능성을 극한적으로 낮추는 생물 멸종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의 운명은 다른 종과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한 친화력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도 예외는 아니다.”

3부에서는 이러한 배경 지식 하에 인간 활동이 생물권에 직간접적으로 끼치는 다양한 유형의 영향력을 비롯해 생물의 멸종 현황, 생물다양성의 빈곤화에 일차적 원인이 되는 요인 등을 통해 인류의 생물자원에 대한 이해와 직면한 사회적 선택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더구나 시장이익과 자연보존의 대립된 시각으로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해법을 향한 양쪽 모두의 전환된 인식의 촉구라는 진전된 생태계서비스 개념을 제시하고 있음은 이 저술의 의미를 한층 새롭게 해주고 있다.
하버드大 생물학 교수인 에드워드 윌슨이 1992년 그의 저서 <생명의 다양성>을 통해 연간 작게는 2만7,000종에서 10만종의 생물이 사라진다는 지적이나, 스튜어트 핌과 존 로턴의 “현재의 멸종 비율이 자연 멸종 비율의 100배에 해당”한다는 조사처럼 오늘의 지구 생태계는 저자의 경고처럼 생물의 출현이 있었던 7억 만년이래 제6차 멸종의 위기에 다가서고 있다.

인류는 자신에게 아무런 직접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상황이 악화되어 치러야 할 대가가 분명히 드러나서야 그 존재를 알아차리는 우매함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세 가지 자원,“물질자원, 문화자원, 생물자원” 처음 두 가지는 일상의 일부이기에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생물종은 용도가 거의 무한한 유전자들의 보고이며, 생물종은 반복할 수 있는 천연자원이다.”화폐기준이 제아무리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상이라도 생물의 다양성과 생태계를 보호자고자 하는 접근법을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류는 전략적으로 심각한 실수로 다가서고 있음을 저자는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다.

인류는 달러의 법칙에 더 잘 부합하기 위해서 유전자의 법칙에서 빠져나왔다. 그만큼 인류는 의식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장 경제는 구조적으로 현실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력을 배제하고 있다. 생태학이 전통적으로 인간과 경제를 배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이처럼 인류는 지금 사회적 선택에 직면해 있다.
1999년‘생태계 흔적’에 대한 분석에서“세계 생태계 흔적은 137억ha로 114억 ha에 달하는 지구의 생산능력을 넘어선 수치임을 보고한 바 있다. 인류전체가 미국인의 생태계흔적 평균 소비수준을 보장 받으려면 지구 3개가 필요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생태계의 지속적인 파괴는 선택이 이제 인류의 것이 아닌 지경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은 우리의 본질이다. 우리가 자연인 것이다.”

종 다양성의 파괴, 유전자의 단일성으로 인한 질병의 취약성, 생존가능성의 감소, 궁극의 결과로 가는 시나리오를 더 이상 진행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윌리엄 해밀턴, 리처드 도킨스, 한스 피터 위르프만, 찰스 엘턴, 벤 벌렌, 데이비드 락, 피터 그랜트 등 동물생태학, 진화생물학, 진화 생태학, 생태행동학 등 당해 분야의 권위자들의 배경이론을 곁들인 인류와 자연의 공존을 모색하는 이 탁월한 생태학 저술은 생존과 번영을 위한 인류의 선택을 멋지게 일깨워주고 있다. 진화생태학의 명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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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언 형제 - 부조화와 난센스 마음산책 영화감독 인터뷰집
조엘 코언·이선 코언 지음, 윌리엄 로드니 앨런 엮음, 오세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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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웃의 경계 밖에서 독립적인 자신들만의 독특한 색채를 30년간 유지해온 영화감독이자 연출가이고, 시나리오 작가이면서 편집자인‘조엘 코언’과‘이선 코언’, 두 형제에 대한 궁금증은 물론, 그들의 작품세계, 제작의도에 대한 호기심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으스스하고 냉혹하며, 괴짜스럽고 잔혹한, 그리고 유머와 개그, 조롱과 뒤틀린 기이한 에피소드를 떠오르게 하는 이들의 수월치 않은 영화에 대한 코언형제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들이 대중에 발표한 최초의 독립영화인 <블러드 심플;Blood Simple>은 소위‘필름 누아르’형식의 전설적인 작품으로 거론된다. 이 작품에서 시작하여 2008년 발표작품인 <번 애프터 리딩;Burn After Reading>까지 30편에 이르는 인터뷰 모음을 담고 있다. 이들 인터뷰를 읽다보면 인터뷰 기자 또는 작가들이 이들에게 두려움과 경외, 울화와 불쾌감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적인 호기심을 위한 질문이나 그들의 영화관에 어긋나는 질문에 냉소적이거나 무응답으로 대응하는 형제의 모습 때문 인 것 같다. 그러나 이들에게 해당 영화에 대한 사실, 그 자체에 대한 인터뷰에서는 솔직하고 적극적인 표현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무튼 흥미로운 인물들임에는 분명하다.

<블러드 심플>이 발표되었을 당시“근래 가장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스릴러이며 심술궂은 게 흥미진진한 살인사건 스토리”라는 평가처럼, 이 영화는 심술궂다. 형제들은 이 작품이 왜 이렇게 비치는지, 그리고 캐릭터, 플롯, 내러티브 등이 어디에서 차용되었는지, 혹은 발상의 원천이었는지 알려준다. 특히, 미국 누아르의 선구자인‘제임스M.케인’의 소설이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밝히고 있으며, “온갖 영화 스타일과 레퍼런스들로 그득한 복주머니”로서, 히치콕, 베르톨루치, 피로 물들이는 영화들, 프리츠 랭, 그리고 오슨 웰스의 절충적 혼합물로서, “다른 영화들의 영화”로서의 특성을 발견케 된다.

또한,‘윌리엄 포크너’나 ‘플래너리 오코너’ 같은 작가들을 연상시키는‘니콜라스 케이지’주연의 <레이징 애리조나;Raising Arizona> 거친 코미디에서, “아슬아슬한 몰취미와 피로 얼룩진 슬랩스틱의 신(Scene), 이는 스티븐 킹과 사뮈엘 베케트의 감성을 조합한 결과”라고 그 캐릭터의 독특한 창조와, ‘톰슨지터버그(Thompson jitterbug;기관총)’를 난사하는 장면, 모자가 뒹구는 장면에 대한 그 수많은 분석과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밀러스 크로싱;Miller's Crossing>의 인터뷰들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그리고, <바톤 핑크;Barton Pink>에서는 왜 색을 그렇게 푸른빛과 노란빛을 사용하였는지, <파고;Fargo>에서는 여주인공인 건더슨 경위를 영화 중반까지 왜 등장시키지 않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해결하게 된다.

이들은 유독‘납치’를 재료로 즐겨 사용하고 있다. 또한, 대다수의 작품이 시대극이고, 특히나 1940년대를 전후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독특한 취향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형제는 “실존적 두려움 같은 요소들이 50년대 영화를 보면 드러나는데, 묘하게 지금 시점에 들어맞는 것 같다”는 것이고, 납치는 일종의 급박감을 플롯에 가미하기에 좋은 장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코언형제의 발표된 전 영화에 대한 그네들의 의도가 진지하게 소개되고 있어, 코언형제의 작품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이 저술은 보물이상이 되어 줄 정도이다.

‘조지 클루니’ 주연의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 O Brother, Where are Thou?>에 대한 제목의 거창함에 대해 “아주 거창하고 중요한 영화인 척 하는 거죠. 그 장엄함은 분명히 조크예요.”라고 답변한다. 코언형제의 냉소적이고 비틀린 유머가 돋보인다. 더구나 “우리영화는 보다 의도적으로 ‘스타일리스틱한 뒤범벅’을 추구하죠.”라든가, 칸영화제나 아카데미상 수상, 그리고 그러한 영화들의 출품에 대해 “상은 작품성과는 관계가 없어요. 경쟁부문에 나가는 건 그렇게 하면 영화가 더욱 주목을 끌 수 있기 때문이에요. (중략) 광고예산이, 말하자면 <진주만큼>넉넉하지 않으니까요.”와 같은 사실 그 자체의 담백한 솔직함이 묻어난다.

그들의 영화 창작에 대한 지론 또한 도처에서 발견 할 수 있는데, ‘레이먼 챈들러’의 이야기를 통해 “모든 훌륭한 예술은 엔터테인먼트다. 누군가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젠체하는 사람이거나 삶의 기술에 있어서 미숙아다.”라고 영화의 재미를 이야기하는가하면, 그들 작품의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서는 “이런 잡동사니 문화 환경 속에서 지식인이 된다는 게 뭔가 부조리하게 느껴진다.”고 피력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평론가들의 자의적 비평에서 그들의 작품을 “오마주나 패러디”라고 규정하는데 대해서, “우린 우리가 하는 작업을 오마주나 패러디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거고, 저는 왜 그렇게 부르는 걸까 늘 궁금해 하죠.”라고 답한다. 영화를 영화 그자체로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 강박적인 해석이나 허위의식에 대한 일갈이 미소를 자아내게도 한다.

최근 헐리웃경계를 허물고 제작한 일부 영화들로 인해 코언형제의 작품색이 변질된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이 존재하지만, 이 저작을 통해 상업적으로 통하는 복고풍 누아르의 전범을 제공한 이들의 독특한 창작의 세계는 당분간은 유지될 것으로 보이는 예고를 감지할 수 있다. 이미 제작 중에 있는 “1967년 중서부 지방의 유대인 커뮤니티를 다룬 영화, <시리어스 맨;Serious Man> 이나, 시나리오 및 배역구상까지 마친 냉전 코미디, <62 스키두>는 그래서 그 어느 때 보다 그들의 작품을 기대케 한다.

코언 형제의 작품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저술은 귀중한 참고가 될 것이다. 또한,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영화에 대한 폭 넓은 감성과 관점을 제공하여 줄 것으로 믿는다. 이들 형제에 대한 탐험의 시간은 흥미롭고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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